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골산 칼럼 제1397호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으로 살아야 하는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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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에게든지 자기만의 이름을 갖고 있다. 사람뿐만 아니라 그 어떤 사물까지도 명칭을 갖고 있다는 것은 지구상에 있는 사람들만의 특권인 것 같다. 창세기 2장 19절과 20절에 하나님께서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난 뒤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신 것이 하나님의 방침이셨다.
그런데 여기서 2장 7절에 사람을 만드실 때 흙(hm'd'a]h'-!mi rp'[아파르 민 하아다마)과 19절에 짐승들을 만드실 흙(hm'd'a]h'하아다마gm)이 같은 흙이 아니라 다른 흙임을 원문에서 살펴볼 수 있다. 그래서 원문을 보지 않고 한글로 된 성경만 본다면 이런 차이점을 알아낼 수 없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말씀 속에 숨겨진 원형과 본질을 찾지도 못한다.
창세기 4장 마지막절인 26절에 셋(tve)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vAna/)라 하였으며 그 때에 사람들이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고 되어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데 이름이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가? 내가 가진 이름을 내가 자주 사용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내 이름을 자주 사용하는데 이름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 알아야 한다.
아담(~d'a')이란 이름은 단순히 “사람”이란 뜻을 가진 것만이 아니다. (a)알렢은 단순히 황소를 의미하지 않고 피의 제사에 사용된 제물인 황소를 의미도 하지만 배우는 존재를 의미한다. 그래서 인도에서는 황소를 귀중하게 여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배우는 존재를 상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고 히브리사상과 서로 연관이 있다고 보지는 않는다.
(d)달렛은 “진리를 배워서 통과하는 관문이나 과정에서 매달리는 상태”를 의미하는데 다윗(dwID 다위드)의 이름은 이 문자가 두 개나 들어 가 있다. 즉 “실존의 진리에 매달리고 또 매달리는 자는 과정을 통과하게 되며 그 통과한 것으로 또 다른 과정을 통과하게 되는 존재”라는 뜻을 함축하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으로부터 총애를 받은 것이다.
(m)멤은 물(흐름)이란 뜻을 가진 이 단어는 “진리를 배워서 따르고 지키고 능수능란하게 가르칠 수 있도록 해 주는 사상의 흐름 정화 및 부흥, 의식, 사역”의 뜻을 갖고 있다. 따라서 아담()의 이름은 “하나님의 생명의 피를 배우기 위해 진리에 매달리며 항상 감사하며 살아가는 존재”가 바로 아담인 것이다. 따라서 내가 첫째 아담이냐? 둘째 아담이냐? 그 어느 중에 소속되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에녹(%Anx] 헤노크)이란 단어도 순종하는 자라고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데 “전수자”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더 자세하게 살펴보면 “진리를 배워서 생명의 울타리를 치고 온전케 된 사역자로 번성하며 진리를 연결하여 확장시켜 올바른 것을 심고 거둘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고 난 뒤 에녹은 간 곳이 없더라는 말씀의 뜻은? 육신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 짐승의 속성이 없어지고 하나님의 속성으로 채워지도록 에녹 속으로 걸어가신 상태로 변화된 차원을 의미하는데 하나님과 하나가 된 연합된 상태가 된 에녹은 육으로 이루어진 상태에서 하나님과 한 몸이 되어버렸다는 뜻이다.
찬송가처럼 “세상과 나는 간데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는 구절과 너무나 흡사한 장면인 내용으로 에녹의 모습은 하나님 뒤에 숨겨져 전혀 보이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 나타나고 있다는 뜻이다. 단순히 에녹이 죽었지만 시체가 없어진 차원만이 아니라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자신의 모습보다 오로지 하나님의 모습만 드러나는 삶을 살았다.
아브람(~r'b.a;)은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주님의 집을 지어 양육된 것을 자기에게 적용하는 존재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아브람의 이름으로 제한시키지 않고 아브라함(~h'r'b.a;)이란 새로운 이름을 주면서 신앙을 부각시켜 나가신다. 하나님의 말씀을 삶 속에서 적용한 것으로 자아를 정복하여 하나님의 사상과 동등하게 그리스도의 사상으로 개방해나가는 존재다.
창세기 12장부터 16장까지 등장했던 아브람의 이름으로는 실수투성이며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어나갈 수 없는 존재였다. 그러나 창세기 17장에 아브라함의 이름으로 개명해 주시고 언약의 표징인 할례와 더불어 아브라함의 사역은 전혀 다른 내용으로 전개되어 나가는 것을 엿볼 수 있다.
야곱(qx'c.yI)은 다른 사람의 발뒤꿈치를 잡고 나온 존재로서(창 25:26) 여기서 발은 인디언들의 발을 구르며 춤을 추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가? 질문했더니 자신들의 영혼은 발에 있어 발을 구르며 춤추어야 영혼과 접촉할 수 있다고 했다. 또한 의학적으로도 제2의 심장이란 의미에도 찾을 수 있지만 천국(basilei,a 바실레이아)이란 단어에서 파생된 단어 중에 발, 걷다, 힘의 기초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시 119:105에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여기서 등은 잠언 20:27 사람의 영혼은 여호와의 등불이요, 말씀과 연관시켜 본다면 우리가 걷고 있는 발은 단순히 육체적인 기관의 일부가 아니라 천국을 향해 있는 귀중한 신체의 일부임을 자각해야 할 것이다.
야곱은 얍복(qBoy:) 강나루에서 천사와 씨름을 한 후에 이스라엘(laer'f.yI)이란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된다. 그 이름의 뜻은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다는 뜻인데 하나님과 싸워서 이긴 결과 얻은 것이 무엇인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패잔병과 같은 초라한 모습에 불과한데 이겨서 그 어느 누가 축하해주는 이도 없는데 기뻐할 내용이 무엇인가?
이스라엘은 신앙인 모두에게 적용되는 이름인데 이스라엘에 사는 사람으로 국한시켜버렸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본래적인 의미는 “하나님을 익히고 배워서 하나님의 사상의 방향으로 올바르게 증명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선택하심 속에서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하나님을 향해 구속되어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며 살아가는 존재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주신 이름은 우리가 과거에 알던 이름의 뜻과 너무나 거리가 멀게 이해하고 있으며 무의식 속에 알고 있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명령의 대상자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질문하면 우리는 그 질문에 의해 다스림을 받아야 하는 존재임을 망각하지 말아야 한다.
이스라엘 초대 왕 사울(lWav')은 하나님께서 질문한 대로 하지 않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여 질문으로 다스릴 수 없는 존재가 되어 하나님은 사울 왕이 존재하는 데도 불구하고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 다윗을 기름 뿔에다 기름을 부어 왕으로 세웠다. 여기서 사울 왕에게는 기름병에 담아서 붓고(삼상 10:1) 다윗에게는 기름 뿔에 담아 붓는 차이점을(삼상 16:1) 하나님께서 명확하게 구분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왜 믿음의 조상들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신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존재가 바뀌고 사역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신약성경을 절반 이상을 기록한 사도 바울은 과거 자신의 이름이 사울이었다. 하나님의 질문으로 다스림을 받을 수 없는 존재였던 그는 거듭난 후 사울에서 바울로 고침을 받고 난 후 하나님의 철저한 지배를 받게 된다.
이것이 육의 속성으로 인해 너무나 큰 존재에서 하나님의 생명과 진리에 의해 육의 속성이 죽어지고 아주 작아진 존재인 사도 바울이 된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름(쉠)이란 하나님의 말씀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시는 것이다.
히브리서 10:9에 “그 첫 것을 폐하심은 둘째 것을 세우려 하심이니라”는 말씀처럼 우리의 첫 존재인 육의 사람을 폐하시고 둘째의 존재 거듭난 영의 존재로 세우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뜻을 발견하고 새로운 이름으로 살아갈 수 있는 영원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간절히 바라는 소망이시며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신앙의 소망이 되어야 할 것이다. 출처/창골산 봉서방 카페 (출처 및 필자 삭제시 복제금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