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1일(화)
* 시작 기도
주님...
우리 주님께서는 ‘내가 그’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또한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내가 그’임을 아는 것이 중요함을 천명하셨습니다(요 8:24, 28).
이는 곧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요 8:32).
이 진리는 다름 아니라 ‘내가 그’임을 아는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도 이사야 43:10, 13절에서 ‘내가 그’임을 알고 믿으며 깨닫게 하심이라 하셨습니다.
‘내가 그’는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 히브리어로 ‘아니 후’로서 이는 곧 하나님 아버지께서 친히 당신을 계시하신 이름입니다(출 3:14).
진리는 우리 주님의 이름을 바르게 아는 것에서부터 출발합니다.
그러나 나는 그 진리를 알지 못하였던 자입니다.
막연히 관념적이고 지식적인 개념으로만 붙든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이런 나를 진리 안으로 인도하신 분이 ‘내가 그’이신 우리 주님이시며 또한 삼위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오늘도 성령 안에서 그 진리의 복음을 온전히 붙잡고 사는 날 되게 하소서.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 외에는 구원자가 없사오니 내 마음이 이리저리 갈팡질팡 흔들리지 않게 장악하여 주소서.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나라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하여 경건함과 두려움으로 하나님을 기쁘게 섬기게 하소서(히 12:28).
거짓으로 둘러싸여 있는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오늘도 죽사오니 오직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거룩한 불구자로 영적 하루살이의 삶을 살게 하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후 1:1-11
제목 :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 : 영생.
1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며 사도인 시몬 베드로는 우리 하나님과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하게 보배로운 믿음을 우리와 함께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2 하나님과 우리 주 예수를 앎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3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이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4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 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9 이런 것이 없는 자는 맹인이라. 멀리 보지 못하고 그의 옛 죄가 깨끗하게 된 것을 잊었느니라.
10 그러므로 형제들아 더욱 힘써 너희 부르심과 택하심을 굳게 하라. 너희가 이것을 행한즉 언제든지 실족하지 아니하리라.
11 이같이 하면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나라에 들어감을 넉넉히 너희에게 주시리라.
* 나의 묵상
베드로는 자신을 예수 그리스도의 종이자 사도라고 소개한다.
하나님이시며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힘입어 동일한 보배로운 믿음을 가진 성도들에게 편지하는 것임을 밝힌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과 주 예수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 은혜와 평강이 더욱 넘치기를 기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생명과 경건에 관하여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자신의 신적인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셨다.
이러한 일은 영광과 덕으로써 성도를 부르신 이 곧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3절의 ‘신기한 능력’이란, ‘금 나와라 뚝딱’ 하면 금이 나오는 그런 요술 방망이와 같은 신기한 능력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은 바로 우리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시는 능력이다.
생명은 아버지의 생명으로써 그 생명을 아들인 그리스도에게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신 생명이다.
이제 때가 되어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또한 우리에게 주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무덤에 장사되심에 연합하여 세례를 받은 자가 바로 그의 생명을 얻게 되는 것이며 이것이 진짜 ‘신기한 능력’이다.
(요 5:26) 아버지께서 자기 속에 생명이 있음 같이 아들에게도 생명을 주어 그 속에 있게 하셨고
(딛 1:2) 영생의 소망을 위함이라. 이 영생은 거짓이 없으신 하나님이 영원전(창세전)부터 약속하신 것인데
바로 이 생명을 얻은 자라야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다.
경건은 악하고 음란한 세대에서 그에 물들지 않고 아들 안에 있는 그 생명으로 그의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삶의 방식을 말한다.
이는 사람이 아무리 경건하게 살아도 아들의 생명이 없이는 신성한 성품(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없다.
따라서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얻는 것이 우선이며 그 생명과 함께 경건은 그리스도인에게 요구되는 특별한 삶의 방식인 것이다.
생명이 없어도 도덕적으로 경건하게 살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자기주장의지에 함몰된 자의 전형일 뿐이다.
문제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은 우리를 부르신 이,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 때에 받게 된다.
여기서 ‘아는 것’은 머리로만 아는 지식적인 앎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그분과의 교제와 사귐 그리고 지속성 곧 영생을 말한다.
교제와 사귐은 말씀을 통한 인격적인 만남을 의미하며, 지속성은 그 만남이 단회적이 아니라 매일 지속적으로 만나야 함을 의미한다.
(요 17:3)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처럼 가장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인 생명, 즉 영생을 주셨기에 우리의 정욕으로 인하여 이 영생을 걷어차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다.
나아가 신성한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신기한 능력으로 우리에게 주신 생명과 경건이 곧 영생이라면 이 영생을 누리는데 가장 큰 저해 요소는 정욕이라 할 수 있다.
세상은 욕망으로 인하여 썩고 부패한다.
세상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세상을 부패시키는 욕망이 문제인 것이다.
욕망은 끝을 알지 못하며 만족이 없다.
욕망은 절제를 알지 못하며 넉넉함이 없다.
욕망은 사랑을 알지 못하며 인내와 연단이 없다.
욕망은 다른 사람을 인정하거나 믿어주지 못하며 헌신과 희생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욕망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이며 온 몸을 사르는 지옥 불과 같다.
욕망은 자기 외에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욕망은 스스로를 하나님처럼 주장하여 결국 자기주장의지에 빠지므로 우상 숭배에 이르게 한다.
이러한 욕망, 즉 정욕은 죄의 근원이다.
(약 1:15)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결국 이 정욕이 싹트게 되면 이로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의 삶인 영생을 무너뜨리게 된다.
따라서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는 아래와 같은 8가지 성도가 지녀야 할 덕목을 가져야 한다.
믿음, 덕, 지식, 절제, 인내, 경건, 형제 우애, 사랑이 그것이다.
이런 덕목이 없는 자는 소경이요, 여전히 옛 사람으로 살아가는 자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택하시고 불러주신 은혜를 알고 날마다 이러한 덕목, 즉 경건의 모양이 아니라 경건의 능력으로 행하여야 한다.
이런 자에게 하나님께서는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수 있는 은혜를 주신다.
(골 1:13-14) 그가 우리를 흑암의 권세에서 건져내사 그의 사랑의 아들의 나라로 옮기셨으니, 그 아들 안에서 우리가 속량 곧 죄 사함을 얻었도다.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아들 그리스도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시며,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분이시다.
그 생명을 우리에게 주셨고 그 생명을 받은 우리로 하여금 날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게 하시며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 것이다.
(골 1:15) 그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이시요 모든 피조물보다 먼저 나신 이시니
(요 1:12-13)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
나는 하나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시고 부르셨으며 아들 안에 있는 생명을 주시기로 작정된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에 걸맞는 삶을 살지 못하고 정욕에 빠져 살던 자였다.
창세전에 나를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사실 앞에서 나의 이성을 초월하여 나의 모든 것을 다 동원해도 알 수 없는 하나님의 뜻과 은혜를 나는 몰라도 너무 몰랐던 자이다.
창세전이라는 말은 나에게 관념이나 지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저 막연한 창조 이전의 시간에 불과하였고, 그 때 이미 나를 아시고 택하시고 부르셨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저 ‘하나님이시니까 그러시겠지!’ 하는 정도였다.
나는 아담 안에 있는 죄의 본성인 옛 사람으로 살면서 사람들에게 보여지는 경건의 모양만 나타냈을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경건의 능력은 정말 부인하는 자였다.
사람들에게는 칭찬 받으나 하나님께는 진노를 살 수밖에 없는 그런 자였다.
그것은 정욕에 빠져 살았기 때문이다.
세상이 부패하고 더러워진 것은 다름 아니라 바로 나 때문이다.
절제할 줄 모르는 정욕으로 끊임없이 음란을 구했으며, 다른 사람은 인정하지 않으면서 나는 사람들에게 인정과 칭찬을 받으려고 속사람이 아니라 겉사람으로 사는 이중인격자가 바로 나였다.
나는 정욕으로 인하여 나 자신을 파괴하는 자였으며 내 안에 성령께서 거하지 못하게 하는 자로, 스스로 성전임을 거부하면서 살았다.
내 안에는 꺼지지 않는 지옥 불이 활활 타올랐다.
나는 내가 하나님인 양 나 자신을 주장하는 자였다.
그런 나는 정말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나의 죄와 비참함을 바라보는 나는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기에 주님께 주의 심판과 함께 죽여 달라고 구하였다.
더 이상 이렇게 살 수 없음을 주 앞에 토설하며 통곡과 눈물로 주님 앞에 나아간다.
주님께서는 목사로써 모든 양 무리의 본이 되라고 하셨건만, 나는 정욕의 화신이 되어 나 자신을 지옥 불로 사르고 또한 다른 이들까지 태워버리는 그런 마성을 가진 자였음을 고백한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그런 나에게도 은혜를 베풀어 주신다.
통곡과 눈물로 회개와 죄를 토설할 때 주님은 내게 평안과 자유를 주신다.
그리고 생명과 경건을 주시는 신기한 능력은 오늘 나로 하여금 하루를 살아내는 자양분이 된다.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인 영생은 이제 나의 것이다.
죄와 허물로 죽었던 나를 당신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장사되심으로 살리셨으니 이제 나도 주님의 십자가와 장사됨에 함께 연합한 자로 살아갈 것이다.
세상을 썩게 하는 정욕을 피하고 신성한 성품, 곧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환난과 고난 앞에서 인내를 배우며 그 인내는 결국 연단이라는 주님의 성품으로 닮아가게 하는 능력이 있음을 믿는다.
나는 오늘도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내 마음과 얼굴에 비추어 나타나기를 소원한다.
그것이 오늘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라는 사실 앞에 겸손히 머리를 조아리며 감사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지금까지 나는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면서 경건의 모양만 앞세웠던 자였음을 고백합니다.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칭찬은 받으려고 하면서 하나님의 성품에는 참여하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성품에 참여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지 못한 채 나는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 거짓으로 일관해 온 자였습니다.
그런 나는 죽어 마땅한 자입니다.
이미 내 허물과 죄로 인하여 죽었던 자이나, 그런 나를 불쌍히 여기사 창세전에 약속하신 그 생명을 주시고자 주님은 그 모진 십자가를 지시고 무덤에 장사되셨습니다.
내가 무엇이관대 이런 은혜를 주시나이까?
그런 은혜를 받을 자격이 전혀 없고 영적 벌거벗음으로 인하여 부끄럽기 그지없는 자를 주님은 당신의 품에 품어주시며 나를 주의 자녀 삼아주셨습니다.
이제 이 세상에서의 정욕을 피하고 오직 사랑의 아들의 나라에서 주님과 함께 주의 영광과 덕으로 날마다 더 깊이 더 많이 주를 알기 원합니다.
내 평생에 주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늘 함께 하시고 내 안에 주의 성품에 참여하는 은혜로 살게 하소서.
주의 통곡과 눈물이 나의 것 되기를 원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