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승원 에세이】
내 고향 청양 ‘애국지사 유허비’에 얽힌 잊지 못할 사연
― <고향 아저씨>, <청양군청>, <장평면사무소> 담당 공무원에 대한 고마움
윤승원 수필문학인, 전 대전수필문학회장
■ 필자의 말
내 고향 청양군 장평면에는 『애국지사 이세영 선생 유허비(李世永 先生 遺墟碑)』가 세워져 있다. 나는 이 ‘유허비 사진’을 보면 고향의 ‘잊지 못할 세분’이 떠오른다.
▲ 한 분은 애국지사의 행적과 그 가족의 일화에 대해 내게 자상하게 알려준 ‘고향 아저씨’이고, ▲ 또 다른 두 분은 청양군청 공보실 담당 공무원과 장평면사무소에 근무했던 공무원이다.
충청권 일간지 금강일보 논설위원으로 고정 칼럼을 집필하던 시절이었다. 독립운동가 자손인 ‘고향 아저씨’를 만났다.
종친으로서 평소 ‘아저씨(부모와 같은 항렬)’라고 칭해온 어른이다. 가깝게 지냈지만, 그동안 고향 아저씨가 ‘애국지사 자손’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다.
우연히 만나 뵙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아저씨의 어머니에 대한 엄격한 가정교육 에피소드를 듣게 됐다. 그러다가 뜻밖에 ‘애국지사 가족’ 임을 알게 됐다.
마침 일간지 고정 칼럼을 쓰던 시절이라 ‘좋은 글감 하나 얻었다’ 생각하고, 독립운동가 가족의 특별한 일화를 알아보게 됐다.
나는 과거 국가 기관의 정보 분야에서 일했던 사람이다. 퇴직 후 일간지 칼럼을 쓰면서도 철저한 자료 수집이 선행되지 않으면 아무리 좋은 얘깃거리도 글로 쓰지 않았다.
우선 고향에 세워졌다는 애국지사 유허비 ‘사진’이 필요했다. 당시 군청 공보실에서 근무했던 강봉수 씨(현재 청양군청 문화체육과장)에게 부탁했다.
강 과장은 담당 업무에 대한 열정도 대단한 분이지만 고향의 자랑스러운 일을 널리 알리는 ‘출향인의 부탁’이라면 제백사(除百事)하고 성심성의를 다해 도와주는 공무원이었다.
내가 유허비 ‘사진’을 부탁한 지 채 한나절도 안돼 답이 왔다. 어찌 이렇게 빠르게 사진을 구할 수 있었느냐고 물으니, “장평면사무소 공무원이 현장에 직접 가서 사진을 찍어 온 것”이라고 말했다.
고마운 내 고향 면사무소공무원의 이름이 뭐냐고 물으니 ‘윤정환 씨’라고 했다.
아, 감탄이 절로 나왔다.
무더운 7월의 복(伏) 날씨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전거를 타고 그 먼 곳에 가서 사진을 찍어왔을 것을 생각하니, 미안하면서도 고맙기 그지없었다.
▲ 내 고향 청양군 『장평면사무소』 - ‘유서 깊은 문화재의 고장’이라는 문구가 인상 깊다. (사진 출처 = 청양군 홈페이지 ‘장평면사무소’ 캡처)
유허비 사진을 받아보고 나서 이번엔 『청양군지(靑陽郡誌)』를 찾아 ‘애국지사 행적비’를 상세히 살펴보기도 했다.
고향 아저씨의 말씀을 기초로 이처럼 땀이 밴 일련의 과정을 거쳐 ‘애국지사 관련 자료 수집’이 풍부하게 이루어졌다. 현장 공무원이 직접 찍어 보내 준 유허비 사진까지 확보됐으니, 필자로서 참으로 고맙고 기쁜 일이었다.
칼럼이 일간지 지면에 게재되면 고향 친구들에게도 전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 후 나의 인터넷 카페에 올렸던 칼럼 ‘소개 글’은 이렇다.
『내 고향 친구 중에는 장평면 관현리가 고향인 친구들도 많습니다. 고향을 방문하시면 관현리에 세워져 있는 「이세영 선생 유허비(李世永 先生 遺墟碑)」도 눈여겨 봐주시기 바랍니다. 제가 오늘 소개하는 ‘고향 아저씨’의 훌륭한 애국심과 독립운동가 가문으로서의 긍지, 그리고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애국가족의 귀감이 되는 엄격한 가정 교육 방법을 알아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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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6. 10.
윤승원 ‘글감 발굴 추억담’ 記
▲ 충청권 일간지 금강일보 칼럼 『윤승원의 세상풍정』 2010.7.26.
【윤승원의 세상風情 】
고향 아저씨의 남다른 자긍심
- 애국지사 가문의 엄격한 자녀교육 -
윤승원 논설위원
요술 방망이처럼 자판을 두들기기만 하면 원하는 모든 것을 검색할 수 있는 편리한 인터넷 시대에 살고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31권이나 되는 육중한 무게의 『원색세계대백과사전』을 책장에서 밀쳐내지 못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애장서 1호’이다.
◆ 백과사전을 느긋이 넘겨보는 즐거움
박봉의 공직 시절에 거금을 들여 사놓은 물건이라 애지중지 ‘보물 대접’을 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할 때마다, 또는 시간 여유가 있을 때마다 가나다순으로 배열된 백과사전을 느긋이 넘겨보는 즐거움이란 간편하고 빠른 인터넷 ‘자료검색’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희열을 준다.
▲ 인터넷 ‘자료검색’과는 비교할 수 없는, 또 다른 즐거움을 주는 ‘백과사전 찾아보기’
최근 고향의 아저씨 항렬 되는 분을 만나 우연히 남달리 자긍심을 가질만한 가문의 일화를 듣고는 오랜만에 그런 ‘지적 충족감’을 맛보았다.
그 아저씨 외가가 뜻밖에도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사실도 백과사전을 통해 새삼 알았다. 아저씨 모친의 남달리 엄격했던 자녀 교육방법을 들으면서 역시 독립운동가 가문의 기개와 올곧은 삶의 정신은 그냥 나오는 게 아니라는 사실도 느꼈다.
▲ 세계대백과사전에 등재된 애국지사 ‘이세영 선생’에 대한 기록(형광펜 표시 부분)
◆ 집안의 위계(位階)를 중시하는 ‘엄격한 자녀 교육방법’
아들 4형제를 둔 아저씨[윤현성]의 모친[李德順]은 어린 자녀들의 태도와 행실에 문제가 있어 고치려 할 때는 일일이 꾸짖지 않고 장남을 먼저 불러 책망하면서 무궁화 회초리를 들었다고 한다.
생나무 무궁화 회초리는 잘 부러지지 않는 속성도 있거니와 당시 남새밭 울타리용으로도 흔히 쓰였기 때문에 구하기도 용이했다.
그러나 무궁화 회초리는 그런 단순한 의미보다 ‘독립운동가 집안’이라는 어떤 상징성이 더 크게 작용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나라 잃은 백성으로서 무궁화는 ‘나라 사랑의 상징적인 꽃’이 아닌가.
▲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는 ‘무궁화’
큰아들은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꺾어다 드리면서 “제가 동생들을 잘못 지도하여 어머니께 걱정을 드렸으니, 노여움이 풀어지실 때까지 저의 종아리를 쳐주십시오.”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 어머니는 장남의 책임을 엄중히 묻고는 정작 잘못을 한 동생들에 대해서는 더는 말씀이 없으셨다고 한다.
한 집안 형제들의 ‘위계(位階)’를 위해 어머니가 여러 자식에게 사사건건 간섭하고 잔소리한 것이 아니라 장남을 통해서 기강을 반듯하게 세워나갔고, 이러한 ‘장남의 권위’는 아버지 다음으로 엄격한 것이었다.
어머니한테 매를 맞은 큰형은 여러 동생을 무릎 꿇려 놓고 훈계하고는 어머니한테 맞은 양만큼 감정적으로 회초리를 휘두른 것이 아니라 전혀 아프지 않게 ‘때리는 시늉’만 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동생들에 대한 형님의 속 깊은 애정이 이러하니, 동생들은 더욱 형님께 미안했고, 장남의 권위와 존경심은 아버지 못지않았던 것이다.
◆ ‘독립운동가 집안’의 남다른 삶의 태도와 생활철학
어머니의 이 같은 슬기롭고 지혜로운 자녀 교육방법은 오늘날에도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해 준다. 또한, 어머니는 평소 자녀들에게 “남을 존중해라. 내가 배울 점 없는 사람은 없다.”라고 가르쳤다고 한다. ‘겸손’을 강조한 것이다.
부모로부터 이 같은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은 자손들은 모두가 예의 바르고, 성실하며, 남에게 베푸는 인정도 따뜻하여 집안 모두 평탄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을 본다. 후대에까지 복을 받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의 고향 아저씨[윤현성]의 외증조부는 어떤 인물인가.
함자는 이세영(李世永, 1869~1938). 충남 청양군 관현리 출신으로 한말의 의병장, 독립운동가로서 을미사변 후 의병을 일으켰다. 한교공회(韓僑公會)를 조직, 일제 기관 습격, 친일파 처단 등 항일투쟁을 했다. 주만통군부(駐滿統軍府) 사령관, 임시정부 참모부 차장 등을 지냈다.
1910년대 만주지역에서 조직된 대표적인 독립군 양성기관인 ‘신흥무관학교 교장’을 지냈다. 훗날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 되었으며, 고향에는 ‘이세영 선생 절의비(李世永 先生 節義碑)’가 세워져 있다.
▲ 애국지사 이세영 선생 유허비 : 李世永 先生 節義碑의 ‘비문은 광복회에서 지었고, 비(碑)는 청양군에서 건립하였다’고 ‘청양군지(靑陽郡誌)’(1995발행, 1166쪽 ‘애국지사 행적비’ 편)에 적혀 있다.
※ 본 사진은 필자가 일간지 칼럼을 쓰면서 청양군청 공보실에 이세영 선생 유허비 사진을 좀 구할 수 없겠느냐고 했더니, 군청 공보실 관계자는 장평면사무소에 부탁하여 사진을 직접 찍어 보내 주었다. 현지에 직접 출장을 가서 유허비 전·후 좌우 형체 등 다각도의 사진을 찍어 보내준 장평면사무소 공무원 윤정환 씨의 성심성의에 거듭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2010. 7. 22)
▲ 『靑陽郡誌』의 애국지사 행적기록 - 『세계대백과사전』과 인터넷 지식창 자료검색을 한 뒤, 항일행적기록을 좀 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보기 위해 ‘靑陽郡誌’(1995년 발행, 청양군) 1166쪽 「애국지사 행적비」 편을 찾아보았다. 군지(郡誌)에 기록된 행적은 이러하다.
※ 李世永 先生 節義碑 : 이세영(1869~1938)은 장평면 관현리에서 출생하였다. 의병을 일으키어 맹활약하였다. 1911년 만주로 망명하여 교포교육에 종사하고 항일투쟁하다가 1938년에 중국 사천성에서 별세하였다. 1978년에 이세영 선생 절의비를 고향인 冠峴里에 건립하였다. 비문은 광복회에서 撰(찬)하고 청양군수 朴贊武가 건립하였다.
◆ 자랑스러운 ‘선조 함자 찾아보기’와 그 정신을 공부하는 것도 뜻있는 일
그동안 이곳을 수없이 지나치면서도 유허비에 새겨져 있는 독립운동가의 애국정신과 삶의 궤적을 눈여겨보지 못한 것도 불찰이다.
비록 작은 시골길에 서 있는 비석이지만 거기 담겨있는 ‘나라 사랑 정신’은 그 어떤 명문가의 훌륭한 가르침과 전통 못지않아 동향인(同鄕人)으로서 자긍심이 생긴다.
곧 8.15 광복절이 다가온다. 방학을 맞아 자녀들에게 어떤 귀중한 체험과 인상 깊은 추억을 만들어 줄 것인가 고민한다면, 선조들의 숨어 있는 비문을 찾아 그 정신을 공부해 보는 것도 뜻있는 일이다. 역사에 묻혀 잘 알려지지 않은 그분들의 생시 일화를 알아보는 것도 흥미롭고 의미 있는 일이다.
이러한 ‘자랑스러운 선조들의 함자(銜字) 찾아보기’는 더 나아가 자라는 청소년들에게 우리 ‘충청인의 정신’이 가정에서부터 어떻게 전통적으로 계승 돼왔는지 새롭게 공부하고, 창조적으로 발전시키는 계기가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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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올바른 역사를 사랑하는 모임’[올사모] 카페에서
◆ 낙암 정구복(역사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 2023.6.11. 09:28
고향이란 듣고 또 들어도 언제나 항상 정다운 말입니다. 그런데 고향이 점점 멀어져 가지 않으려면 고향을 지켜주는 분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 분이 없다면 고향은 타향이 됩니다. 고향을 연속되는 고향으로 만들려고 장천 윤승원 선생이 무던히 애쓰시는 모습이 더욱 숭고해 보입니다. 고향에 관한 이야기, 조국 광복을 위해 헌신한 분이 계시다는 것만으로도 자긍심을 가집니다. 우리의 관계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것이 바로 인연이라는 것입니다. 인연은 고리 고리를 찾아 풀이하면 실타래처럼 길고 길 것입니다.
장천 윤승원 선생님! 고향의 인연을 살리려고 애쓰시는 노고에 대하여 더욱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정구복)
▲ 답글 / 윤승원(필자)
고향 아저씨(윤현성)와 함께 독립기념관도 다녀왔습니다. (이 글을 쓰기 전에...) 고향 아저씨가 운전하는 승용차를 타고 독립기념관에 가서 우리나라 애국지사들이 어떤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려고 노력했는지 살피고 왔습니다. 애국지사 가족이신 <아저씨의 어머니> ‘가정 교육’이 참으로 엄격하면서도 배울 점이 많다고 느꼈습니다. 일간지 칼럼에 한 단면을 소개하기엔 부족합니다. 유허비 관련 사진 자료를 협조해준 청양군청 관계 공무원과 장평면사무소 공무원의 따뜻한 성의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존경하는 고향 선배님이신 낙암 교수님의 따뜻한 격려 말씀을 들으니 졸고를 더 많은 출향인과 나누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윤승원 올림)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