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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3. 16. 큐티
사무엘상 23:15 ~ 29
다윗의 생명을 노리는 사울과 하나님의 도우심
1) 십 광야에서 요나단을 만나는 다윗
- 15절. “다윗이 사울이 자기의 생명을 빼앗으려고 나온 것을 보았으므로 그가 십 광야 수풀에 있었더니” => “십”(זִיף, 지프)은 ‘녹이다’는 뜻의 지명이다. 그일라 남동쪽 방향 20km 지점의 해발 864m인 성읍이다. “수풀”(חֹֽרְשָׁה, 호레솨)은 ‘숲’ 혹은 ‘숲으로 덮인 높은 곳’이라는 뜻의 ‘호레쉬’에서 파생된 말이다. 이 수풀은 ‘십’ 남쪽 3km 지점에 위치한, 오늘날의 ‘키르벱 코레이사’와 동일한 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본다. 즉 ‘십 광야 수풀’은 특정한 지명을 가리키는 고유명사이다. 그냥 풀이 무성하게 자란 들판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 16절. “사울의 아들 요나단이 일어나 수풀에 들어가서 다윗에게 이르러 그에게 하나님을 힘 있게 의지하게 하였는데” => 요나단은 ‘호레쉬’에 자신의 목숨을 걸고 다윗을 찾아 들어간다. 요나단은 사울에게 쫓김을 당하고 있는 다윗을 위로하러 그곳에 들어간 것이다. 요나단은 사울과 생각이 완전히 다르게 하나님을 신뢰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존재였다.
- 17절. “곧 요나단이 그에게 이르기를 두려워하지 말라 내 아버지 사울의 손이 네게 미치지 못할 것이요 너는 이스라엘 왕이 되고 나는 네 다음이 될 것을 내 아버지 사울도 안다 하니라” => 요나단은 “두려워 하지 말라”는 메시지를 전한다. 요나단은 다윗이 골리앗을 쳐 죽일 때부터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아버지 사울과 자신의 힘으로는 가나안의 7지파를 완전히 몰아낼 수 없으며, 하나님의 나라를 힘 있게 세워나가지 못함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나단은 자신이 사울의 뒤를 이어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 다윗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울은 그런 경우 일반적으로 새롭게 세워지는 왕이 선대 왕과 그 자녀들을 모두 도륙하는 것을 생각하여 다윗이 결코 왕이 되지 못하도록 죽이고자 혈안이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요나단은 다윗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신의 아버지의 뜻을 바꾸어서 말하고 있다. 다윗을 이어서 이스라엘의 왕이 될 것을 보장해 달라는 말이 아니다. 요나단은 다윗보다 대략 20여세나 나이차이가 나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다윗이 왕위를 마치고 요나단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요나단의 말은 왕위가 자신에게 넘어오지 않음을 강조하기 위한 말이 되는 것이다.
- 18절. “두 사람이 여호와 앞에서 언약하고 다윗은 수풀에 머물고 요나단은 자기 집으로 돌아가니라” => 다윗과 요나단 두 사람이 언약을 맺은 것은 20장에 이미 나오는 말씀이다. 요나단은 그것을 상기시킨다. 다윗은 이 언약을 소중히 여겨서 장차 요나단의 자녀들에 대해 책임지는 모습을 다한다.
2) 다윗을 밀고하는 사람들
- 19절. “그 때에 십 사람들이 기브아에 이르러 사울에게 나아와 이르되 다윗이 우리와 함께 광야 남쪽 하길라 산 수풀 요새에 숨지 아니하였나이까” => 십 사람들은 놉 땅에서 사울 왕이 벌인 대학살에 대한 소문을 들었던 듯 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들이 다윗을 도와주었다는 말이 사울의 귀에 들어가면 사울의 대군이 십 땅의 사람들을 쓸어버릴 것을 염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다윗을 밀고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다윗이 숨어있는 구체적인 지명을 밝히고 있다. 바야흐로 다윗의 생명은 바람 앞의 등불이 되는 신세가 되었다.
- 20절. “그러하온즉 왕은 내려오시기를 원하시는 대로 내려오소서 그를 왕의 손에 넘길 것이 우리의 의무니이다 하니” => “붙일 것”(הַסְגִּירֹו, 하스기로)은 ‘닫다’, ‘가두다’ 라는 뜻의 ‘사가르’의 사역형동사이다. 따라서 이 단어의 의미는 상대방을 강제로 감금함으로써 궁지에 빠뜨리는 것을 가리킨다. 이 단어는 그일라의 백성들이 다윗을 향해 취하려는 행동을 표현할 때도 사용되었다. 다윗이 지속적으로 밀고를 당하고 배반을 당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음을 의도적으로 반복해서 표현하고 있다.
- 21절. “사울이 이르되 너희가 나를 긍휼히 여겼으니 여호와께 복 받기를 원하노라” => 사울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이름을 남발하고 있다. 자신에게 유익한 것을 하나님이 복 주시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사울은 입술로는 하나님을 존경하고 하나님을 위하는 삶을 사는 듯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인생을 살고 있는 모습이다.
- 22절. “어떤 사람이 내게 말하기를 그는 심히 지혜롭게 행동한다 하나니 너희는 가서 더 자세히 살펴서 그가 어디에 숨었으며 누가 거기서 그를 보았는지 알아보고” => 사울은 사람들의 정보망을 의지하고 있다. 다윗이 자주 그 거처를 옮기고 있으며 사울의 군대를 얼마나 경계하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말이다.
- 23절. “그가 숨어 있는 모든 곳을 정탐하고 실상을 내게 보고하라 내가 너희와 함께 가리니 그가 이 땅에 있으면 유다 몇 천 명 중에서라도 그를 찾아내리라 하더라” => 다윗이 유다 땅에 있다면 아무리 많은 사람들 틈에 숨어있을지라도 반드시 찾겠다고 맹세를 하고 있다. 사울은 언제나 이렇게 오버를 한다. 하나님이 계심을 인정하지 않기에 제 멋대로 호기를 부리는 것이다. 그러나 결과는 다윗을 찾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호하시기 때문이다.
3) 사울과 다윗의 술래잡기에서 다윗이 거의 잡힐 뻔하다.
- 24절. “그들이 일어나 사울보다 먼저 십으로 가니라 다윗과 그의 사람들이 광야 남쪽 마온 광야 아라바에 있더니” => 사울에게 다윗을 밀고하는 이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이 은밀하게 다윗의 무리들에게 접근하고 그들이 사울에게 다윗이 있는 곳을 알리게 되면 다윗의 목숨은 이제 “끝~”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 25절.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찾으러 온 것을 어떤 사람이 다윗에게 아뢰매 이에 다윗이 바위로 내려가 마온 황무지에 있더니 사울이 듣고 마온 황무지로 다윗을 따라가서는” => 다윗에게도 충성스러운 이들이 있었다. 사울이 보낸 스파이가 있음을 알려준 것이다. 다윗이 이 때 협곡이 아닌 평지에서 있었기 때문에 사울의 대군이 급습을 하게 되면 피할 도리가 없었다.
- 26절. “사울이 산 이쪽으로 가매 다윗과 그의 사람들은 산 저쪽으로 가며 다윗이 사울을 두려워하여 급히 피하려 하였으니 이는 사울과 그의 사람들이 다윗과 그의 사람들을 에워싸고 잡으려 함이었더라” => 사울이 다윗이 있는 곳으로 와서 다윗을 잡으려 했다. 그러나 다윗은 간발의 차이로 마온에 있는 거대한 바위 협곡을 사이로 두고 피신을 하게 되었다. 건너편으로 다윗이 도망가는 것을 사울과 그 일행들은 넋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확실한 밀정들의 정확한 제보에도 한 발 늦게 도착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요나단의 제보였을 수도 있지만,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다윗을 철저히 보호하고 계시기에 피한 상황임을 알게 된다.
- 27절. “전령이 사울에게 와서 이르되 급히 오소서 블레셋 사람들이 땅을 침노하나이다” => 그렇게 넋을 놓고 다윗을 바라보고 있는 시점에 사울의 국경선 부근에 주둔 시켜놓은 군대의 전령이 사울에게 달려왔다. 블레셋 군이 이스라엘을 침공하였다는 보고를 하필이면 이때 하고 있는 것이다. 바로 눈 앞에 다윗이 있고, 계속 집요하게 쫓아다니다 보면 다윗을 잡는 것은 시간 문제인 상황이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하던 방법으로 다윗을 구원해 주시고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에게 분명히 피할 길을 내어주시며, 그 생명을 보호하셨다.
- 28절. “이에 사울이 다윗 뒤쫓기를 그치고 돌아와 블레셋 사람들을 치러 갔으므로 그 곳을 셀라하마느곳이라 칭하니라” => “셀라하마느곳”(סֶלַע הַֽמַּחְלְקֹֽות, 셀라 함마흐레코트)은 ‘분리하는 바위, 피신하는 바위’라는 뜻이다. 다윗이 사울을 피해 몸을 숨겼던 마온 광야의 바위틈을 부르게 된 지명이다. 사울이 다윗을 쫓기를 순간적이나마 포기할 수밖에 없도록 다윗을 떠나 분리됨으로 인해서 그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 실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닐 수 없음을 다윗은 시편 63편에서 노래한다.
- 29절. “다윗이 거기서 올라가서 엔게디 요새에 머무니라” => 다윗은 사울이 물러갔지만 다윗을 감시하는 눈길이 자신을 따라다님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다윗과 일행은 마온 협곡을 완전히 벗어나서 엔게디로 가게 되었다. “엔게디”(עֵֽין־גֶּֽדִי, 엔 게디)는 ‘염소의 샘’이라는 뜻이다. 이곳은 마온 황무지의 동북방 약 17km 정도 지점에 위치해 있다. 엔게디 요새는 한 지점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약 20 여km에 걸쳐있는 산맥 전체를 가리킨다. 여기서 “요새”(מְצָדֹות, 메차도트)는 복수이다. 즉, 다윗이 한 곳에 머문 것이 아니라 엔게디 산맥의 이곳 저곳을 옮겨다니면서 요새를 쌓고 그곳에서 피신한 것임을 의미한다. 이곳에는 약 30도 정도의 뜨뜻미지근한 물이 나오는 샘이 있었다. 그래서 요새에 있지만 오랫동안 버틸 수 있는 식수를 공급받을 수 있었다. 다윗과 그 일행들이 얼마나 생존을 위한 고생을 하고 있었는지를 짐작해 볼 수 있다.
가르침 :
1) 요나단은 다윗을 마지막으로 만난다. 그는 끝까지 다윗 편이었다. 아니 하나님 편이었다. 그리고 끝까지 다윗을 보호하기 위해 애를 쓴다. 그는 진실로 다윗이 이스라엘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확신을 했던 것이다.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을 알아본다. 그리고 자신을 내려놓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되도록 하기를 소원하는 자이다. 이런 사람을 보기 드문 세상이다.
2) 다윗은 그일라에서 이미 배신을 당한 경험이 있었다. 사울은 다윗에게 스파이를 심었다. 그리고 그들로 말미암아 다윗의 위치가 드러나게 되었다. 다윗은 또 다시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하고 있다. 다윗은 사울 뿐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로부터도 배척을 받는 아픔을 경험하고 있다.
3) 사울이 보낸 스파이들로 인해서 다윗은 거의 사울에게 잡힐 뻔한 상황에 처한다. 누가 보더라도 다윗은 소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일하신다. 하나님이 블레셋을 책동하셔서 이스라엘을 침공하게 하시고, 긴급한 상황을 전령이 보고하게 되고 사울은 다윗을 포기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긴급 철수하게 된다. 그럼으로 사울과의 죽음의 조우를 눈앞에 두고 사울과 분리하게 된다. 그래서 “분리의 바위”인 “셀라하마느곳”이라는 지명이 생겨나게 되었다.
4) 다윗은 엔게디에 머물게 된다. 다윗은 이제 생존을 위한 극한의 상황에 처하게 되고 더욱 하나님만 의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그러나 그 시간이 오히려 다윗을 연단했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깊고 깊은 시간이 될 수 있었다. 그럴지라도 다윗과 그 일행이 겪은 고생은 아주 힘들고 어려운 시간이었다. 하나님께 순전하게 쓰임받는 자들은 이런 시간과 과정이 필요하다.
적용 :
1) 사람들의 배반이 이어지면서 다윗은 요나단으로 위로를 받았다. 내가 다윗의 처지에 있던지 요나단의 위치에 있던지 사람을 위로하는 자가 될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사람으로 위로받는 관계를 맺어갈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람을 의지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지만 내가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존재가 되는 것을 해 볼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2) 죽음의 경계를 날마다 매순간 넘나드는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아직 그런 경험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윗을 통해서 그런 상황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원리를 발견하게 된다. 곧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것이다. 그럴 때 그 속에서 피할 길이 나오는 것이다.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으며 사람을 원망하지 않으며 형편을 원망하지 않는 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런 말도 되지 않는 상황속에서 다윗을 가장 훌륭한 군왕으로서 빚어가고 계시는 중이었다. 세상의 왕도를 준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대리통치자로서의 군왕의 길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하나님의 지도자로 세우시기를 원하신다. 그것이 모든 인생의 데스티니이다. 그 과정에서 낙오하고 포기하고 실패하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바르게 순종하는 자는 Finishing well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비록 미얀마에서의 일로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고 있지만, 앞으로가 더욱 중요하다. 주님의 인도하심을 믿고 날마다 매순간 사선을 넘지는 않을지라도 그러한 심정으로 주님을 따라갈 때 주님의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나는 그것을 믿는다.
3) 아들 병조가 코로나에 감염되어 동거인 pcr 검사를 받았다. 내일 결과가 나오게 된다고 한다. 주일 인천청라순복음교회 청년부 수련회의 설교가 있는데, 주님의 은혜를 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