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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Tour-390회, 히말라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
오늘은 2015년 5월 6일 수요일로, 서초동 투모로 법무사사무소에서 우리들 독서클럽 ‘Book Tour’ 390회 모임이 있는 날이다.
오늘 모임에는 내가 발제자로 나섰다.
사실은 호머의 대서사시 중 하나인 ‘오뒷세이아’로 독후감 발표를 하려다가 갑자기 바꿨다.
따끈따끈한 책 한 권이 내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주 최근인 지난 2015년 4월 17일에 초판 1쇄가 발행되어서 아직 한 달도 채 넘기지 않은 신간이다.
나는 사실 이 책을 출판되기도 전인 원고일 때에 이미 읽었다.
교정을 도와줄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또 읽었다.
출판된 책으로 읽는 것도 나름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서, 엊그제 내 고향땅 문경 교촌 ‘햇비농원’에 들렀을 때, 그 하루에 다 읽었다.
그래서 따끈따끈하다고 했다.
그리고 저자의 인간미가 따뜻하게 녹아있기에도 그랬다.
알피니스트 이상배가 쓴 ‘히말라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라는 제목의 책이 바로 그 책이다.
나와 저자와는 특별한 인연도 있다.
경북 문경을 같은 고향으로 둔 것이 그렇고, 내 중학교 동문으로 절친인 백파 오상수 친구의 조카이기도 한 것이 그렇고, 저 지난해 3월로 거슬러 저자를 대장으로 해서 15일 일정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드트레킹에 나서서, 해발 5,416m의 초롱라 고개를 넘은 것도 그렇다.
그러나 대면한 것은 딱 2년이다.
그래도 그 인연으로, 지난 4월 25일 토요일 오후 3시에, 부산의 명문 책방인 서면의 ‘영광도서’ 4층 문화홀에서 있었던 그 책 출판기념회에, 아내를 비롯해서, 내가 카페지기인 우리들 Daum카페 ‘아침이슬 그리고 햇비’ 회원들 몇과 함께 발걸음 했고, 내 직접 단상에 올라 축사까지 했다.
짧은 인연이긴 하지만, 그동안 그의 ‘내면세계의 따뜻함’을 다 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꿴 그의 모습을 축사에서 낱낱이 소개했다.
‘나마스떼’ ‘청자연적, 골통’ ‘산 따라 바람 따라’ ‘글로벌 리더’ ‘초롱라 고개’ ‘뜨거운 눈물’ ‘내 나이가 어때서’ ‘문득 생각 곧장 실행’ ‘도전, 집념, 조화’ ‘마지막까지 힘 내슈!’라는 제목으로, 그동안 내 눈에 담기고 마음에 담긴 그의 삶 모두를 끄집어내줬다.
Daum사이트에서 그 책에 대한 소개의 글을 찾아봤다.
책이 시중에 배포된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인지, 아직은 출판사 ‘신지니’의 서평밖에 없었다.
그 서평을 여기 그대로 옮겨 적는다.
▶ 늦깎이 산악인, 히말라야에서 배우다
남들이 인정하는 안정적인 공무원 생활을 마감하고 전문 산악인의 삶을 시작한 저자가 도전하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책이다. 이 책은 물질문명에 지친 현대인들에게 자연과 함께하며 온몸으로 산을 체험하는 산악인의 정신을 나타내고 있다. 더욱이 산을 타는 사람들 사이의 끈끈한 우정과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산악인의 삶 등을 다뤄, 우리가 잊고 지냈던 자연으로부터 깨달을 수 있는 정신적 가치를 되새긴다. 공시생이라는 신조어가 등장할 만큼 취업을 앞둔 이들에게 선망의 대상으로 자리 잡힌 공무원. 전기 엔지니어로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산에 오르는 아마추어 산악인이었던 저자는 공무원 생활을 박차고 산악인이라는 새로운 길을 준비하면서, 현대인에게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것은 ‘안정된 삶’이 아닌 ‘좋아하는 일’, ‘인연’, ‘행복’이라는 소박한 데 있음을 일깨우고 있다.
▶ 극한의 추위 속,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아로새긴 배움
손만 뻗으면 뭐든지 쉽게 얻을 수 있는 무미건조한 도회지의 삶에서 벗어나 모든 것을 훌훌 털어버리고 오로지 자연과 함께하며 산을 정복하는 데서 저자는 커다란 성취감을 깨달았고 인간의 ‘노동의 가치’를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함께 등반 일정에 올랐던 산악인 친구가 불귀의 객이 되어 유명을 달리했던 일이나, 현지인 셰르파(등반 도우미)와 정을 나누었던 이야기, 국적과 언어가 다르지만 끈끈한 우정을 나누었던 산악인 친구 노구치 켄이 전개했던 환경관련 캠페인 이야기 등 산악인으로 살고 있는 저자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누구나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처럼 이상을 현실로 이루려는 생각을 갖곤 하지만 대부분 생각에만 그칠 뿐, 셰익스피어의 『햄릿』처럼 고민만 하다가 아무것도 이루지 못하는 게 태반이다. 『히말라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에는 단순히 취미로 등반을 즐기던 저자를 에베레스트, 아콩카구아, 킬리만자로 등 세계 8천미터급 고산의 최고봉으로 오르게끔 한 저자의 신념과 늘 자연에서 세상사를 배우고자 하는 저자의 사유가 깃들어 있다.
▶ “배운 게 있으면 가르치라”는 히말라야의 뜻대로/청소년들에게 참다운 성장을 가르치다
히말라야에서는 천천히 걷고, 천천히 먹고, 천천히 생각해야 한다. 자신의 체력을 과신하거나 자신의 이성을 과신해서는 안 된다. 오로지 오체투지 하듯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고 대지에 밀착시켜야 한다. 이렇게 산을 존중하면 내가 산이 된다. 청소년들과 함께 산에 오르다 보면 표지석에 함부로 걸터앉는 아이들이 있다. 나는 그 아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당부한다. 내 몸이 조금 편하자고 쉽게 군림하려 드는 태도로는 산을 배우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_「히말라야는 위대한 스승」 중에서
저자는 히말라야를 두고 “위대한 스승”이라 표현한다. 히말라야의 고산들은 산소가 충분하지 않아 스스로는 풀 한 포기 갖지 못했지만 산자락까지 생명수를 공급해주는데, 저자는 이를 두고 인간 세계가 자연에서 배워야 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평범한 공무원 생활로 인생을 허비하고 싶지 않았던 저자는 과감하게 사직서를 제출하고 꿈을 좇기 위해 영어학원을 다니면서 무명 산악인으로서 스폰서를 구하기 위해 고군분투하였고, 다양한 활동을 통해 히말라야에서 배웠던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청소년 힐링 캠프’, ‘사제동행 영남알프스 종주’ 등 저자는 여러 가지 청소년 관련 프로그램을 진행해왔는데, 그중 가해학생에게는 뉘우칠 기회를 주고, 피해학생들에게는 마음의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는 ‘노란 손수건’ 프로그램은 팝송의 가사 속에서 그 이름을 찾았다. 저자는 토니 올랜도와 던이 1973년에 발표한 ‘Tie a Yellow Ribbon Round the Ole Oak Tree’라는 팝송을 언급하며, 잘못된 길로 접어든 청소년들에게 ‘불량청소년’이라는 ‘낙인’을 지울 것이 아니라, 그들과 같은 걸음으로 산을 ‘동행’하며 용서와 기다림의 자세를 가진다면 청소년들에게 참다운 성장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라는 지혜를 준다.//
다음은 저자 이상배에 대한 소개의 글이다.
90년 미국 요세미티 100주년 암벽등반을 시작으로 40대 초반부터 등반을 시작해 초오유, 아콩가구아, 가셔브룸2봉, 로체, 아마다블람, 메라피크, 히무룽, 그리고 2007년에는 세계 최고봉 에베레스트를 오른 산악인이다. 남미(아콩가구아), 북미(맥킨리), 아시아(에베레스트), 유럽(엘부르즈), 아프리카(킬리만자로)의 세계 5대륙 최고봉을 등정했으며, 한 해도 쉬지 않고 해외 원정을 미친 듯이 다니며 역마살 인생을 멈추지 않고 있다. 체육훈장 기린장을 수상하였으며, 현재 사단법인 영남등산문화센타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또한 영남등산문화센타 부설 등산학교에서 산악동호인들에게 산악인의 삶을 가르치고, 청소년 힐링캠프 ‘노란 손수건’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학교 부적응 학생들에게 산이 주는 가르침을 전수하고 있다.//
책의 목차는 이렇다.
1장 에베레스트 삼수생 늦깎이 산악인
요세미티에서 꿈을 꾸다/나 자신에게 투자한다는 것/첫 히말라야 초오유 봉
늦깎이 장애인 등반가
2장 내 인생의 히말라야
히말라야는 위대한 스승/왼발은 저승, 오른발은 이승/불편은 받아들이면 편안해진다/히말라야는 나의 종교/히말라야 밥상/야크와 닮은 내 모습/등산도 학문이다/죽음을 기억하는 삶/히말라야 첫 원정과 인생 수업/산악인이자 생활인으로 사는 법
3장 내 마음의 산들
지구의 용마루, 에베레스트/두 번이나 살아서 돌아왔다/에베레스트 삼수/고요의 바다에 우뚝 서다/히말라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반짝이는 얼음창고, 히무룽/상행 카라반이 시작되다/히말라야는 몸살을 앓고 있다/탐험 같은 카라반/베이스캠프 입성/열리지 않는 히무룽/아쉬운 퇴각/재도전/간절한 염원을 담은 라마제/노 프라블럼/어머니의 보석상자, 아마다블람/청춘의 카라반/고소증/아마다블람의 기슭/1차 공격조 편성/1차 등정 실패/아마다블람의 정상에 서다/신령스러운 봉우리, 옴비가찬으로/절반의 성공/붉은 바위봉우리, 드락마르포리/아무도 가지 않은 길/나와 히말라야의 드라마
4장 참다운 성장
노란 손수건/용서와 기다림/인내는 쓰다/어설픈 가르침은 싫어요/위대한 스승은 가슴에 불을 지른다/탐험가의 세계는 왕복이 없는 편도다/산은 길이 끝난 데서 시작된다//
우리나라 대표적 산악인인 엄홍길과 법무부장관을 지낸 재단법인 행복세상 김성호 이사장이 추천사를 붙였다.
엄홍길 산악인은 ‘자기는 손금도 마운틴의 M자라는 이 산 사나이’라는 제목의 추천사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이상배 씨는 억센 경상도 사투리로 “내는 손금도 M자, 마운틴의 첫 글자”라고 말하고 다니는 산 사나이다.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보는 법이다. 이 대장은 그렇게 자신의 손바닥에서도 M자를 찾아내 산꾼 인생을 살고자 하는 열정을 태워온 사람이다. 그런 이 대장이 마흔셋이란 나이가 되어서야 알피니즘을 구현하는 대상으로서의 산을 만나게 된 것은 아쉽다.」
「그의 기록이 실로 놀라운 이유는, 한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를 무릅쓰고 이룩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는 패러글라이딩을 하다가 추락하여 척추가 내려앉았으며, 한쪽 다리를 잘라야 한다는 진단이 나올 정도의 극심한 골절상을 입었으나 인공 철심을 박고 재활했다. 그러나 철심을 박은 한쪽 다리는 가늘어진 상태로 끝내 원상회복되지 못했다고 한다. 그런 다리로 그는 남보다 일찍 일어나 움직이고, 남보다 늦게까지 걷는 노력으로 8,000m 봉우리를 등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저자의 앞날에 히말라야 여신의 무궁한 축복을 보낸다고 했다.
김성호 전 법무부장관은 ‘은빛 꿈의 알피니스트’라는 제목의 추천사에서, 10여 년 전으로 거슬러, 곧 공직자로서 사회에 첫 발걸음을 내디디게 될 맏이에게 ‘치열하면서도 풋풋한 인생이기를!’이라는 제목을 붙여 쓴 편지글을 인용해서 덕담을 담고 있었다.
그 대목이다.
「첫째는 모든 것의 중심에 인간을 두라는 것이고, 둘째는 열정적으로 살라는 것이며, 셋째는 항상 떳떳한 처신을 하라는 것이고, 마지막 넷째는 가족에 대한 책무였습니다. 특히 둘째 소망인 열정적으로 살라는 단원에서 공직자의 요건은 ‘MAP’, 즉 도덕성(Morality)과 능력(Ability)과 열정(Passion)이라고 했습니다. 그중에서도 열정은 조직의 성패는 물론 개인의 성공을 좌우하는 절대적인 요소라고 강조하면서 ‘열정적으로 산다는 것’은 한 가지 목표를 향해 ‘미친다’라는 뜻이라고 비유적 풀이도 해줬습니다.」
그러면서 그런 삶을 살아온 사람이 바로 알피니스트인 저자 이상배라고 했다.
그리고 끝으로 이와 같은 기원을 더 보탰다.
「은빛 꿈의 알피니스트요, 휴머니스트인 이상배 씨의 글을 읽으면서 인간난로 같은 따스함을 보았습니다. 그의 앞날에 신의 은총이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렇게 다들 저자를 인간적 알피니스트로 본 것이다.
저자 또한 본문에 들어가기 전에 ‘책을 펴내며’라는 제목으로 그가 책을 펴내게 된 동기를 썼다.
그 전문을 여기 그대로 옮겨 적는다.
지구상에서 가장 강력한 상징물이라고 한다면 아무래도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주는 히말라야라는 큰 산일 것이다.
사람보다 신(神)이 많다는 그 영역에 다가갔을 때 내 존재는 너무도 작아 보였다. 여인을 사랑하는 데 조건이 없듯, 무작정 산이 좋아 서 1990년도에 요세미티 암벽등반에 덤벼들었다가 충격을 받았고, 1996년에는 히말라야 고봉 초오유(8,201m)와 인상적인 첫 만남을 가짐으로써 나를 산에 더 미치게 만들었다. 꿈에 그리던 히말라야를 한 번만 갔다 오겠다고 한 것이 고봉등정의 희열감으로 이어지는 영속효과를 통해 내 역마살의 등산 인생을 가만두지 않았다.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그곳을 들락날락하다가 깨지고 얻어터지고 상처도 많이 받았다. 때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었지만 당당하게 버티고 끝까지 최선을 다했다. 결과는 아직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다. ‘먼 훗날 인생을 뒤돌아볼 때, 하지도 않았던 일을 후회하기보다는 했던 일을 후회하고 싶다.’던 조지 링컨의 말을 기억하고 있었다.
야크처럼 천천히 걸어가며 한 봉우리씩 오를 때마다 아무도 느끼지 못하는 성취감에 도취되기도 했다. 굶주림과 체력이 고갈되어 얼음절벽으로 떨어졌다가 홀어머니께 아들 먼저 떠난다는 마지막 하직 인사도 드리면서 한없이 울었다. 저승문턱에까지 가서 얼굴 없는 저승사자도 만나고 왔다.
이렇게 나는 살아 돌아올 수 없는 곳에서 기적적으로 생환했다. 8,000m 이상에서 실종된다는 것은 사실상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데 나는 살아서 돌아왔다. 내가 생각해도 살아 돌아왔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히말라야 원정대는 아무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진정 얻어야 할 것은 고작 하나뿐인데 버려야 할 것은 많다. 원정ㄴ 길에 오를 때마다 책임감 때문에 몸과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래서 대장은 늘 외롭고 고독하다는 이야기를 내뱉는다.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인간관계만큼 중요한 것도 없을 것이다. 타인에게 도움도 줄 수 있고 받을 수도 있는 일이 다반사 아닌 가. 평소에 주고받는(Give&Take) 정신으로 인간관계를 잘 만들어놓아야 힘든 원정에서 돌아왔을 때 상처받는 일도 적을 것이고 사회생활 하는데 원만해진다.
나는 그동안 깨달음의 땅인 히말라야 원정을 통해 정신의 견고함과 영혼이 맑아지는 경험을 얻었다.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는 자신감도 배웠으며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결코 포기하지 않겠다는 인생의 노하우도 터득했다.
히말라야로 가는 길은 언제나 모험과 탐험 같은 고통스러운 길이었다. 끊임없이 쌓이는 눈 속을 헤치며 걸어야 했고, 산소가 희박한 공기 속에서 엄습하는 추위에 시달려야 했다. 절벽 위로 만들어진 가파른 길은 기어서 올라야 했다. 하지만 히말라야라는 위대한 스승을 통해 학생의 신분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정말 인생 공부 톡톡히 하고 왔다.
히말라야와 그곳 사람들에게 배우고 경험한 것을 돌아와서는 지역 사람들에게 가르치고 청소년들에게 선도프로그램을 통해 교육하며 활동하고 있다. 특히 청소년 선도프로그램인 ‘노란 손수건’은 용서와 기다림을 뜻하는 교육 프로그램으로서 호기심 많은 청소년들에게 산악 힐링캠프 활동이 정말 좋은 효과를 보고 있다고 자부한다. 경험처럼 좋은 기술은 없다고 했다. 수십 년 다녔던 히말라야 그곳에서 나는 많은 것을 경험하고 깨우쳤다.
미국의 사상가 에머슨은 ‘역사에 기록된 모든 성취는 열정의 승리다.’, ‘열정 없이 이루어진 위대한일은 없다.’라는 말을 했다. 열정은 내안의 신(神)이 라고 한다. 그동안 신들린 사람처럼 산을 헤매고 다녔다. 천방지축으로 뛰어다닌 나를 묵묵히 지원해주고 아직도 뒷바라지하면서 힘들었을 텐데 도망가지 않고 지금까지 살아준 아내가 내게는 최고의 후원자이기도 하다. 살아 돌아온 지금, 아내에게 늘 미안함을 지울 수 없다.
늦깎이 고산등반가인 나는 산악활동처럼 인간의 휴머니즘과 활기찬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일은 흔치 않다고 생각한다. 문명에서 찌든 때가, 더러움을 타지 않는 높은 산에서 말끔히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원정을 떠날 때마다 메모해둔 일기장이 한 권의 책으로 나오는 데 도움주신 분들이 있다. 원고정리를 맡아주신 이창우 선생님과 번역을 도와주신 김미현 선생님, 그리고 산지니 출판사 강수걸 사장님께도 진심으로 감사를 드린다.//
저자는 본문의 첫 글인 ‘요세미티에서 꿈을 꾸다’에서 그가 알피니스트의 길을 걷게 된 단초를 이렇게 썼다.
「지방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틈틈이 산에 오르는 게 그저 취미였던 나 이상배는 말하자면 늦깎이 산악인이다. 이런 나를 알피니스트라 부르는 산악인의 길로 접어들게 만든 것은 미국의 네바다 주에 있는 국립공원 요세미티 암벽등반이었다.」
그 등반에서 그가 그동안 얼마나 작은 세상에 갇혀 있었는지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에게서 자신의 꿈을 벤치마킹했다고 했다.
그 대목이다.
「사람들은 나더러 미쳤다고 했다. 제대로 된 인간으로 봐주질 않았다. ‘히말라야의 꿈 때문에 멀쩡한 직장까지 때려치우다니?’하며 돈키호테처럼 괴짜 같은 놈이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돈키호테라도 상관이 없었다. 아니 나는 차라리 라만차의 기사 돈키호테가 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룰 수 없는 꿈을 꾸고, 이길 수 없는 적과 싸우며, 이룰 수 없는 사랑을 하고, 견딜 수 없는 고통을 견디고, 잡을 수 없는 저 하늘의 별도 잡자”던 돈키호테는 인간이 꿈꾸는 자유의 표상이다. 돈키호테의 낭만주의는 현대인이 잃어버린 꿈을 일깨우는 근원적인 힘이다.」
산을 타고자하는 저자의 꿈은 그저 이루어진 것이 아니었다.
세계적인 탐험가들의 경험담을 읽고 또 읽는 것에서부터, 저자의 돈키호테 식 모험은 시작됐다고 했다.
그 대목이다.
「공직 생활을 접은 후 나는 히말라야에 대한 원정보고서도 많이 읽어보고 전문서족도 구입해서 번역을 해가며 공부를 했다.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봉 최초의 8,000m를 오른 프랑스의 모리스 에르족이나 세계 최초로 8,000m 14개봉 완등을 이룩한 이탈리아 등반가 라인홀트 메스너가 쓴 책을 비롯해 그린랜드를 종단하고 북극해 12,000km를 개썰매로 횡단한 우에무라 나오미의 탐험기를 탐독했다. 세계적인 탐험가들이 던지는 메시지는 강렬하게 나를 유혹했다.」
프랑스 산악인인 알랑 드 샤뗄리우스가 ‘등산은 길이 끝나는 데서부터 시작된다.’라고 말했던 것처럼, 극한의 상황에서 몸으로 써내려간 그들의 한마디 한마디가 저자에게 큰 힘이 되었다고 했다.
저자에게 있어 첫 히말라야는 청록의 여신이라고 불리는 8,201m 초오유 봉이라고 했다.
마흔세 살의 늦깎이 ‘고3 등반인’인 저자에게 있어 그 첫 원정은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절박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수백 번 산악훈련의 과정을 거쳤다고 했다.
그 대목이다.
「아무리 철저한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산이 허락하지 않으면 오를 수 없다. 나는 당시 히말라야 원정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라고 생각했고 가족들에게도 딱 한 번만 다녀오겠다고 다짐하고 떠났다. 신의 가호가 있었기 때문이었을까? 나는 첫 원정을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청록의 여신 초오유에 오른 덕분에 그 후로도 또 새로운 스폰서를 구할 수 있었으며, 에베레스트를 비롯해 남미 최고봉인 아콩카구아, 아프리카 대륙의 최고봉인 킬리만자로 등 세계 5대륙의 최고봉에 오르게 되었고 매년 히말라야 원정길에 오르는 운명이 되었다.」
그동안 저자가 오른 봉우리는 초오유 봉을 비롯해서 세계 최고봉이라는 에베레스트(8,850m), 아콩카구아(6,959m), 가셔브룸 2봉(8,035m), 로체(8,516m), 아마다블람(6,812m), 메라피크 중앙봉(6,461m), 히무룽(7,126m), 드락마르포리(6,185m)등이라고 했다.
특히 지난해인 2014년 4월에 등정한 ‘붉은 바위봉우리’라는 뜻의 드락마르포리는 그동안 사람의 발자취가 전혀 없었던 처녀봉으로 공산주의 색체가 강했던 네팔이 민주화가 된 기념으로 네팔 정부에서 그 첫 등정의 기회를 저자에게 선물한 봉우리라고 했다.
그 등정의 인간적 기록서가 곧 이 책이다.
저자는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다고 했다.
그 고비를 ‘죽음을 기억하는 삶’에서 이렇게 썼다.
「히말라야 등반 도중에 작은 실수로 설벽에서 추락사했던 산악인도 있었다. 살인적인 추위를 견디지 못해 결국 동상에 걸린 손가락과 발가락을 절단했던 이들도 있었으며, 심지어 정상에서 내려오는 도중에 한 외국 산악인이 얼어붙은 채 죽어 있는 주검을 목격하기도 하였다. 나에게도 이러한 죽음의 그림자가 닥쳐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크레바스에 빠진 적도 있었고, 사방에서 날아다니는 얼음덩어리에 얻어맞을 뻔했으며, 강풍에 몸이 날아가기도 했다. 로프에 매달려 얼음벽에서 오도 가도 못하는 절체절명의 순간도 있었으며, 눈사태로 자다가 텐트 속에 갇힌 채 산 아래쪽으로 떠밀려 간 적도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찔한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렇게 늘 죽음과 가까이 살면서도 한계상황에 부닥치면 삶에 대한 절절한 의지를 더욱 느끼게 마련이다.」
저자는 2006년 두 번째 에베레스트 도전에서 바로 눈앞에 정상을 두고 기상 악화와 산소 부족으로 어쩔 수 없이 하산하게 되었을 때 죽음의 위기를 맞았다고 했다.
그 대목이다.
「안자일렌으로 고통스럽게 하산하던 어떤 시점에서 텐지가 줄을 풀고 도망치듯이 내려갔다. 기상 악화와 산소 부족으로 인해 나의 하산 속도가 너무 더딘 탓이었다. 히말라야의 세찬 강풍과 혹독한 추위 속에 나는 홀로 남겨지게 되었다. 일순간 서운함과 배신감이 몰려왔다. 그러나 텐지의 판단이 옳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잠도 설치고 제대로 먹지도 못해 육신의 에너지가 고갈된 상태라 한 발짝 움직이는 것조차 너무 힘들고 고통스러웠다. 이런 나와 함께 하산하다간 둘 다 무사하기 어렵겠다고 판단한 것일 수도 있다. 살기 위해서는 혼자 힘으로 내려가야 하는데 몸은 술 취한 사람 같았다. 정신도 희미해져갔다. 그러다 어느 순간, 어둠 속에서 잡고 내려가던 생명줄인 고정 로프마저 놓치고 말았다. 그 순간 내 몸은 얼음절벽 아래로 추락하여 다시는 올 수 없는 황천길로 초고속으로 떨어졌다.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파노라마처럼 어떤 상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마 수 초 후엔 어느 절벽으로 떨어져 온몸이 박살 나겠지? 그리고 어머니가 떠올랐다. 저승문에 들어서면서 “어머니 불효자인 아들 먼저 갑니다.”하고 마지막 하직 인사를 올렸다.」
2007년 5월 18일, 에베레스트 삼수 끝에 결국 저자는 해발 8,850m의 세계 최고봉에 섰다.
찬란한 그 극복의 순간에서, 그는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를 생각 속에서 떠올렸다고 했다.
그 대목이다.
「‘고난과 역경이 우리 인생에 있어서 아름다운 이유는 그 속에서 발견하는 오아시스와 같은 배움이 있기 때문’이라고 ‘어린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는 말했다. 히말라야도 오아시스를 감춰두고 있다. 고난과 고통을 극복했을 때 맛보는 기쁨의 샘. 이번 등정을 통해 나를 긍정할 수 있었고 나에게 기회를 준 히말라야에게 무한히 감사할 수 있었다. 히말라야 등반과정에서 극한상황을 만날 때마다 오해받는 일도 있었고 나를 힘들게 하는 일도 있었지만 결국 히말라야가 감추어둔 오아시스에서 지상 최고의 배움의 샘물을 맛보고 새로운 인간으로 재탄생된 후 문명세계로 무사귀한 한 것이다.」
‘할 수 있거나 꿈꿀 수 있는 게 무엇이건 당장 시작하라. 대담성에는 천재성과 힘과 마법이 들어 있다.’
괴테의 말이라고 했다.
그래서 저자는 30대 후반부터 늦깎이로 본격적인 산악활동을 시작했고, 쉰다섯의 나이에 해발 8,035m의 가셔브룸 2봉 원정을 떠났다고 했다.
‘히말라야는 나이를 묻지 않는다’라면서 책을 썼지만, 90kg을 훌쩍 넘는 체중에 똥배이기까지 한 그 몸으로 해발 5,416m의 초롱라 고개를 넘어본 나로서는 ‘히말라야는 몸을 묻지 않는다. 묻는 건 오로지 의지 그 하나뿐이다.’라고 외치고 싶다.
저자는 그렇게 히말라야를 오르면서 겸손을 배웠다고 했다.
그 대목이다.
「히말라야는 광막한 우주를 몸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같은 체험이다. 압도적인 자연이 나를 한없이 겸손하게 만드는 것이다. 나를 겸손한 인간으로 만드는 산, 내가 사랑하는 산은 나를 참다운 인간으로 고향시키는 것이다. 라인홀트 매스너의 말처럼 “나는 산을 정복하려고 온 게 아니다. 또 영웅이 되어 돌아가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는 두려움을 통해서 이 세계를 알고 싶고 도 새롭게 느끼고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산을 배우는 영원한 학생이다.」
그렇게 배운 끝에 그는 산에 대해서 이렇게 정리했다.
「그렇다! 산은 산자락에서 정상까지 모두 산이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쌓이지 않으면 정상에 도달할 수가 없다. 정상을 딛는 마지막 한 걸음만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산자락부터 시작된 한 걸음이 똑같은 의미가 있다. 산은 과정 하나하나를 소중히 여기는 자에게 자신의 품을 열어준다. 계곡을 흐르는 시냇물과 지리한 푸석바위의 너덜지대, 수직의 청빙지대 모두 산의 식구들이고 그 모두를 경외의 눈빛으로 대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산의 품에 안길 수 있는 것이다.」
내 늘 주위를 향해서 말하기를, 자신이 세운 목표에 도달하는 것만이 성공이 아니라, 거기에 이르는 과정 하나하나가 모두 성공의 의미가 있다고 했던, 내 뜻과 하나 다르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이렇게 외쳤다.
「히말라야는 위대한 스승이다.」
저자는 바람이 많이 불던 날, 억지로 패러글라이더를 띄웠다가 공중에서 날개가 휘말려 추락하는 사고로 한쪽 다리에 인공 철심을 박아야 하는 장애인이 되었다고 했고, 그 장애를 가지고 산을 올랐다고 했고, 다른 정상인들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일찍 일어나 움직여야 했고, 더 늦게까지 걸어야 했다고 했다.
저 지난해 3월에 저자와 함께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라운드트레킹에 나섰을 때 그때의 내 모습과 일맥상통하는 대목이다.
저자는 그 장애를 자기 성숙의 계기로 삼았다고 했다.
그 대목이다.
「장애는 나에게 시련이기도 했지만 나를 성숙시키는 계기이기도 했다. 나는 내 꿈의 산에 오르기 위해 장애를 이겨야만 했다. 장애를 이기는 과정에서 내가 더욱 단단해진 것도 의미가 없지는 않겠지만 나와 같은 장애를 가진 이들에 대한 연민과 공감의 능력을 갖게 된 게 더욱 소중한 것이었다. 그것은 내가 장애를 겪지 않았다면 얻지 못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나의 장애 덕분에 세상의 ‘그늘’을 보게 되었다. 가난의 그늘도 있고, 노인들이 겪는 나이의 그늘도 있다. 성소수자라는 그늘, 머나먼 타국에서 돈을 벌어 고향집으로 송금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이 겪는 차별의 그늘, 공부를 못한다고 구박받는 꼴찌들의 그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겪는 그늘 등 세상은 어찌 보면 그늘투성이다. 그늘을 가진 사람들은 타인의 아픔을 자신의 그늘에 비추어 공감할 수 있다. 양지만 좇는 사람이라면 전혀 느낄 수 없는 아름을 그늘이 있는 사람들은 알 수가 있다.」
그리고 이렇게 한 마디 더 보탰다.
「장애란 그늘은 인간에게 더 큰 공감과 연민의 정서를 갖게 해주고 더 넓고 따뜻하게 세상을 품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또 이렇게 문장 하나를 정리했다.
「양지는 그늘 덕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뭇잎 사이로 반짝이는 햇빛도 나무 그늘이 있어 그 영롱함이 더욱 빛난다.」
그의 책 마무리는 이랬다.
「나는 오늘도 ‘삶의 유일한 의미는 인류에게 헌신하는 일’이라던 톨스토이의 말처럼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남은 인생을 바치리라 마음을 먹는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알피니스트, 곧 이상배 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