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아직 몸이 뜨겁다
노병철
젊었을 때 난 나이 오십이 넘으면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우리 동네 오십 대 남자는 다 영감 소리를 들었고 오십 대 여자는 할머니 소리를 들었다. 실제 손주가 있는 할머니였다. 내가 태어났을 때 울 외할머니는 사십 대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사십 대에 “디다.”시며 농사일을 우리에게 미루기 시작했다. 건장한 삼 형제를 생산한 아버지의 특권이었다. 그래서 아버지의 노인 시절은 남들보다 더 길었다.
생애 마지막 잔치가 환갑잔치였다. 당시엔 환갑 잔칫상도 못 받고 돌아가신 분이 참 많았다. 사촌 형님 환갑 때 아버지도 환갑상 못 받으셨는데 아들인 내가 받는 게 송구스럽다며 눈시울을 붉히셨다. 그 사촌 형님도 아흔한 살로 돌아가신 지 몇 년 되었다. 동네 환갑잔치는 정말 거창했다. 형편이 좀 괜찮은 집은 창(唱)하는 기생도 불렀다. 효자가 되는 것은 부모님 환갑잔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좌우되던 시절이었다.
그 형님 동생분이 지금 여든아홉이시다. 아직 정정하시다. 이 형님이 육십 중반, 지금의 내 나이 때 상처하셨다. 일 년쯤 지나 서울 사는 자식들이 혼자 사는 아버지가 불편했던지 재혼을 종용했는데 꿈쩍도 안 하셨단다. 그래서 집안에서 말발이 제법 셌던 나보고 아버지를 설득해 달란다. 당시 내 나이 사십 대였지만 아버지가 11남매의 막내라 나의 집안 서열이 만만찮았다. 아버지와 비슷한 연배였지만 족보상 형님이었다.
제법 지역에선 유지였고 성당에서 신도회장까지 한 양반이라 나름 체면을 유지하려고 그런가 싶어 슬쩍 물었다. 이만하면 할 만큼 하셨다고. 솔직히 돌아가신 형수와 그렇게 깨가 쏟아질 정도는 정분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1년 정도 지났으면 주위에서도 다 이해하리라고 보았다.
“형님, 애들 생각도 좀 해 주셔야죠. 매주 내려와 챙겨드리는 게 그렇게 쉬운 일만은 아닐 겁니다.”
형님은 요지부동이었다. 손사래를 치면서 그런 말은 하지도 말란다. 생각이 없다신다. 하지만 형님 혼자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집요한 나의 설득에 마침내 말문을 열었다.
“이놈들이 자꾸 육십 대 여자를 데리고 와서 붙이려고 하잖아.”
‘히떡’ 자빠질 뻔했다. 그 뒤 오십 대 여자분이랑 재혼해서 알콩달콩 제2의 인생을 살고 계시다. 당시 나이 육십 넘은 영감인 분이 무슨 욕심이 있어 그딴 망언을 하시나 생각했다. 육십 대가 오십 대를 넘보는 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망령이 났다고 집안 젊은 여자들은 구시렁거렸다. 그래도 형님은 초지일관 당신 뜻을 굽히지 않았고 마침내 소원을 이뤘다. 그래서 그런지 요즘도 펄펄난다. 이해가 안 됐다. 난 기가 다 뻿겨 일찍 야위어서 돌아가실 줄 알았다.
지금 나의 나이가 당시 형님 나이가 되었다. 이 나이가 되어보니 형님이 이해가 되고 남는다. 지극히 정상이었다. 나 또한 할매라도 예쁜 할매가 좋고 입성 좋고 냄새 안 나는 할매에게 눈 돌아가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리고 요즘 육십 대는 할매로 보이지도 않는다. 아니 최소한 내 눈에 보이는 육십대 여성은 그렇다. 카톡 프로필 사진에 손주 사진을 걸어 놓아서 할매이지 골프장 필드에서 짧은 치마 입고 들이대는 용기 있는 중년의 여자들이다. 커피 한잔 사달라고 남자에게 농도 걸 줄 알고 짓궂은 음담패설도 얼굴 하나 안 붉히고 내뱉는다. 되려 남자들이 부끄러워 얼굴을 숙일 지경이다. 집사람에게서 전화 오면 들으라고 옆에서 큰 소리로 이야기한다.
“형님, 밖에 있는 남자에게 전화 거는 거 아니에요.”
우린 아직 노인이 아니다. 몸속엔 아직 피가 뜨겁다.
첫댓글 화자가 ‘히떡’ 자빠질 뻔했다면 독자는 '벌렁' 다니비질 뿐 한 글 재밋게 읽었습니다.
저도 아직 노인이라는 생각은 해본적이 없어요.
누가 어르신이라고 불렀을 때 얼아나 당황했는지. 엄마 왈 지 늙은 걸 모른다더니 ㅋ
효녀 천사라 부르지 뭐.
천사는 늙지 않으니
ㅎㅎ
재밌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