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년 6월 10일(월)
* 시작 기도
주님...
어제와 오늘 계속해서 연일 장대비가 쏟아집니다.
천둥과 번개는 마치 쉴 새 없이 으르렁댑니다.
어제는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전에 살던 반까오 지역이 물에 잠겨 그곳에 있는 성도들이 오지 못할 상황이었습니다.
집에서 챙겨나와서 택시를 잡으려고 한 시간을 기다렸는데 택시가 잡히지 않아서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포기할 수 없어서 교회 옆에 사시는 장로님과 연락이 되어 장로님이 이곳에서 택시를 타고 반까오로 가서 다른 성도들을 태워 오기도 했습니다.
예배 시간이 좀 늦었지만 그래도 괜찮습니다.
주님께 예배하고자 하는 그 중심이 얼마나 아름다운지요.
여전히 비가 많이 오지만 그런 환경이 우리의 마음을 앗아가지는 못합니다.
이 하루도 주님 안에서 주님과 연합하여 살기를 원합니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를 사랑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넉넉히 이겨내게 하소서.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부요한 자 되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우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전 5:8-14
제목 :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마귀를 대적하라.
8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9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라.
10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깐 고난을 당한 너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하게 하시리라.
11 권능이 세세무궁하도록 그에게 있을지어다. 아멘.
12 내가 신실한 형제로 아는 실루아노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간단히 써서 권하고 이것이 하나님의 참된 은혜임을 증언하오니 너희는 이 은혜에 굳게 서라.
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14 너희는 사랑의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 모든 이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 나의 묵상
베드로 사도는 계속해서 권면하기를 근신하고 깨어서 대적 마귀가 먹을 것을 찾는 우는 사자와 같이 자신의 먹이를 찾아 돌아다니고 있기 때문에 항상 믿음을 강하게 하여 그 마귀를 대적하라고 한다.
마귀를 대적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대적 기도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면 길을 지나가고 있는데 나를 향하여 정신없이 짖어대는 개가 한 마리 있다고 치자.
그 개는 사납고 강한 개일까?
그렇지 않다.
그 개는 자신이 두렵고 무서우니까 상대방을 향하여 자신이 힘이 있는 듯 큰 소리로 짖어대는 것이다.
정말 강하고 큰 개는 사람이 지나간다고 아무에게나 짖어대지 않는다.
오히려 본 체 만 체 하면서 지나갈 뿐이다.
이와 똑같다.
아무리 강한 것 같이 우리를 삼킬 것 같은 마귀라 할지라도 그 앞에서 그것을 막아서고 쫓아낸다고 소리소리 지르면서 대적 기도를 하는 것은 내가 그만큼 약하다는 방증이다.
물론 우리는 약하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대적하는 것이지만, 그렇게 대적기도를 하는 것은 상대에 대하여 일단 한 수 접히고 들어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강하기에 그 이름의 능력을 덧입고 살아가는 우리는 그 이름과 함께 강한 자로 서 있으면 된다.
성경에서 마귀를 대적하라는 말씀은 대적기도를 하라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실체를 분명히 알고 거기에 굴복하지 말라는 것이다.
마귀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은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이며, 믿음을 강하게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온전히 들어가는 것이다.
믿음은 단순히 믿는 정도가 아니다.
내 믿음의 대상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동등한 상대인 친구끼리의 믿음이란, 서로를 신뢰하고 믿어주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향한 믿음이란, 그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을 말한다.
세상에 있는 그 어떤 존재나 대상을 믿는다고 할 때는 ‘믿음’이라는 영어 단어인 believe나 헬라어 ‘피스튜오’ 앞에 전치사가 붙지 않는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나 그의 사건을 믿는다고 할 때는 항상 전치사가 붙는데 영어의 ‘in, into’나 헬라어 ‘에이스’가 붙는다.
이는 친구끼리 어깨동무 하면서 ‘나는 너를 믿는다’는 식의 믿음이 아니라, 내가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나는 없어지고 오직 예수만 남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이 믿음이다.
그런 믿음일 때, 어떠한 마귀의 대적이라도 거기에 굴복하지 않고 넉넉히 이겨낼 수 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주신 두 가지의 복음에서 여자의 후손으로 오실 그리스도가 아담을 넘어지게 했던 뱀, 즉 사탄의 머리를 박살낼 것임을 천명하셨다.
(창 3:15) 내가 너로 여자와 원수가 되게 하고 네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 하시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는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셔서 마귀에게 시험도 받으시고 또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결국 마귀에게 굴복당하신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진리는 마귀의 머리를 박살내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성취하신 것이다.
그렇게 하시는 것이 또한 아담에게 약속하신 두 번째 복음을 성취하심이다.
(창 3:21)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과 그의 아내를 위하여 가죽옷을 지어 입히시니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귀의 세력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사망의 세력인데 그 사망은 주님이 다시 오실 종말의 때에
멸망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고전 15:26)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는 사망이니라.
내가 나의 힘과 나의 꾀로 사망인 마귀를 대적하고 이기려고 하면 넘어지고 질 수밖에 없다.
아무리 머리가 상했을지라도 아직 그의 몸통은 살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믿고 신뢰함으로 그분 안에 들어가 나의 힘이 아니라 주님의 힘으로 살 때 마귀는 힘을 쓰지 못한다.
그것이 바로 믿음을 굳건하게 하는 것이요 강하고 담대한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9절에서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는 마귀를 대적하는 기도를 해서 너만 그 고난에서 빠져나오라는 말이 아니다.
너와 동일한 불 시험과 같은 고난을 받고 있는 형제들처럼 너도 넉넉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그 고난에 굴복하지 말고 이겨낼 것을 권면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부르셔서 그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실 은혜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친히 온전하게 하시고, 굳건하게 하시고 강하게 하시고 우리의 터를 견고하게 해 주실 것이다.
그것에 비하면 우리가 당하는 현재의 고난은 잠깐이다.
(롬 8:18) 생각하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 없도다.
어찌 보면 우리가 이 땅 위에서 살아가는 것 자체가 고난이다.
아이들은 매일 매일 공부와의 전쟁, 어른들은 직장과 사업에서 전쟁이다.
먹고 사는 문제, 보란 듯 하게 사는 문제 등, 남들보다 한 발 더 앞서 가기 위하여 두 발을 더 뛰어야 하는 것이 현실이요 그것이 바로 전쟁과 같은 고난이다.
나 역시 동일하게 이런 삶을 살았던 자이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이 세상에서 멋지고 화려하게 살아보고자 열심히 공부했고, 직장에서 열심히 일했으며, 또한 열심히 사업도 하면서 땀을 흘렸다.
그래서 동일 선상에 있는 친구들에 비해서 경제적으로 한 발 앞서가는 시간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유를 가질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그 자리에 올라갔다고 해서 여유를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혹시 뒤처질까봐 그 자리에서 더욱 열심히 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초조하고 불안함이 나를 둘러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이 땅 위의 모든 사람이 동일하게 겪는 모습이다.
돈이 많아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다고 해서 삶을 누리고 즐길 수 있는 것이 아님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위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그 자리를 빼앗길까봐 더 초조와 근심에 휩싸여 불안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유를 누리기는커녕 더 불안한 것이다.
물론 본문의 상황은 로마의 황제로부터 육체적 상황적으로 박해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오늘날 현대인들은 육체적으로 당하는 현실적 박해는 없다 할지라도 그들의 정신적 영적 고난은 결코 그것과 비교해 차이가 없을 것이다.
그런 이들에게 참된 안식과 평강을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바로 믿음이다.
이 믿음은 아무 종교나 아무 신이나 믿어도 되는 그런 믿음을 말하지 않는다.
어깨동무하고 으쌰으쌰 하는 그런 믿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가 나는 없어지고 오직 예수님만 남는 그런 믿음이다.
오늘 그런 믿음을 우리가 어떻게 가질 수 있으며 어떻게 체험할 수 있는가?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존재 자체이신 말씀 안에 들어가 날마다 주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매일 말씀을 깊이 묵상하게 되면 나는 없어지고 오직 말씀이신 그리스도가 나를 지배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참된 안식과 평강을 누리게 된다.
세상에서 학생 때 공부를 하면서도, 직장을 다니거나 사업을 하면서도, 심지어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면서도 한 번도 누려보지 못했던 안식과 평강, 그리고 하늘의 기쁨과 행복을 나는 지금 누리고 있다.
그것은 내가 무엇을 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오직 말씀 앞에 나아가 그 안에서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갖기 때문이다.
사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말씀 앞에만 있다고 하는 것은 이성적으로 생각해보면 바보 같고 뒤처지는 것 같으며 불안하기 그지없을 것 같다.
목사로써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사업가로써 할 일이나 직장인으로써 그리고 학생으로써 할 일이 도대체 얼마나 많은가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할 일이 많아도 그 일 가운데 안식과 평강을 누리지 못하면 거기에는 영생이 없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얻기 원하는 것은 영생이다.
영생은 주님을 아는 것이요 또한 누리는 것이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일을 이루었을 때, 누리는 성취감은 있다.
하지만 그것은 잠시 뿐, 또 다시 고난은 찾아오게 되어 있다.
그렇다면 이 고난 속에서 누리는 영생은 어떻게 맛보아야 하는가?
날마다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이 보았던 아버지의 영광을 나도 보면 된다.
그것이 바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유언적 기도이다.
(요 17:24)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전부터 나를 사랑하심으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
그 영광을 보며 그 안에 거할 때, 더 이상 이 세상의 고난이 고난이 아니며 불안과 초조가 나를 덮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내 안에 주의 평강이 임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상황과 환경에 처할지라도 그것이 나를 두렵게 하거나 나를 지배하지 못하는 것은 그보다 더 큰 주의 평강과 영광이 나를 덮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상황적 고난과 무덤도 넉넉히 견딜 수 있다.
우리를 삼키려고 쫓아다니는 마귀를 대적하는 최고의 방법은 대적기도도 아니고 도망다니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오직 주의 말씀 앞에서 날마다 주님과 교제와 사귐을 가질 때 세상이 알 수 없는, 세상이 줄 수도 없는 참된 평안과 기쁨을 맛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복음을 통하여 이 기쁨을 맛본 자로써 이 맛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이 맛을 보여주고 알려주기 위하여 복음을 전하는 것이다.
그리고 말씀 묵상을 하도록 권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이것이 주를 믿는 이유이며 또한 목적이다.
나는 오늘도 주님과 함께 그 평강 가운데 거하며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하다.
우리가 걸어가는 길은 십자가의 길이지만, 그것은 고통의 길이 아니라 바로 하늘의 기쁨으로 충만한 길이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는 마귀를 대적하는 것이 대적기도를 하여 이겨내는 것으로 오해했었습니다.
복음을 알기 전까지는 내가 예수를 믿어도 늘 혼미하고 헷갈리며 흔들려서 무엇을 어떻게 붙잡아야 되는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이것이 좋다고 하면 그것을 잡아보고, 저것이 좋다고 하면 저것을 잡아 보는 등 얼마나 헤매었는지요.
그러나 참된 복음을 듣고, 이 세상에서 무엇을 얻으려고 좇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복음을 통하여 세상 만물에 속한 것들을 내려놓자 자유와 평강이 임했나이다.
말씀 속에 참 자유와 평강이 있음을 나는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압니다.
그것이 해답이요 정답임을 말입니다.
주님 안에 거하는 믿음으로 넉넉히 이 세상에서 당하는 고난도 감당하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거기에 매몰되지 않고 날마다 위를 향하여,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올라가게 하시고 영생을 누리게 하시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내가 아니라 주님이 하셨습니다.
오늘도 기대가 됩니다.
주께서 이끄실 하루를 말입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첫댓글 목사라도 교제하지 않으면 하늘의 기쁨 누리지못하지요.
반까오 사는 성도들,
모시러 간 장로님...
벅찬 감동의 예배네요!
시간좀 늦으면 어떠리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