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군의 거센 공세로 방어에 급급한 우크라이나군에게 숨통이 트였다. 미 하원이 지난해 10월부터 6개월 가까이 미뤄온 총 953억 4천만 달러 규모의 대외 지원 안보 예산안을 20일 통과시켰다. 이중 3분의 2가량인 608억 4천만 달러가 우크라이나의 몫이다.
미 국방부는 이 자금으로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과 155㎜ 포탄 등 우크라이나에게 긴급히 필요로 하는 군수품을 보낼 수 있게 됐다. 미국 워싱턴 포스트(WP)는 "무기 제공에는 1주일이 채 걸리지 않을 것"으로 전망했다.
미 하원은 또 이스라엘(260억 달러)과 대만 등 인도태평양 지역(81억 달러)을 지원하는 예산안과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몰수해 우크라이나 재건에 사용할 수 있도록 허용하는 법안을 가결했다.
이 법안은 내주 상원 표결을 거쳐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의 서명으로 법제화한다. 미 백악관은 법안 서명후 미국의 재고 무기 중 일부를 즉각 우크라이나에 제공할 것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코메르산트 등 러시아 매체에 따르면 미 하원은 20일 본회의에서 608억 4천만 달러(약 84조원) 규모의 대(對)우크라 지원 예산안을 찬성 311표, 반대 112표로, 260억 달러(약 36조원)의 대이스라엘 안보 지원안을 찬성 366표, 반대 58표로, 대만을 중심으로 미국의 인도·태평양 동맹 및 파트너의 안보 강화를 돕는 81억 달러(약 11조원)의 지원안을 찬성 385표, 반대 34표로 각각 가결했다.
미 하원의 대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안 가결 결과/사진출처:스트라나.ua
또 동결 러시아 자산의 몰수와 중국계 IT 플랫폼 '틱톡'의 강제 매각, 러시아와 이란 등에 대한 제재 방안 등을 담은 4번째 법안은 찬성 360표, 반대 58표로 통과됐다.
미 행정부는 당초 지난해 10월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대만에 대한 군사 지원와 남부 국경의 안보 강화 등을 묶은 1천50억 달러 규모의 추경 안보 예산안을 의회에 요청했으나, 우크라이나 지원에 반대하는 하원 다수당 공화당에 의해 발목이 잡혔다. 공화당 측은 이스라엘 지원만 떼어낸 별도 법안을 추진하는 등 어깃장을 놓기도 했다.
그 사이, 우크라이나군은 모든 전선에서 수세로 몰렸다. 가뜩이나 병력 부족에 시달리는 상황에서 이를 보완할 포탄과 방공 미사일마저 바닥을 드러내면서 패배 위기감이 고조됐다.
아이러니하게도, 이같은 흐름을 바꾼 것은 지난 13일 이란의 이스라엘 공습이다. 이스라엘은 미국 등 서방의 방공 지원에 힘입어 이란의 대규모 미사일·드론 공격을 막아냈지만, 중동 지역의 전운은 더욱 짙어졌다. 이에 마이크 존슨 미 하원의장은 대외 지원 안보 예산안을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 대만 지원안, '21세기 힘을 통한 평화' 법안 등 4개 법안으로 분리해 처리하는 방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날 4개의 법안이 모두 무난히 하원을 통과하면서 거의 6개월만에 우크라이나 추가 지원이 확정됐다.
바이든 대통령은 이날 하원의 법안 처리를 환영하면서 "중대한 분기점에서 역사의 부름에 응해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에 결정적인 지원이 될 안보 예산안을 처리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또 "전장에서 우크라이나의 긴급한 수요를 충족할 수 있는 무기와 장비들을 최대한 빨리 보낼 것"이라고 덧붙였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상 메시지 모습/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도 엑스(X·옛 트위터)에 "미국 하원과 양당(민주·공화당), 그리고 개인적으로 역사가 옳은 방향으로 가도록 결정한 마이크 존슨 하원의장에게 감사한다"며 "우리는 미국의 지원을 활용해 양국을 더욱 강하게 하고 푸틴 (대통령)이 패배해야만 하는 이 전쟁을 끝낼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미국의 지원은 예측가능했던 일"이라며 "이는 미국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고, 우크라이나는 더욱 망치게 하며, 더 많은 우크라이나인들을 죽음으로 몰 것"이라고 비판했다. 또 러시아 자산을 몰수하는 '21세기 힘을 통한 평화' 법안에 대해서는 "미국에 돌이킬 수 없는 이미지 손상을 초래할 것"이라며 "많은 투자자들을 주저하게 만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지원 예산안 608억 4천만 달러 가운데 3분의 1 이상인 232억 달러는 키예프(키이우)에 군수품을 공급한 후, 줄어든 미군 재고를 보충하는데 사용된다. 우크라이나를 위한 새로운 무기 구입에는 138억 달러가 쓰인다. 또 113억 달러는 이 지역에서 미군이 현재 수행중인 제반 활동(우크라이나군 훈련과 우크라이나 인근 나토 회원국 주둔 미군 경비 등)에 할당됐다.
미국의 대우크라 탱크 인도 모습/사진출처:minfin.com.ua
우크라이나의 재정적자를 메꿀 자금은 78억 이상이다. 그러나 미 백악관의 당초 무상 지원 의도와는 달리 차관 형태로 제공된다. 나머지 배정 예산은 마약 밀매 통제, 핵 안전및 법 집행기관 강화 등에 지원된다.
주목을 끄는 것은 바이든 대통령에게 주문한 대우크라 추가 지원 전략 보고다. 법안은 대통령에게 “다년간에 걸쳐 이뤄질 구체적이고 달성 가능한 목표를 설정하고, 이를 미국의 국가 안보 이익과 비교해 우선 순위를 정한 뒤 45일 이내에 보고할 것"을 의무화했다. 미 공화당이 이를 차기 대선에서 활용하기 위한 전략으로 보인다.
스트라나.ua는 "바이든 미 행정부는 키예프에 대한 지원을 사실상 무기한으로 설정하고, 필요할 때마다 지원하는 방안을 선호해왔다"며 "공화당은 다년간에 걸친 대우크라 지원 전략의 구체화를 요구하면서 바이든 대통령을 특정 프레임에 가뒀다"고 평가했다. 그 결과,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지원 기간 및 범위 내에 승리하지 못할 경우, 특정 조건 하에서 평화 협상이 시작될 가능성이 높아졌다고 이 매체는 전망했다. 또 만약 바이든 대통령이 구체적인 지원 내용을 밝히지 않는다면, 전쟁을 장기화하고 자금을 불투명하게 지출했다는 국민의 지탄을 받게 될 것으로 예상했다.
존슨 의장이 바이든 대통령에게 걸어놓은 또하나의 덫은 사거리 300㎞의 에이태큼스(ATACMS) 장거리 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제공이다. 법안은 에이태큼스의 우크라이나 인도를 의무화하면서, 대통령이 안보상의 이유로 이를 거부할 경우, 그 이유를 의회에 설명하도록 했다. 바이든 대통령은 지금까지 전쟁의 확대를 우려해 160km 이하의 에이태큼스 미사일만 우크라이나에 제공하도록 한 명령을 지목한 것으로 보인다. 대선에 나선 바이든 대통령에게 정치적으로 타격을 가하려는 전략으로 풀이된다.
미국의 에이태큼스 장거리 미사일/사진출처:록히드마틴 홈페이지
에이태큼스 미사일외에 우크라이나로 보내질 무기로는 러시아의 공습을 막기 위한 패트리어트 대공 미사일과 전선에서 가장 필요로 하는 155㎜ 포탄이 가장 먼저 꼽힌다. WP는 미 국방부가 이같은 무기를 우크라이나군에 전달하는 데 1주일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의 군사지원이 재개되면 러시아군이 주도권을 쥐고 있는 전쟁의 흐름을 바꿀 수 있을까? 그 윤곽은 앞으로 몇 달 안에 드러날 것이다.
이 법안의 통과에서 빠뜨릴 수 없는 것은 공화당의 전략 변화가 주는 의미다. 미 공화당은 지난 6개월간 (트럼프 전 대통령이 제안한) '남부 국경(멕시코 국경) 보호 조치'를 이유로 대우크라 지원안을 저지해 왔다. 지난 2월에는 바이든 행정부의 이민 정책을 일부 강화하는 민주당 법안마저 부결시키며 남부 국경지대의 보호 조치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한 바 있다.
하지만 통과된 법안은 이 문제를 전혀 언급하지 않고 있다. 트럼프 전대통령이 다시 백악관의 주인이 되더라도 '우크라이나 지원'이라는 대세를 거스르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나오는 이유다. 미국의 기존 세계전략을 미 공화당도 수용하기로 했다는 뜻으로 읽힌다. 우크라이나로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의 복귀에 따른 악몽을 지워갈 수도 있을 듯하다.
그렇다고 공화당이 대통령에게 걸어 놓은 두개의 덫(다년간 우크라 지원 전략 보고와 에이태큼스 미사일 이전 불가 이유 설명)을 잊어서는 안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