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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태인, 유대인, 유다인, 이스라엘인
오늘날 팔레스타인에 있는 이스라엘 국민을 지칭하는 말은 이스라엘인이지만 이외에도 유태인(猶太人), 유대인(Judea人) 혹은 유다인(Judea人)이 있다. ‘유대’와 ‘유다’는 영어 Judea(주디아)를 한글로 옮기면서 나뉜 것이다. 흥미롭게도 ‘주디아’를 한자어로 표기할 때는 유태(猶太)로 했다. 그래서 이스라엘인을 우리가 지칭할 때 유태인, 유다인, 유대인 등으로 다양하게 나뉘어졌다.
여기서 주목해 볼 점은 그냥 ‘이스라엘(Israel)인’ 혹은 ‘이스라엘 사람’으로 하면 좋을 터인데, 왜 굳이 Israel을 제치고 Judea가 등장하여 혼란을 부추기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무슨 곡절이 있을까?
‘이스라엘’은 본디 아브라함의 아들 ‘이삭’이 낳은 ‘야곱’의 개명된 이름이다. 야곱은 믿음의 조상으로 일컬어지는 아브라함의 손자이다. 여기서 이스라엘의 국호가 유래했다. 그러니 이스라엘의 시조는 야곱이라 할 수 있는데, 왜 국호(國號)와 민족의 명칭에 이스라엘 말고 유다 혹은 유대, 유태가 되었을까?
이스라엘로 이름이 바뀐 야곱에게는 열두 아들이 있었는데. 그중에 넷째 아들이 ‘유다(Judah)’이다. 넷째 아들 유다로부터 오늘날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는 호칭이 비롯한다. 아들이 열둘이나 되는데, 그들 중에서 왜 하필 유다일까?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한 제사장 나라로서 아브라함 - 이삭 – 야곱, 그리고 야곱의 열두 아들 중 넷째인 유다로 정통성이 이어진다. 유다의 직계 후손으로 다윗, 솔로몬에 이어 예수님이 탄생한다. 종교적 정통성이 열두 아들 중에서 유다로 흘러 예수님에 이르렀다. 그래서 유다, 유대가 고유한 대명사가 된다.
둘째, 역사적 정통성이 유다의 혈통으로 이어졌다. 솔로몬 사후 이스라엘은 남북으로 분열되는데, 남쪽은 유다지파 중심으로 국호도 ‘유다’가 되고 나머지 대부분의 지파들이 북쪽에 ‘이스라엘’을 세워 분열왕국시대가 되었다. 이후 북쪽의 이스라엘이 먼저 망하고 얼마 후 남쪽 유다도 바빌론 제국에 의해 멸망한다.
그러나 멸망과 함께 포로로 끌려간 유다 사람들은 70년 후 귀환하여 민족공동체를 회복했다. 열두 지파 중에서 유다만 명맥을 유지한 셈이다. 이로써 이스라엘은 곧 ‘유다’가 되어 유다인, 유대인, 유태인이 되었다.
이스라엘의 역사서 열왕기와 역대기는 포로귀환 이후 기록되었다. 그래서 간혹 이스라엘을 지칭할 때 ‘유다와 이스라엘’이라는 표현이 나온다.(왕상 4:20,25).
유대인
유대인(히브리어: יהודי 유다인; Yehudi) 또는 유태인(猶太人)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다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혈연 또는 개종을 통해 고대 히브리 민족의 후예가 된 유다 민족을 가리킨다. 여기서는 민족적인 의미를 다룬다.
유다인의 역사
구약성서에 의하면 고대 이스라엘인 또는 고대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의 후예로 가나안 땅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고대 히브리 왕국을 세웠다. 2대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정복, 왕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사울왕가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패권을 쥐었다. 그의 아들 3대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유다교 성전을 건축하였다. 하지만 솔로몬 사후에 가혹한 부역활동에 대한 반항으로 반란이 일어나, 북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어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게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 신(新) 바빌로니아에 멸망하였다. 유다의 엘리트는 바빌론으로 끌려가나(바빌론 유수), 이후 바빌로니아가 벨사살을 암살한 다리우스가 세운 페르시아에 망한 뒤 그중 일부가 유다 땅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유다인의 명목을 이었다. 보통 구약성서의 역사기록들은 이때까지의 역사가 배경이다.
그후 유다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유다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다교 정통파들은 마카베오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다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경의 외경 중 '마카베오 상,하'에 나와 있다.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몬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다인들은 하누카를 통해 이 사건을 기념한다. 하지만 B.C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AD 66년 유다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하지만 유다인들이 그들 땅에서 유다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AD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에는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바르 코흐바(bar Kokhba)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다이아(이후 이 지방은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불린다)를 파괴했으며 135년 이후 유다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다이아 땅의 유다인들은 대다수 노예로 팔리거나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것을 두고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로마 시대의 유다인들 상당수는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와 소아시아 등지에서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로 생각된다. 실례로 외경이 포함된 구약성서인 70인역 성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다인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서이다.
유다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다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카자르인(Khazars), 이두매아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다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유럽의 유다인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수난을 면치 못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유다인들에 대해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고, 직업선택과 거주지에 대한 제한을 두었다. 일반 직업에 종사할 수 없게된 유다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인정하지 않던 직업인 금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오늘날의 유다인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다인 인구가 1천8백만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1천2백만 정도로 줄어들었다.[출처 필요]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1천4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5백80만, 이스라엘에 5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 많은 수의 유다인들이 살고 있다. 유럽의 유다인 인구는 2백40만, 라틴 아메리카는 5십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설립된 이스라엘 공화국은 유다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the Law of Return)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다인이 있거나 유다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다인으로 간주된다. 또 유다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다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다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다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다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다인으로 여겨 반유다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다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다인이 가장 많은 곳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1백만에서 1백50만 정도가 있다고 추산된다. 유럽에서 유다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로 특히 동유럽에서 많이 이주해 온다고 한다.
유다인의 영향
오늘날 유다인은 미국, 유럽 등지에 살면서 막강한 영향과 세력을 발휘하고 있다.
•유다인들은 금융업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 영국 청교도 혁명 때 혁명파 수장 올리버 크롬웰에게 자금을 지원해 영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영국에서 명예 혁명으로 윌리엄 3세가 오르자 유다인들은 윌리엄 3세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화폐발행권 이권을 얻어냈고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
•유다인들은 이후에도 영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쳐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직접 수상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유다인은 전유럽의 금력을 바탕으로 막강해지기 시작했는데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다인 국제금융업자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 예로 가문을 크게 일으킨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은행을 설립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후 유럽 전역에 진출해 막강한 돈과 금융을 업고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첫째 아들 암셸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둘째 아들 잘로몬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 빈, 셋째 아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영국 런던, 넷째 아들 카를 로스차일드는 이탈리아 나폴리, 다섯째 아들 제임스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파리에 각각 진출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아들들 중 셋째 아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각 동맹국 정부에 1억 파운드씩 빌려주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75년 수에즈 운하 건설에도 융자해주고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 정부에 영향을 주어 유다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을 유도하기도 했다.
•유럽 전역에 반유다주의가 휩쓸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상인 스펜서 모건과 그의 아들이자 훗날 모건 은행을 설립하는 존 피어폰 모건을 앞세워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유다인들은 할리우드 영화 등 영화 산업을 이용해 백인 중심의 세계로 바꾸었다.
•초기 8대 할리우드 영화사의 우두머리가 모두 유다인이었다. 워너브라더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파라마운트 픽처스, 20세기 폭스, 유니버설 스튜디오, 콜럼비아 픽처스 등 모두 유다인들이 설립한 영화사들이다.
•미국 역사상 최대 재벌 중 하나였던 존 D. 록펠러도 유다인과 장사 수단이 비슷해 유다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3대 신문인 LA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뉴욕타임스도 유다인 소유이거나 유다인 운영 관리 회사이다.
•세계적인 통신사 UPI, AP, AFP 역시 유다인 소유이다. [출처 필요]
•영국 최대 통신사이자 세계 3대 통신사인 로이터 통신 역시 유다인 파울 율리우스 로이터가 세운 것이며,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시트로앵의 창시자 앙드레 시트로앵, 이탈리아의 컴퓨터 회사 올리베티의 창시자 카밀로 올리베티 역시 유다인이다.
•미국 3대 TV NBC, ABC, CBS-TV와 영국의 유명한 공영방송 BBC도 유다인의 세력에 있다.
•세계적 주간지 <뉴스위크>와 경제 전문기 <더 월스트리트 저널> 등 수많은 신문, 방송, 잡지 등을 유다인이 보유하고 있다.
•FRB 회장의 4회나 맡으며 미국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던 앨런 그린스펀도 유다인이다.
•전임 세계은행의 총재 폴 울포위츠와 현 총재 겨주기 로버트 졸릭, 국제통화기금의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전 프랑스 재무장관 등도 유다인이다.
•세계적 커피 회사 스타벅스의 회장 하워드 슐츠, 헤지펀드계의 거물 조지 소로스, 인텔의 창립자 엔디 글로브, 델의 창업자 마이클 델, 러시아의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 옛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러시아의 미디어 재벌이던 보리스 베레좁스키, 유명한 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시무어, 영국의 광고재벌 찰스 사치, 미국의 스포츠재벌 랜디 러너와 맬컴 글레이저, 로버트 크래프트, 뉴욕 시장이자 블룸버그 L.P.의 창립자 마이클 블룸버그,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등 세계적 거물 인사들도 모두 유다인이다.
•퓰리처상을 제정한 신문왕 조셉 퓰리처 역시 헝가리 출신 유다인계이다.
•세계적인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창시한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 박사도 유다인이다.
•<뉴욕타임스>의 최고논설위원 월터 리프만도 유다인이다.
•무엇보다도 노벨상을 받은 유다인이 현재까지 무려 179명에 달한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펠릭스 멘델스존,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자니 클레그, 레오니트 크로이처 같은 음악가도 유다인이다.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와 러시아 혁명의 레온 트로츠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가도 유다인이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조 리버먼이 부통령으로 지명되기도 했고 뉴질랜드의 총리 존 키도 유다인이다.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아들러, 막스 아이팅곤과 대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도 유다인이다.
•작가 안나 제거스와 야코프 바서만, 프란츠 카프카, 전신학자 막스 라빈, 수학자 에밀 뇌터와 헤르만 민코프스키, 레오폴트 크로네커, 게오르크 칸토어, 생리학자 핸스 애돌프 크리브스, 화학자 크리츠 하버,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소련의 비밀경찰이던 겐리흐 야고다 등도 모두 유다인이다.
•아이작 스턴이나 헨리 키신저, 오토 릴리엔탈, 찰스 린드버그, 아놀드 쇤베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란츠 오펜하이머, 레너드 번스타인, 스타니스와프 울람, 리바이 스트라우스 모두 유다인이다.
•유다인과 결혼하여 개종한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스티븐 스필버그, 로만 폴란스키 등 연예계에서도 유다인의 힘은 막강하다.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축구감독을 역임했던 호세 페케르만 역시 유다인으로 아르헨티나가 월드컵 우승 2회, 준우승 2회에 빛나는 축구의 명가인 관계로 월드컵 무대에서도 유태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현재 미국 유명대학 재학 유다인 비율이 하버드 대학교 30%, 예일 대학교 28%, 보스턴 대학교 24%로 엄청나다.
•이외에도 로버트 오펜하이머, 바뤼흐 스피노자, 발터 베냐민, 노암 촘스키, 에리히 프롬, 마르크 샤갈, 스티븐 발머 등도 모두 유다인이다.
•미국 100대 기업의 40%가 모두 유다인의 소유이다.
•세계 5대 메이저 식량 회사 중 3개가, 세계 7대 슈퍼메이저 석유 회사 중 6개가 유다인의 소유이다.
유태인 교육법
유태인들은 세계 역사에서, 특히 근현대 역사에서 뛰어난 업적을 자랑하고 있다. 인구비율에 비해 압도적인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하고 있음[출처 필요]은 유태인의 뛰어난 능력과 교육법에 관심을 갖게 한다. 유태인들은 종교교육을 통해 그들 민족의 역사와 지혜를 배운다
유대인
유대인(히브리어: יהודי 유대인; Yehudim) 또는 유다인 혹은 유태인(猶太人)은 종교적인 의미에서는 유대교를 신봉하는 사람, 민족적인 의미에서는 혈연 또는 개종을 통해 고대 히브리 민족의 후예가 된 유다 민족을 가리킨다. 유대교의 법률인 《하라카》의 정의에 따르면,어머니가 유대인으로서(민족적 의미) 유대교를 따르는(종교적 의미) 사람을 유대인이라 한다. 서아시아의 가나안에서 근원한다. 유대인의 민족, 문화, 종교 및 신앙은 서로 밀착된 강한 관계를 보이며,유대교는 유대인 간의 동질감을 느끼게 하는 전통종교인 것이다.여기서는 민족적인 의미를 다룬다.
유대인의 역사
구약성서에 의하면 하나님은 영원하고 고대 이스라엘인과 고대 히브리인은 아브라함의 후예로 가나안 땅에서 사울을 초대 왕으로 고대 히브리 왕국을 세웠다. 2대 다윗왕은 예루살렘을 정복, 왕국의 수도로 삼았으며 사울왕가와의 내전에서 승리하여 이스라엘의 패권을 쥐었다. 그의 아들 3대 솔로몬왕이 예루살렘에 유대교 성전을 건축하였다. 하지만 솔로몬 사후에 가혹한 부역활동에 대한 반항으로 반란이 일어나, 북의 이스라엘 왕국과 남의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어 북이스라엘은 기원전 8세기 아시리아의 살마네세르 5세에게 멸망하고 남유다는 기원전 6세기 신(新) 바빌로니아의 느부갓네살 왕에 멸망하였다. 유다의 엘리트는 바빌론으로 끌려가나(바빌론 유수), 이후 바빌로니아가 벨사살을 암살한 다리우스가 세운 페르시아에 망한 뒤 그중 일부가 유다 땅에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고 유대인의 명목을 이었다. 보통 구약성서의 역사기록들은 이때까지의 역사가 배경이다.
그 후 유대인들의 땅은 페르시아 제국이 알렉산드로스에게 정복당한 후 시리아 지역에서 알렉산드로스 제국을 승계 셀레우코스(Seleucid)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셀레우코스 왕조의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가 예루살렘의 유대교 성전을 제우스 신전으로 바꾸려 하자 유대교 정통파들은 마카베오 가문(Maccabees)의 지도로 반란을 일으켜 독립된 유대인 왕국을 세웠는데 당시 에피파네스 왕조의 반유다주의 및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은 구약성경의 외경 중 '마카베오 상,하'에 나와 있다. 마카베오 가문의 반란으로 세워진 왕조를 하스몬 왕조(Hasmonaean Dynasty)라 하는데 기원전 165년부터 기원전 63년까지 계속되었다. 유대인들은 하누카를 통해 이 사건을 기념한다. 하지만 B.C 63년 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유다이아(Judaea) 주로 편입되었다. AD 66년 유대인들은 총독과 세리를 통해 자신들을 탄압하고 수탈하는 로마 제국에 대해 제1차 유다-로마 전쟁을 일으켜 저항하였으나 베스파시아누스와 티투스는 이를 철저히 진압하고 성전을 파괴했다. 하지만 유대인들이 그들 땅에서 유대교를 믿도록 허용했다.
AD 2세기 하드리아누스 황제 때에는 율리우스 세베루스가 바르 코흐바(bar Kokhba)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유다이아(이후 이 지방은 팔레스티나 지방으로 불린다)를 파괴했으며 135년 이후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에 들어가는 것이 금지되었다.
유다이아 땅의 유대인들은 대다수 노예로 팔리거나 로마의 시민으로 동화되었다. 이렇게 뿔뿔이 흩어진 것을 두고 디아스포라라고 한다. 로마 시대의 유대인들 상당수는 헬레니즘 및 로마 시대에 알렉산드리아와 소아시아 등지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로 생각된다. 실례로 외경이 포함된 구약성서인 70인역 성서는 알렉산드리아의 유대인들이 그리스어로 번역한 성서이다.
유대인들은 로마 제국 전역에 살았으며 이슬람교가 성장하면서는 일부가 인도와 중국까지 진출하기도 하였다. 오늘날의 유대인 중 일부는 지중해 연안 외의 지역에서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의 후손인데 하자르인(Khazars), 이두매아인(Edomites), 에티오피아인, 아랍인 등이 유대교로 개종하는 일이 많았다.
하지만 유럽의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로부터 수난을 면치 못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유대인들에 대해 예수를 죽인 민족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었고, 직업선택과 거주지에 대한 제한을 두었다. 일반 직업에 종사할 수 없게된 유대인들은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인정하지 않던 직업인 금융업을 통해 부를 축적하였다.
유대인의 분파
흔히 사용하는 아슈케나짐(Ashkenazim)와 세파르딤(Sephardim)의 구분은 종교적 차이와 민족적 차이를 다 포함한다. 어떤 학자들은 아슈케나짐 유대인들은 팔레스티나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며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바빌로니아식 유대교 전통을 따른 이들의 후손이라 주장한다.
역사적으로 유다 민족의 4대 분파는 다음과 같다.
아슈케나짐 -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다가 동유럽으로 이주하였다. 일부는 프랑스와 독일에 살고 있지만 인근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라트비아, 러시아, 리투아니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몰도바, 루마니아, 불가리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슬로베니아에도 살고 있다.
세파르딤 - 스페인과 포르투갈에 살았다. 스페인과 포르투갈 쪽에 소수가 있고, 네덜란드, 터키등지로 이주했다.
동방 유대인 (Oriental Jews) - 중동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 살다가 중앙아시아, 남아시아 등지에도 퍼졌다. 이들은 세파르딤 유대인들과 종교 의례가 거의 같아 보통 세파르딤이라 부르기도 한다.
예멘 유대인 (Yemenite Jews) - '테이마님(Teimanim)'이라고도 한다. 동방 유대인이었는데 지리적·사회적으로 다른 유대인 사회로부터 고립되어 특이한 예배식과 의례가 발전하였다.
이 외에도 다음과 같은 소수 분파가 있다.
에티오피아 유대인 - '팔라샤(Falasha)' 또는 '베타 이스라엘(Beta Israel)'이라고도 불린다.
베네 이스라엘 - 인도의 뭄바이(봄베이)에 살았다.
코친 유대인 - 이들도 인도에 살았다.
로마니오트 (Romaniotes) - 헬레니즘 시대부터 현재까지 발칸 반도에서 살고 있는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유대인들이다. 전 세계에 6천 명 정도 있다.
아슈케나짐는 전통적으로 이디시어를, 세파르딤은 라디노어(유다 포르투갈어)를 사용했다. 동방 유대인은 대부분 아랍어를 사용했으나 아람어, 페르시아어(파르시어)를 사용하는 이들도 있었다.
스페인의 종교재판(Spanish Inquisition) 이후 세파르딤 유대인들은 흩어져 유럽에 이주, 아슈케나짐와 동화되거나 중동으로 이주, 동방 유대인들과 동화되었다.
오늘날 유대인의 80% 정도가 아슈케나짐이고 나머지는 대부분 범 세파르딤계이다.
유대인 하위 집단에는 '그루짐(Gruzim)' 즉 카프카스 조지아 지방의 유대인, '유후림(Juhurim)' 즉 코카서스 동부 다게스탄의 산악 유대인, '마크레빔(Maghrebim)' 즉 북아프리카 유대인, '아바유다야(Abayudaya)' 즉 우간다 유대인 등이 있다. 그밖에도 러시아의 러시아유대인, 카자흐스탄,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키르기스스탄의 중앙아시아유대인, 싱가포르, 필리핀, 중국, 일본의 아시아유대인도 있다.
한편 헝가리계 유대인 역사학자 아서 쾨슬러와 일본 학자 우노마사미 등은 아쉬케나지가 인종적으로 셈족이 아닌 백인계 투르크족 하자르인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다. 이스라엘 텔 아비브 대학에서 중세사 교수를 지낸 폴리악도 1944년에 <하자르 왕국과 유대교 개종>이란 연구논문을 발표하여 이런 주장에 동조했다. 이들이 하자르 멸망 후 동구권으로 흩어져 아쉬케나지가 되었다는 것이다. 보통 셈족 유대인들에게는 금발이나 푸른 눈이 없으나 아쉬케나지 중에는 백인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이들이 많은 이유라 한다. 근래 인류학과 유전학 연구의 성과로 아슈케나짐과 세파르딤을 비롯한 기타 유대인의 인종학적 차이가 미미하다는 것이 밝혀져 아서 쾨슬러 등이 주장한 아슈케나짐의 하자르 설은 비판을 받고 있다세파라디와 아쉬케나지 사이엔 갈등이 많은데, 세력으로나 영향면에서 아쉬케나지가 압도적이다.
오늘날의 유대인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에는 전 세계의 유대인 인구가 1천8백만 정도였으나 히틀러가 집권하는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로 1천만 정도로 줄어들었다. 오늘날 전 세계 134개국에 1천4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미국에 5백80만, 이스라엘에 5백만 정도가 살고 있다. 그밖에 캐나다, 헝가리, 우크라이나, 프랑스, 아르헨티나, 러시아, 독일 등에 많은 수의 유대인들이 살고 있다. 유럽의 유대인 인구는 2백40만, 라틴 아메리카는 5십만 이상으로 추정된다.
1948년 5월 14일 설립된 이스라엘 공화국은 유대인이면 누구나 시민권을 발급할 수 있게 허용한다. 이는 귀환법 또는 귀향법(the Law of Return)이라고 한다. 이 법률상 조부모 중 유대인이 있거나 유대교로 개종한 이들 모두 유대인으로 간주된다. 또 유대인 이민자들과 가족관계인 비(非)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 이민을 허용한다. 이스라엘의 귀환법이 유대교에서 전통적으로 따르는 유대인의 정의보다 일부러 더 광범위하게 정의한 이유는 유대인의 친척들도 외부에서는 유대인으로 여겨 반유다주의의 피해를 입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유대인이 다수민족인 국가는 이스라엘뿐이다. 유럽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은 곳은 헝가리의 부다페스트로 1백만에서 1백50만 정도가 있다고 추산된다. 유럽에서 유대인 인구가 가장 빨리 증가하고 있는 국가는 독일과 동유럽으로 현재 많은 유대인이 많이 이주해 온다고 한다.
유대인의 영향
오늘날 유대인은 미국, 유럽 등지에 살면서 막강한 영향과 세력을 발휘하고 있다.
역사 속의 유대인 유대인들은 금융업에서 막강한 위력을 발휘해 영국 청교도 혁명 때 혁명파 수장 올리버 크롬웰에게 자금을 지원해 영국에 진출할 수 있었다. 이후 영국에서 명예 혁명으로 윌리엄 3세가 오르자 유대인들은 윌리엄 3세에게 군자금을 지원해 화폐발행권 이권을 얻어냈고 1694년 잉글랜드 은행을 설립했다. 이후에도 영국에 막강한 영향을 끼쳐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직접 수상 자리에 오르기까지 했다.
유대인은 전유럽의 금력을 바탕으로 막강해지기 시작했는데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유대인 국제금융업자 가문인 로스차일드 가문이 그 예로 가문을 크게 일으킨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는 로스차일드 은행을 설립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이후 유럽 전역에 진출해 막강한 돈과 금융을 업고 마이어 암셀 로스차일드의 첫째 아들 암셸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독일 프랑크푸르트, 둘째 아들 잘로몬 로스차일드는 오스트리아 빈, 셋째 아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영국 런던, 넷째 아들 카를 로스차일드 는 이탈리아 나폴리, 다섯째 아들 제임스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프랑스 파리에 각각 진출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아들들 중 셋째 아들 네이선 마이어 로스차일드는 나폴레옹 전쟁 당시 각 동맹국 정부에 1억 파운드씩 빌려주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도 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1875년 수에즈 운하 건설에도 융자해주고 제1차 세계 대전 종전 후 영국 정부에 영향을 주어 유다 국가 건설을 약속하는 밸푸어 선언을 유도하기도 했다. 유럽 전역에 반유대주의가 휩쓸자 로스차일드 가문은 상인 스펜서 모건과 그의 아들이자 훗날 모건 은행을 설립하는 존 피어폰 모건을 앞세워 미국 시장에 진출했다.
유대인은 문화적으로도 많은 족적을 남겼다.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와 음악가 펠릭스 멘델스존, 브와디스와프 슈필만, 헨리크 비에니아프스키, 자니 클레그, 레오니트 크로이처는 유대인이다.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와 러시아 혁명의 레온 트로츠키, 독일의 로자 룩셈부르크 같은 혁명가도 유다인이다.
미국 유대인들은 할리우드 영화 등 영화 산업을 이용해 미국을 백인 중심의 세계로 바꾸었다. 초기 8대 할리우드 영화사인 워너브라더스, 메트로-골드윈-메이어, 파라마운트 픽처스, 20세기 폭스, 유니버설 스튜디오, 콜럼비아 픽처스 등은 유대인이 설립한 회사였다.
미국 역사상 최대 재벌 중 하나였던 존 D. 록펠러는 유대인과 장사 수단이 비슷해 유대인이라는 오해를 받기도 했다.
미국 3대 TV NBC, ABC, CBS-TV는 유대인의 세력 아래에 있다.
현재 미국 유명대학 재학 유대인 비율이 하버드 대학교 30%, 예일 대학교 28%, 보스턴 대학교 24%로 엄청나다.
유대인이 운영하거나 관리하는 LA 타임스, 워싱턴 포스트, 뉴욕타임스는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으로 꼽힌다. 또한 세계적 주간지 <뉴스위크>와 경제 전문기 <더 월스트리트 저널> 등 수많은 신문, 방송, 잡지 등을 유대인이 보유하고 있다.
2000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는 유대인인 조 리버먼이 부통령으로 지명되기도 했고 뉴질랜드의 총리 존 키도 역시 유대인이다.
세계적인 통신사 UPI, AP 역시 유대인 소유이다.
앨런 그린스펀은 FRB 회장의 4회나 맡으며 미국의 경제 대통령이라 불리었다.
전임 세계은행의 총재 폴 울포위츠와 현 총재 로버트 졸릭
스타벅스의 회장 하워드 슐츠
헤지펀드계의 거물 조지 소로스
인텔의 창립자 엔디 글로브
델의 창업자 마이클 델
<뉴욕타임스>의 최고논설위원 월터 리프만
퓰리처상을 제정한 조셉 퓰리처
아이작 스턴
헨리 키신저
오토 릴리엔탈
오스카르 랑게
찰스 린드버그
아놀드 쇤베르크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프란츠 오펜하이머
레너드 번스타인
스타니스와프 울람
스티븐 스필버그
로만 폴란스키
리바이 스트라우스 (미국의 청바지 회사 리바이스 창시자)
이 외에도 미국의 스포츠재벌 랜디 러너와 맬컴 글레이저, 로버트 크래프트, 뉴욕 시장이자 블룸버그 L.P.의 창립자 마이클 블룸버그, 페이스북의 창립자 마크 저커버그, 로버트 오펜하이머, 바뤼흐 스피노자, 발터 베냐민, 노암 촘스키, 에리히 프롬, 마르크 샤갈, 스티븐 발머 등 미국의 세계적 거물 인사들도 모두 유대인이다.
미국 100대 기업의 40%가 모두 유대인의 소유이다. 종종 빌 게이츠가 유대인으로 오해받는 경우도 있다. (그는 스코틀랜드계이다.)
유명한 사진 작가 로버트 카파와 데이비드 시무어
프랑스 프랑스 굴지의 통신사 AFP는 유대인이 소유하고 있다.
프랑스의 자동차 회사 시트로앵의 창시자 앙드레 시트로앵
국제통화기금의 총재 도미니크 스트로스 칸 전 프랑스 재무장관
영국 파울 율리우스 로이터 (로이터 통신사의 창시자)
영국방송협회(BBC)도 유대인의 영향력 아래에 있다.
광고재벌 찰스 사치
이탈리아 이탈리아의 컴퓨터 회사 올리베티의 창시자 카밀로 올리베티 역시 유대인이다.
러시아 소련의 혁명가이자 제1대소련 공산당 서기장 블라디미르 레닌
소련의 정치가 레온 트로츠키
소비에트 연방의 비밀경찰이던 겐리흐 야고다
러시아의 억만장자 로만 아브라모비치
옛 유코스의 미하일 호도르코프스키
러시아의 미디어 재벌 보리스 베레좁스키
독일 심리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
알프레드 아들러
막스 아이팅곤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안나 제거스
야코프 바서만
프란츠 카프카
전신학자 막스 라빈
수학자 에밀 뇌터
헤르만 민코프스키
레오폴트 크로네커
게오르크 칸토어
생리학자 한스 아돌프 크리브스
화학자 크리츠 하버
천문학자 카를 슈바르츠실트
철학자 에드문트 후설
폴란드 세계적인 인공어 에스페란토를 창시한 라자로 루드비코 자멘호프 박사
아르헨티나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축구감독을 역임했던 호세 페케르만. 아르헨티나는 월드컵 우승 2회, 준우승 2회에 빛나는 축구의 명가이며 월드컵 무대에서도 유대인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기타 노벨상을 받은 유대인이 현재까지 무려 179명에 달한다.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유대인은 아니지만 유대인과 결혼하였다.
올림픽에서도 유대인의 활약이 보였다. 20세기 초반에 펜싱의 종주국 헝가리의 우승을 기여한 선수들도 모두 유대인이었다. 4개의 올림픽에 출전하여 총7개의 메달을 획득한 폴란드의 육상 선수 이레나 셰빈스카, 미국의 수영 선수들 중에 뮌헨 올림픽 7관왕 마크 스피츠와 5개의 올림픽에 출전하여 총 12개의 메달을 획득한 다라 토레스 모두 유대인이다.
세계 5대 메이저 식량 회사 중 3개가, 세계 7대 슈퍼메이저 석유 회사 중 6개가 유대인의 소유이다.
유대인의 특징
상술
유대인들이 상업에서 많은 업적을 남긴 이유를 정성호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상업에서의 신용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계약에서의 서명을 신중하게 한다.계약내용을 확인하지 않고 서명하면 위험하기 때문이다.
무엇이든지 돈이 될 수 있음을 생각한다.
유럽의 유대인들은 직업선택에서 제한을 받는 인종차별을 받았으므로,기독교인들이 하지 않는 상업을 해야 했다.그런데 유대인 박해가 진행되면 망명해야 했으므로 현금이 중요하게 여겨졌다.
중국의 유대인
중국 송나라 시대에 유대인들이 서역을 경유하여 중국에 들어와 살았다고 한다. 그들이 사용한 성씨로는 리(李), 장(张), 안(俺), 진(金)씨 등이 있다고 한다. 이들의 일부가 고려로 들어오기도 했다. 북송의 카이펑(开封)에 거주하여 카이펑유대인(开封犹太人) 또는 이츠러예(一赐乐业, 일사락업)인(人)으로 불렸다. 이츠러예(一赐乐业)는 북송 황제가 하사한 이름으로 이스라엘의 음역이다. 중국에 진출한 이슬람교의 무슬림처럼 유대인도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 종교신앙으로 인해,북송시대의 중국인들은 이 두 집단 모두를 고교(古教), 남모회회(藍帽回回) 등으로 불렀으며, 유대인을 죽흘(竹忽), 주오(主吾), 주호득(朱乎得), 축호(祝虎), 주혁(珠赫) 등으로 불렀다. 북송 카이펑의 이츠러예인들은 한족과 같이 과거시험을 칠 수 있었으며,명(明)이 건국되자,명 태조 주원장(朱元璋)은 색목인(色目人), 회회인(回回人)은 본족내 통혼(本族内通婚)을 불허함을 명문으로 규정하였다.
첫댓글 카페지기가 회원님께 드리는 글
카페에 후원이 필요합니다 후원이 안돼니
지난달 공과금도 못내고 있습니다
하루하루 지내기가 힘듭니다 용기를 주시길 바랍니다
카페를 어지간해야 끌고 가는데 유플러스 집 인터넷비와 휴대전화
통신비도 못내고 카페도 운영이 어렵게 되었습니다
후원이 없으니 답답한 심정을 털어놓습니다
먹을게 없으니 늘 아쉬운 소리를 하게됩니다
쌀도 김치도 없어 사야하고 집세..임대료와 통신비 공과금을 내야합니다
오늘은 천사의 손길이 되어 주시는 분이 계셔서
용기를 주시길 간절함으로 기대합니다 죄송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평안하시길 기도드립니다 감사합니다^^*
국민은행 229101-04-170848 예금주.황종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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