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 [중랑구 봉화산&노원구 (태릉&강릉)] 지도
태릉(泰陵)
사적 제201호
태릉은 제11대 중종의 제2계비 문정왕후(1501~1565) 윤 씨의 능으로 봉분 1기만 있는 단릉이다. 문정왕후는 중종과 인종, 명종 3대에 걸쳐 왕비와 대비로 있으면서 정권에 개입하는 등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조선을 회오리바람 속으로 몰아넣은 인물로 알려진다.
문정왕후에 관한 일화는 워낙 많지만 을사사화와 연계된 정난정의 일화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다. 그녀의 아버지 정윤겸은 부총관을 지냈지만 어머니는 관비 출신이므로 위계가 철저한 조선에서 그녀가 일어설 기회는 거의 없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난정은 이 기회를 반전하기 위해 우선 기생이 되었다. 고관과 자주 어울릴 수 있는 기생은 격이 낮은 여자가 신분 상승을 꾀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그녀는 바람대로 문정왕후의 동생인 소윤 윤원형의 첩이 되었다. 마침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고 모후인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게 되자 정계는 모두 윤원형 쪽으로 쏠린다.
곧바로 윤원형은 명종과 문정왕후에게 인종의 척족 윤임이 그의 조카 봉성군에게 왕위를 주려 한다고 무고한다. 이는 인종의 외척인 대윤과 명종의 외척인 소윤의 권력 다툼으로, 결국 대윤의 우두머리인 윤임 등이 반역 음모죄로 유배되었다가 사사되고 만다. 이를 '을사사화'라고 한다.
이 기회를 이용해 정난정은 윤원형의 정실 김 씨를 몰아낸 다음 적처1) 가 되고, 윤원형의 권세를 배경으로 상권을 장악해 전매·모리 행위로 많은 부를 축적한다. 그럼에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어 궁궐을 마음대로 출입했고, 1553년에는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이 되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정난정에 대한 사가들의 평은 비난으로 꽉 차 있지만 그녀는 윤원형을 움직여 적자와 서자의 신분 차별을 폐지하고 서자도 벼슬길에 나설 수 있도록 했다. 당시로서는 신분 제도의 근간을 흔드는 획기적인 정책으로 좌절한 사람들에게 커다란 호응을 받았음은 물론이다.
문정왕후는 당의 측천무후, 청의 서태후와 비교될 정도로 억척같은 집념으로 아들을 왕으로 만든 여인이다. 그러나 명종이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르자 8년 동안 국정을 지휘하며 막강한 권력을 행사해, 문정왕후의 가장 큰 피해자로 그의 아들인 명종이 손꼽히기도 한다. 왕이 된 아들에게 "내가 아니면 어떻게 이 자리를 소유할 수 있었겠느냐?"라며 호통을 치고, 왕이 자신의 말을 듣지 않자 회초리까지 들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명종을 눈물로 왕위를 지킨 왕으로 기억한다.
하지만 그녀의 월권은 적어도 국왕의 권위를 누르거나 자신의 욕심만을 위한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수렴청정을 끝내며 문정왕후는 다음과 같은 말을 남긴다.
"우리나라가 불행하게도 두 대왕이 연이어 사망했으므로, 주상이 어린 나이에 보위를 이어 국정을 맡길 수 없었기 때문에 내가 부득이 섭정을 하기는 했으나, 미안한 마음을 일찍이 하루도 잊지 못했다. 더구나 재변이 계속 이어지고 여러 변고가 함께 발생함이 지금과 같은 적이 없었다. 나는 항상 나의 부덕한 소치 때문이 아닌가 해 주야로 근심하고 염려했으며 2~3년 이래로는 항상 성상께 귀정(歸政)하고자 했으나, 아직 주상의 학문이 성취되지 못해 모든 기무를 홀로 결단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굳이 사양하는 까닭에 머뭇거리다가 지금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문정왕후는 남편인 중종 옆에 묻히고 싶었는지 원래 장경왕후의 희릉(고양시 서삼릉 내) 우측에 있던 중종의 능을 정릉(현재의 강남구 삼성동) 터로 옮겨놓고, 자신도 그 옆에 묻힐 계획을 세웠다. 하지만 정릉 주위의 지대가 낮아 장마철에 물이 들어 자주 침수되자, 명종이 장마철에 물이 들어온다는 명분을 대고 태릉에 안장해 결국 그녀의 뜻은 무산된다.
태릉은 조선 왕릉 가운데 능침과 정자각의 거리가 가장 길며, 기를 모아 뭉치게 한다는 능침 앞 강(岡)을 약하게 한 것이 특이하다. 상설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는데 봉분 아래에는 구름과 십이지 신을 의미하는 병풍석과 난간석을 둘렀다. 병풍석 위의 만석 중앙에는 12간지를 문자로 새겨놓았다. 12간지가 문자로 쓰이기 시작한 이유는 병풍석을 없애고 신상을 대체하기 위한 방편이었는데, 여기에는 신상과 문자가 함께 새겨져 있어 주목할 만하다.
문·무인석은 목이 짧고 얼굴이 상대적으로 매우 큰 형태다. 문인석은 높이가 260센티미터로 사람의 실제 키보다 크며 과거 급제자가 홍패를 받을 때 착용하는 복두 차림이다. 두 손으로는 홀을 공손히 맞잡고 있는데, 좌측 문인석은 오른손으로 왼손을 감싸고 있는 반면 우측의 문인석은 반대 자세다. 일반적으로 좌우 문인석이 홀을 잡는 방법이 동일한데 이곳은 예외다.
무인석은 문인석과 비슷한 크기이지만 얼굴이 크고 방울눈에 유난히 큰 코와 우락부락한 표정이 특징이다. 문·무인석 모두 얼굴과 몸통의 비례가 1대 4 정도로 머리 부분이 거대하다. 학자들이 이들 석상에 큰 점수를 주지 않는 이유는 얼굴 부분을 제외하고 입체감이 결여되어 사각기둥이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정자각은 6·25전쟁 시 파손되어 석축과 초석만 남아 있던 것을 1994년에 복원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정전과 그 앞의 배전으로 이루어져 있다.
한편 태릉에서는 비교적 원형에 가까운 금천교를 만날 수 있으며 태릉의 소나무 숲은 신림(神林)으로 불릴 만큼 울창해 도시에서 얻을 수 없는 풍취를 느끼게 한다.
임진왜란 직전 조영된 태릉은 효인이라는 사람이 능침 안에 금은보화가 많다고 고자질해 1593년 1월 왜군이 기마병 50명을 동원해 도굴하려 했으나, 삼물의 회(灰)가 너무 단단해서 실패했다는 기록이 있다.
문정왕후(文定王后)
목차
조선 시대 반가의 여성들은 대부분 언문이나 천자문 등 소통에 필요한 기본적인 문자만 체득했을 뿐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 또 혼인하면 ‘남존여비(男尊女卑)’과 ‘삼종지도(三從之道)’라는 절대원칙에 따라 규방에 갇힌 채 가사노동에 종사하면서 오로지 남편에 대한 순종, 출산과 양육에 몰두하는 ‘현모양처(賢母良妻)’의 길을 걸어야 했다.
여성이 남성의 부속물로 취급받았던 엄혹한 세월 속에서 문정왕후, 신사임당, 황진이, 허난설헌, 민회빈 강씨,명성왕후 등 재기발랄한 몇몇 여성들은 사회의 완고한 벽을 뚫고 자신의 뛰어난 역량을 발휘함으로써 여성으로서의 존재감을 드높였다.
그 가운데 특히 중종의 계비였던 문정왕후 윤씨는 뛰어난 학문을 바탕으로 오랜 세월 축적된 조선의 모순을 타파하여 백성들에게 생기를 불어넣었던 일세의 여걸이었다. 그녀는 아들 명종이 즉위하자 수렴청정을 펼치며 공론을 일삼던 사림을 척결하고 불교부흥과 신분개혁을 적극 추진함으로써 조선에 새바람을 몰고 왔다.
이런 그녀의 시도는 비록 미풍으로 가라앉았지만 유교 원리주의에 사로잡힌 남녀차별의 완강한 분위기 속에서 측천무후에 비견되는 여성 권력자로 한 시대를 풍미했다는 점만으로도 커다란 의의를 찾을 수 있겠다.
중종의 세 번째 왕비가 되다
문정왕후 윤씨는 1501년(연산군 7년) 10월 22일 파산부원군 윤지임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전성부부인 이씨이다. 본관은 파평(坡平)이다. 이 해는 조선 유학의 태두인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이 태어난 해이기도 하다. 그녀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기억력이 남달랐는데 실록에는 ‘천성이 강한(剛狠. 굳세고 강직하다.)하고 문자를 알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형제로는 윤원개, 윤원량, 윤원필 등 세 명의 오라비와 언니 한 명이 있었고 아래로 남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이 있었다. 11세 때 어머니를 잃었는데 3년 동안 검소하게 살면서 조상하는 품이 마치 어른과 같았고, 홀아비가 된 아버지를 섬기는 데도 어머니가 살아계실 때처럼 한결같았으며, 동기들에게도 정성을 다하여 칭찬을 받았다.
1515년(중종 10년) 2월, 장경왕후 윤씨가 세자 이호를 낳고 엿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그러자 중종은 총애하던 숙의 박씨를 왕비로 삼으려 했지만 원로대신 정광필이 그녀의 소생인 복성군 이미가 어린 원자의 자리를 흔들 것이라며 강력하게 반대했다. 그와 같은 대의명분에 굴복한 중종은 새 왕비를 맞이하기로 결정했다.
때마침 담양부사 박상과 순창군수 김정, 무안현감 유옥 등이 상소를 올려 중종반정 직후 궁궐에서 쫓겨난 단경왕후 신씨의 복위를 주장했다. 그로 인해 이듬해까지 조정에서는 신료들 사이에 폐비 복위를 놓고 설전이 벌어졌다. 만일 신씨가 복위하여 왕자를 낳으면 또 다시 후사 문제가 어지러워질 것을 우려한 중종이 논의를 중지시켰다.
그렇게 폐비 복위 문제가 일단락되자 중종의 모후 정현왕후 윤씨는 서둘러 새로운 왕비 후보를 물색했다. 윤씨는 1517년(중종 11년) 2월 어린 원자 이호를 배려하여 가세가 미약한 윤지임의 딸을 최종 낙점하고 대궐로 불러들였다. 장경왕후 윤씨와 문정왕후 윤씨는 공히 세조비 정희왕후 윤씨의 자손으로 9촌지 간이었으므로 안심하고 원자를 맡길 수 있다는 것이 그녀의 판단이었다. 그렇게 해서 중전으로 책봉된 문정왕후는 세 살짜리 원자를 직접 양육하며 입지를 다졌다.
그 무렵 궐내에는 경빈 박씨,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 수많은 후궁들이 임금의 총애를 다투고 있었다. 그 중에 특히 중종의 사랑을 받았던 경빈 박씨는 장차 중전이 되어 아들 복성군을 보위에 올리겠다는 야심을 품고 문정왕후를 괴롭혔다. 또 반정공신 홍경주의 딸로 궐내에 영향력이 컸던 희빈 홍씨도 아들 봉성군을 염두에 두고 그녀를 배척했다. 그녀들에 비해 가문도 미미하고 용모도 평범했던 문정왕후는 온갖 수모와 굴욕을 참아내며 절치부심 때를 기다렸다.
급변하는 정세 속에 힘을 키우다
중종의 치세는 사림파와 훈구파의 경쟁으로 정국이 변화무쌍하게 흘러갔다. 1515년(중종 10년) 성균관 유생들과 이조판서 안당의 추천으로 조정에 들어왔던 조광조와 사림이 성리학의 완고한 규범에 염증을 느낀 중종의 변심과 때맞춘 훈구파의 반격으로 1519년(중종 14년) 11월 기묘사화라는 철퇴를 맞았다. 1521년(중종 16년) 10월에는 관상감 판관 송사련과 학생 정상의 무고로 안당, 안처겸, 안처근을 비롯하여 수많은 사림파 선비들이 처형된 신사무옥이 일어났다.
연이은 대형 옥사를 통해 사림파를 몰락시킨 훈구파 신료들은 다시 중종의 후사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개시했다. 그 대표주자는 세자 이호를 지지하는 김안로와 경빈 박씨와 복성군을 지지하는 심곤, 남정 등이었다. 1523년(중종 18년) 김안로가 남곤, 심정, 이항 등의 탄핵으로 인해 경기도 풍덕으로 유배되었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안로는 4년 뒤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작서의 변이라는 기묘한 사건을 연출했다.
1527년(중종 22년) 2월 26일, 동궁에 불탄 쥐[灼鼠] 한 마리가 걸려 있고 물통의 나무 조각으로 만든 방서가 함께 발견되었다. 돼지띠인 세자 이호는 전날이 생일이었는데, 쥐는 통상 돼지와 비슷한 것으로 간주되었으므로 세자에 대한 저주임에 분명했다.
곧 의금부를 중심으로 대대적인 수사가 시작되었는데 범인으로 경빈 박씨가 지목되었다. 그녀의 종 범덕이가 동궁 주변을 수차례 오가는 것이 궁인들에게 목격되었고, 그녀의 딸 혜순옹주의 종들이 평소 인형을 만들어 세자를 저주했다는 것이었다. 분노한 중종은 경빈 박씨 모자를 유배형에 처했다.
1529년(중종 24년) 6년 만에 조정에 복귀한 김안로는 심정, 이항, 김극핍 등을 모함하여 신묘삼간(辛卯三奸)으로 몰아 죽임으로써 확고부동하게 권력을 손에 넣었다. 김안로는 여세를 몰아 아들 김희를 사주하여 가작인두(假作人頭) 사건을 연출함으로써 경빈 박씨 모자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1533년(중종 28년) 5월 17일, 동궁의 빈청에서 괴이한 인형이 발견되었다. 인형을 고정시킨 목패에는 세자를 능지처참하고 왕비를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저주와 함께 병조 서리 한충보가 썼다는 글이 씌어져 있었다.
의금부의 수사 결과 그것은 경빈 박씨의 사위 홍여의 지시로 사헌부 서리 김형경이 처남 서수견, 노비 강손, 보모 효덕이 벌인 저주극으로 밝혀졌다. 대노한 중종은 그들을 모두 능지처참하고 경빈 박씨와 복성군마저 사사했다. 그렇듯 김안로는 교묘한 방법으로 정적들을 제거하고 권력을 독점했다. 그때까지 문정왕후는 세자를 빌미로 김안로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세자의 외숙부였던 윤임도 그녀의 편이었다. 그 와중에 동생 윤원로와 윤원형은 조정에서 꾸준히 세력을 넓히고 있었다.
대윤과 소윤 권세를 다투다
1534년(중종 29년) 5월 22일 문정왕후는 늦은 나이에 경원대군 이환을 낳았다. 이에 따라 잠잠하던 정국이 또 다시 요동치기 시작했다. 중신들이 세자 이호를 지지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을 지지하는 소윤(小尹)으로 갈리면서 권신 김안로와 함께 세 개의 큰 축으로 나뉘어 무한경쟁을 개시했던 것이다.
대윤의 수장은 세자의 외숙부인 윤임이었고, 소윤의 수장은 경원대군의 외숙부인 윤원형이었다. 윤원형은 문정왕후의 막내동생으로 1533년(중종 28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여 사관으로 조정에 진출했다. 문정왕후는 경망스럽고 세평이 좋지 않았던 윤원로 대신 윤원형을 후원했다. 그 덕에 윤원형은 사헌부 지평, 홍문관 응교 등 청요직을 지내며 청렴결백한 이미지를 과시함으로써 젊은 관리들을 자파에 끌어들일 수 있었다.
1537년(중종 32년) 윤원형은 자신이 몸담았던 사헌부 관리들을 동원하여 문정왕후의 폐출을 기도하던 권신 김안로를 조정에서 축출함으로써 뛰어난 정치력을 보여주었다. 그렇게 권력의 세 축 가운데 하나가 와르르 무너지면서 대윤과 소윤의 격돌이 표면화되었다.
1542년(중종 37년) 중종은 두 외척이 각기 당파를 만들어 조정을 분열시킨다는 공론이 불거지자 윤임을 귀양 보내고 윤원형을 파직시켰다. 하지만 윤원형은 곧 복직되어 성절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승정원 좌부승지, 좌승지, 공조참판 등의 요직에 임명되는 등 약진을 거듭했다.
1544년(인종 즉위년) 중종이 승하하고 인종이 즉위하면서 대윤과 소윤의 경쟁은 종식되는 듯했다. 그때 윤원형은 대윤 송인수의 탄핵으로 파직되었고, 윤임은 이언적 등 사림 세력을 조정에 끌어들여 입지를 다졌다. 그런데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대윤은 졸지에 끈 떨어진 연이 되고 말았다.
인종의 갑작스런 죽음에는 문정대비 윤씨의 독살설이 널리 유포되어 있다. 그녀가 자신의 아들 경원대군 이환을 보위에 올릴 욕심으로 인종을 살해하려 했다는 것이다. 인종의 세자 시절 문정왕후가 꼬리에 불을 단 여러 마리의 쥐를 동궁에 들여보내 큰 불이 났다. 그러자 세자는 어머니가 자식을 죽이려 하니 죽어주는 것이 도리라면서 방 안에서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밖에서 중종이 다급하게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리자 자신의 죽음이 어머니에게는 효행이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라면서 빈궁과 함께 불길을 헤쳐 나왔다고 한다.
인종이 즉위하고 나서 대비가 하사한 떡 때문에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어느 날 인종이 문안을 드리러 가자 그녀가 평소와 달리 인자한 미소를 띠며 떡을 내놓았는데, 그 떡을 먹은 인종이 갑자기 시름시름 앓다가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이런 종류의 야담은 오로지 문정대비의 악독함을 부각시키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다. 숭유억불이라는 조선의 통치이념에 반하여 불교를 부흥시키려 했던 그녀에 대한 유학자들의 반감이 이 같은 혹세무민의 소설로 승화된 것이다. 기실 인종의 죽음은 스스로 자초한 결과였다. 효성이 지극했던 인종은 부왕이 승하하자 병중에도 불구하고 엿새 동안 식음을 전폐했으며, 5개월 동안 호곡하며 몸을 돌보지 않았다. 그 와중에도 명나라 사신을 친히 접대하느라 동분서주하면서 병세가 회복할 수 없는 지경으로 빠져들었던 것이다.
을사사화, 사림에 철퇴를 가하다
1545년(명종 즉위년) 6월 28일, 최후를 직감한 인종은 이복동생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사흘 후인 7월 1일에 승하했다. 문정대비는 그때부터 12세의 명종을 대신하여 수렴청정(垂簾聽政)을 시작했다. 당시 45세였던 그녀는 중중에게 《논어》를 강론할 만큼 학문에 뛰어났으므로 직접 신하들과 정사를 논하면서 만기를 친람할 수 있었다.
이로써 정국이 역전되자 윤원형은 예조참의로, 윤원로는 군기시첨정으로 조정에 복귀한 다음중추부지사 정순붕, 병조판서 이기, 호조판서 임백령, 공조판서 허자 등과 함께 대윤 제거작업에 돌입했다. 그는 중종이 승하했을 때 윤임이 희빈 홍씨의 소생의 봉성군 이완을 보위에 올리려 했고, 인종이 승하했을 때는 성종의 셋째 아들 계림군 이유를 옹립하려 했다는 소문을 퍼뜨린 다음 정난정을 통해 그 내용을 문정대비에게 고했다.
이에 분노한 문정대비가 윤임과 유인숙 등을 치죄하려 하자 대윤을 지지하던 사림이 끼어들어 화를 자초했다. 사헌부 헌납 백인걸이 대비의 밀지에 의해 정당한 절차도 없이 대신들을 귀양 보내는 것은 지나치다고 따지고 들었던 것이다. 그러자 윤원형은 사림이 역적을 비호하고 대왕대비를 능멸했다며 엄벌에 처하라고 상주했다. 그 결과 대윤의 윤임, 유관, 유인숙 등과 더불어 사림의 이휘, 나숙, 정희등, 박광, 이문건 등 10여 명이 죽음을 당하고 수많은 관련자들이 귀양을 가거나 파직되었다. 이 사건이 바로 조선시대 4대 사화의 하나인 을사사화이다.
을사사화의 여파는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1547년(명종 2년) 9월 부제학 정언각과 선전관 이로가 경기도 과천의 양재역에서 ‘위로는 여왕, 아래로는 간신 이기가 권력을 휘두르니 나라가 곧 망할 것이다.’란 익명의 벽서를 발견하고 조정에 보고했다.
윤원형은 이 사건이 대윤 일파에 대한 숙청작업이 미비한 탓이라 여기고 이 기회에 대윤의 잔당을 척결하자고 문정대비에게 건의했다. 이에 따라 윤원형을 탄핵한 바 있던 송인수와 윤임의 사돈 이약수가 죽음을 당했고, 봉성군 이완도 사사되었다. 이어서 이언적, 정자, 노수신, 정황, 유희춘, 백인걸, 김만상 등 20여 명의 사림이 유배형에 처해졌다.
을사사화 이후 윤원로와 윤원형 형제는 확고부동한 권력을 움켜쥐었다. 그런데 두 사람이 불화하면서 극단적으로 권력을 다투었다. 윤원형은 수시로 자신을 음해하는 형 윤원로에 맞서 병조좌랑 윤춘년을 이용하여 그를 탄핵했다. 동생들의 분쟁에 고심하던 문정대비는 결국 윤원로를 남원으로 귀양 보냈다가 이듬해 사사했다. 이 사건 때문에 문정대비와 윤원형은 형제까지 죽인 비정한 권력자라는 세간의 악평을 감수해야 했다.
획기적인 불교중흥정책을 펼치다
독실한 불교 신도였던 문정대비는 왕후 시절 여러 사찰에 내수사 관리를 보내 내원당으로 지정한 다음 정기적으로 향을 보내 복을 빌곤 했다. 명종이 즉위한 뒤 그녀는 본격적으로 불교를 부양하기로 결심하고 그 명분으로 사찰의 양성화를 내걸었다.
“승려들은 날로 번창하고 군액은 날로 감소하고 있는데 사찰은 도둑의 소굴이 되고 있다. 승려들을 핍박하여 당장 모두 환속하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만약 이들을 통솔하는 자가 있다면 사찰로 피하려는 자들을 늘어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정대비의 목소리는 성리학을 신봉하고 있던 지배계층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대간에서는 연일 고려 시대 이래 빚어진 불교의 폐단과 토목공사의 부당함을 들어 극력 반대했다. 하지만 사림에 대한 을사년의 철퇴를 목도한 그들은 금세 입을 다물었다.
문정대비는 우선 중종의 능침인 정릉(靖陵) 근처에 있던 봉은사를 화려하게 중창하고 선종의 중심사찰로 삼았으며, 봉선사를 교종의 중심사찰로 삼았다. 이어서 《경국대전》의 규정에 따라 연산군 대에 폐지된 승과를 부활하는 한편 그 동안 금지되었던 도첩제를 실시하게 하고 전국에 3백 개소의 사찰을 공인했다. 그와 함께 회암사에 있던 보우대사를 불러올려 선종판사로 임명하고, 수진대사를 교종판사로 임명했다. 당시 문정대비로부터 불교중흥의 대임을 위임받은 보우는 강력한 불교 부흥 의지를 피력했다.
“만약 나암(懶庵. 보우대사의 호)이 오늘 없다면 후세에 영원히 선(禪)이 없게 될 것이다.”
보우대사가 궁궐에 들어와 임명장을 받는 순간 선교양종(禪敎兩宗)이 오랜 잠에서 깨어났다. 이어서 사판승들이 공무를 빌미로 소관부서인 예조를 당당하게 드나들면서 《경국대전》에 실려 있던 승려의 도성출입 금지규정은 휴지조각이 되어버렸다.
승과는 3년에 한 차례씩 실시되면서 이후 15년 동안 4천여 명의 승려를 배출했다. 임진왜란 당시 승군을 이끌고 맹활약을 펼쳐 호국불교의 상징적인 인물이 된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당 유정도 이때 승적에 이름을 올렸다.
그렇듯 보우대사는 문정대비의 전폭적인 지원 아래 많은 불사를 펼쳤지만 유학자들의 끊임없는 공세에 시달렸다. 선종과 교종의 대립으로 인한 승려들의 반목도 그를 지치게 했다. 결국 그는 1555년(명종 10년) 8년 동안 맡았던 봉은사 주지와 선종판사직을 내놓고 청평사로 물러났다. 이후 그가 진퇴를 반복하자 문정대비는 정릉을 경기도 광주의 선릉 동쪽으로 이장하고 봉은사도 함께 옮겼다.
이와 같은 문정대비의 불교중흥정책은 역사 속에 그녀가 악녀로 규정되는 계기가 되었다. 《명종실록》의 사관은1565년(명종 20년) 4월 6일자 기사에서 아래와 같이 불교 정책의 결과를 혹평하고 있다.
‘불사를 숭봉함이 한도가 없어서 내외의 창고가 남김없이 다 고갈되고, 뇌물을 공공연히 주고받고 백성의 전지를 마구 빼앗았으며, 내수사의 노비가 제도에서 방자하게 굴고 주인을 배반한 노비들이 못에 고기가 모이듯, 숲에 짐승이 우글거리듯 절로 모여들었다.’
서얼허통으로 신분제를 개혁하다
명종 시대, 문정대비의 불교중흥을 앞장서 부추긴 인물은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이었다. 불심 깊었던 그녀는 대비에게 보우대사를 소개하는 한편 불사 중창에 거금을 기부하고 다양한 불교행사를 마련했다.
이에 감동한 문정대비는 1549년(명종 4년) 윤원형의 공이 크다는 이유로 첩의 소생이 다른 집 적자와 통혼하고 벼슬길에 오를 수 있도록 해주었다. 물론 그 첩은 정난정이었다. 2년 뒤인 1551년(명중 6년)에는 윤원형이 조강지처 김씨를 내쫓게 해달라고 주청하자 허락해 주기까지 했다.
1553년(명종 8년) 3월, 명종은 문정대비의 명에 따라 정난정에게 직첩을 내림으로써 그녀를 합법적인 유원형의 정실로 인정해 주었다. 당시 윤원형은 종1품 의정부 좌찬성이었으므로 그녀는 단숨에 외명부 종1품 정경부인(貞敬夫人)이 되었다. 그 덕에 그녀 소생의 자식들은 천역에서 벗어나 어엿한 양반이 되었다. 그해 10월 윤원형은 정난정의 간청을 받아들여 영의정 심연원, 좌의정 상진, 우의정 윤개 등과 함께 서얼허통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
“인재의 우열은 타고난 기질의 순수한가 아닌가에 좌우되는 것이지 출생의 귀천과는 관계가 없습니다. 만일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 첩의 몸에서 났는데 서얼이라 하여 등용하지 않는다면 어찌 왕자가 인재를 취함에 귀천을 가리지 않는 도라고 하겠습니까.”
그 결과 대간과 이조판서 안현 등의 극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서얼호통법이 통과되었다. 그 획기적인 조치에 그 동안 숨죽이고 있던 서얼들이 환호성을 질렀다. 그때부터 억울한 일을 당한 서얼이나 평민, 노비 등이 구름처럼 윤원형의 집으로 몰려들었다.
문정대비는 인간 평등이라는 불교의 이념을 받아들여 적서를 차별하지 않았으므로 종친들에게도 관대했다. 또 중종 사후 삼년상을 치른 뒤 출궁이 관례화되어 있는 후궁들을 만류하여 궁궐에 머물게 했다. 선원계보에 기록되지 않은 귀인 한씨는 선조 때까지 궐내에 살았다. 마찬가지로 천출이었던 윤원형의 소실 정난정을 따뜻하게 대함으로써 그녀의 지극한 충성을 이끌어냈다.
죽음과 함께 악녀로 매도되다
1551년(명종 6년), 명종은 즉위 6년이 지나 18세의 성인이 되었지만 모후가 수렴청정을 계속하자 내심 불만을 품었다. 그래서 신진사림을 등용하여 외척들을 견제하려 했지만 대비의 단호한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553년(명종 8년) 7월, 명종의 나이 20세가 되자 문정대비는 수렴청정을 거두고 임금에게 권력을 돌려주었다. 드디어 친정에 임하게 된 명종은 인순왕후의 친정에서 추천한 이량을 측근으로 등용했다. 그런데 이량은 이감, 신사헌, 권신 등 추종세력을 포섭하여 문무관의 인사관을 가진 이조와 병조를 장악한 뒤 매관매직으로 치부에 골몰했다.
이량의 월권이 금도를 넘어서자 사림파의 박소립과 윤두수가 공론을 이유로 그를 공격했고, 윤원형도 그 대열에 합세했다. 하는 수 없이 명종은 그를 외직인 평안도 관찰사로 내보냈다가 곧 이조참판에 제수하여 중앙으로 불러들였다. 한데 조정에 복귀한 이량은 이전보다 더한 탐욕을 부렸다.
그 무렵 조선 팔도는 거듭된 흉년으로 인해 유랑민이 들끓고 도적떼가 창궐하여 목불인견의 참상이 연출되고 있었다. 탐관오리의 창고에는 곡식이 썩어나가는데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 주린 배를 움켜쥐었다. 그런 상황에서 1555년(명종 10년) 왜구들이 전라도 일대를 휩쓴 을묘왜변이 일어났다. 또 1559년(명종 14년)부터 1562년(명종 17년)까지 3년여에 걸쳐 양주 백정 임꺽정이 이끄는 도적떼가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를 휘저었다.
1563년(명종 18년) 이량이 박소립과 윤두수를 제거하려 하자 명종은 심의겸의 도움으로 홍문관을 움직여 그를 조정에서 축출했다. 그 무렵 윤원형이 딸을 덕흥군의 아들과 혼인시키려 했지만 허락하지 않았다.
그렇듯 심약했던 명종이 이전과 다르게 능동적으로 왕권을 행사하던 1565년(명종 20년) 4월, 강건하던 문정대비가 갑자기 병석에 눕더니 그달 6일 오후 세상을 떠났다. 향년 65세였다. 그녀는 생전에 중종의 능침 옆에 안장되길 원했지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 공릉리의 태릉(泰陵)에 안장되었다.
문정대비 사후 아들 명종은 중신들의 성화에 따라 윤원형과 보우대사를 제거한 다음 선교양종을 철폐하고 승과와 도첩제를 없애버렸다. 그렇게 해서 문정대비에 의해 15년 동안 반짝했던 불교 중흥의 기운이 덧없이 스러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