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믿음의 공동체가 함께 모여 예배드리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영과 진리로 예배드리게 하옵소서.
오후에는 연합회 지체들과 함께 약한 교회를 방문하여 교제합니다.
복음과 생명의 삶이 전해지는 새로운 길이 열려지게 하옵소서.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부정성으로 오염된 영혼을 정결케 하여 주옵소서.
주님의 보혈을 의지합니다.
성령님, 말씀을 조명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 너희 중 장로들에게 권하노니 나는 함께 장로 된 자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요 나타날 영광에 참여할 자니라
2. 너희 중에 있는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되 억지로 하지 말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하며 더러운 이득을 위하여 하지 말고 기꺼이 하며
3. 맡은 자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양 무리의 본이 되라
4. 그리하면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
5. 젊은 자들아 이와 같이 장로들에게 순종하고 다 서로 겸손으로 허리를 동이라 하나님은 교만한 자를 대적하시되 겸손한 자들에게는 은혜를 주시느니라
6. 그러므로 하나님의 능하신 손 아래에서 겸손하라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7.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기라 이는 그가 너희를 돌보심이라
(본문 주해)
1~4절 : 장로들에게 권하는 말씀이다.
여기서 장로란 평신도 지도자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감독, 목자, 목사’와 함께 쓰이는 말로서 각 지역의 교회에서 말씀을 증거하고 치리하는 자를 가리킨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을 다른 장로들과 동등하게 말하면서, 그들에게 세상의 헛된 영광에 마음 빼앗기지 말고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 하는 일에 참예할 것을 권면한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께 보냄 받은 사도이며, 교회에서 장로의 지위를 갖고 있다.
그는 직접 고난을 체험하여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여한 자이다. 따라서 그가 고난에 관해 권면하는 것은 체험에서 나온 권면이다.
양무리를 치게 될 때에 억지로 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진하여 하고, 더러운 이익을 따라 하지 말라고 권면한다. 더러운 이익이란 물질만이 아니라 세상의 명예와 영광을 위한 것도 포함이 된다.
또 하나님께서 맡기신 양무리를 지배하려고 하지 말고, 양 떼의 모범이 되라고 한다.
이러한 권면의 내용으로 목회를 하는 자가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인 것이다.
그렇게 하면 목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을 얻게 된다.
이것은 현 세상에서 주어지는 것은 아니다.
그때, 이러한 면류관을 받기는 하지만 그 면류관을 쓰는 것이 자신에게 합당치 아니함을 알고 예수 그리스도께 다시 돌려드린다고 계시록에서 말씀한다.
“스물네 장로는 그 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서, 영원무궁 하도록 살아 계신 분께 경배드리고, 자기들의 면류관을 벗어서, 보좌 앞에 내놓으면서
"우리의 주님이신 하나님, 주님은 영광과 존귀와 권능을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십니다. 주님께서 만물을 창조하셨으며, 만물은 주님의 뜻을 따라 생겨났고, 또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하고 외쳤습니다.”(계4:10~11, 새번역)
5~7절 : 마귀의 작전은 첫째는 교만하게 하는 것이요, 두 번째는 세상에 대하여 염려하게 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장로들의 다스림을 받는 젊은 자들에게 이것을 경계하며 권면한다.
먼저 겸손함으로 장로들에게 순종하라고 한다.
젊은이들이 장로들에게 순종하는 것은 겸손에서 나온다. 당시 그리스 사회에서 겸손은 미덕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에서 겸손은 예수님의 본을 따르는 것으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 사람들과 같이 되셨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빌2:6~8)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6절)은, ‘겸손하게 지내면 언젠가는 하나님께서 높여주신다’는 말이 아니다. 그 높여주심이란 세상에서 높여주신다는 것이 아니라, 홀로 높임을 받으시는 주님을 높이는 자리에 참예한다는 것이다. 즉 보좌에 계신 이와 어린 양께 찬양과 존귀와 영광과 능력을 세세무궁토록 돌리는 그 높은 자리에 참예하게 해 주신다는 것이다.
이어서 하나님께서 그들을 돌보시고 계시니, 세상의 염려들을 주께 다 맡기라고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생의 염려가 없을 수 없지만, 그것은 주 안에서 누리는 기쁨을 소멸하는 요소인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6~7)
(나의 묵상)
베드로 사도가 오늘날 교회의 목사와 그들의 치리 안에 있는 자들에게 하는 권면의 말씀이다.
목회자들에게 하는 말씀은 그들이 명심해야 할 말씀이지만, 동시에 내가 알아야 할 말씀이기도 하다.
그것은 과연 그들이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목회자인지, 또 자신의 이익(물질과 자신의 영광)을 위해 양떼를 소유하고 지배하려는 목회자들인지 아닌지를 구분해 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과거에 이것을 분별하지 못했다.
그저 ‘주의 종에게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분위기 속에 ‘목사님 말씀이라면!’ 하고 따랐다.
거기다 주의 종에게 순종하지 않으면 나중에 안 좋은 일 생긴다는 협박적인 미신으로 찝찝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과연 그가 진실한 주의 종인지 아닌지를 분별한다는 것은 생각하지도 못했다.
이 세상에는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 목회자가 너무 많다.
더 놀라운 것은 목회자라도 복음을 모르는 자가 수두룩하고(물론 자신들은 안다고 한다.), 복음을 모르니 엉뚱한 자기 생각이나 세상의 교훈을 성경과 적당히 연결시켜 ‘말씀’이라고 선포하는 것이다.
이런 말들은 성도의 가려운 귀를 긁어준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이 되자는 말씀보다는 이런 말씀들이 백배 천배 듣기 좋고 가볍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말씀, 혹은 변질된 복음으로 서로 은혜 받았다고 주고받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의 복음이 없는 곳은 떨치고 나와야 하는데, 그런 곳이 단체로 가는 멸망의 집단인 줄도 모르고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인다.
참으로 감사한 것은 그런 중에도 복음의 신실한 증인이 되는 목회자들을 주님께서 곳곳에 남기셨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자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고난을 증거함으로 맡겨진 양 떼의 본이 되는 주의 종들이다.
나는 이들이 늙어가는 것이 아깝고 안타깝다.
하지만 주님은 바울도, 베드로도....때가 되었을 때 다 거두어 가셨으니, 이들도 그렇게 주님의 품에 안으실 것이다.
그러면 또 누군가를 남기셔서 복음을 전하게 하시고, 아들의 생명의 나라를 이어가게 하실 것이다.
한편으로, 내 인생의 후반에서야 복음을 알게 하시고, 이 땅에서부터 영생을 누리는 은혜를 주신 것을 생각하면, 지금 답답하고 아쉬운 목회자들에게 하나님께서 장차 어떤 경로를 통해 은혜를 부어주실지는 알 수 없으니 안타까운 그 영혼들을 위해 기도할 뿐이다.
장로나, 그들이 치는 양 떼들이나, 목자장이신 주님 앞에서는 다 연약하고 어리석은 양들이요, 그리스도의 고난의 증인들이다.
주님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함께 격려하고 기도하며 이 길을 간다.
세상의 헛된 영광에 속지 않고, 십자가의 영광에 마음을 두고 사는 자들인 것이다.
(묵상 기도)
주님,
사도들이 전해준 복음,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이 주와 그리스도이심을 전하는 주의 종들이 많아지게 하옵소서.
또 그런 종들이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힘 있게 복음만을 전하게 하옵소서.
그들로 하여금 목자장이신 주님의 뒤를 한결같이 따르게 하시고,
저도 그 뒤를 따르게 하옵소서.
그래서 이 세상에서 주어지는 영광을 기대하는 자들이 아니라,
십자가의 영광을 통해 하나님과 아들의 영광을 보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성령님,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