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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월요일. - 믿기로 한 믿음과 믿게 된 믿음.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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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11 05:37
- 믿기로 한 믿음과 믿게 된 믿음
오늘 복음을 보면 즉시 이상한 점을 발견하게 됩니다.
죽어가는 자기 아들에게 주님께서 직접 가달라고 왕실 관리가 조르지만
주님께서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라는 말로 거절하십니다.
그래서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라고 복음은 기술합니다.
그래서 집에 갔더니 병이 나을 것이라고 말씀하신
바로 그 시간에 자기 아들의 병이 나은 것을 확인케 되고,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라고 합니다.
주님 말씀을 믿고 떠났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기적을 확인하고 믿게 되었다는 말을 또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첫 번째 믿은 것’과
‘두 번째 믿게 된 것’ 사이에 뭔가 차이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일까요?
우리가 많이 생각지 않아도 첫 번째 믿음은 일단 믿기로 한 것이고
두 번째 믿음은 그 믿음이 완성되고 완전해진 믿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믿기로 하는 믿음,
이 믿음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도박으로 치면 믿는 쪽으로 패를 건 겁니다.
그냥 가라는 주님 말씀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앞에 두고
믿는 쪽으로 의지적인 선택을 한 것인데 그 결과 기적을 체험합니다.
그러므로 그가 믿지 않는 쪽으로 선택한다면
그것은 그 믿음을 싹부터 잘라버리는 겁니다.
우리의 믿음도 이토록 믿기로 하는 것에서 시작되는데
그 믿음은 아직 불완전하고 믿음의 싹에 불과합니다.
그래도 이 믿음의 싹이 중요하고,
이 믿음의 싹은 자기 믿음이 완전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는 것으로 완전해지고 더 확장됩니다.
나무로 치면 믿음의 작은 싹이 나무로 자라고,
한 나무로 그치지 않고 군락을 이루게 된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우리는 오늘 이 이야기에서
의지적 믿음과 체험적 믿음의 관계를 볼 수 있고,
의지적 믿음의 그 작은 싹이 이후 체험들을 통해
나무로 성장하고 완전해져야 한다는 것을 배웁니다.
겨자씨 같은 믿음이 큰 나무로 자란다는 말씀이
이 말씀이 아닐까 묵상하게 되는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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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1913년 엘리너 H.포터가 집필한 고전 소설 ‘폴리아나’(Pollyanna)를 기억하시는 분이 많을 것 같습니다. 초등학생을 위한 세계 명작으로 꼭 등장하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만화 영화로도 나왔었다고 하더군요. 이 책의 주인공은 이모 집에 얹혀삽니다. 그러나 삶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면서 자기 사는 곳을 살기 좋은 곳으로 바꿔 나간다는 아주 훈훈한 내용입니다.
주인공 폴리아나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것은 불행한 삶 속에서도 매 순간 ‘다행한 일 찾기’ 때문입니다. 저택 같은 집에서 아주 좁고 퀴퀴한 다락방에 살게 되었지만, 전망이 좋아서 그림 같은 경치만 봐도 정신 수양이 되어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또 방에 거울이 없지만, 주근깨 난 얼굴을 안 보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이런 식으로 ‘다행한 일 찾기’를 계속하고 있습니다.
언젠가 신부 모임에서 있었던 일이 생각납니다. 모임에서 한 신부가 방귀를 시원하게 뀌었습니다. 모두가 그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말이지요. 그러자 한 신부가 “야~ 그러다 똥 싸겠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에 그 당사자 신부는 이렇게 말하더군요.
“똥 싸지 않아서 정말 다행이지?”
다른 이의 말과 행동에 긍정적으로 대처하는 마음에서 행복이 가까워짐을 알게 될 것입니다. 따라서 폴리아나처럼 ‘다행한 일 찾기’ 놀이를 해 보면 어떨까요? 언제 어디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주님을 체험하는 그 시작이 될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주님을 매 순간 느끼는 방법이 있으니 참 다행이 아닙니까?
왕실 관리의 아들이 앓아누워 있었습니다. 이 왕실 관리는 예수님을 찾아와 고쳐 주십사고 청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라면서 거절의 뜻을 비치지만, 왕실 관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부탁합니다. 이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 것이다.”
왕실 관리이니 재산이 많이 있고 또 권력도 가지고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를 가지고 아들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까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말씀만을 전해주십니다. 만약 재산과 권력이 전부라고 생각했다면, 그는 예수님께서 주신 말씀에 화를 냈을 것입니다. 자기 권력을 이용해서 예수님을 끌고 갈 생각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믿고 떠나갑니다. 믿음만으로 충분한 것을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재산과 권력에만 매여있었다면, 그는 다행한 일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너머에 있는 주님께 대한 믿음이 있었기에 다행한 일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우리 역시 매여있는 것이 혹시 있는 것이 아닐까요? 주님께서 우리 편이라 정말로 다행이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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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내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는 단계에 이르기 위해 그토록 긴 시간이 필요했다(앙리 마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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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요한복음>은 예수님이 하느님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일련의 표징과 증거들, 곧 일곱 개의 표징과 일곱 개의 예수님의 자기 선언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증거의 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 ‘표징’이란, 단순한 기적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과 신성을 증거 하는 하느님의 계시가 구체화 된 것을 말합니다. 그것은 모두 예수님의 파스카에 집결되어 있고, 우리는 지금 파스카를 향하여 나아가는 ‘사순시기’의 한 가운데 이르렀습니다. 이제, 전례주년에 따라 ‘기쁨주일’이 지나고, 십자가의 수난이 다가올수록 새로운 창조에 대한 희망의 빛을 점점 더 밝게 비추어집니다.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새 하늘 새 땅의 창조에 대한 희망과 기쁨의 메시지를 전합니다.
<복음>은 갈릴래아의 카나에서 행하신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두 번째 표징’입니다. 이 역시 희망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곧 아픈 아들 때문에 절망에 빠져있던 왕실관리가 예수님에게 희망을 걸고 찾아가 기쁨을 찾은 이야기입니다. 그는 예수님께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가파르나움에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왕실관리가 예수님을 찾아와 도움을 청한 것 자체가 그의 희망과 믿음의 표시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치유해 주실 수 있다고 믿지 않았다면, 굳이 청할 필요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 그의 믿음은 불완전했던 것입니다. 그는 백인대장이 예수님께서 “내가 가서 그를 고쳐주마” 하셨을 때, “주님 수고하실 것 없습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해 주십시오, 그러면 제 종이 나을 것입니다.”(마태 8,8;루카 7,7)라고 고백했던 것과는 달리,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집에까지 가야만 치유하실 수 있는 정도로만, 혹은 죽기 전에 치유해야만 되는 정도로만 믿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요한 4,50)라는 “예수님께서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났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는 “말씀”을 믿었습니다. 아직 표징을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집으로 돌아가던 중에 종들이 와서 아들이 나은 것을 알려 주었을 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표징과 이적을 보고서” 비로소 온전히 믿었던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병든 아들의 치유만이 아니라, 마음이 병든 아버지도 치유하시었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한 말씀으로 두 영혼을 치유하셨습니다. 비록 그의 믿음이 불완전할지라도 결코 하찮게 여기지 않으신 것입니다. 비록 겨자씨만한 믿음일지라도 그 믿음을 소중하게 여기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왕실관리 아들을 살리신 이 ‘두 번째 표징’은 믿는 이들에게는 확증을 주기 위함이요, 믿음이 약한 이들에게는 믿음을 굳게 하기 위함이요,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믿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신성과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아멘.
주님! 보고도 믿지 못하는 불신을 몰아내소서.
사랑받고도 사랑하지 못하는 완고함을 몰아내소서.
제 삶이 믿음과 사랑의 표징이 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고는 믿지 않을 것이다.”(요한 4,48)
주님,
믿음이 부족하오니, 도와주십시오.
의혹하고 믿지 못하는 병든 마음을 치유하소서.
믿음 없이 청하기만 하고 돌아서버리고만 마는 일이 없게 하소서.
오, 주님!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소중하게 여기시는 당신을 믿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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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구원을 부른 고통
왕실의 한 관리가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앓아누웠습니다. 그러자 그 관리는 예수님께 쫓아가 자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했습니다. 그 관리는 예수님께 관심도 없던 사람입니다. 갈릴래아 카나에서 기적을 행하실 때는 자기와는 상관없는 분으로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 아들에게 고통이 왔기 때문에 위신 체면 다 버리고 예수님께 달려와서 매달렸습니다. 이렇게 보면 그에게 닥친 시련은 불행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주님을 발견하게 되는 은총의 기회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예수님께서 이르셨습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주님,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요한 4,48-49). 하며 사정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가거라.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라는 예수님의 응답을 얻어냈고 그 시간에 아이는 나았습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 사정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매달릴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들 때문입니다. 아들의 고통이 관리를 사정하게 했고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면박도 감당하게 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네 아이는 살아날 것이다’ 는 말씀에 두말없이 믿음을 걸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고통이 하나의 시련이었지만 구원을 가져왔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왕실의 관리의 믿음이 만나서 아이는 살아났고 온 집안이 믿게 되었습니다(요한4,53). “믿음의 기도가 그 아픈 사람을 구원하고, 주님께서는 그를 일으켜 주실 것입니다”(야고5,15). 시련과 고통은 은총의 기회이고 기적을 낳는 원천입니다.
믿음 없이 살다가 무슨 일이 생기면 그제서 밤을 지새가며 기도하고 부산을 떠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그래도 믿음을 가지고 매달리면 주님께서 그 마음을 헤아려 주십니다. 우리의 간청에 당신의 계획마저 바꾸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내가 원하는 것을 내가 원하는 때에 원하는 방법으로 채워주시지는 않는다는 것입니다. 왕실의 관리가 예수님께서 자기 집으로 가시길 원했지만, 예수님께서는 한마디 말씀으로 당신의 능력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들을 낫게 해준 것은 약초나 연고가 아닙니다. 주님, 그것은 모든 사람을 고쳐 주는 당신의 말씀입니다”(지혜16,12).
그러므로 내 방식으로 되지 않는다고 실망하거나 의심하지 말고 그분께서 원하시는 때에 그분의 방법으로 이루어 주심을 믿고 “희망 속에 기뻐하고 환난 중에 인내하며 기도에 전념 하십시오”(로마12,12). “아무것도 걱정 하지 마십시오. 어떠한 경우에든 감사하는 마음으로 기도하고 간구하며 여러분의 소원을 하느님께 아뢰십시오. 그러면 사람의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줄 것입니다”(필리피4,6-7).
고통은 결코 죄의 벌이 아닙니다. 한편으로 하느님의 섭리요, 은총의 기회입니다. 또한 하느님께 영광을 드릴 수 있는 절호의 찬스입니다. 예수님의 고통은 부활의 기쁨으로 끝납니다. 우리도 그리스도의 고통을 느꼈을 때는 곧 다가올 부활을 기억하십시오. 하느님께서 주신 것은 모두가 다 귀한 것입니다. 고통 이라할지라도....이 고통을 통하여 하느님께서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아듣도록 기도해야 하겠습니다. 고난을 통하여 더욱 튼튼하여지고 아름다워지길 빕니다. 우리는 믿음의 특권에서 오는 고난의 특권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곧 영광의 특권이 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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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5년 전에 뉴욕에서 지낼 때에 보일러에 문제가 있어서 새로 바꾼 적이 있습니다. 이번 댈러스에 와서도 보일러에서 가스가 누출되는 문제가 있었습니다. 간단하게 해결 될 줄 알았는데 보일러의 수명이 다 되어서 새것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합니다. 보일러를 바꾸면서 형제님이 제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신부님은 이동하는 곳마다 보일러를 바꾸시네요.” 제가 가는 곳마다 보일러의 수명이 다 되었던 것 같습니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제가 가는 곳마다 새롭게 뜨거운 열기를 만들어 내라는 사명인 것 같습니다. ‘Peace Maker'가 있다면 저는 ’Heat Maker'인 것 같습니다. 예전에 성령 강림 대축일에 바치던 기도가 생각합니다. “허물들은 씻어주고 메마른 땅 물주시고 병든 것을 고치소서. 굳은 마음 풀어주고 차디찬 맘 데우시고 빗나간 길 바루소서.” 새로운 곳, 댈러스에서 제가 따뜻한 마음으로 굳은 마음을 풀어 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지친 이들에게, 아픈 이들에게 위로의 손길을 내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3시간 넘게 보일러를 교체하는 현장에 함께 했습니다. 보일러에는 물이 50갤런 넘게 들어 있기 때문에 먼저 보일러에 있는 물을 빼 주어야 했습니다. 물이 빠지기를 기다리면서 형제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전날 작업 중에 왼손 중지가 다쳐서 작업에 애로가 많았지만 형제님은 꼼꼼하게 작업을 해 주었습니다. 물이 빠진 보일러를 빼내고 새 보일러로 교체 했습니다. 다시 물을 채우고, 가스를 연결하고, 배기가스가 나갈 수 있도록 연통을 달았습니다. 물을 채우면서 공기를 빼주고, 드디어 불꽃으로 가스에 불이 붙었습니다. 뜨거운 물을 틀어 놓으니 에어가 빠지면서 드디어 따뜻한 물이 나왔습니다. 저는 형제님을 보면서 ‘장인정신’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형제님은 제가 옆에서 지켜보니 문제가 쉽게 해결 된다면서 좋아하였습니다. 보일러를 교체하는데 순간순간 문제들이 생겼습니다. 공간이 협소해서 보일러를 넣은 작업도 힘들었습니다. 배관을 연결했는데 고무 파킹이 낡아서 새것으로 갈아야 했습니다. 배관이 짧아서 더 긴 것으로 교체 했습니다. 3시간 넘게 작업을 지켜보면서 매일 따뜻한 물을 사용할 수 있기 까지 수고하는 분들이 있음에 새삼 감사를 드렸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새 하늘 과 새 땅은 눈에 보이는 시간과 장소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곳입니다.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던 마구간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믿음으로 치유되었던 실로암 연못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회개하고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온 둘째 아들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주었던 자캐오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강도당한 이웃을 정성껏 돌보아 주었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이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예수님의 발에 기름을 부어드리고, 정성껏 씻어 주었던 마리아가 새 하늘과 새 땅입니다. 뉴욕이든, 댈러스이든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 수 있다면 그곳이 새 하늘 과 새 땅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은 시간의 흐름 안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고, 하느님과 함께하는 삶이라고 하겠습니다. 모든 주도권은 하느님께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따르면 된다고 말을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보다 명확하게 말씀을 하십니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왕실 관리가 한 일은 예수님을 만났고, 예수님께 청을 드린 것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여주시는 표징은 우리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영원을 사는 것이 아님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중심으로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믿고 한 주간 충실하게 지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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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주님께서는 포도주의 기적을 일으키셨던 카나로 가십니다. 그리고 왕실 관리를 만나시게 됩니다. 그런데 아들을 고쳐 달라고 청하는 왕실 관리 앞에서 표징과 이적에 관한 이야기를 하십니다. 즉 주님께서는 그곳에 모여 있던 사람들에게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 너희는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카나에서는 이미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났었습니다. 카나 혼인 잔치를 통해 처음으로 기적을 행하셨습니다. 또한 좋은 술이 먼저 나오고 그렇지 않은 술이 나중에 나오는 상식 또한 파괴하십니다.
그리고 오늘 또다시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납니다. 사실 왕실 관리 정도면 그 지위가 낮지 않을 것입니다. 왕실을 드나드는 수많은 의사와 약제를 다루는 이들을 알고 있었을 것입니다. 어쩌면 이미 그 모든 수단을 동원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희망을 품고 주님께 찾아왔습니다. 얼마나 간절했을까요? 얼마나 절실했을까요? 그런 왕실 관리에게 주님께서는 믿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십니다.
만약 제가 왕실 관리라면 쉽게 돌아서지 못했을 것입니다. 확실한 답을 얻을 때까지 옷을 잡고 늘어졌을 것입니다. 혹은 돌아가라는 말을 들었을 때 불신의 마음을 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왕실 관리는 주님의 그 한마디를 믿고 다시 돌아섭니다. 그리고 알게 됩니다. 그분께서 말씀하셨던 그 순간 은총이 아들에게 내렸다는 것을 말입니다.
우리 역시 신앙의 길 위에서 상식 밖의 무언가를 체험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기적은, 은총은 주님의 말씀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짧고 단순한 그 한마디가 은총을 이룬다는 것을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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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플 때 먹는 것.
각자가 다르겠지만
물론 없을수도 있지만
저는 아플 때 찾는 음식이 있습니다.
바로, 치킨입니다.
몇조각 먹고 약먹고 자고
또 몇조각 먹고 약먹고 자고....
여러분도 혹시 이런 음식이 있을까요?
먹으면 회복되는 느낌을 주는 음식.
몸 아플 때 먹고
마음 아플 때 먹고
머리 아플 때 먹고
이래저래 아프다는 핑계 만들어서 먹고....^^
갑자기 주님께서 물으십니다.
‘치킨보다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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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새 하늘과 새 땅”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오늘 제1독서 이사야서에서 이사야가 펼쳐 보여주는 유토피아 하늘 나라 꿈의 세상이 참 멋지고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꿈과 희망이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이사야 예언자처럼 이상주의적 현실주의자가 되어 주님의 은총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실현하며 살게 합니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이사65,17-18)
이사야 예언자는 참으로 멋진 대영성가이자 하느님 사랑의 신비가이고 시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우리 모두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 나라 꿈을 실현하며 살도록 격려하십니다. 이런 생생한 하늘 나라 꿈에서 샘솟는 기쁨과 즐거움입니다.
여기서 “창조하다(create;히브리어bara)”라는 단어가 세 번 나오는데 모두가 하느님의 고유한 창조활동을 뜻합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신 것은 생명으로 충만합니다. 태초에 한번의 창조로 끝난 것이 아니라 오늘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그리고 오늘 지금 여기서도 끊임없이 펼쳐지는 하느님의 창조활동입니다. 주님은 은총의 사순시기,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를 끊임없이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새롭게 창조하시며 거듭 말씀하십니다.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이어지는 이사야의 하늘나라 꿈은 얼마나 멋지고 고무적인지요! 이런 샘솟는 하늘나라의 꿈과 희망이 현실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힘차게 살아낼 내적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런 생생한 하늘나라의 꿈과 희망이 타락과 부패를 막아주고, 세상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며, 존엄한 품위의 삶을, 늘 새롭고 놀랍고 아름다운 참 좋은 삶을, 영육으로 건강한 삶을 살게 합니다.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오늘 이사야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의 하늘 나라의 꿈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심으로 실현됩니다. 주님 말씀의 창조와 치유의 구원입니다. 왕실 관리의 간청과 예수님의 응답입니다.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말씀하신 바로 그때 왕실 관리의 아들은 살아났고,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합니다. 하느님의 창조활동이 오늘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통해 계속되고 있음을 봅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일곱 표징중 두 번째 말씀을 통한 하느님 창조의 표징입니다. 참고로 우리의 믿음을 북돋우는 예수님을 통한 하느님의 일곱 표징을 순서대로 소개합니다.
1.가난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변하다(2,1-11).
2.왕실 관리의 아들을 살리시다(4,46-54;오늘의 복음).
3.양문 곁에 있는 못가에서 앉은뱅이를 고치시다(5,1-18).
4.굶주린 5000명을 먹이시다(6,1-15).
5.예수님은 물위를 걸으시다(6,16-21).
6.태생 소경을 고치시다(9,1-41).
7.나자로를 살리시다(11,1-44).
얼마나 고무적인,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는 하느님의 빛나는 기적의 표징들인지요! 하느님의 창조는 지금도 계속됩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 자들에게는 언제 어디서나 늘 새 하늘과 새 땅이요, 눈만 열리면 오늘 지금 여기가 참으로 역동적인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의 실현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우리 베네딕도 수도회의 정주서원, 정주영성이 얼마나 역동적인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인지 깨닫습니다. 새 하늘과 새 땅이라는 하늘 나라 꿈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정주서원입니다. 이런 감격을 노래한 얼마전 “산과 강”아라는 자작시를 다시 한 번 나누고 싶습니다.
“아니, 산이 산에 갈 수가 있나?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나 머물 때는 산이고 나 움직일 때는 강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밖으로는 한결같이 임기다리는 산인데
나 언제나 거기 그 자리에서
안으로는 끊임없이 임향해 흐르는 강인데
밖으로는 산, 안으로는 강인데
늘 임을 만나 임과 함께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의 영원한 삶인데
어찌, 산이 산에 강이 강에 갈 수가 있나?”
죽어서 가는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가 아니라, 오늘 지금 여기 꽃자리, 제자리에서 살아야 할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의 꿈입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를 당신의 즐거움으로, 기쁨으로 창조하시어, 우리 모두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꿈을 실현하며 살게 하십니다. 다음 행복기도 내용 그대로입니다.
-“주님, 눈이 열리니
온통 당신의 선물이옵니다
당신을 찾아 어디로 가겠나이까
새삼 무엇을 청하겠나이까
오늘 지금 여기가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늘나라 천국이옵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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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말씀하시는 분의 말씀만 있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요한 3,50)
말씀하시는 분이 곧
말씀이요
말씀이 곧
말씀하시는 분이니
말씀을 믿음은 곧
말씀하시는 분을 믿음이요
말씀하시는 분을 믿음이 곧
말씀을 믿음이라
말씀하시는 분
비록 곁에 없어도
말씀만으로도
더 바랄 것 없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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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1. 사순 제4주간 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요한 4,49)
아버지들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에 분별없는 행동도 곧잘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당신께 와서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한 아버지의 정신 상태를 꾸짖으십니다. 기적이 일어나기 전에는 이 아버지의 믿음이 굳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와 간청한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닙니다. 부모들은 자식 사랑하는 마음에 분별을 잃고서 평소에 의지하던 의사들만 아니라 전혀 신뢰하지 않던 이들에게까지 의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가능성도 배제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 그러니 그리스도를 믿는 마음이 큰 아버지라면 아들이 죽어 가고 있을 때 예수님을 찾아 유대아로 가는 것을 망설이지 않았을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분열된 사랑에서 통합된 사랑으로 우리를 이끌어 달라고 하느넘께 기도합시다. 하느님께서 이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아멘.
엑카르트는 죽음에 관한 이 설교에서 존재의 거룩함과 성스러움을 다루고 있다. 그는 모든 삶의 역설을 인정한다. 실로, 그에게 존재는 죽음을 초월한다. 사람들이 충만한 존재 속으로 들어가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길이다. 그가 말하는 영생은 생명이 곧 존재가 되는 그런 삶이다. 영생과 죽음은 동시에 일어나지만, 엑카르트의 관심을 가장 많이 끄는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겪는 죽음이다. 엑카르트는 “이 세계에 대하여 죽는 것”은 이 세계를 피하거나, 이 세계를 버리거나, 생명을 미워하거나, 죽음을 맞이하는 것과 같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고 말한다. 이 세계에 대하여 죽는다는 말은 생명이 곧 존재가 되는 삶으로 문을 활짝 여는 것을 뜻한다. 엑카르트가 보기에 삶의 목적은 존재의 형식이 되는 데 있는 것 같다. 그것은 모든 신비를 연결하는 신비, 분리되지 않는 신비를 생생하게 체험하는 것이다. 삶은 움켜쥐거나 보호하거나 정복하거나 자랑하거나 하는 형식이 아니라 존재의 형식이다.(134)
✝️ 월요일 거룩한 독서(렉시오디비나)의 날✝️
마태 19,16-30
하느님의 나라와 부자
그런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면 무슨 선한 일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어찌하여 나에게 선한 일을 묻느냐? 선하신 분은 한 분뿐이시다. 네가 생명에 들어가려면 계명들을 지켜라.”
그가 “어떤 것들입니까?” 하고 또 묻자 예수님께서 이르셨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거짓 증언을 해서는 안 된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여라.’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젊은이가 “그런 것들은 제가 다 지켜 왔습니다. 아직도 무엇이 부족합니까?” 하고 다시 묻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네가 완전한 사람이 되려거든, 가서 너의 재산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그러나 그 젊은이는 이 말씀을 듣고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따름과 보상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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