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래 검열- 의심나면 검열하고, 수상하면 족쳐라
1970~80년대"모든 것을 의심하라"는 맑스의 좌우명을 지침으로 삼고,포이에브바하에대한 11번째 테제(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왔을 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화시키는 것이다)를 받들어 '중요한 것은 해것이 아니고 검열'이라고주장하며,우리가 모르는 곳 깊은 곳에서 '음지에서 양지를 지향'하던 이 땅의 검열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20세기 초반 금지곡 중에서 가장 유명한 곡은 <아리랑>과 <봉선화>였습니다. 그 이유는 잘 알다시피 이 노래들이 민중들의 독립 의식을 고취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황성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로 시작하는 <황성옛터>도 역시 금지곡이었는데,작사가와 작곡가는 순사에게 끌려가 고초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이 땅에 노래 검열은 '정치적 검열'에서 출발한 것입니다.
1956년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던 신익희 민주당 후보가 호남 지역으로 내려가는 기차 안에서 급사한 일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 덕분에 <비내리는 호남선>(남행열차와 헷갈리지 마세요)이라는 노래가 난데없이 된서리를 맞고 금지곡이 되어버립니다. 그 노래가 신익희 후보의 죽음을 애통해하는 노래로 포장되어 전국 각지에서 불려졌기 때문입니다.
당시 작곡가 박춘석,작사가 손로원,가수 손인호은 이승만 정권에 줄줄이 소환되어 조사까지 받았다고 합니다. 워낙 유명한 사건이었기 때문에 해공 신익희 관련 자료를 보다보면 <비 내리는 호남선>을 언급하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찾기 힘들 정도입니다.
==목이 메인 이별가를 불러야 옳으냐/ 돌아서서 피눈물을 흘려야 옳으냐/사랑이란 이런가요 비 내리는 호남선에/
헤어지던 그 인사가 야속도 하더란다 -<비내리는 호남선>중
여기까지가 검열의 사전 준비 마당이었다면, 박정의 군사정권은 노래 검열의 그 본마당을 펼칩니다. 일단 학생들이 좋아하던 노래는 무조건 금지곡이이었습니다. 그 가장 대표적인 노래가 바로 <아침이슬>입니다. 김민기 본인은 그 노래를 '아침 산책을 하다가 풀잎에 맺힌 이슬을 보며 삶의 덧없음을 떠올려 만든 노래'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심지어 그 노래를 발표한 1974년에는 박정희 정권이 수여한 '건전가요상'까지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학생들이 시위에서 빠지지 않는 노래가 되자 그 이슬이 꽁꽁얼어붙어 버립니다.검열의 된서리를 맞은 거지요. 정보기관은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라는 가사 중 '태양,묘지,붉게'의 의미를 문제 삼기도 했답니다. 이미 1972년도에 대학 내 공연이 문제가 되어 레코드를 전량 수거당한 경험이 있던 김민기는 그 뒤 전면적인 금지대상이 되어, 아예 '금지곡 목록'에도 오르지 않은 상황이 펼쳐집니다.
한대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물 좀 주소>하는 노래가 중앙정보부의 '물고문'을 비꼰 것으로 소문나면서 그의 모든 노래가 금지곡이 됐는데 '모두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라고 노래한 <행복의 나라>는 '그렇다면 지금 불행하다는 말이냐'는 말도 안 되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어버렸습니다. 황당하지요.
그 뒤 그의 노래들은 김민기와 마찬가지로 '금지곡 목록'에 조차 올라가지 않는 불가촉 금지 대상이 되었습니다. 유치하기 그지 없지만 검열 당국의 유치함은 이제 시작일 뿐입니다.
신중현의 경우는 위의 경우들과 좀 다릅니다. 그는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너무도 비정치적인 노래를 만든 바람에 정치적 보복을 당한 경우입니다.
1973년에 청와대와 공화당은 1960년대 말부터 인기를 끌던 신중현에게 박정희 대통령 찬가를 만들어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신중현은 몇 차례에 걸쳐 거부하다가 그 오기로 발표한 곡이 바로 <아름다운 강산>이라는 곡입니다. 그 뒤 정권의 괘씸죄에 걸린 신중현은 발표한 노래들이 줄줄이 금지곡 판정을 받고, 그가 앞서 발표한 노래들도 금지곡으로 분류되면서 암흑 속으로 밀려나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대한 범죄행위는 괘씸죄라는 것이 법조계에서는 공인된 다수설로 내려오고 있습니다)
신중현은 나중에 '신중현과 엽전들' 음반을 내려 <지키자 우리나라 우리 모두 지키자>같은 소위 '건전가요'를 많이 내기도 했지만 이 노래들마저 나중에는 금지곡으로 분류되어 매장당하고 맙니다. 그 검열주의자들이 '엽전들'이라는 이름이 가진 자괴감을 이해했을 리 없지만 괘씸죄는 참으로 오래 가는 범죄였던 모양입니다.
그의 노래 <미인>은 '학생들이 가사중 '한 번 보고 두 번 보고 자꾸만 보고 싶네'라는 부분이 있습니다. 학생들이 시위를 하면서 박정희 장기집권 야욕을 빗대어 '한 번 하고 두 번하고 자꾸만 하고 싶네'로 바꿔 불렀다는 것이 결국 금지 사유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황당하게도 노래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어도 인기를 얻고나서 여기저기 불리기 시작하면 금지곡으로 바뀌는 노래들이 생겨납니다.
신중현과 함께 동시대에 활동했던 김추자는 '담배는 청자,노래는 추자'로 불릴 정도로 한때 전성기를 구가했지만 역시 검열의 드센 칼날에 사라집니다.당시 한참 인기를 구가하던 김추자의 <거짓말이야>는 '불신풍조 조장'이라는 명분으로 제거 되었는데, 김추자의 춤이 간첩 수신호라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는 소문이 퍼지자 실제로 중앙정보부는 그녀를 끌고 가 조사한 일까지 있었습니다. 그 뒤 그녀는 대인기피증이 심해져 아직까지 바깥출입을 거의 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신중현과 김추자 노래의 금지 사유는 '창법 저속','불신풍조 조장'등등으로 참 다양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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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당시 무식한 검열의 불똥은 외국곡이라고 비켜가지 않습니다. 존 레논은 자신이 만든 노래 중 가장 정치적인 노래는 바로 사적소유 철폐, 국가 철폐, 종교 철폐를 노래하는 <이매진(Imagine)>이라고 이야기한 일이 있습니다.그리고 비틀즈의 <혁명>이라는 노래는 제목과 달리 68혁명을 반대하며 비꼬는 곡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검열주의자들은 <혁명>이 단지 제목이 드렇다는 이유로 판매금지,방송금지로 묶어버리더니 <이매진>은 제한 없이 방송하도록 풀어줍니다. 그리고 스팅의 <러시아인들>이라는 곡은 소련을 비난하는 가사가 들어있음에도 단지 제목이 <러시아인들(Russians)>이라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럴 게 바로 '희극적 비극의 엽기 호러 팩쳐 쇼'가 아닐까 싶습니다.
1965년 '방송윤리위원회'를 앞세워 시작된 박정희 정권의 검열은 1968년 '예술문화윤리위원회'의 음반 사전 심의로 이어지더니 1970년대에는 드디어 '긴급조치'와 '공연활동정화대책'으로 대중가요를 콩가루로 만들어버립니다. 그 중 가장 큰 충격은 '긴급조치9호'에 의한 대중가요 대학살이었습니다. 자그마치 222곡을 한꺼번에 금지시켰는데 나중에 '노래의 분서갱유'라는 말까지 듣게 됩니다.
공연윤리위원회와 방송위원회의 자료에 의하면 최종적인 공식 금지곡은 공연윤리위원회382곡, 방송위원회846곡이나 됩니다. 이 와중에 얌전히 있다가 단지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검열의 철퇴를 맞은 노래도 있습니다. 송창식이 작사,작곡하고 정미조가 노래한 <불꽃>이 그런 노래입니다.
==언제부턴지 내 가슴속엔 / 꽃씨하나 심어졌었지/ 가을 지나듯 봄이 오더니/ 어느 틈에 싹이 돋았지 /바람 불어 잠 못 자던 날 / 웬일인지 가슴 뛰던 날 /아아 꽃은 피었지 뛰는가슴에 / 불꽃처럼 피었지 사랑의 꽃/ 행복의 꽃 생명의 꽃 영원의 꽃/ 나는 타오르는 불꽃 한송이ㅡ <불꽃>중
송창식의 노래는 영화의 배경음악으로 나왔다가 금지곡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이 <왜 불러>는 하길종 감독의 영화 <바보들의 행진>에 잠깐 나오는데 그 장면이 걸작입니다. 영화 주인공 병태와 영철이가 미팅을 나가다가 경찰의 장발단속에 걸려 도망가는데, 경찰이 '학새~앵'하고 부르자 이 노래가 나옵니다. '왜에 불러~ 왜에 불러~ 돌아서서 가는 사람을 왜에 불러~'결국 공권력에 대한 모독으로 금지곡이 됐습니다.
그리고 그 영화의 주제곡이었던 <고래사냥>도 금지곡이 되었는데, 작사가였던 최인호는 중앙정보부에 끌려가서 노래 가사의 '고래'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추궁당했다고 합니다. 말 그대로 의심나면 검열하고,수상하면 족치던 시절인 거지요.
하길종 감독의 명작이라 할 수 있는 작품, <바보들의 행진>은 배경음악뿐만 아니라 영화 자체도 검열의 희생물이 었습니다. 가장 황당한 장면은 병태가 영철에게 어딘가를 같이 가자고 조르고, 영철은 머리를 싸안고 고민하는 장면입니다. 영화에서는 다음 장면에 '연고전 농구대회'가 나오는데 본래의 장면은 '학생시위'였습니다. '시위에 나갈까, 말까'고민하는 장면이 '농구장에 갈까,말까'고민하는 것으로 바뀌어버린 것이지요. 제게 우리나라 영화를 하나만 골라보라고 하면 망설임 없이 <바보들의 행진>을 꼽을겁니다.
시대를 잘못 만난 저주받은 명작이고 하길종 감독은 명감독입니다. 이 개떡 같은 세상에 스스로 '바보'라 부른 이 영화는 1983년 이장호 감독의 <바보선언>으로 다시 이어지고, 1984년 직계 자손인 <고래사냥>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숫자만 봐도 살벌한 '1981'년에 열린 제 5회 대학가요제에서 광주에서 죽어간 전사들의 영령을 위로하기 위해 만들어진 노래가 대상을 차지해버린 사건이 있었습니다.
그 노래는 바로 '정오차'라는 학생의 <바윗돌>이라는 노래입니다. 아직도 광주의 피가 거리에서 채 식기 전,전두환의 눈에서 피 냄새가 가시지 않았던 그 때, 대학가요제라는 것은 군부독재의 선전도구일 뿐이라고 생각하던 당시, 그 대상을 받은 곡이 광주를 노래했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 순진무구한 건지 용감무쌍한 건지 '정오차'씨는 TV 가요프로그램에서 그 사실을 자수해버립니다."이 노래는 광주에서 죽어간 친구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서 만든 곡입니다. 바윗돌은 그 친구의 묘비를 의미합니다" 그 다음날부터 이 노래는 대학가요제 사상 최초이자 마지막 금지곡이 되었습니다.
=찬비 맞으며 눈물만 흘리고/하얀 눈 맞으며 아픔만 달래는 바윗돌/ 세상 만사 야속타고 주저않아 있을소냐/ 어이타고 이내청춘 세월속에 묻힐소냐/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한 맺힌 내 가슴 부서지고 부서져도/ 굴러 굴러 굴러라 굴러라 바윗돌/ 저 하늘 끝에서 이 세상 웃어보자 아아~~-정오차의 <바윗돌>
그런데 이 멍청한 군부는 <바윗돌>과 이름이 비슷한 <바위섬>을 또 놓치고 맙니다. 당시 광주 출신의 '김원중'이란 가수가 부른 <바위섬>은 광주학살 뒤 새들도 찾아오지 않는 무인도처럼 희망을 잃어버린 광주를 위로하기 위한 노래였습니다. 그 노래는 '가요톱텐'에서 한동안 1등을 놓치지 않았는데, 나중에 김원중은 통일을 노래한 '직녀에게'라는 노래까지 히트시키게 됩니다.
그 뒤 1987년 민주화 대투쟁의 성과로 대부분의 노래가 검열을 벗어나게 되는데, 당시 한동안 술자리는 '아침이슬'을 부르면서 파장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 전까지 저의 한 친구를 카페에서 피아노 연주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항상 '아침이슬'을 마지막 노래로 연주했더니 경찰에서 조사를 나오는 바란에 일자리를 잃었던 경험도 했고, 한 친구는 중국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아침이슬을 부르다가 경찰 급습을 받고 2층 창문으로 뛰어 달아났던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뒤로 이땅에서 검열이 사라진 것은 아닙니다. 정태춘씨를 주축으로 서전 검열을 무효화하기 위한 투쟁이 승리한 이후에도 지금까지 방송에서, 영화에서, 인테넷에서 우리는 숫한 검열에 막혀있습니다. 아직도 우리에게 갈 길은 멀기만 합니다.
최세진-내가 춤출 수 없으면 혁명이 아니다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