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과 내시 김처선
“폐비 신씨가 보고싶다.‘
조선조에서 가장 광포(狂暴)한 왕인 연산이 불과 30의 나이에 서해안 끝 교동도에서
숨을 거두며 한 말...폐비 신 씨는 서인이 되었고 아들 둘은 새로 등극한 중중이
죽이지 말라고 사정해도 쿠데타 세력은 뒷날을 생각해야 한다며 죽여 버렸다.
연산의 행각은 도저히 정상이라고 할 수 없다. 날마다 음행에 젖고
성균관 등 권위 있는 관청들을 기생의 기숙사로 만들고 그리고 계속 벌이는 살인극.
주지하다시피 9대 성종의 아들 연산은 궁 밖으로 쫓겨난 생모 윤씨 때문인지
어려서부터 성질이 사나웠다. 궁내에서 돌아다니는 사슴을 활로 쏘아 죽이기도 하고
흣날 세자 때의 스승을 죽이기도 했다..
1494년에 즉위하여 1506년에 폐위되니 나이 30이었다. 즉위 초에는 국방을 튼튼히
하는 노력도 하였다. 또한 평안도 함경도 수비를 튼튼히 하느라 성도 새로 쌓고 백성들도 이주 시켰다. 이렇게 즉위 초에는 선정을 베풀다 무오사화를 일으키며 사람이 달라진다. 연산군 4년 성종실록 편찬 중 김일손이 삽입한 조의제문이 세조가 일으킨 계유정난(수양이 단종을 뒤엎은 역모) 을 비난한 것이라는 이극돈, 유자광의 참소에 김일손을 처형하고 많은 사람들을 죽이고 유배 보냈는데 이미 사망한 김종직의 묘를 파 부관 참시하였다.
즉위 초부터 그는 생모의 복권을 시도했으나 사림파들의 반대로 번번이 실패했다.
연산은 홍문관 사간원 예문관등을 폐지하고 본격적으로 사람 사냥을 시작한다
폐비 사태를 주도했던 성종의 두 후궁을 그들의 아들들이 때려죽이게 하였는데 아들들이 에미를 세 개 치지 못하니까 연산이 내려가 직접 잔인하게 죽였다. 그 아들들은 귀양 보내고 사약을 내려 죽였다. 이밖에 당시의 관련자인 훈구파·사림파 대신들을 살아 있으면 처형하고 이미 사망했으면 부관 참시했다. 이 일련의 사건이 갑자사화이다. 사헌부 홍문관 성균관을 기생의 집단 기숙사로 만들어 종일토록 음란 행위에
빠졌다. 큰 어머니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하여 자살하게 만들었다.
변태와 패륜의 연산은 궁녀, 비구니, 기생 등과 노는 것이 싫증나니까 나중엔 신하의
부인들 까지 건드리기 시작하였다. 어느 신하가 연산에게서 “어느 날 대감의 부인을
데러고 오시오.“ 명을 받고 안절부절 하면서 집에 왔다. 그리고 부인에게 말했다,
부인, 몇일날 상감이 부인을 진상하라는 어명이요. 이를 어쩌면 좋소?“ 부인은 대답
도 아니하고 울기만 했다. 대감은 바빠서 잊어 버렸다. 어느 날 보니까 부인이 화장하고 옷을 갈아입기에, 대감은, “어쩐 일이요?” 부인은, “오늘이 전하께 가는 날이잖아요?” “아, 그렇군.” 그날이 오니까 들뜬 부인이 분단장 곱게하고 연산에게 가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이렇게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고 즐길 수 있는 때가 쉽지가 않다.
사실 연산이 자기의 부인을 찍어주길 바라는 신하도 여럿이었다한다. 부인이 연산과
데이트하면 일 계급 이 계급 특진이 되기 때문이다. 그 임금에 그 신하라. 미끼를
던질 것이 없이 자기 마누라를 미끼로 삼았다는 연산의 신하들은 참 dirty하다.
1506년 9월 성희안 박원종 등은 임사홍등 연산의 간신들을 죽이고 궁을 장악하고 중종을 새 임금으로 추대했다. 이날 밤 반정의 소문이 한양에 파다하여 연산에 충성하
던 무리도 나중에 반정파줄에 서서 서훈을 받았다. 쿠데타도 엉성하고 연산을
지키는 근위병들도 마찬가지였다.
연산군은 반군에 잡히어 강화군 교동도로 유배 가서 한 두 달쯤 있다 병으로 쓰러져
타계했다. 어느 역사가는 조선조가 연산군 때부터 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내시 김처선
김처선(?-1505)은 세조부터 연산 까지 네 임금을 모셨다
몇 차례 관직을 삭탈당하기도 하고 복직되기도 하였다.
1505년 연산이 음탕한 놀이를 하는 것을 보고 “이 늙은 신이 네 임금을 섬겼는데
전하처럼 하는 이는 없었습니다.
연산은 처선의 다리를 모두 잘라 버렸다.
연산이 놀렸다; 너 지금 걸어보아라
김처선; 전하께서는 다리가 부러져도 걸을 수 있습니까?
이 말을 들은 연산군은 처선의 혀를 잘라버렸다...
김처선의 양아들 이공신도 처형했고 부인과 며느리는 노비로 팔렸고
전국의 모든 공 사문서에 處善(처선)이 두 한자는 절대로 써서는 안 된다는
왕명이 하달되었다.
내시하면 역사적으로 간신과 궁중암투의 대명사였는데 – 삼국지에서의 십상 시(十常侍) 명나라의 위 충현 - 우리의 김처선은 이런 선입견을 타파하고
임금의 잘못을 지적하는 충성심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가-몸이 멀쩡한
신하도 못하는-돋보인다. 자랑스럽다.
첫댓글 궁녀들을 전라로 마루에 눕히고 연산군 자신도 전라로
궁녀위를 구르다가 멎을때 그 밑에 있는 궁녀를 당일
수청을 들게했다는 이야기는 사실인지 아닌지 궁금.....
지아비를 위하여 연산군에게 간 신하의 부인 행위는
어떻게 평가 받아야 할지 아리송.....???
어느 나라 어느 시대이건 충신과 간신은 있기 마련.
궁녀들을 전라로 마루위에 눞힌 얘기는 모르겠고 경복궁 연못에서 궁녀/비구니 들 데리고 그 짓을 했다는 야사는 들어보았어요. 신하의 부인은 양심의 가책을 덜 받았겠지요. 그러나 자기 마누라를 미끼로 연산을 기다린 신하들은
정말로 엉터리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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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bile motel은 처음듣는일이요. 일본 아이들이 알았으면 "이동 위안소(mobile comfort center)"로 설계변경 했을텐대
뭐~ 역사 속의 한낫 에피소드 정도로 생각하면 안될까요.
네로의 폭정과 패륜을 보고서도 당대의 스토아 철학자 세네카는
"네로가 '나를 권태롭게 한다"는, 의연한 語錄을 남기고 자살했다는데...
고대 로마나 중국의 황제들이 자행한 荒淫과 패륜은
그 내용과 규모가 조선조 연산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하고 잔혹했던 것을...권력욕은 성욕과 비례한다는게 프로이드의 분석?^-^
연산때 부터 조선조가 망하기 시작했다는 역사학자의 주장도 있고 연산은 너무 잔인하고 음탄하지 않았나요?
세네카는 네로의 스승으로 네로가 자살을 강요해서 자살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연산도 스승을 죽였지요
이 점에는 둘이 같구만요. 역사라는 만화경에는 엄청난 그림들이 있는데 네로나 연산은 좀 더 눈에 띄는 그림이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