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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회(하원)를 통과하더라도 (우크라이나가) 불리한 전황을 바꾸지 못할 것"(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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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가 패배한다면 제3차 세계 대전'이 벌어질 수 있다" (데니스 슈미갈 우크라이나 총리)
다른 듯 같은 발언이 러시아 크렘린과 우크라이나 총리의 입에서 나왔다. 20일로 예정된 미국 하원의 대(對)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안 처리를 놓고 벌이는 '신경전'이다. 우크라이나 측은 간절한 마음으로 자국에 대한 미국의 추가 지원안이 통과되기를 바라고, 러시아 측은 '이미 늦었으니 신중하게 처리하라'는 압력을 담고 있는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대우크라 추가 지원 여부는 전세계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다. 서로 다른 성격의 전쟁이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에 대처하는 미국의 핵심 외교정책, 나아가 세계 전략을 엿볼 수 있는 흔치 않는 기회다. 더욱이 미국은 남부 국경지대(멕시코) 안보 강화 여부를 놓고 민주·공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소위 '이민 전쟁'마저 벌이고 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실상 3개의 전선이 서로 작용, 반작용을 하면서 이해 충돌로 예산안 처리가 6개월 가까이 지연된 게 지금까지의 상황이다.
미 하원을 배경으로 한 존슨 의장/사진출처:엑스(X,트위트)
이같은 혼전은 20일 미 하원 본회의 표결로 끝이 날 전망이다. 우크라이나 지원안 외에 이스라엘, 대만 지원 관련 예산안과 대러 제재 강화 법안 등 모두 4개 법안이 이날 표결에 부쳐진다. 모두 가결되거나 일부 부결되는 상황을 예상해볼 수 있다.
미국의 대우크라 추가 지원안이 통과될 경우, 젤렌스키 대통령 등 우크라이나 전체에 안겨주는 심리적 효과는 실제 지원 효과보다 훨씬 크다. 미국이 아직 자신들을 버리지 않았다는 안도감, 나아가 미래의 기대감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지난 13일 미국 등 서방 측의 방공 지원을 받아 이란의 대대적인 미사일·드론 공습을 물리치자, 우크라이나는 심리적으로 서방 측으로부터 '버림받았다'는 좌절감이 팽배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좌절감을 딛고 다시 러시아에 대응할 수 있는 자신감을, 미국의 지원안 통과를 계기로 되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 여부를 놓고 미 백악관과 각을 세워온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공화당)은 지난 17일 우크라이나에 607억 5천만 달러를 지원하는 안보 예산안 등 4개의 법안을 20일 표결에 부치겠다고 발표했다. 미 백악관은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대만을 지원하는 예산을 모두 하나의 법안에 묶어 의회 통과를 시도했으나, 공화당이 장악한 미 하원의 문턱을 넘지 못했다. 남부 국경지대의 안보 강화 조치가 부족하다는 이유에서다.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사진출처:X
이같은 상황에서 존슨 의장이 남부 국경지대에 대한 요구 조건을 철회하고, 백악관의 원래 법안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는 법안을 단순히 4개로 분리한 뒤 따로 표결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이다. 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결정이 매우 중요하다"는 이유를 댔다. "역사가 우리의 일을 평가할 것"이라며 "강경파 동료 의원들의 해임 위협이 두렵지 않다"고도 했다.
그의 발언 중 주목을 끈 부분은 "미국 청소년들이 총알받이가 되도록 하는 것보다는 우크라이나에 총알을 보내는 것이 낫다"는 대목. 스트라나.ua는 "존슨 의장의 아들이 올 가을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할 예정"이라며 "러시아가 나토(NATO)를 공격할 경우, 그의 아들도 참전을 피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가 발표한 우크라이나 지원 법안의 주요 내용을 보면 총 지원액 607억 5천만 달러 중 230억 달러는 (우크라이나 지원에 따른) 미국의 재고 무기 충원에, 113억 달러는 '지역 내 지속적인 미국의 군사작전'에 사용된다. 또 138억 달러는 미 육군과 동맹국을 위한 최신 무기 구입에 쓰인다. 다만, 우크라이나 경제 지원용 78억 달러는 차관 형태로 지원된다.
미 국방부는 이 예산안이 통과될 경우, 국방부 비축 무기를 우선 우크라이나로 이전하고, 통과된 예산으로 부족분을 보충할 것으로 에상된다.
상원을 통과한 기존의 백악관 안과 차별화한 점은 우크라이나 경제 지원 예산이 무상 지원에서 차관 형태로 바뀐 것이다. 바이든 대통령은 법안 채택후 60일 내에 우크라이나 정부와 차관 상환 계약을 체결해야 한다. 다만 미국 대통령 선거(11월 5일)가 끝난 뒤인 11월 15일 이후 우크라이나 채무를 최대 50% 탕감할 수 있는 권리를 대통령에게 부여했다. 또 2026년 1월 1일 이후(새 대통령 취임 날짜는 2025년 1월 20일)에는 모든 채무를 탕감할 수 있다. 탕감 권한을 신구(新舊) 대통령에게 공평하게 나눠줬다고 할 수 있다.
당초의 백악관 안에 추가된 것은 에이테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의 제공 부분이다. 우크라이나로 이전할 무기에 ATACMS 장거리 미사일을 포함시킨 뒤, 제공 여부 결정은 대통령에게 위임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까지 사정거리 300km에 이르는 장거리 미사일(우크라이나에 제공된 에이태큼스는 사정거리 160km 이하/편집자)의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여왔다. 자칫하면 우크라이나 전선을 더욱 확대시킬 수 있다는 우려에서다. ATACMS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지원이 실제로 이뤄질 가능성은 낮다.
미국의 에이태큼스 미사일/사진출처:위키피디아
이 법안은 또 국무부와 국방부에게 채택후 45일 이내에 우크라이나 지원 전략을 구체적으로 보고하도록 했다. 공화당이 바이든 정부에 '대우크라이나 전략'을 요구하고, 이를 대선에 적절히 활용하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바이든 미 대통령은 존슨 의장의 예산안이 통과되면 지체없이 서명하겠다고 밝혔다.
존슨 의장의 4개 안보 예산 법안 중 마지막인 ‘힘을 통한 21세기 평화’ 법안은 18일에야 공개됐다. 옥산나 마르카로바 주미 우크라이나 대사는 일단 "기대에 미치지 못한다"고 평가했다. 대통령에게 러시아의 동결 자산을 몰수해 우크라이나 재건 사업에 사용하도록 의무화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통령에게 그 권한을 위임하는데 그쳤다. 이 법안에는 또 지난달 하원을 통과한 ‘틱톡 금지 방안’과 이란에 대한 제재 등이 포함됐다.
존슨 의장의 예산안은 그러나 공화당내 일부 강경파의 반발을 초래했다. 그 법안을 무력화할 수정안이 즉각 제출된 이유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을 지지하는 마저리 테일러 그린 의원은 18일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을 지지하는 의원은 누구나 우크라이나전에 참전하도록 하는 수정안을 냈다. 수정안은 또 우크라이나가 계엄령 하에서도 선거를 실시하고, (러시아가 의혹을 제기하는) 모든 생물학 실험실을 폐쇄하며, 이 모든 작업에 대해 미 정부가 보고할 때까지 할당된 예산을 사용할 수 없도록 했다. 다소 엉뚱해보이는 이 수정안이 본회의에서 통과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존슨 의장에 대한 심정적 거부감을 표출했을 뿐이다.
미 하원 전경/사진출처:하원 홈페이지
존슨 예산안의 통과 여부가 더욱 주목을 받는 것은, 공화당 대선 후보인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 이후 미국 핵심 외교정책의 수정 여부를 예상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스트라나.ua는 "미 공화당이 대우크라 추가 지원안을 거의 6개월 동안 잡아놓은 것은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제안한 '남부 국경 보호 조치' 때문"이라며 "존슨 의장의 예산안이 하원을 통과한다면, 트럼프 후보의 대선 승리 이후에도 미국의 기존 외교 정책에 변화가 없을 것이라는 분명한 신호가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공화당은 지난 2월 바이든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일부 강화하는 법안마저 부결시키며 남부 국경지대의 보호 조치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존슨 예산안은 의외로 이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존슨 의장은 '지금 우크라이나를 돕지 않으면 러시아가 나토를 공격할 것'이라는 바이든 대통령의 주장을 그대로 반복하면서, 표결의 당위성을 강조했다. 트럼프 전대통령조차 우크라이나 지원을 중요하다고 말을 살짝 바꿨다. 그가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되더라도 우크라이나 지원이라는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다.
나아가 예산안 통과는 푸틴 대통령에게도 의미있는 신호가 될 것이라는 주장이다. 미국(우크라이나)과 협상하려는 의지가 있다면, 트럼프 후보의 당선 후에도 달러질 게 없으니 지금이라도 적극 나서라는 주문이라는 것.
20일은 결판의 날이다. 친트럼프 공화당 강경파 의원들이 끝까지 존슨 안을 저지하려고 할 것인지, 순순히 받아들일 것인지, 시간은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