놀라움의 힘
The Power of Surprise
내 삶을 바꾸는 놀라움의 비밀이란 소제가 붙은 ‘마이클 루셀’의 글이다. 필자는 교사이자 심리학자이며 ‘서던 오레곤대학교’ 명예교수로, <갑작스러운 영향력>이란 책이 국제적 명성을 얻고 전문성을 입증했단다.
“왜 우리는 자아 정체성이 형성되는 결정적인 순간을 의지가 아닌 우연에 맡길까?” 세상은 기회와 위험으로 가득하다. 놀라움은 신경학적 오류 신호다. ‘복잡한 문제의 본질을 포착해 내는 신비한 능력’이 있다며 칭찬을 받으면 자부심과 나만의 특성으로 여기기도 한다. 놀라움이라는 감정적 메커니즘이 믿음을 변화시키는 가장 일반적인 촉매제라는 사실을 발견한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전략적으로 놀라움의 순간을 선사하는 방법을 알려준다. “시험을 치르는 속도가 느린 이유는 집념을 가지고 집중해서 심사숙고하기 때문”이란 선생님의 격려를 듣고 필자는 놀라고 말았단다. 또 ‘제러미’는 자신이 수업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똑똑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수업 대신에 혼자 도서관에서 공부하려고 도서관 출입증을 자주 요청했다. ‘제러미’는 아버지를 도와서 컴퓨터 수리하는 일을 도왔고 기술도 꽤 있었다. 담임 교사는 이 사실을 알고 칭찬한다. “넌 내가 아는 똑똑한 아이 중 한 명이야. 두뇌가 명석한 사람들만 너처럼 컴퓨터에 능숙하게 다룰 수 있거든.” 이후 ‘제러미’의 출석률은 높아졌고, 더는 도서관 출입증을 요청하지 않았다. 담임은 ‘제러미’가 원래 가지고 있던 능력을 새로운 맥락으로 연결해 놀랐다.
믿음이 우리를 형성한다. 인간의 뇌는 항상 주변 환경을 인식하고 기회나 위협을 감지한 다음, 상황에 따라 최적화된 반응을 도출하기 위해 즉각적으로 신경전달물질을 방출한다. 무의식에서 작동하는 감정은 이러한 상황 판단에 따라 사용될 수 있는 뇌의 자원을 배분한다. 상황이 중요하다고 판단하면 자원을 많이 배분하고 중요하지 않다면 적게 배분한다. 이런 감정 반응에 따라 ‘회피’ 또는 ‘참여’ 행동을 활성화한다. 우리는 믿음을 선택하지 않는다. 인간의 뇌는 안전하고 생산적이며, 예측 가능한 장소에서 살아갈 수 있게끔 주변 환경을 파악하도록 각인되어 있다. 기회와 위험으로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접근 대상과 회피 대상을 어떻게 구분할까? 살아 있는 유기체는 자극을 기억하고 그에 적응해 반응하는 자극-반응 메커니즘이 있다. 우리는 적극적으로 믿음을 시험한다. 그리고 자신에 대한 믿음 검증하기를 한다. 믿음은 패턴에서 진화한다. 패턴에서 이야기로 전개한다. 믿음은 무의식에서 작용한다.
믿음은 어떻게 기능하는가. “인간은 타인의 말을 신뢰하는 성향을 타고났으며, 모든 정보에 일일이 의문을 제기할 시간이 없다.” 불신은 믿음의 반대말인가? 불신 상태에 도달하면 뇌는 더 열심히 일해야 한다. 불확실 상태에서는 오류 감지, 갈등 해결이 관련된 뇌 영역이 활성화되었다. 믿음은 빨리 자연스럽게 도달하지만, 의심이나 거부는 천천히 깊이 고민해야 도달할 수 있다는 가정이 뒷받침한다. 나는 나의 믿음을 신뢰한다. 빠르게 본능적으로 혹은 느리게 의식적으로 작용한다. 잘못된 믿음은 ‘생각’ 없이 빠르게 형성될 수 있다. 지름길이 정확도보다 중요하다. 믿을 게 없을 때는 만들어서라도 믿는다.
강력한 믿음 유지하기. “믿음은 진화 과정에서 우리 조상들이 미지와 위험으로 가득한 세상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왔다. 심지어 미신적인 믿음조차 말이다. 조상들의 가정은 정확하지도 않았을 수도 있지만, 믿음은 두려움을 줄이고 집단을 결속시키는 가치를 전수하게 해주었다.” 믿음은 한 번 확립되면 놀라운 지속력을 보여준다. 안정된 믿음은 편안하게 해주지만 변화에 저항하면 제 기능을 하지 못한다. 필자는 글을 늦게 깨우쳤다. 엄마는 아홉 살 혹은 열 살까지 기다렸다가 그 이후에 글을 깨치는 것이 훨씬 좋고, 실제로 늦은 나이에 글을 깨친 학생들이 어려서 압박을 속에 글을 깨친 학생들보다 훗날 더 우수해 독해 능력을 보였다는 연구 결과를 찾았다고 말씀해 주셨다. 그리고 엄마는 필자가 적당한 때에 글을 깨칠 것이라 확신하셨다. 필자는 충분히 준비되어 있기에 그 순간이 오면 나머지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도 하셨다. 그리고 필자는 매우 놀란다. 평생 잊지 못할 어머니와의 대화다. 포기하지만 않으면 모든 것이 괜찮을 것이라는 사실에 얼마나 큰 안도감과 용기를 얻었는지 모른다. 너무나 안심이 되었다고 필자는 회상한다.
무엇이 믿음을 통제하는가. 믿음은 개개인을 고유한 존재로 만든다. 두 사람이 같은 사건을 겪어도 경험은 서로 완전히 다를 수 있다. 인지 편향은 복잡한 세상에서 믿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러면 편향에 가장 취약한 사람은 누구일까? 확증편향과 지능 사이에는 아무런 상관관계가 발견되지 않았다. 어떤 경우에는 지능이 높은 사람이 믿음을 합리화하는 데 뛰어나다는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다. 이들은 유창한 논리로 자신을 설득했다. 심리학자들은 이를 가리켜 ‘지능의 함정’이라고 부른다. 누구나 우리 안에 있는 이러한 성향에 빠져들기 쉽다. 그래서 믿음은 고유함을 만들고, 편향은 고유함을 유지하게 시킨다. 자신의 믿음에 반박하는 근거를 마주할 때, 뇌는 자동으로 투쟁-도피 반응을 보이고 몸은 자신을 보호할 준비를 한다.
자신의 행복과 안녕을 위협하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회피함으로써 믿고 싶은 현실을 선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연구는 많다. 예컨대, 다이어트 할 때는 맛있는 디저트의 열량은 보지 않으려 하고, 자신의 정치적 견해와 일치하는 출처에서 나온 뉴스만 선별해서 본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것을 확증하는 정보만 선택해서 주의를 기울이고, 사실이 아니기를 바라는 정보를 잊는 데 매우 능숙하다. 정보 회피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사례는 정보를 획득하지 않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대개 새로운 정보보다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을 확증해 주는 정보를 원한다. 사람들이 모두 거짓말을 한다고 주장하는 ‘세스 스티브스 다비도위츠’는 거짓말은 성과를 부풀리고 설문조사에서 사람 좋은 척 거짓으로 답변하고, 거짓 소문을 퍼뜨리고, 페이스북에서 자신을 포장하는 등의 행위가 포함된다. 자기 뒤통수를 보려면 노력이 필요하듯 편견을 알아차리는 것 또한 뒤통수를 보는 것만큼이나 어렵고, 불가능할 수 있다.
개인적 편향 감지하기. 당신이 어떤 편향이 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설탕과 과잉행동 사이에는 연관성이 있을까, 없을까? 우리 부모는 설탕이 과잉행동을 유발한다고 믿었다. 필자는 ‘회귀 프로토콜 표준분석’이라는 방법에 주목한다. 우리 안에 있는 확증편향의 ‘밀고 당김’에 주목하는 것이다. 이 과정은 본능적으로 일어난다. 우리는 끊임없이 경계 태세를 유지할 수 있긴 하지만, 이는 굉장히 어렵고 지치는 일이다. 경험이 우리를 만들고 우리가 경험을 만든다. 확증편향은 인간이 지닌 고유한 특징이다. 정당화하여 승리하라. <인간은 왜 추론하는가?>에서 생쥐가 인간처럼 확증편향을 가진다고 가정한 이야기를 보자. “주변에 고양이가 없다는 믿음을 확증하는 데 열중한 쥐가 있다면, 조만간 고양이의 저녁거리가 될 것이다. 확증편향 때문에 인간이 자꾸 새로운 위협이나 과소 평가된 위협의 증거를 무시한다면, 이러한 성향은 자연선택에서 도태되었어야 한다. “인간이 합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위해 추론하도록 진화했다면, 왜 확증편향과 같은 심각한 설계 결함을 발전시켰을까?
믿음이 공격당하면 견해를 바꿔라. 사람은 정보를 무시할 수 없을 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해 버린다. 반박이 통하지 않으면 아예 주제를 바꿔 개인적인 문제로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공격당한다고 느끼자, 투쟁-도피 반응이 그의 변연계를 자극한 것이다. 격양된 감정은 자기합리화를 유발해 어떤 합리적인 사고도 알 수 없도록 방해한다. 피해자는 자기합리화도 서슴지 않는다. 더 이상의 대화는 무의미하다. 반칙 혐의는 이제 부차적인 일이 되고, 곧 잊힐 것이다. 하지만 암시적인 분노는 계속 남는다. 영리한 정치인은 감정이 이성적인 논쟁을 압도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감정은 언제나 사실을 능가한다. 우리는 감정을 앞세워 사실을 무시할 때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 누군가 ”이봐, 사실은 당신이 틀렸어.”라고 지적하면 우리는 “하지만 이건 경우가 달라.”라고 말한다. 정치인들도 자신이 할 때는 옳고, 상대 정당이 똑같이 하면 불공평하다고 주장한다.
내 안의 편향 성찰하기. “세상에는 두 종류의 연구가 있다. 하나는 우리가 가진 상식을 확인시켜 주는 연구고, 다른 하나는 틀린 연구다.” 처음 배운 방식이 최선의 방식이라고 장담할 수 있을까? 만약 나중에 쉽게 배울 방식이 존재함을 알면 어떻게 할 것인가? 확증편향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우리를 신념의 노예로 만들어버린다. 최적 방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먼저 접한 철학이나 전략을 채택한다. 그저 항상 그렇게 해왔기 때문에 그렇게 할 뿐이다. 더 정확하게 세상을 바라보고자 노력하고 싶다면, 먼저 편향이 본능적으로 인간의 인식을 왜곡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자신의 편향과 싸우는 일은 본능에 반하기 때문에 매우 어려운 일이다. 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2024.09.13.
놀라움의 힘
마이클 루셀 지음
상상스퀘어 간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