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5월 26일 저녁 MBC 보도국에서 일하던 김 모 작가는 상급자로부터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위에서 개편을 대대적으로 하라는 지시가 내려졌고, 코너를 개편해야 해서 한 달 후인 6월 26일까지만 근무를 하라는 통보였다. 같은 날 같은 프로그램에서 일하던 이 모 작가도 같은 통보를 받았다.
두 작가는 2011년 서로 다른 시기에 MBC 보도국의 채용 공고를 보고 지원해 입사했다. 이 작가는 MBC의 아침 뉴스인 <뉴스투데이>에서 외신을 소개하는 코너인 <이 시각 세계>를 맡았다. 아침 6시에 방송되는 생방송 뉴스이다 보니 늦어도 새벽 3시에서 3시 30분 사이엔 출근을 해야 했다. 정규직 PD와 협의해 그날 방송될 외신 아이템을 선정한 뒤 다시 부장, 부국장에게 보고하고 MBC 기사 입력 시스템에 접속해 원고를 작성했다. 작가가 작성한 원고를 토대로 편집자가 영상을 편집하고 생방송 스튜디오에서 리포터가 원고를 읽었다. 이 작가가 이 코너를 담당하기 전까지는 국제부 기자들이 담당했던 업무였다. 업무 과정에서 MBC 정규직들의 촘촘한 관리 감독이 있었다는 얘기다. 채용 당시에는 외신을 보고 한글 기사 원고를 작성하는 필기시험을 치르고, 4명의 심사위원으로부터 면접도 치렀다. <뉴스투데이>에서 <아침 신문 보기> 코너를 담당한 김 작가의 업무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MBC의 아침 뉴스인 <뉴스투데이>에서 지난 6월까지 근무한 이 모 작가(사진 왼쪽)와 김 모 작가.
출근길 반파 사고에도, 부친상에도 출근 먼저
응급한 일이 생겨도 두 작가가 먼저 챙긴 건 일이었다. 이 작가는 2019년 5월 새벽 출근길에 차량이 빗길에 미끄러져 차량이 반파되는 사고를 당했다. 지나가는 다른 차량 운전자가 “운전자가 죽었을지도 모르겠다”며 119에 신고해 경찰차와 소방차가 출동했다. 그런데 이 작가가 향한 곳은 병원이 아니라 MBC였다. 이 작가는 “찰과상을 심하게 입었는데 나 때문에 방송이 피해를 입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어떻게든 일을 해야 된다고 먼저 생각했던 것 같다”고 말했다.
김 작가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상황에서도 회사에 출근했다. 김 작가는 “일을 누가 대신해줄 사람이 없으니까 택시를 타고 출근을 했다”며 “일을 다 하고 퇴근할 때 부국장에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고 말을 하고 다시 병원으로 갔다”고 말했다.
그런데 10년 가까이 30대 열정을 다 바친 직장에서 되돌아온 것은 전화 해고 통보였다. 김 작가는 해고 이유가 코너가 폐지되기 때문이라고 통보받았다. 김 작가는 5월 26일 전화로 해고 통보를 받으면서 상급자로부터 “아침 신문 보기 코너는 폐지를 하고 좀 다른 형식으로 바꾸기로 결정했다”고 들었다.
코너 폐지한다더니... 해고 일주일 앞두고 인수인계 지시
개편 후 <아침 신문 보기>는 정말 폐지됐을까. 지난해 6월 26일 개편 전 마지막 방송과 6월 29일 개편 후 방송을 비교한 결과, <아침 신문 보기>라는 코너 이름이 <뉴스 열어보기>로 바뀌고 조간신문에 인터넷 뉴스가 추가됐다는 것 말고는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 보였다. 이 작가가 맡았던 <이 시각 세계>는 타이틀 화면만 바뀌었을 뿐 코너 이름까지 그대로였다.
2020년 6월 26일 <뉴스투데이>의 개편 전 <이 시각 세계> 타이틀과 6월 29일 개편 후 타이틀 화면.
두 작가는 해고 일주일을 앞두고서야 자신들이 맡던 코너가 폐지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상급자가 갑자기 해당 코너에 대한 인수인계를 지시했기 때문이다. 김 작가는 “없어진다고 했던 코너의 인수 인계를 그만두는 주에 갑자기 하라고 했다”며 “사전에 얘기한 것도 아니고 새벽에 출근을 했는데 ‘이따가 후임자가 올테니 인수인계를 하라’고 통고했다”고 말했다. 이 작가는 “회사가 매년 적자 때문에 힘들어하고 있었기 때문에 비정규직을 정리하는 수순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경력이 적은 작가를 내 자리에 앉히는 걸 보면서 굳이 개편을 하려는 취지가 뭔지 많은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렇게 두 작가는 10년 가까이 근무한 MBC 보도국에서 해고되는 진짜 이유가 뭔지도 모른 채 씁쓸하게 마지막 근무를 해야 했다.
심지어 두 작가는 계약기간이 6개월이나 남아 있었다. 프리랜서 작가들의 경우 연초 1년 단위로 프리랜서 업무 위임 계약서를 작성했다. 계약기간이 2020년 1월부터 12월까지로 돼 있었기 때문에 계약기간이 6개월이나 남았지만 무용지물이었다. MBC가 적용한 조항은 프리랜서 업무 위임 계약서에 명시해둔 ‘민법 689조’였다. 이 조항에 따르면 위임계약은 각 당사자가 언제든지 해지할 수 있다. MBC 작가 사건을 대리한 김유경 공인노무사는 “프리랜서 위임 계약서라는 것은 사용자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는 부분이고, 서명을 강요받는 입장에서는 거부할 수가 없다”며 “이 조항이 부당하니 고쳐달라고 요구할 수 있는 프리랜서 작가는 아무도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두 작가 “지휘감독 받았다” vs MBC “작가가 자유롭게 대본 작성”
두 작가는 지난해 8월과 9월 각각 서울지방노동위원회에 부당 해고 구제신청을 제기했다.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 구제신청을 한 사실이 알려지기만 해도 좁은 방송계에서 다시 작가로 일하기가 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작가는 “10년 동안 지시받은 상황이 명확하기 때문에 지노위에 가져가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며 “을의 입장해서 일을 해야 하는 다른 작가들이 또 부당한 일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지노위에 가게 됐다”고 말했다.
지노위 심문 과정에서 MBC는 두 작가가 대본을 자유롭게 작성했기 때문에 업무 수행 과정에서 지휘감독이 있었다고 보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반면 두 작가는 아이템 선정부터 원고 작성까지 데스크의 지휘감독을 받았다고 맞섰다. 지노위는 김 작가의 경우에 대해서는 화해를 권고했다. 그러자 MBC는 △근로기준법상 근로자가 아님을 인정한다 △합의 이후 민형사나 행정상 이의 제기를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전제로 합의금 300만 원을 제시했다. 김 작가는 화해를 거부했다.
두 작가는 지노위로부터 부당 해고 여부를 아예 판단조차 받지 못했다. 지노위가 지난해 10월과 11월, 두 사건을 각하 처리했기 때문이다. 지노위에서는 노동자로 인정되는 당사자에 대해서만 부당 해고 여부를 판단하는데 두 작가에 대해서는 노동자성이 인정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서울지노위가 이들의 노동자성을 부인하는 근거로 제시한 내용은 △일반 직원 채용공고로 보기 어려운 점 △프리랜서 업무 위임 계약서 작성 △인사규정, 취업규칙을 적용받지 않은 점 △업무에 대한 자율권이 보장된 점 △근로소득세가 아닌 사업소득세를 납부한 점 △프로그램 단가로 보수를 책정한 점 등이었다.
김 작가는 상급자의 지휘감독을 입증하는 여러 개의 녹취 파일도 증거로 제출했지만 노동자성을 입증하는 증거로 채택되지는 못했다. 두 작가 측은 지노위의 판정이 그동안 법원이 인정해온 노동자의 요건을 후퇴시킨 것이라는 입장이다. 이 작가의 사건을 대리한 김유경 공인노무사는 “부차적인 요소를 주요 판단 근거로 삼아 노동자성을 부정했다는 것은 법원 판례보다 굉장히 후퇴한 것”이라며 “계약서도 형식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실제로 일한 내용을 보겠다는 것이 대법원의 일관된 판례”라고 말했다. 실제 최근 법원은 지노위가 두 작가의 노동자성을 부정하는 데 근거로 쓴 사업소득세 납부 여부, 인사규정 미적용, 급여의 형식 등은 사용자가 우월적 지위를 이용해 임의로 정할 여지가 크다는 이유로 근로관계의 실질을 따지는 데 부차적 요소라고 판결하는 추세다.
보도국 작가 10명 중 7명 “업무 지시 내용 변경할 권한 없어”
똑같이 방송작가라는 이름으로 불리지만, 어느 프로그램을 위해 일하느냐에 따라 방송작가들의 업무 형태는 천차만별이다.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 작가와 시사 프로그램 작가의 업무 형태는 전혀 다르다. 시사 프로그램 작가 중에서도 PD들과 함께 제작국에서 일하는 작가와 기자들과 함께 보도국에서 일하는 작가의 업무 형태가 또 다르다. 두 작가처럼 보도국에서 일하는 시사 작가들은 프로그램 특성상 여러 방송작가 군에서도 상시 지속적으로 일하는 경우가 가장 많다.
최근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방송작가유니온)가 전국의 지상파, 종편 등의 보도국에서 일하는 보도국 작가들을 상대로 실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123명) 10명 중 8명은 일주일에 다섯 번 이상을 출근한다고 답했다. 48%는 ‘매우 일정한 시간’에, 31.7%는 ‘다소 일정한 시간에 출퇴근한다’고 답했다. 주 15시간 이상 40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작가는 47.2%, 주 40시간 이상 주 52시간 미만으로 일하는 작가는 45.2%였다. 특히 10명 중 7명(72.4%)은 업무 지시자의 지시 내용을 본인이 변경해 수행할 권한이 없다고 답했다. 보도국 작가들이 기자나 뉴스 PD 등 업무 지시자의 지휘 감독 아래 업무를 수행하는 점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지난해 12월 10일 예술인 고용보험이 시행되면서 방송작가 직군도 예술인 범주에 포함돼 고용보험을 적용받게 됐다. 그런데 보도국 작가는 제외됐다. “보도는 예술의 범주로 볼 수 없다”는 이유였다. 결국 보도국 작가는 지노위에서 노동자로 인정도 못 받고 예술인으로도 인정이 안 돼 고용보험을 적용받지 못하는 사각지대에 놓였다. 김순미 언론노조 방송작가지부 사무국장은 “보도국 작가들은 근로계약을 하고 4대 보험을 적용받아야 하는 게 맞다”며 “문체부나 고용노동부, 방통위에서 협의를 해서 방향을 정해야 하는데 아무도 책임지려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방송작가 처우 문제는 지난해 국정감사에서도 뜨거운 이슈였다. 국회 과학기술정보방송통신위원회에서는 전혜숙 의원이 방송문화진흥회 국감에서 MBC 작가 해고 문제를 다뤘고, 국회 환경노동위원회에서는 이수진(비례) 의원이 고용노동부 국감에서 프리랜서라는 이유로 근로기준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문제를 지적했다. 이수진 의원은 국감 당시 공공부문 방송사들을 상대로 인력 현황 자료를 제출하라고 요구했는데, 가장 큰 공영방송사인 KBS와 서울 MBC는 프리랜서 현황 자료를 제출하지 않았다. KBS는 “파악하기 어렵다”, 서울 MBC는 “영업 비밀”이라는 이유를 댄 것으로 전해졌다. 이 의원은 “방송사가 직원들이 어떤 형태로 근무하고 있는지 실태조사를 안한다는 것 자체가 직무유기”라며 “영업 비밀이라는 핑계를 댄다는 것도 이해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이 의원은 “방송국 안에서 관행처럼 쓰다가 버리는 소모품처럼 노동자를 대우하는 문화는 사라져야 한다”며 “상시 지속적 업무에 대해서는 기준을 만들고, 보도 작가들에 대해서는 노동부에서 노동자성을 인정하고 노동법 테두리 안에 넣도록 방법을 찾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말했다.
MBC “자유로운 해지권 보장은 작가를 위해서도 필요”
MBC는 두 작가에게 계약 해지를 통보한 이유에 대해 “프로그램의 개편에는 코너의 신설 및 폐지 등 형식이나 내용상의 변경뿐만 아니라 방송사의 개편 방침에 따라 진행자, 작가, 연출 등이 교체되는 인적 개편도 포함된다”며 “이는 시청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는 콘텐츠를 계속해서 생산해야 하는 방송 산업의 특성상 불가피하며 어느 방송사나 마찬가질일 것”이라고 답했다.
상암 MBC
계약 해지를 결정한 주체에 대해서는 “프로그램 개편과 관련한 내부 규정에 따라 이루어졌다”고만 답했다.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데도 계약 해지를 한 부분에 대해서는 “자유로운 해지권의 보장은 방송사만이 아니라 작가를 위해서도 필요하다”며 “계약기간이 정해져 있는데 작가의 개인적인 사정으로 계약을 중도에 해지해야 하는 경우에 해지권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작가는 업무 수행이 강제되거나 방송사에 손해배상을 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두 작가는 최근 중앙노동위원회에 재심을 신청했다. 중노위는 두 사건을 병합해 심사할 예정이다. 방송사의 보도국 작가가 부당 해고 여부를 다투는 사건은 이번이 처음이어서, 향후 어떤 결과가 나올지 방송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