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섬을 찾는 것은
홍종해
2005년 「시와산문」 등단. 에세이집 「물푸레골 연정」, 시집 「마음에 쓰는 편지」.
겨울 동안 남해의 이곳저곳 외진 섬을 돌던 발걸음을 봄이 문턱에 들어서자 서해의 낙도로 돌린다.
인천연안부두를 떠난 여객선은 자월도, 승봉도를 거쳐 대이작도로 들어선다. 대이작도, 그 이름이 좀 그렇다. 대이작도는 본래 그 이름이 대이적도(大伊賊島)였는데, 후에 지금의 대이작도(大伊作島)로 부르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 일본의 횡포를 피해 이 섬에 피난 온 사람들이 임진왜란이 끝난 후에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해적질을 하며 이 섬에 숨어 살았다 하여 대이적도라 불리었다고 한다.
선착장에 내려서자 <섬마을 선생님> 노래비가 눈길을 끈다. 1967년 김기덕 감독이 연출한 작품으로, 그 당시 크게 유행하던 이미자의 노래 <섬마을 선생님>을 영화화 한 그 촬영지요 배경이 이곳이다. 해안 길을 따라 잠시 걷다 보니 이작분교가 나온다. 교사 2명에 학생 5명이라고 한다. 섬마다 학생이 없어 폐교되고 있는데 이작분교는 언제까지 계속될런지.
부아산으로 오르다 장승공원을 만난다. 지역의 경계나 이정표, 마을의 수호신으로 마을의 안녕을 상징하는 테마공원으로 조성되었다. 부아각시, 송이서방 등 장승 이름이 재미있다.
큰풀안해변에서 대이작도가 바다 속에 숨겨 놓고 가끔씩 열어보는 비밀스런 보물을 엿본다. 풀등이다. 썰물 때면 나타났다가 밀물 들면 바다 속으로 사라지는 모래섬으로, 섬사람들은 풀등 혹은 풀치라고 부른다. 바다의 신기루다. 나는 지금 큰풀안해변에서 저만치 바다 위에 그 모습을 드러낸 풀등을 보고 있다. 길게 뻗어 있는 하얀 모래 언덕, 그 모래밭을 걷고 싶은데 건너갈 뱃길이 없어 그저 바라만 보고 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이윽고 다시 그 모습을 물속으로 감출 때에야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린다.
내친걸음에 <섬마을 선생>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계남분교가 있는 계남마을로 향한다. 선착장에서 그곳까지는 십리길로, 산을 넘어야 하는 고갯길이다. 섬에서 말하는 거리의 기준은 무엇일까? 길을 물으면 ‘한참길’이라고 하는데, 이제는 거의 다 왔으려니 하고 다시 물어보면 아직도 한참이라고 한다. 그 ‘한참’이란 거리는 대체 얼마를 두고 하는 말일까? 가풀막진 길이 이어지고 있다.
낙도에 부임한 총각 선생님이 몸담았던 계남분교가 있는 계남마을은 참 아름답고 아늑하다. 한가롭다. 그러나 섬 처녀를 울리던 총각 선생님도 떠나고 순정을 바쳐 사랑하던 섬 처녀도 떠나고 아이들마저 떠난 섬마을엔 텅 빈 학교 건물만이 쓸쓸하게 서 있다. 지금은 모두들 어디서 어떤 모습으로 살고 있을까? 그때 계남분교의 학생이던 어린이들이 어른이 되어 지금도 대이작도에 살고 있다.
김정관 씨(63세)는 그때를 회상한다.
“어릴 때 일이라 아른아른한데 그때 내가 3학년이고 학생이 모두 17명이었습니다.”
선착장이 있는 언덕에는 섬마을 처녀 문희가 선생님을 싣고 떠나는 배를 바라보며 소나무에 기대어 눈물짓던 애절한 모습을 느낄 수 있는 소나무 세 그루가 서 있다.
봄날이 짧아 해가 설핏해진다. 소이작도로 떠나는 마지막 배에 오른다. 소이작도를 둘러보고 그곳에서 하룻밤 쉬어 갈 예정이다. 대이작도와 소이작도는 겨우 5분 거리, 서로 바라보며 마주 앉아 천 년이다. 하루 세 번 오가는 뱃길이 있다. 대합실에 들어서는 낯선 나그네에게 매표원이 말을 걸어온다.
“어떻게 오셨어요?”
“섬을 둘러보고 쉬었다 내일 떠나려고요.”
“잘못 오셨어요. 민박집들이 모두 함께 뭍으로 나가고 쉴 곳이 없어요. 곧 들어오는 배편으로 승봉도에 가서 쉬시고 내일 떠나세요.”
생각할 여지가 없다. 그래도 노숙하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 여기며 서둘러 선착장으로 발길을 돌린다.
섬에는 길에 사람이 없다. 그래서 섬을 걷노라면 언제나 나 홀로이다. 길을 물어보고 싶어도 사람이 없다. 조금은 외롭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그래서 더욱 섬을 걷는지도 모른다. 여느 섬처럼 승봉도 또한 그렇다. 아늑한 섬의 여유로움과 바닷가의 낭만이 그렇다.
해안산책도로를 따라 걷는다. 한편에는 해송들이 몸을 굽혀 바다로 향하고 또 한편에는 검은색 기괴한 바위들로 장관을 이루고 있는 긴 산책로를 걷는다. 조용히 밀려왔다 돌아가는 파도, 부는 바람이 삽상하다. 바다 위에 점점이 떠 있는 작은 섬들, 가까운 듯 먼 것이 바닷길이요 섬 간의 거리이다.
해송이 우거진 수림 속으로 들어선다. 숲속의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노라면 어느새 몸도 마음도 날아갈 듯 가벼워진다. 피로가 싹 가신다. 이 맑은 공기를 마시며 살고 있는 섬사람들이 부럽다.
철 아닌 때, 사람의 발걸음이 멈춘 텅 빈 이일레해수욕장의 모래사장을 걷는다. 눈 내리는 겨울, 아무도 걷지 않은 눈밭을 뽀드득뽀드득 발밑에 일어나는 내 발자국 소리를 들으면서 마냥 걸었던 그 시절처럼 하얀 모래밭에 내 발자국을 찍는다. 사람들이 찾아드는 여름철까지는 이 발자국이 그대로 남아 있겠지. 저 멀리 화물선 한 척이 떠가고 있다. 어디서 떠나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쉬임 없이 파도는 밀려왔다 돌아가는데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수평선이 아스라하다.
모래밭에 누워 본다. 참 평안하다.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빈 섬, 텅 빈 해수욕장의 넓고 고운 이 모래밭, 이 해변 모두가 나를 기다렸다는 듯 이렇게 정겹게 안겨오니 내 무슨 말 더 하랴. 나는 지금 세상에서 가장 넉넉하고 행복한 사람인 것을…
섬의 민박집들이 손님 맞을 준비에 바쁘다. 민박집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사람들이 이 섬을 찾아들 때면 나는 섬을 향한 발길을 멈출 것이다. 사람들에게 시달려 섬이 몸살을 앓을 것이 안쓰럽다. 언제나 건강하게 잘 있었으면 좋겠다. 변하는 세태 속에서도 섬만이 지닌 독특한 아름다움이 훼손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 후한 인심도. 어제도 섬을 걷다 한나절이 넘었는데 음식 먹을 곳이 없어 가방에 준비한 컵라면에 부을 물을 부탁하려고 어느 집에 들렀는데, 끓인 물과 함께 김치와 밥 한 공기, 그리고 고구마 몇 개를 안겨 주던 고운 인정이 가슴 뭉클한 감동으로 다가와 나의 섬 사랑을 더하게 한다.
이제 찾아갈 다음 섬은 또 어떤 모습으로 내게 다가올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