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개토대왕 침공으로 미추홀을 떠난 비류백제계 유민들은 현 아산시 인주면 밀두리에 정착 했다가 일부는 천안 수신면으로, 일부는 공주 의당면 수촌리(미치홀)로 옮겨 왔다.
이때 일부 세력은 일본으로 건너 갔고 유민의 후손중에서 일본의 15대 응신천황이 나왔다.
이때 부터 일본은 야마토왜의 국가 형태를 갖추게된다
일본은 신무천황부터 14대 천황과 남장을 하고 삼한을 정복 하였다는 신공황후까지의 740년 역사는 허구이다.
비류 백제계 응신천황 이후 무령왕의 동생 26대 계체천황의 후손 천지천황(38대)계에서 40대 천무천황계로 황권이 넘어 갔다가 49대 광인천황때 다시 천지천황의 후손이 황위에 오르니 광인천황의 부인은 무령왕의 아들 순타태자의 10대 후손녀이고 그의 아들 환무천황이 50대 황위에 올라 현제126대 나루히토 천황까지 이어져오고있으며 125대 아키히토 천황이 일본 천황가의 뿌리는 백제 후손이라고 2001년에 공식 발표 하였던 것이다.
26대 게이타이(계체)천황이후 부터가 확실한 실존 인물이며 그 이전은 부 정확한 계보이다.
사마 나이 사십이 되서야 백제 25대 왕위에 올랐는데 무령왕7년에는 친히 일본에 건너가 극악 무도한 일본 25대 무열천황을 제압하여 폐하고 이부동생 계체천황을 26대 황제에 봉하고 돌아오고, 23년간 재위 한후 63세에 죽었다.
사마의 아들 성왕이 26대 왕에 올라 15년 후인 538년에는 사비도성(부여)으로 천도 하면서 국호를 남부여라 하고 부여씨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되었거나 왕에 버금가는 세력을 구축한 가야,백제,신라인은 매우많다.
1, 서기103년에 가야 왕자 일곱명이 일본 시치구마에 진출하여 각자 왕이 되었고,
2, 서기157년에는 신라계 연오랑과 세오녀가 바위배를 타고 일본 나라에 진출하여 왕이 되었으며,
ㅡ이소노카미신궁에 보관중인 칠지도 ㅡ
3, 서기372년 근초고왕(또는서기408년진지왕)이 일본의 천황에게 칠지도를 하사하여 통치권을 인정 해주었으며, 아직기와 말 두필을 보내어 말기르는법과 왕자를 교육 시키게 하자 오진천황이 현자를 보내달라고 요청하여 왕인박사를 보내어 천자문과 논어를 전하고 도자기및 기와등의 제조 기술를 알려 주었으며 오늘날의 일본 문자인 가나를 만들어 주었고 아스카 문화의 시초가 되었다.
왕인박사에 대한 기록은 일본서기에는 있고 삼국유사나 삼국사기에는 없다..
4, 비류백제의 유민중에서 15대 응신천황이 되었고
5, 서기461년 개로왕의 동생 곤지가 후쿠오카에 진출하여 그의 아들이 26대 계체천황이 되었다.
6, 서기576년 백제26대 성왕의 셋째 아들 임성태자는 거북이등을 타고 건너가 구마모토에 자리를 잡고 막강한 제철 사업으로 후손이 막부 쇼군을 누르고 천황의 세력을 능가하는 오우치가의 시조가 되었다.
일본은 나,당 연합군에 멸망한 백제의 부여풍과 흑치상지가 항전 중인 것을 돕기위해 27,000명의 수군을 보내어 백강에서 나당 연합군과 전투를 벌였으나 전멸 하였고, 부여풍은 흑치상지의 배반으로 패하여 고구려로 달아났다.
일본은 나.당연합군의 보복 공격에 대비하여 일본내의 세력을 통일하게 되었고 서기670년 부터 일본이라는 국호를 사용하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