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19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이사야 58,1-9ㄴ
마태오 9,14-15
그리스도인의 단식
학생 때 영어 단어를 외울 때 연습장에 까맣게 써 가며 외웠던 기억이 납니다.
‘왜 그냥 눈으로 보고 암기하면 안 될까?’라고 생각할 때 선생님이 답을 해 주셨습니다.
“사람이 머리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란다. 몸도 기억을 한단다.
그래서 속으로만 외우는 것보다 입으로 소리를 내고 손으로 써보면 더 잘 기억하게 되는 거야.”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몸이 기억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매우 신기하게 들렸습니다.
저의 한 친구에겐 복숭아 알레르기가 있는데 많은 과일 속에 복숭아 향만 들어있어도 몸에서 이상한 반응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이 알레르기가 태어날 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랍니다.
마치 살아오면서 배탈이 났거나 좋지 않은 기억이 있는 음식들을 몸이 거부하여 잘 먹지 못하는 것처럼
알레르기도 그렇게 안 좋은 기억을 몸이 기억하고 거부하는 것입니다.
악기를 배울 때나 운동을 배울 때 처음엔 머리를 써가면서 연습합니다.
그러나 나중엔 머리를 쓰면 더 안 되고 그냥 몸에 배인 실력으로 할 때 더 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누가 일일이 생각하며 걷고 눈을 깜빡이겠습니까?
이 모든 것은 몸에 배어있는 것입니다.
상어와 같은 물고기들은 뇌를 빼 내도 계속 헤엄쳐서 갑니다.
닭은 머리가 잘려도 얼마 동안은 뛰어다닙니다.
왜냐하면 그런 능력은 뇌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몸에 배어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수난을 느끼며 감사해하는 것도 머리로만이 아니라 몸으로 조금이라도 그 수난을 체험할 때
그 감사가 몸에까지 새겨집니다.
단식은 음식을 먹지 않음으로써 몸에 고통을 주는 것입니다.
배고파본 기억이 있는 사람이라면 단식을 꺼릴 것입니다.
몸이 원하질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단식을 며칠 한 적이 있는데 이틀 동안 물도 마시지 않았습니다.
밥과 물을 먹지 않으니 온 뼈마디가 쑤셔왔습니다.
그러다보니 당연히 신앙인으로서 그리스도께서 나의 죄를 위해 얼마나 큰 고통을 받았는지를 느끼게 되고
그 분께 대한 고마움이 뼛속까지 들어오는 듯한 느낌이었습니다.
단식은 그저 육체를 절제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단식하는 목적은 몸 안에 그리스도의 수난의 기억을 새겨놓는 일입니다.
인간은 하느님을 영적으로만 찬미하는 것이 아니라 몸까지 주님을 찬미하게 해야 합니다.
오늘 요한의 제자들이 “저희와 바리사이들은 단식을 많이 하는데, 스승님의 제자들은 어찌하여
단식하지 않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들은 그저 단식을 하는 것 자체가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줄 알았나봅니다.
하느님은 인간이 행복하기를 원하시지 고통 받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그러나 진정 몸을 절제하면 영이 맑아지는 것은 확실합니다.
왜냐하면 육과 영은 서로 반대되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사람은 영이 메마르게 되어있습니다.
그래서 세례자 요한도 극기의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따라서 그들의 제자들도 단식하는 것 자체가 좋은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먹보요 술꾼’으로 불렸고 제자들까지 단식 같은 것은 시키시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단식의 새로운 의미를 가르쳐주십니다.
“혼인 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예수님이 신랑이시고 교회가 신부입니다.
혼인잔치에서 신랑과 함께 있으면서 단식한다는 것은 옳지 않은 일입니다.
오히려 잔치를 준비한 사람에게 실례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당신 ‘수난’을 예고하십니다.
당신을 빼앗긴 후, 즉 신랑을 빼앗긴 후 그리스도인들은 그 분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해 단식하게 된다는 뜻입니다.
주님의 수난을 기억하기 위한 단식이 아니면 그리스도인의 단식이 아닙니다.
단식은 사실 그리스도교보다도 다른 종교들에서 훨씬 많이 합니다.
그런 단식들은 육체를 이기고 영을 충만하기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단식은 필수불가결하게 그리스도의 수난을 몸으로 기억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이는 단식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 안에서 주어지는 모든 육체적 영적인 고통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당신을 잃게 되면 제자들도 단식을 하게 될 것이라고 한 것처럼 단식 자체가 좋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때문에 하는 단식이기에 가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군대를 제대하고 대학 등록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로 막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시작하자마자 쇠파이프에 얼굴이 긁혀서 얼굴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상처가 생겼었습니다.
그렇게 돈을 벌면서 처음으로 느꼈던 것이, 이렇게 돈 벌기가 어려운데, 부모님이 얼마나 힘들게 돈을 벌어서 우리를 키우셨나하는 감사의 마음이었습니다.
얼굴에 난 상처와 함께 조금 더 부모의 고마움을 알게 되고 성숙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단식도 작은 고통으로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을 증가시키는 것이 목적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2월19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마태오 9장 14-15절
"선생님의 제자들은 왜 단식하지 않습니까?"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참된 단식이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 설명하고 계십니다.
단식의 핵심이자 목적은 다른 무엇에 앞서서 예수 그리스도 당신 자신임을 명확히 밝히고 계십니다.
진정한 단식은 예수 그리스도 그분 때문에 행하는 단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 그분의 우리를 향한 수난과 희생, 죽음을 묵상하기 위한 단식이 참된 단식입니다.
단식을 하는 사람들의 의식은 더욱 예수 그리스도께로 집중되어야하며 그분이 걸으셨던 십자가의 길에 관심이 모아져야 할 것입니다.
또한 단식은 단식 그 자체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결실을 거두는 단식이어야 합니다.
단식의 결과가 이웃사랑으로 연결되어야 그 단식은 참된 단식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세상 안으로 더욱 투신하고 그 세상을 위해 철저히 헌신하고 봉사하는 것 그것이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참된 단식에 대해서 묵상하다가 "기쁨과 희망"이란 아름다운 소식지 3월 1일자에 실린 한 수녀님의 글이 자꾸 떠올랐습니다.
"사제가 곁에 있어도 우리는 사제가 그립다"는 제목의 수녀님 글은 얼마나 저를 부끄럽게 했는지 모릅니다.
수녀님의 글은 사제로서 참된 단식이 무엇인지 잘 설명해주고 계셨습니다.
"한국 교회의 구조와 한국인의 의식구조 안에서의 사제상은 우리가 익히 듣고 그려온 착한 목자상과는 거리가 먼듯하다.
어느 틈엔가 굳어진 목에선 겸손함이 그립고, 강론 준비도 제대로 안되는 건 고사하고 주일미사에 어렵사리 나와 주님 안에 평화를 얻고자 하는 신자들을 야단쳐서 보내지 않으면 다행이다.
신자들의 바람을 추려보면 성체 앞에 기도하며 머무는 사제의 모습이 그립고, 만나면 먼저 인사해주는 겸손하고 따뜻한 모습이 그립고, 자신과 신자들의 영성의 깊이를 더해가기 위해 공부하고 연구하는 모습이 그립고, 자기 관리가 되는 사제가 그립고, 말이 통하는 사제, 들을 귀가 큰 사제가 그립다고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많은 사제들과 함께 살면서도 진정한 사제가 그립다.
다른 무엇보다도 사랑 때문에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어놓았던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전공한 사제가 진짜 그립다."
"성서와 함께" 3월호에 보니 또 다른 수녀님께서 사제로서의 참된 단식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잘 소개하고 계십니다.
어느 모임에서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젊은 사제가 자신의 소중한 체험을 나누어 주었답니다.
"제가 술에는 정말 자신이 있는 사람입니다만, 사제 생활을 시작하면서 두 가지 목표를 세웠는데, 하나는 술을 끊는 것과 또 하나는 저녁 10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사제관으로 돌아온다는 것입니다.
본당 소임이 이동되어 신자들과 송별회를 하던 중,
술을 안마시고 말짱하게 앉아 있다가 10시가 가까워져서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아우성치는 교우들을 뒤로 한 채 사제관으로 돌아와 잠을 자던 저는 병자성사를 요청하는 전화를 받고 달려가면서 주님께 감사드렸습니다.
송별회라는 명분으로 술을 마시고 더 앉아 있었더라면
본당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큰 오점을 남길 뻔 했으니 말입니다.
병자 성사를 받은 그 교우는 그 날 새벽에 운명을 했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2월19일 [재의 예식 다음 금요일]
복음: 마태 9,14-15: 신랑을 빼앗길 그 때에 가서는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
단식한다고 거창한 말로 떠들어 대거나 창백한 얼굴로 뽐내며 지나치게 소문내고, 하느님의 눈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마음에 들기 위해 단식한다면, 그런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기쁨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혼인잔치 손님들이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 슬퍼할 수야 없지 않으냐? 그러나 그들이 신랑을 빼앗길 날이 올 것이다. 그러면 그들도 단식할 것이다.”(15절)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 신랑이 함께 있는 동안은 당신의 제자들이 단식할 필요가 없다고 하신 것은, 그분이 함께 계실 때의 기쁨과, 그분께서 계시는 동안, 즉 마음의 빛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고 있는 동안에는 누구나 거룩한 양식을 누리는 것이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의미하고 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명의 양식에 굶주리며 버려질 것이라는 말이다. 신랑을 누려야 한다는 말이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단식을 책망하셨던 것은 그들이 하는 단식행위 자체만으로도 하느님을 올바로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하였고, 자신들 또한 ‘하느님께 이보다 더 무엇을 해드릴 수 있을까?’ 하면서 자위하는 교만한 행위였기 때문이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들의 이러한 행위를 오늘 독서에서 맹렬히 비난하고 있다. “제 머리를 골풀처럼 숙이고 자루옷과 먼지를 깔고 눕는 것이냐? 너는 이것을 단식이라고, 주님이 반기는 날이라고 말하느냐?”(이사 58,5)
이 말씀은 오늘의 모든 위선자들을 향해서 하시는 말씀이기도 하다. 이 말씀은 하나의 경고이며, 그 당신의 그 사람들에게만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모든 시대의 모두에게, 그리고 지금 여기 있는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이다. 하느님께서 기뻐하시는 참다운 단식이란 이런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은 우리가 성경필사를 하면서, 성경을 읽으면서 무수히 들어온 말씀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무심히 지나쳤고 법조문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로 살아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가 좋아하는 단식은 이런 것이 아니겠느냐? 불의한 결박을 풀어 주고 멍에 줄을 끌러 주는 것, 억압받는 이들을 자유롭게 내 보내고 모든 멍에를 부수어 버리는 것이다. 네 양식을 굶주린 이와 함께 나누고, 가련하게 떠도는 이들을 네 집에 맞아들이는 것, 헐벗은 사람을 보면 덮어 주고, 네 혈육을 피하여 숨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이사 58,6-7).
이것이 진정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단식이다. 우리는 어떻게 하고 있는가? 적어도 바리사이파 사람들과 같이 남에게 보이려는 외적인 모습이 아니라, 성서의 말씀과 같이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는 단식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주님의 은총을 받는 우리가 되도록 하여야 한다. 적어도 우리의 단식과 금육재는 이웃에 대한 사랑으로 완성되어야 한다. 이러한 삶의 은혜를 청하며 기도하자.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