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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화요일. - 살림. 등 )
0735. 김찬선 신부님, 반영억 신부님 글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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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살림>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에
저를 못 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요한 5,7)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는데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매 순간
딱 한 사람
오롯이 곁에 있으면
더할 나위 없으니
사람이
사람답게
살 수 있도록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누군가에게
그 한 사람이
되어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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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2024.03.12 06:37
- 성전다운 성전
“이 강이 흘러가는 곳마다 온갖 생물이 우글거리며 살아난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뜬금없이 돌아가신 백안젤로 수사님께서 하신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사람들이 사람, 사람 하는데 사람이면 다 사람인가,
사람이 사람다워야지 사람이지!’
이 말씀이 생각난 것은 ‘성전이면 다 성전인가,
성전이 성전다워야지 성전이지!’ 이런 말을 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강론은 ‘성전다운 성전’으로 잡아봤습니다.
성전다운 성전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느님께서 그 안에 계신 성전이지요.
하느님께서 아니 계시면 아무리 아름답게 지어도 성전이 아니고,
신자들이 아무리 많이 모여 있어도 성전이 아니지요.
그러나 오늘 독서와 복음에 비춰 볼 때 성전이란
생명의 물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그것은 또한 사랑이 넘쳐흐르는 곳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생명의 물이 없고 그래서 죽어가는 공동체란 말입니다.
왜냐면 사랑이 없는 공동체는 아무런 관심이 서로 간에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환자는 서른여덟 해나 앓았는데도 주님처럼
“건강해지고 싶으냐?” 하고 묻는 사람이 없었고 성전 물에
데려가 주는 사람이 없었고 그래서 병을 치유할 수 없었습니다.
관심이 없는 곳,
이런 곳이 사랑이 없는 곳의 대표적인 곳입니다.
다음으로 사랑이 없는 곳이란 관심은 없고 욕심만 있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상대는 내 욕심의 대상일 뿐입니다.
당연히 서로는 욕심의 희생자들이 될 것이고,
심지어 욕심 때문에 죽이는 일도 서슴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곳에서는 당연히 생명이 넘치는 것이 아니라 죽음이 설치겠지요?
세 번째는 관심도 많고 욕심도 많은 곳입니다.
이런 곳에는 사랑도 있겠지만 사랑만큼 미움도 많을 것입니다.
오늘은 너무 늦게까지 잠을 자
제목대로 강론을 완성하지 못하고 이대로 올려야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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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강의를 시작하면서 지갑에서 만 원짜리 지폐를 꺼내 들고 말합니다.
“이 시간에는 여러분에게 만 원을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만 원을 주도록 저를 설득해 보실 분이 있나요?”
몇몇 지원자가 있었고, 그중에 한 명을 지목하니 왜 자신이 만 원을 가져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휴대전화 충전기가 필요하고, 유니세프에 기부할 예정이고, 내게 꽃을 사줄 생각이랍니다. 저는 “그러시리라 믿어요.”라고 말했지만, 만 원짜리 지폐를 주지 않고 손에 꼭 쥐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지원자는 또 다른 말로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저는 주지 않습니다. 이제 다른 지원자가 저를 설득합니다. 그런데도 저는 돈을 주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 지원자들이 제게 하지 않은 말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무엇일까요?
맞습니다. 만 원을 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 원이 필요한 이유만을 이야기했을 뿐이지, “만 원을 제게 주세요.”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원하는 내용을 명확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잘 말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아서 해주기만을 바랄 뿐인지 이유만 늘어놓습니다. 단순히 부탁하면 되는데, 복잡하게 꼬아서 말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요?
이런 모습이 바로 과거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잘 지켜야 하느님께서 우리의 바람을 들어주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을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입장은 조금 달랐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구속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해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종교 지도자들이 주장하는 율법은 사람을 구속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지 못하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벳자타 연못에서 병자를 일으키시어 자신의 들것을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문제는 이 날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율법에 어긋난다는 이유를 들어 유다인들은 그 기적이 하느님의 현존을 드러낸다고 여기기는커녕 예수님을 단죄하는 절대적 증거로 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에서 인간의 행복을 위한 도구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주님께 가장 중요한 말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이것저것을 따지면서 정작 주님께서 듣고 싶은 말을 피하는 우리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또한 자기 생각을 앞세워서 다른 사람이 주님 앞에 나아가는 것을 또 주님의 은총 안에 머무는 것을 방해해서도 안 됩니다. 이 모두를 위해 주님과 더 가까운 사이가 되어야 합니다.
주님과의 어떤 대화도 없이 즉, 기도나 어떤 신앙생활도 하지 않았던 분이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하느님께서 그러실 수 있습니까?”라고 말입니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십시오.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부탁하기가 쉽던가요? 마찬가지로 하느님과 전혀 대화를 나눈 적 없는 사람은 부탁도 제대로 할 수 없습니다. 부탁도 친밀한 관계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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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우리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든다(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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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서 들은 왕실관리의 아들을 치유하신 ‘두 번째 표징’에 이어 벌어진 ‘세 번째 표징’ 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축제 때가 되어, 갈릴래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어, 안식일에 ‘벳자타 못’을 방문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많은 병자들과 서른여덟 해나 앓아누워 있는 병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해 동안 광야생활에 찌들고 문드러진 이스라엘 백성의 표상입니다. 바로 우리들의 표상입니다.
그가 있는 ‘벳자타 못’에는 ‘물’이 있었습니다. ‘물’은 <성경>에서 죽음과 생명이라는 상반된 두 가지의 상징과 동시에 정화의 상징입니다. 노아의 홍수와 홍해의 물은 파괴와 죽음임과 동시에 정화와 생명의 상징입니다. 오늘 <제1독서>의 에제키엘서의 물과 <복음>의 ‘벳자타’의 물도 그렇습니다. 정화와 생명의 물은 첫 번째 표징인 ‘가나안의 혼인잔치’에서 새 생명의 포도주로, 파괴와 죽음의 물은 여섯 번째 표징인 ‘예수님께서 물 위를 걷는 장면’에서 발아래 짓밟혀질 것입니다.
‘벳자타’라는 말은 ‘은혜의 집’이라는 뜻입니다. 오늘, 우리는 ‘은혜의 집’인 여기 ‘벳자타’에서 은혜로운 생명의 물을 마시며 살아갑니다. 어쩔 수 없는 약함과 무능력을 한 아름 보듬고서 말입니다. 벗어나지 못한 질병과 악습과 상처를 부둥켜안고서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요한 5,6)
“예”라고 즉각적인 믿음으로 대답하지 못하고, “자를 물속에 넣어 줄 사람이 없습니다.”하면서 구실과 변명을 들이대며 투덜대는 병자에게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이는 당신이 참된 “물”이심을 말합니다. 곧 ‘벳자타의 물’로가 아니라, 당신 ‘말씀의 물’로 그를 적셔주시어 그를 걸어가게 하십니다. 그렇습니다. 당신 말씀이 바로 ‘생명의 물’입니다. 곧 당신 자신이 바로 ‘생명의 물’이심을 드러내는 “표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치유를 받은 병자에게 들것을 버리고 가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들것에 주저앉아 있지 말고 그것을 들고 걸어가라 하십니다. 자신의 몸을 얹어놓았던 들것을 이제는 스스로의 손으로 들고 가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오늘 우리는 말씀의 물을 마시고 “일어나야” 할 일입니다. “들것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치유를 받는다는 것은 자신이 누워있던 들것을 버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기꺼이 사랑의 표지로 들고 가는 것임을 말합니다. 마치 예수님께서 구원의 표시로 지니신 오상처럼, 그 상처를 통하여 우리에게 베푸신 그 자비, 그 사랑을 들고 걸어가야 할 일입니다. 나아가, 이제는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상처에서 십자가를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곧 우리에게 베풀어진 자비와 구원을 관상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절망과 무기력한 사순이 아니라, 파스카를 향한 희망과 기쁨의 사순을 살아가야 할 일입니다. 다른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면서 말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주님!
깔고 있던 들것을 떨치고 일어나게 하소서.
일어나 들것을 들고 걸어가게 하소서.
입은 자비를 드러내게 하소서.
이제는 앓는 이들에게 들것이 되어주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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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24.03.12 06:26
핑계 없는 무덤 없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는 옛말이 있습니다. 무엇이고 결과가 있는 것은 반드시 원인이 있듯이 무슨 일이든지 핑계는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핑계를 댄다는 것은 대개는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탓을 남에게 돌리는 마음이 거기에 있습니다. 창세기에 보면 주 하느님께서 아담에게 “네가 알몸이라고 누가 일러주더냐? 내가 너에게 따 먹지 말라고 명령한 그 나무 열매를 네가 따 먹었느냐?”하고 물으시자 아담은 아내 핑계를 댑니다. 또 아내는 뱀에게 책임을 떠넘겼습니다(창세3,11- 13).
루카복음 14장15절 이하에 보면 혼인 잔치의 비유가 나옵니다. 초대받은 사람 중 첫 사람은 “밭을 샀는데 그것을 보아야 한다.”고 하였고, 다른 사람은 “겨릿소 다섯 쌍을 샀는데 그것들을 부려보려고 가는 중”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다른 사람은 “방금 장가를 들었소.”하며 핑계를 대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벳자타 못가에는 이따금 주님의 천사가 내려와 물을 휘젓곤 하였는데 물이 움직일 때 맨 먼저 못에 들어가는 사람은 무슨 병이든 나았습니다. 그런데 많은 병자 중 어떤 사람은 서른여덟 해나 앓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건강해지고 싶으냐?”하고 물으시자 그는 “선생님, 물이 출렁거릴 때 저를 저 못 속에 넣어줄 사람이 없습니다. 그래서 제가 가는 동안에 다른 이가 저보다 먼저 내려갑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가 “예, 낫고 싶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안타깝게도 그는 물이 움직일 때 자기를 물에 넣어주지 않는 사람들과 자기보다 먼저 물에 들어가는 어떤 사람을 탓하고 원망하는 투로 대답을 대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를 낫게 해 주실 분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며 낫고 싶은 희망을 표현하였습니다. 나를 인정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나쁜 놈’이 어떤 사람인지 아십니까? ‘나뿐 놈’ 이랍니다. 오직 나만 아는 사람이지요. 오직 자기에게만 관심을 두고 있었으니 그렇게 38년 동안이나 있었지 않았을까? 또한 주변에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있었더라면 그렇게 오랜 고통 속에 머물러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하긴 누구에게나 자신의 병이 가장 절박하게 느껴질 것입니다. 서로에 대한 사랑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모두가 주님의 능력을 만났을 것입니다.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서 하느님을 뵐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성 아우구스티노).
하긴, 주변 사람들의 태도를 보면 그럴 만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병자에게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요한 5,8). 하시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것을 들고 걸어갔습니다. 그것을 본 유다인들이 병이 나은 사람에게 “오늘은 안식일이오. 들것을 들고 다니는 것은 합당하지 않소.”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들 것’을 들었다는 것, 다시 말하면 안식일에 일하는 것만을 보았습니다. 율법에 매여서 볼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보아야 할 것은, 38년이나 앓다가 걸어가게 되었다는 것을 봐야 했습니다. 고통을 거두어 주셨다는 것에 감사해야 했습니다. 주님께서 살리는 일은 이미 시작되었고 앞으로도 지속될 것입니다. 걸어가는 것은, 앞으로도 이러한 일이 계속될 것이라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어려운 일이 있다고 해서 남을 탓하지도 말고,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지도 말아야 하겠습니다. 규정을 내세워 살리는 일을 막는다면 그것도 하나의 핑계가 될 것이요, 사람을 위한 법이 오히려 법을 위해 사람이 있는 것으로 본말이 뒤바뀔 것입니다. “병든 사람이 병든 질서를 만들고 병든 질서가 다시 병든 사람을 낳습니다. 이 악순환의 고리를 예수님께서 끊어버리십니다” (이현주).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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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97년 대통령 선거 당시입니다. 73세였던 김대중 후보는 상대적으로 고령의 나이였습니다. 그때 김대중 후보 진영에서 내세운 선거 전략은 ‘준비된 대통령’이었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오랜 시간 민주화 운동을 하면서 투옥되어 교도소에 갇혀있을 때가 많았습니다. 김대중 후보는 교도소에서 책을 읽을 수 있었고, 자신의 사상을 정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교도소는 ‘학교’라고 할 수 있었습니다. 자동차 사고로, 납치되어서 몇 번이나 죽을 고비를 넘겼습니다. 그래서 김대중 후보를 ‘인동초(忍冬草)’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추운 겨울을 참아내며 피어나는 풀이라는 뜻으로 모진 어려움을 견뎌내고 뜻을 이룬 사람을 비유하기도 합니다.
국내가 아닌 해외에서 생활하는 조건으로 교도소에서 풀려난 김대중 후보는 미국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유수의 정치인들과 교류를 맺었습니다. 그분의 영어 인터뷰를 보았는데 발음에는 약간 어려움이 있지만 뜻을 정확히 전달하는 영어를 구사하였습니다. 준비된 대통령이었던 김대중 후보는 마침내 4번의 도전 끝에 1997년 대한민국의 15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개성공단, 금강산 관광 등과 같이 남북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헌신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한민국 최초로 노별 평화상을 수상했습니다. IMF 경제위기로 벼랑 끝에 몰렸던 대한민국 경제를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은 전 국민적인 노력을 이끌어내고, 고강도의 구조조정으로 IMF 경제위기를 조기에 벗어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저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에 부임하면서 ‘준비된 본당신부’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전임 신부님 두 분이 모두 저와 동창신부님이기 때문입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있었기에 예전에 몇 번 방문한 적도 있었습니다. 동창 신부님의 초대로 교우들과 함께 성지순례를 다녀오기도 했습니다. 동창 신부님들이 12년간 사목하던 곳이어서 낯설지가 않았습니다. 작년에 부임한 보좌신부님은 제가 신학교에서 ‘설교학’을 가르쳤습니다. 영어를 잘 하는 보좌신부님이 있으니 든든합니다. 무엇보다 저는 한국에서 바로오지 않고 5년 동안 뉴욕에 있으면서 미국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미국에 오면 꼭 거쳐야 하는 과정을 이미 다 거쳤습니다.
쇼셜넘버를 5년 전에 받았습니다. 미국생활에 꼭 필요한 것들 중에 하나인 운전면허증도 5년 전에 받았습니다. 미국 은행에서 발해해준 신용카드도 받았습니다. 2년 전에는 신문사에 있으면서 그린카드도 받았습니다. 이 정도면 적어도 외적인 면에서는 준비된 본당신부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내적인 준비는 늘 부족함을 느낍니다. 심지도 않고 거두려는 성급함이 있습니다. 자라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보고 놀란다고 때로 불안과 초조가 마음의 평화를 깨뜨리곤 합니다. 소탐대실이라는 말처럼 멀리보지 못하고, 작은 것들에 집착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약하고, 부족했던 제자들과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두려움에 도망치고, 다락방에 숨어있던 제자들에게 ‘평화’와 ‘성령’을 주셨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예수님께 의탁하며 지내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벳자타 연못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이야기에서 ‘준비된 사람’을 보았습니다. 38년간 누워서 지내야 했던 사람입니다. 그는 벳자타 연못에 들어가서 병을 고치고 싶었지만 아무도 데려다 주지 않아서 연못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38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내야 했습니다. 그는 결코 포기하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하며 벳자타 연못을 찾았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몸은 물론 영혼까지 깨끗하게 치유해 주시는 분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간 눈물로 지내야 했던 사람의 고통을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38년 동안 포기하지 않고 일어나려 했던 사람의 의지를 아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묻습니다. “건강해 지고 싶으냐?” 38년 동안 누워있어야 했던 사람은 간절한 마음으로 그렇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38년간 누워있었던 사람은 건강한 몸으로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사순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는 우리를 주님과 더욱 가까이 지낼 수 있도록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남은 사순시기도 기도와 자선, 희생과 단식으로 영적인 준비를 경건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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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중심 이야기는 ‘안식일’입니다. 이미 우리는 성경을 통해 안식일의 주인이 바로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즉 안식일에는 하느님께서 인간을 사랑하시는 대로 사랑해야 합니다. 또한 자기 자신도 돌보아야 합니다. 이것이 안식일의 정신입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안식일에 관한 법령은 안식일을 위한 법령으로 바뀌었습니다. 안식일만을 위한 법이어서 그 안에는 인간을 존중하고 인간을 중심에 두는 따스함이 사라져 버린 것입니다.
오늘도 사람들은 안식일을 그 생각의 중심이 둡니다. 병이 나은 사람이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어떻게 그 고통의 시간을 보냈는지, 그 아픔을 나누려 하지 않습니다. 또한 이제 고통의 병고에서 해방된 것을 축하하지도 않습니다. 오로지 ‘안식일’을 준수하지 않았음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주님께서는 바라보고 계십니다. 그리고 안식일의 주인으로서 행할 것을 행하십니다. 주님의 은총을 입은 병자는 기쁨의 함성을 지릅니다. 안식일의 주인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일로 인해 주님을 박해하기 시작합니다.
법이라는 것은 지켜야 하는 것입니다. 법은 사회적 약속입니다. 법은 사회의 질서를 유지합니다. 그래서 지켜야 합니다.
그러나 그 법이 사람 위에 설 수는 없습니다. 법은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지 사람을 해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법은 늘 우리를 살려냅니다. 늘 우리를 따스하게 감싸 안아줍니다. 우리 또한 하느님의 법안에서 누군가를 살려내는 자녀 되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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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셨습니다.
사순을 지내며 죽음을 생각합니다.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죽음에서 도망칠 사람도 없습니다.
어쩌면 죽음은 우리가 태어난 순간부터
우리와 함께 있었던 동반자일 것입니다.
그래서 죽음을 다른 말로
‘돌아갔다.’라고 말하는지도 모릅니다.
하늘에서 온 사람이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
이것이 바로 죽음일 것입니다.
우리가 잘 온 것처럼
우리가 잘 돌아가기를 바랍니다.
하늘처럼 예쁜 옷 입고
하늘 보며 예쁜 미소 지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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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생명수의 샘, 생명수의 강”
이 되어 삽시다!
-우리 구원자 주 그리스도 예수님과 함께-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이 말씀 꼭 마음에 지니고 사시기 바랍니다.
“곁에 있는 사람을
내 몸처럼 사랑하지 않으면,
세상을 구제하자는 이상도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3월12일자 다산 어른 말씀도 마음에 깊이 와닿습니다.
-명진스님은 평화의 길 이사회에서 이사장직을 사임했다. “내 나이 75세면(1950년생), 죽음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노후 대책’이 아니라 ‘사후 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면서 “이후에는 선원 생활을 하면서 수행에 정진하겠다”고 밝혔다-
노후대책이 아닌, 사후대책을 준비해야 할 때라는 말마디에 공감이 갑니다. 하루하루 거품이나 환상, 허영이 걷힌 본질적 깊이의 삶을 살아야 할 때입니다.
오늘 복음 “벳자타 못 가에서 병자를 고친” 예수님 일화는 요한복음에 일곱 표징중 세 번째에 속합니다. 어제는 두 번째 표징인 왕실관리의 아들을 살리신 일화였습니다. 예루살렘 양문 곁, 벳자타라 불리는 못에는 주랑이 다섯 채 딸렸는데, 그 안 모습이 흡사 세상의 축소판처럼 생각됩니다.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로 가득했다 합니다. 벳자타 못 주변의 이 사람들은 그대로 꿈과 희망을, 빛과 길을 찾는 인간군상들을 상징합니다.
서른 여덟 해나 앓던 사람과 예수님의 만남이 극적입니다. 병자의 치유받고 싶은 간절한 열망의 눈빛이 주님께 포착됐든듯 합니다.
“건강해지고 싶으냐?”
“일어나 네 들것을 들고 걸어가거라.”
그러자 그 사람은 곧 건강하게 되어 자기 들 것을 들고 걸어갔다. 주님을 만나 치유받음으로 운명의 질곡에서 탈출이자 해방입니다.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도 의미심장합니다.
“자, 너는 건강하게 되었다. 더 나쁜 일이 너에게 일어나지 않도록 다시는 죄를 짓지 마라.”
주님을 만남으로 육신의 치유와 동시에 죄를 용서받음으로 영혼의 치유 은총까지 받았으니 이제부터 절대 죄를 짓지 말라하십니다. 노년에 병마와 힘겨운 전쟁을 치루는, 이제 약을 먹으며 은총으로 사는 이들에게 경각심을 줍니다. 은총으로 사는 처지에 죄를 짓지 말라는 것입니다. 기도할 시간, 사랑할 시간, 회개할 시간을 생각하면 죄지을 시간이 어디 있겠는지요!
진짜 생명의 못, 치유의 못은 벳자타 못이 아니라 예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렇습니다. 생명수의 샘, 생명수의 강은 우리 구원자 그리스도 예수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생명의 샘, 치유의 샘, 생명의 강, 치유의 강이신 주님과 늘 함께 하는 우리들입니다. 바로 구상 시인의 "오늘"이란 시가 은혜롭게도 이런 진리를 새삼 깨닫게 합니다.
“오늘
오늘도 신비의 샘인 하루를 맞는다
이 하루는 저 강물의 한 방울이
어느 산골짝 옹달샘에 이어져 있고
아득한 푸른 바다에 이어져 있듯
과거와 미래와 현재가 하나다
이렇듯 나의 오늘은 영원 속에 이어져
바로 시방 나는 그 영원을 살고 있다
그래서 나는 죽고 나서부터가 아니라
오늘로부터 영원을 살아야 하고
영원에 합당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한다
마음을 비운 삶을 살아야 한다”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하나로 관통하는 생명의 강, 치유의 강, 구원의 강, 진리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영원한 현재를 살아가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제1독서 성전의 샘에서 솟아나 세상으로 흘러가는 생명의 강이 상징하는 바 우리 구원자 예수님이자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이 강이 닿는 곳마다 모든 것이 살아난다...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생명의 강인 주님 미사의 강가에 심어져 깊이 뿌리 내린 우리들이 얼마나 큰 은혜를 받고 있는지 깨닫습니다. 주님과 하나되는 미사은총으로 우리가 내놓는 주님의 신망애의 열매들은 이웃에게는 양식이 되고 약이 되겠기 때문입니다. 창세기 에덴 낙원에서도 신기하게 물이 흐르고 무성한 나무들 한 가운데에는 생명나무가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제 생명수의 강은 우리 믿는 이들의 영원한 살아있는 꿈이, 희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성전인(요한2,21)인 예수 그리스도의 몸, 곧 그분의 옆구리에서는(요한19,34)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물이 흘러 나옵니다. 그리고 마침내 희생된 어린양의 천상어좌에서는 생명수의 강이 흘러나오니 바로 이것이 우리의 영원한 꿈이자 희망입니다.
“그 천사는 또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에게 보여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한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요한묵시22,1-2).
바로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모시는 주님이 끊임없이 흐르는 생명수의 강입니다. 생명수의 강이신 주님과 함께 생명수의 강이 되어 세상을 살리며 흐르는 강같은 삶이 되기를 바라며 바치는 기도시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하루하루 끊임없이 하느님 사랑의 바다를 향해 흐르는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때로은 좁은 폭으로 또 넓은 폭으로
때로는 완만하게 또 격류로 흐르기도 하면서 결코 끊어지지 않고
주님과 함께 계속 한결같이 흐르는
사랑의 강, 생명수의 강이 되어 살았습니다
하느님은 영원토록 영광과 찬미받으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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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2. 사순 제4주간 화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그 안에는 눈먼 이, 다리저는 이,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이 같은 병자들이 많이 누워 있었다. 거기에는 서른여덟 해나 앓는 사람도 있었다.(요한 5,4-5)
중풍 병자의 인내
중풍 병자의 인내가 놀랍습니다. 그는 서른여덟 살이고 병에서 놓여나기를 줄곧 기대해 왔습니다. 그는 한 번도 포기하지 않고 그곳에 누워 기다렸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보여 준 만큼 인내심이 없었다면, 과거는 물론이고 미래의 전망만으로도 이미 실망을 안고 그곳을 떠나기에 족하지 않았을까요? 언제 물이 출렁일지 아무도 몰랐으니 그곳에 있던 병자들이 얼마나 예민하게 주의를 기울이고 있었을까 생각해 보십시오. 다리저는 이들과 팔다리가 말라비틀어진 자들은 물을 지켜볼 수 있었지만 눈먼 이는 그것을 어떻게 알아차렸을까요? 주위의 소란으로 눈치챘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과도한 게으름을 부끄러워하고 반성합시다. 이 남자는 자기가 바라는 것을 서른여덟 해가 지나도록 얻지 못했는데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그가 부주의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힘에 눌리고 억압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우리는 … 한 열흘 무엇을 청하는 기도를 하다가 바라는 바를 얻지 못하면 이 남자처럼 꿋꿋하게 버티지 못하고 게을러집니다. 그런데도 같은 인간에게는 끝없이 기대합니다. 행여나 무엇을 얻을까 역경을 견디며 싸우고 비천한 일도 마다않지만 그런 것들은 결국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한 수고보다 훨씬 큰 보상을 주실 것이 확실한 우리 주님을 섬기는 일에는 그만큼 정성을 쏟지 않습니다. … 설령 그분께 아무것도 받지 못한다 하더라도, 끊임없이 그분과 이야기할 수 있는 것 자체가 무수한 축복아닙니까?
-요한 크리소스토무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엑카르트가 “존재는 거룩하며 죽음을 초월한다”고 말하기 위해 인용한 문구는 순교자 축일 전례에서 읽던 성서 구절이다. 엑카르트는 아래 성서 본문들을 토대로 설교한다. 성서 본문은 예언자의 죽음을 말한다.
“복되도다, 사람들이 나 때문에 그대들을 모욕하고 박해하며 온갖 사악한 거짓말을 하면! 기뻐하고 신명내시오. 그대들이 받을 상이 하늘에 많습니다. 사실 그들은 그대들에 앞서 간 예언자들도 그렇게 박해했습니다”(마태 5,11-12).
“그대들은 내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참고 견디는 사람이야말로 구원받을 것입니다”(마태 10,22).(134)
✝️ 화요일 성령(성시간)의 날✝️
오, 예수님,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세기에 걸쳐 당신을 평화의 왕으로 갈망해 왔나이다. 예언자들이 당신올 노래했으며, 모든 시대의 민족과 나라가 당신을 평화를 주시는 분으로 그리워했습니다. 죄악과 불의로 억압받고 다툼과 전쟁에 신음하는 이들이 당신을 갈망했으며 위험에 빠진 이들이 평화가 동터오는 그날을 기다렸나이다. 시편 저지는 다음과 같이 평화를 노래하며 기도하나이다.
주님, 당신께서는 당신 땅을 어여삐 여기시어
야곱의 운명을 되돌리셨나이다.
당신 백성의 죄를 사하시고
그들의 모든 잘못을 덮어주셨나이다.
당신의 격분을 말끔히 거두시고
당신 분노의 열기를 돌리셨나이다.
저희 구원의 하느님 저희를 다시 일으키소서.
저희에 대한 노여움을 푸소서.
끝끝내 저희에게 진노하시렵니까?
당신 분노를 대대로 뻗치시렵니까?
당신께서 저희를 다시 살리시어
당신 백성이 당신으로 기뻐하게 하지 않으시렵니까?
주님, 저희에게 당신 자애를 보이시고
저희에게 당신 구원을 베푸소서.
하느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나는 듣고자 하노라.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당신께 충실한 이들에게
진정 평화를 말씀하시는도다.
그들은 다시 우매함으로 돌아가지 말지어다.
정녕 그분을 경외히는 이들에게는 구원이 가까우니
우리 땅에 영광이 머무르리라.
자애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
주님께서도 복을 베푸시어
우리 땅이 그 열매를 내어주리라.
정의가 그분 앞을 걸어나가고
그분께서는 그길 위에 걸음을 내디디시리라.(시편 85,1-14)
0 평화의 왕이신 예수님, 당신 안에서 사랑과 믿음, 정의와 평화가 서로 만나게 하소서. (침묵 가운데 반복한다.)(244)
-성시간, 슬라브코 바르바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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