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우표 없는 편지 원문보기 글쓴이: 청풍명월
신라를 뒤흔든 12가지 연애 스캔들
잘 아는 김유신도 여동생 문희를 실권자로 부상하던 김춘추와 짝짓게 하고는 그 둘이 낳은 딸을 아내로 맞았듯이 신라는 삼촌과 남매간 혹은 고모나 이모와도 결혼할 수 있었지만,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던 나라였다. 지금 우리의 시각으로 보면 비난받고 욕 먹을 일이지만 당시로서는 하나도 어색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 우리는 짐작도 하지 못한다.
그러나 책의 저자 박은몽은 머리말에서 “이 책에는 우리가 보기에는 문란하기 짝이 없는 사랑 이야기들이 신라인에게 그것은 일탈이 아니라 일상이었음을 우리는 인정해야 할 것이다. 시대마다 도덕의 잣대는 항상 달라서 시간과 공간에 따라 더 엄격해지기도, 더 자유로워지기도 했다. 우리의 잣대를 가지고 신국의 도를 난잡한 문화로 폄하할 수는 없으리라. 오히려 정해놓은 도덕의 잣대를 제멋대로 흔드는 일이 비일비재한 우리의 모습이 도를 잃은 것이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고 했다.
이런 주제를 담고 있는 이 책에는 어떤 이야기가 담겨 있는지 궁금해 지기도 하지만, 그보다 먼저 이 책에 나오는 이야기는 주로《삼국사기》《삼국유사》《화랑세기》의 기록을 참고했다고 하고, 역사학자 이종욱, 김태식 등의 저술도 참고했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아직까지 위작 논란에 놓여있는 《화랑세기》에 대해서 작가는 어떤 견해를 갖고 있는지 볼 수 있을 것 같다.
1) 첫 번째 이야기
“신라에는 같은 성끼리 혼인하는데 그치지 않고 형제의 자식이나 고모, 이모, 사촌 자매까지 아내로 맞았으니 비록 외국으로서 각기 풍속이 다를지라도 중국의 예속으로써, 이를 따진다면 큰 잘못이다 하겠다.”《삼국사기》- 신라본기 내물왕 조
그러나 이런 신라의 풍속은 단순히 성적 문란이라기보다는 지배계층의 혈통을 철저히 지키기 위한 하나의 방편이었고, 혈통을 중시한 신라인들은 자식을 귀히 여기고 혈통의 자손을 이어가는 일을 무엇보다 중시했다. 따라서 왕족에게 성性을 바치는 색공(色供)은 왕이나 태자의 자손을 생산하기 위한 것으로, 근친혼을 통해 성골혈통을 철저히 지켜나가고자 했던 것이다. 지배계층은 스스로 신神이라 여겼고, 신국에 도道가 있다고 한 것이다. 그것에 색도(色道)가 포함된 것이다.
‘우리는 흔히 정조를 목숨처럼 여긴 조선의 관념이나 유교적 윤리만을 우리의 역사로 알고 있으나, 신라의 역사도 분명 우리의 역사로 신국의 도는 또 다른 우리의 유전자임을 재발견해야 하지 않을까?’저자의 주장 혹은 궤변이지만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은 후세사람인 우리들 몫이겠다.
‘이 아이는 우리의 도를 일으킬 만하다.’고 말하고 옥진은 손녀 미실에게 교태부리는 방법과 가무를 가르쳤다.
옥진은 법흥왕의 색공色供이었으나, 이미 영실공과 결혼해 딸 묘도가 있었고 나중에는 묘도마저 법흥왕에게 바쳤다. 그러나 묘도는 왕과 서로 맞지 않았고 대신에 법흥왕의 딸 삼엽궁주 아들인 미진부와는 서로 눈이 맞아 미진부와의 사이에 몰래 딸을 낳으니 그가 미실이고, 아들을 낳으니 미생이다.
미실은 영화나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색도로 한 나라를 좌지우지한 여색으로 나오는데 미실의 미색이 한창 무르익을 무렵에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천전리 각석에는 지몰시혜비)가 조카인 미실을 궁으로 불렀다. 지소태후가 미실을 부른 이유는 아들 심맥부지(천전리 이름-진흥왕)와는 배다른 아들인 세종전군이 미실에게 반해 어머니를 졸랐기 때문이었다. 미실은 왕이 아닌 전군을 섬기게 된 것이 아쉬워했지만 ‘지금은 전군의 첩으로 궁에 들어가지만 빈첩의 도가 색공에 있는데, 어찌 왕을 받들지 못 하겠습니까?’하고 당돌하게 말을 하니, 할머니 옥진도 미실의 등을 쓸어주며 ‘너로 인해 우리 대원신통이 크게 일어날 것이다.’하고 격려했다
세종전군의 첩이 된 미실은 미모와 기교로 세종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세종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미실이 아들의 마음을 지나치게 사로잡자 경계하고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트집을 잡아 미실을 내쫓고 아들을 용명과 결혼시켰다. 그러나 세종이 괴로워하면서 미실을 잊지 못하자 지소태후는 하는 수 없이 다시 미실을 궁에 들였다.
미실은 ‘전군에게는 이제 용명이라는 처가 있는데 어찌 내가 색공을 하겠습니까? 첩이 부끄러워 전군을 받들지 못하겠습니다.’하고 말하니, 세종이 어머니 지소태후에게 미실을 정실부인으로 삼도록 해 달라고 졸라용명을 차비로 삼았다 마침내 용명을 내쫓았다. 쫓겨났다가 다시 들어와 세종전군과 합하게 된 미실은 권력을 잡으면 많은 힘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2) 두 번째 이야기
일곱 살 때 왕이 된 진흥왕은 법흥왕의 딸 지소태후와 법흥왕의 동생 입종갈문왕(천전리 각석에는 사부지갈문왕)사이에서 태어났다. 진흥왕은 어머니를 따르면 법흥왕이 외할아버지, 아버지를 따르면 큰아버지가 되는 셈이다. 진흥왕이 신라의 영토를 크게 넓히고, 척경비를 4개 세운 사실은 역사 공부로 배운다. 그 진흥왕은 첫 부인 사도왕후한테서 동륜과 금륜을 낳았지만, 어머니 지소태후의 바람대로 어머니의 딸이자 배다른 동생인 숙명왕후와도 결혼해 정숙태자를 낳았다. 숙명왕후는 상대등 태종과 지소태후 사이에서 난 딸이었다.
그런데 숙명은 왕비였음에도 진흥왕을 오래 섬기지 못했는데, 화랑인 이화랑과 정을 통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화랑은 위공의 아들이다. 피부가 옥과 같이 부드럽고 눈은 미소짓는 꽃과 같고, 음률과 문장을 잘했다. 숙명왕후는 이화랑과 더불어 정을 통함이 심해졌고 여러 번 왕에게 들켰다. 왕이 왕후를 폐하려 하자 지소태후가 울면서 간하여 이룰 수 없었다.’《화랑세기》- 이화랑 조 -
결국 숙명왕후는 이화랑과 야반도주해 둘 사이에는 원광과 보리가 태어났다. 숙명왕후의 이런 폐륜으로 정숙은 태자 자리에서 폐위되고, 첫째 왕후인 사도왕후의 아들이던 동륜이 태자가 되었다. 하지만 동륜이 젊은 나이에 비명횡사하자 동생인 금륜이 태자가 되고, 금륜은 신라 25대 진지왕이 되었다. 하지만 그 진지왕도 방약무도하다는 이유로 왕위에 오른지 4년을 채우지 못하고 폐위되니 다시 동륜의 아들 백정이 진평왕으로 신라 26대 왕이 되었다.
동륜, 금륜 등 이런 이름은 전륜성왕에서 따온 것으로 진흥왕 시대는 큰아버지 혹은 외할아버지 때 이차돈의 순교로 공인된 불교가 성행했다. 진흥왕이 신라의 세력을 크게 확장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가 ‘신라 여인들이여! 모두 미륵을 낳아달라’고 한 것이 먹혔기 때문인데, 미륵은 인간의 내세를 이끌어 줄 미래부처다.
이화랑과 숙명 사이에 태어난 원광은 ‘세속 5계’를 만든 주인공으로 수나라에 유학했다가 돌아오자 불법을 깨우치려는 젊은이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고, 귀산과 추향 두 화랑이 ‘저희는 화랑이지만 어리석어 아는 것이 없으니, 한 말씀 가르쳐 주시면 평생의 교훈으로 삼겠습니다.’고 하여 원광이 사군이충(事君以忠), 사친이효(事親以孝), 교우이신(交友以信), 임전무퇴(臨戰無退),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 하고 삼가고, 경계하고, 지키면 일생에 실수가 없을 것이다. 고 했다.
다음왕이 된 진평왕의 이야기는 다음으로 미루고, 이 책에서 자주 인용되고 있는 《화랑세기》의 진위여부를 우선 보도록 하자.
고구려에는《유기》,《신집》이, 백제에는《서기》가, 신라에는 거칠부가 지었다는 《국사》가 있었으나, 현재 전하지 않고, 다만 고려시대에 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통해 우리는 삼국의 역사를 알 수 있다. 《삼국사기》가 뛰어난 역사서기는 하나 선덕여왕에 대해 ‘할멈이 규방에서 나와 정사를 보다니 나라가 망하지 않은 게 다행’이라고 폄하 하여 남성 중심 사관의 한계를 드러냈다.
대신 《화랑세기》는 유일하게 전하는 신라인 김대문이 쓴 신라 역사서지만 역시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그런데 일제 강점기 박창화가 필사했다는 필사본 《화랑세기》가 1989년 발견되어 위작 여부가 쟁점이 되고 있다. 김대문은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를 배출한 진골 집안의 후손으로 「한성주 도독」을 지냈으며, 풍월주들의 이력과 그들의 모계와 부계 혈통에 대해 기록한 것이 《화랑세기》인데, 이것은 김대문 가문의 족보나 마찬가지라 하겠다.
근친혼과 문란한 성풍속 때문에 위작 시비가 끊이지 않지만, 어떤 역사학자는 여러 가지 이유로 위작이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역사에 문외한인 내가 봐도 박창화가 아무런 근거 없이 소설 쓰듯 하지는 않았을 것같다는 생각은 든다. 위작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첫째,《화랑세기》에 나오는 미실의 향가는 조작할 만한 수준의 작품이 아니다. 상당한 수준의 작품으로 문장이 탁월해, 궁에서 왕 대신 문서를 참견했을 정도였다고 알려진 미실이기에 이해할 만한 작품이라는 것이다. 《화랑세기》에 나오는 미실의 노래는 현재 전하는 가장 오래된 향가다. 내용은 이렇다.
*풍랑가-미실
風只吹 留如久爲都 郞前 希吹莫遣
(풍지취 유여구이도 랑전희취막견)
浪只打 如久爲都 郞前 打莫遣
(랑지타 여구위도 랑전타막견)
早早歸良來 更遣叱那 抱遣見遣
(조조귀량래 갱견질나 포견견견)
此好郎耶 執音乎手乙 忍麽等尸良奴
(차호낭야 집음호수을 인마등시량노)
바람이 분다고 하되 임 앞에 불지 말고
물결이 친다고 하되 임 앞에 치지 말고
빨리빨리 돌아 와 다시 만나 안고 보고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차마 물리라뇨(겠느뇨?)
둘째, 《화랑세기》에 언급된 ‘구지’의 존재다. 구지는 왕궁인 월성 둘레에 적의 침략에 대비하여 파 놓은 못을 말하는데 신라 말에 매립되어 있다가 1980년대 후반에 와서야 국립문화재연구소 발굴로 처음 알려졌다. 만약 박창화가 일제 강점기에 조작한 것이라면 그가 어떻게 구지의 존재를 알았겠는가 하는 것이다. 더구나 구지는 다른 나라의 못이나 해자와는 달리 못과 도랑이 연결된 톡특한 형태이다.
셋째, 임신한 유부녀가 상위층과 관계를 가져 아이가 태어나면 마복자로 삼는 신라의 풍속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유래가 없는 특이한 풍속인데, 이런 희귀한 풍속을 박창화가 그저 상상만으로 만들어 냈을 가능성은 매우 낮다는 것이다.
*마복자 : 신라만의 독특한 제도로 임신한 여자가 높은 지위를 가진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후에 낳은 아들을 말한다. 지위가 높은 세력들은 정치적인 지지자를 갖게 되고, 마복자는 후원자를 갖게 되는 제도다. 왕도 마복자를, 화랑들과 낭도들도 마복자를 가졌다. 사회적, 정치적으로 ‘의제 가족관계’를 맺는 것으로서 마복자의 존재는 단순히 성적 문란의 증거가 아니라『화랑세기』에 의하면 1세 위화랑 조에 비처왕(소지왕)의 마복자들이 마복칠성으로 나오고, 사다함과 진흥왕의 부인이기도 했던 미실궁주의 아들들도 상당수가 마복자였다.
《화랑세기》는 약 200년 동안 얽히고설킨 신라 사람들 이야기를 기록한 것인데, 지금의 우리가 반복해서 읽어도 이해하기 힘들 정도여서 박창화 혼자서 상상해 냈다고 볼 수 없고, 오직 《화랑세기》가 실존한 역사서로 보고, 혈통을 중시한 신라의 김대문이 혈통을 세세하게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해도 무리가 없을 것 같다. 신라시대 성문화는 자연스러웠기 때문에 김대문은 이를 감출 이유도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3) 세 번째 이야기
아들이 아버지의 여자를 탐하고 아버지가 아들의 여자를 탐하는 경우는 당나라 현종이 며느리가 될 여인을 절로 보낸 뒤에 다시 불러서 귀비로, 그리고 왕후로 삼은 현종과 양귀비의 경우가 있지만, 우리 역사에도 이런 일이 있었다는 것은 나는 배우지도 않았고 알지도 못한다.
진흥왕비이던 숙명이 이화랑과 눈이 맞아 달아나자 숙명의 아들이었던 정숙태자는 폐태자 되었고, 첫 부인 사도왕후의 아들이던 동륜이 태자가 되었다. 그러자 사도왕후와 대원신통의 기세가 점점 등등해졌다. 하지만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는 동륜이 태자가 된 것을 못마땅히 여기면서 진골정통이던 만호부인과 동륜을 억지로 결혼시켰다. 그러자 사도왕후는 조카인 미실을 동륜에게 보내 동륜의 마음을 사로잡게 한 다음 만호를 내쫓을 계획을 세웠다. 시어머니:며느리, 태후:왕후, 진골정통:대원신통 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미실은 세종전군과의 사이에 아들 하종을 낳은 지 얼마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동륜을 모실 수 없다고 하였으나, 사도왕후는 미실에게 동륜과의 동침을 부추겼다. 가만히 생각한 미실은 동륜태자와 연이 닿으면 자신과 대원신통의 입지가 확실하게 다져질 것이고, 게다가 동륜의 어머니인 사도왕후가 밀어주고 있으니 무슨 일이라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그래서 미실은 아직 어린 동륜을 가랑이 아래에 넣어 맥을 못 추게 했고, 환희에 찬 동륜의 정기는 미실의 몸에 뿌려져, 성골혈통인 싹이 미실의 몸에서 자라기 시작했다.
세종전군의 아내로 딸까지 나은 미실이었지만, 어느 날 미실의 미색을 본 진흥왕이 사도왕후에게 말했다.
“세종에게는 이미 용명이라는 처가 있지 않았던가?”
왕후가 답했다.
“세종에게 이미 용명이 있었으나, 세종전군이 미실의 색공을 받은 이후 용명을 사랑하지 않아 지소태후께서 세종전군과 미실을 결혼시켰습니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진흥왕이었지만, 진흥왕은 미실이 탐났던 것이고 사도왕후는 미실의 몸에 이미 동륜태자의 씨가 자라고 있다는 것이 탄로 날까봐 두려웠다. 그런데 진흥왕이 쐐기를 박듯 말했다.
“신국에 대왕의 것이 아닌 것이 무엇이 있단 말인가? 미실은 색공지신 가문의 여인이니 왕을 받드는 것이 마땅하다.”
사도왕후가 대답했다.
“예 대왕의 명대로 준비시키겠습니다.”
그렇게 말했지만 사도왕후는 앞일이 걱정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미실은 왕의 부름에 이렇게 답했다.
“왕을 색으로 모시는 것이 소녀가 타고난 사명이거늘, 무엇을 망설이겠습니까? 왕께서 원하시면 성심을 다할 뿐입니다.”
미실은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는 듯 사도왕후에게 합궁날을 잡게 했다.
진흥왕과 합궁함으로써 태자 동륜의 씨를 진흥왕의 씨 인양하기 위함이었다. 진흥대왕은 미실과 합궁한 후, 연이어 두 번도 더 불러 사랑한 후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고는 세종전군에게는 용명을 다시 불러들여 살게 했다. 진흥왕과 세종은 지소태후의 배다른 아들이었지만 세종은 진흥왕의 명, 즉 신의 명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진흥왕은 미실과 세종 간에 난 아들 하종을 양자로 삼을 것을 약속하고 또 하종을 전군으로 삼아 미실을 기쁘게 해 주었다. 전군은 왕후가 아닌 후궁이 낳은 아들, 또는 왕이 아닌 귀족과의 사이에 왕후가 나은 아들을 말하는데 하종은 왕의 아들도 왕후의 아들도 아니었으나 진흥왕이 미실을 총애하여 하종을 양아들로, 또 지위를 높여 전군에 오르게 해 주겠다고 한 것이었다. 이 연회 자리에 동륜과 금륜 그리고 다른 전군들도 여럿이 함께했다.
연회에서 진흥왕은 “미실은 나의 빈첩이니, 마땅히 너희의 어머니다. 모두 어머니라 부르고 절을 올려 예를 갖추어라”고 하여 아들들 모두가 4배를 올리게 했다. 동륜이 머뭇거리자 눈치를 챈 미실이 나서 말했다.
“태자는 다른 왕자하고도, 전군과도 다릅니다. 어찌 다른 이들과 같이 하겠습니까? 1배로도 족합니다.”
동륜이 위기를 모면하기는 했으나 동륜은 처음 여인과의 기쁨에 눈뜨게 한 색신 미실을 아버지에게 빼앗겼으니 너무도 허탈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동궁으로 돌아가다가 우연히 아버지 진흥왕의 빈첩인 보명궁주와 마주쳤다. 보명궁주는 진흥왕의 어머니 지소태후가 신하이던 구진의 색공을 받아 태어난 여자로 진흥왕의 빈첩들 중에서 가장 나이가 어렸다. 그런데 이유를 알 수 없지만 그녀도 자신처럼 울고 있었다.
동륜은 시치미를 떼고 보명궁주에게 말했다.
“궁주는 기쁜 날에 어찌 우는가?”
궁주가 답했다.
“왕께서 기뻐하시는데 소첩이 어찌 기쁘지 않겠습니까. 다만 왕을 바라만 봐야 하는 제 신세가 슬퍼서 우는 것입니다.”
둘은 동병상린을 느꼈다. 그날 이후 동륜은 보명궁주와 자주 만났다. 그러나 보명궁주는 혼자서 보내는 궁 안의 밤이 외롭기는 했지만 왕의 여자로서 왕의 아들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소녀 비록 왕에게 사랑받지 못하나 어찌 태자마마를 받들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동륜은 끈질겼다.
동륜은 여러 날을 벼른 끝에 시종과 함께 담을 넘어와서 보명궁주에게 ‘미실의 색도를 당할 수 없다’면서 그녀를 설득해 그녀가 문을 열도록 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밤마다 안 보면 못 견딜 지경에 이른 어느 달도 없는 어두운 밤에 혼자 담을 넘다가 그만 누군가 풀어 놓은 개에게 물려 밤새 앓다가 동틀 무렵에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572년 3월이었다.
동륜태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을 보고만 있지 않았던 지소태후와 미실의 음모에 의한 희생으로 보기도 하지만, 소현세자의 독살만큼이나 증거는 없었다.
진흥왕은 큰아들 동륜이 죽자, 작은아들 금륜을 태자로 봉했다. 그리고 576년 진흥왕은 왕위에 오른지 36년 43살의 나이에 죽었다. 사도와 미실, 보명, 옥리, 월화에게 파묻혀 있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진흥왕이 죽자 사도와 미실은 왕의 죽음을 비밀로 한 채, 금륜태자에게 미실에게 왕후 자리를 약속받고 그를 왕좌에 올렸다. 이이가 진지왕인데 진지왕에게는 이미 지도부인이 있었다. 그가 왕위에 오르고 나서 민가의 여인 ‘도화녀’를 궁으로 불러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도화녀는 “나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을 것 입니다. 아무리 제왕이라 하더라도 여자의 정조를 함부로 꺾을 수는 없습니다”고 하면서 진지왕을 거부했다. 당돌한 그 말에 진지왕이 희롱하듯 말했다.
“만약 순종하지 않으면 내 너를 죽일 것이다. 어찌 하겠느냐?”
“여기서 죽는 한이 있어도 다른 마음을 갖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네 남편이 없다면 어찌 하겠느냐?”
“남편 없이 홀로 된다면 그때는 대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에 진지왕이 껄껄 웃으면서 도화녀를 풀어주었다고 한다.(사실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러나 이 일은 사도태후와 미실에게 빌미를 주어 진지왕이 지나치게 색을 탐하여 색신의 색공에 만족하지 않고, 민가의 여인까지 함부로 범하려 했다고 소문을 퍼뜨렸고, 왕실의 권위를 땅에 떨어뜨린 왕을 그대로 둘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워 낭도들을 부추겼다. 진지왕은 왕위에 오른지 4년도 안 돼 폐위되고 말았다.
4) 네 번째 이야기
폐위된 뒤 월성 유궁에 유폐 된 진지왕에게 어린 용수, 용춘이 찾아와 문밖에서 울면서 아버지를 찾았다. 그러나 할머니 사도는 이들을 왕자란 호칭에서 빼도록 하고 전군으로 부르게 하였으며, 개에게 물려 죽은 동륜태자의 아들이던 백정을 새 왕, 즉 진평왕에 즉위시켰다.
13살 어린 진평왕은 사도태후와 미실궁주에게는 너무도 쉬운 허수아비 왕이었다. 이 진평왕은 선덕여왕의 아버지면서 신라 역사에서 가장 오래, 54년간 왕위에 머물렀다. 사도태후는 진지왕의 부인이었던 지도부인에게 새 왕인 진평왕을 모시라고 했는데, 이는 작은 어머니가 왕이 된 조카를 섬기라고 한 것이다. 지도부인은 사도태후의 명에 순종했고, 덕분에 진지왕이 남긴 아들 용수와 용춘을 지킬 수 있었다. 그리고 나서 사도태후는 미실과 보명에게 왕에게 색도를 가르쳐 왕의 양陽이 제 성정을 누리도록 하게 했다.
그러나 이때 보명의 몸에는 이미 폐위되기 전 진지왕의 아이가 자라고 있었으므로 그녀는 진평왕을 모시지 못했고, 대신 미실이 먼저 진평왕을 모시게 되었다. 미실이 누구인가? 진평왕에게는 그의 할아버지 진흥왕을 모셨던 여인이자, 작은아버지 진지왕도 모셨던 여인이며, 자신의 아버지 동륜태자까지 모셨던 여인이 아닌가? 진평왕에게는 이미 어머니 연배로 세종전군부터 진흥왕, 동륜태자, 진지왕까지 색공한 미실을 마주한 어린 왕은 볼부터 벌겋게 달아올랐다. 진평왕은 어린 나이에도 기골이 장대한 장부였다.
“무릇 양기를 잘 다스려야 몸과 마음이 바로 서고, 몸과 마음이 바로 서야 비로소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법입니다. 제왕의 힘이 양기에서 나오니 어찌 음을 통하여 양을 보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색공은 천한 것이 아니라, 도로써 행하며 왕의 몸과 마음을 어루만지기 위한 것입니다. 색사를 제대로 배워서 양을 바르게 다스리고 바로 선 몸과 마음으로 나라를 바르게 다스리소서.”
미실은 어린 왕에게 절을 한번 올리고 왕의 눈앞에서 옷을 하나씩 벗기 시작하자 풍만한 몸매가 더러 났다. 성숙한 여인의 몸을 보지 못한 진평왕은 미실에게서 눈을 뗄 수 없었다. 미실은 소년 진평을 젖무덤에 안고 가만히 눈을 감았다. 세월이 가고 있었다. 더 이상 젊지만은 않았다. 왕은 다음날도 그다음 날도 미실을 불러 사랑하며 양기 다스리는 법을 서서히 익혀갔다.
그리고 얼마 뒤에는 진평왕이 스스로 보명을 찾았는데 어린 아기처럼 보채는 진평왕을 보고 보명은 그의 아버지로 살뜰히 자신을 사랑해 주던 동륜이 생각나 임신 중임에도 그를 받아 주었다. 그리고 얼마 뒤 보명이 진지왕의 딸 석명공주를 나았고, 출산 후에도 진평왕이 거의 매일 보명을 찾아왔다. 미실이 어머니 같은 편안함을 주었다면, 보명은 왕에게 왕으로서의 위엄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이태껏 동륜을 잊지 못하던 보명은 진평왕을 보면서 마치 동륜이 살아 돌아오기라도 한 양 애뜻한 마음으로 대했고, 사연을 알리 없는 진평왕은 보명의 애절함을 더할 수 없는 매력으로 느꼈다. 그러면서 시간이 갈수록 보명궁주를 더욱 총애했고 이번에는 진평왕과의 사이에서 딸 ‘양명’을 낳았다.
신라의 궁중사를 보면 모두 침실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진흥왕이 일곱 살에 왕위에 오르자 어머니 지소태후가 섭정을 하고 그 진흥왕이 풍질에 걸리자 부인인 사도왕후와 미실궁주가 권력을 장악했으며, 진흥왕이 죽자 둘은 진지왕을 왕위에 올려 왕을 허수아비로 만들어 통제하고, 자신들의 측근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어 반대 여론이나 반발 움직임을 잠재웠다. 왕 위의 왕 노릇을 하던 사도태후에게는 항상 미실이 함께했고, 진지왕의 처사가 자신들의 입맛에 맞지 않자 낭도들을 일으켜 군사적인 힘으로 진지왕을 폐위시키고 어린 진평왕을 즉위시켰다. 왕을 갈아치울 정도로 여인들의 권세는 대단했고 왕의 총애를 통해 단순히 부귀영화를 누리는 차원을 넘어 권력을 장악했던 것이다.
진평왕이 왕위에 오를 때는 진평왕의 할머니 사도태후, 진평왕의 생모 만호태후, 폐위된 진지왕의 부인이자 작은어머니 지도태후가 있었는데, 진평왕 즉위 후, 이들 태후들은 때로 연합하고, 때로는 겨루면서 한동안 왕을 대신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한민족 역사에서 여왕을 세 번이나 배출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여인들이 정치 예행연습을 한 때문이 아닐까?
5) 다섯째 이야기
미실은 세종전군의 아내로서 진흥왕을 모실 때도 자주 궁을 빠져나가 풍월주(화랑의 우두머리)인 설원랑과 사통했다. 어느 날 설원랑이 말했다.
“무릇 색은 대범할수록 더욱 즐겁고 깊어지는 것이라. 둘이 함께하여 이리 즐거우니 셋이 하면 얼마나 더 즐겁겠습니까?”
“그대와 내가 하나이니, 나의 마음이 어찌 그대와 다르겠는가? 그러면 누가 우리와 더불어 격이 없이 함께할 수 있겠는가?”
“궁주께서는 온 신국의 여인들이 몸을 한번 바치는 것이 소원일 정도로 잘생긴 동생을 두셨는데 무엇을 망설이십니까? 미생이라면 말이 샐 염려가 없을 것입니다.”
설원은 음밀히 미생을 불렀다. 그리고 술을 권하면서 말했다.
“모두가 암컷이 아니면 수컷에 불과한 것을...”
미생은 설원의 말을 들으며 자신에게 알몸을 비벼대는 미실을 보면서 도대체 어떤 음사를 하기에 누이를 한번 안아 본 왕들은 하나같이 사족을 못 쓰는지가 궁금해졌다. 설원이 다시 속삭였다.
“대왕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사내인데 어찌 대왕만이 양의 즐거움을 모두 누리겠는가. 궁주가 우리를 어여삐 여겨 받아 주시니 우리도 궁주와 함께 왕께서 맛본 열락의 세계를 한번 맛보지 않겠는가?”
“미실의 총애를 믿고 방탕하여 설원랑과 그의 동생인 미생과 통했으나 진흥대왕은 이를 알지 못했다. 미실은 ‘내가 너희들과 사통했는데 만약 낭도들의 우러러봄을 잃는다면 곧 세상의 여론을 거둘 수 없을 것이다. 너희들은 어찌하여 나를 원화*로 받들지 않는가?’라 했다”《화랑세기》 -5세 세종 조
*원화(源花) : 화랑의 전신, 청소년 단체로 원화에 여성을 임명한 것은, 종교적 의례에서 여성이 차지했던 지위를 반영한 것이다. 진흥왕 대에 개편된 청소년 단체에도 여전히 종교적 역할의 수행이 요청되었다. 신라 중기 이후 관료제도가 정비되고, 삼국간의 전쟁이 격화되면서 남성의 역할과 임무가 중시되면서 원화가 화랑으로 개편되었다.
6) 여섯 번째 이야기
미실이 막내아들 보종을 불러서 말했다.
“너는 내가 내린 윤궁의 딸 현강을 마다했다는데 사실이냐?”
“ⵈⵈ”
“현강이 나를 찾아와 보종 네가 도무지 자신을 안으려 하지 않고 찾지도 않으니 분해서 살 수가 없다고 하더구나”
현강은 사도태후와 미실이 화랑 낭도들의 세력을 얻기 위해, 설원랑을 대신해 풍월주로 삼은 문노의 딸로 윤궁은 그의 어머니다. 미실은 아들 보종이 남자라면 응당 알게 되는 여자와의 즐거움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게다가 성품도 여자처럼 여리기만 하니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아갈지 걱정스럽기도 했다.
신라에는 아이가 있는 유부녀를 취할 경우 그 유부녀의 자식을 자신의 자식으로 삼는 마복자라는 풍속이 있었는데, 진평왕은 미실과 설원랑의 아들인 보종을 자신의 마복자로 삼아 총애하고 많은 재물을 내려주기도 했다. 보종은 진평왕을 아버지라 불렀고, 자라면서 설원랑의 모습을 닮아 아름다웠다. 그러나 설원랑은 여인들을 차지하고 즐겁게 했지만, 보종의 아름다움은 남자를 위한 것이었다.
어느 날 저녁 자신을 찾아온 호림과 같이 놀다가 보종이 말했다.
“호림 형님, 앞으로는 여기서 지내시지요”
호림은 풍월주로 여러 사람들의 부러움을 사는 호걸이었을 뿐 아니라, 진평왕의 부인인 마야왕후의 동생이었다.
“제가 여인이 되어 형님을 섬길 수는 없지만, 형님이 원하시는 거라면 무엇이든 하겠습니다”
그날 이후 호림은 보종의 거처에 함께 기거하게 되었고, 얼마 후에는 호림이 보종을 풍월주를 보좌하는 화랑의 2인자 즉 ‘부제’로 삼았다. 곧 차기 풍월주가 된다는 의미다.
이때 공사 간 바빠진 보종의 일을 도와준 이가 있었으니 염장으로 나이 18세지만 체구가 보종보다 훨씬 커서 보종을 아이처럼 업어 주기를 좋아했다. 염장보다 여섯 살이나 나이가 많은 보종은 염장을 귀여워했지만, 자신이 맡았던 ‘부제’직위는 염장이 아니라 어린 유신에게 넘겨주었다. 부제를 넘겨주는 일에 염장은 물론 호림도 반대했지만, 미실까지 나서서 보종편을 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이렇게 삼국통일의 영웅이 되는 유신은 날개를 펼 수 있었다.
호림과 보종이 한집에 살다 보니 보종의 처 현강과 호림이 서로 통했고 결국은 딸 ‘계림’을 낳았다. 그러자 보종이 말했다.
“형님, 현강이 나의 아내지만 형님의 아이까지 낳았으니 계속 제집에 머무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형님이 데려가서 처로 삼는 것이 낫겠습니다. 현강도 원하는 일일 겁니다.”
보종의 말에 호림은 현강을 아내로 맞아들였다.
7) 일곱 번째 이야기
막내아들 보종이 여색을 멀리하고서 처 현강 마저 남색 애인 호림에게 떠나보내자, 보종의 어머니 미실의 근심은 더욱 깊어졌다. 미실은 궁에 남아 있는 궁주들을 불러 보종을 유혹하는 궁주에게는 상을 내리겠다고 말했다. 이에 보명궁주와 진평왕 사이의 딸 양명공주가 보종을 유혹하여 둘은 딸 ‘보리’와 ‘보량’을 낳았다. 하지만 보종은 양명을 멀리하고, 염장과 동성애를 계속했다.
양명은 두 딸을 낳고도 자신을 멀리하는 보종이 싫었다. 이에 염장을 불러 자신을 섬기라고 했다. 그리고 그 둘은 마침내 아들 장명을 낳았다. 이런 일에 대해 보종은 매우 기뻐한 것은 물론 ‘장명’을 아들처럼 사랑했다.
또 보종은 조카인 ‘모종’에게도 아내를 품도록 기회를 만들어 주어 아내 양명이 다섯 살이나 어린 모종과 동침하여 아들 양도를 낳았는데, 양도(良圖)는 보종이 지어준 이름으로 ‘어질 양, 그림도’흘륭한 그림이라는 뜻이다. 양도는 커가면서 모종이 생부임을 모르고 모종을 숙공(叔公)이라 부르며 따르다 마침내 모종이 자신의 생부임을 알게 되었다. 양도는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했음을 용서해 달라고 하면서 눈물을 흘렸다.
그러자 모종이 말했다.
“네가 내 아들임은 틀림없지만 너는 보종공의 대를 이을 아들이니 보종공께 효를 다해야 한다. 어찌 친아버지와 양아버지를 구분하랴”
그 후 양도가 화랑으로 선발되었을 때는 그에게는 장명이라는 배다른 형이 있었고 자신이 먼저 화랑이 되자 형에게 양보하려고 하였다.
“제 위에 형이 계신데 어찌 동생인 제가 먼저 화랑이 되겠습니까?”
이에 장명의 아버지 염장이 양도에게 말했다.
“형제간에 우애도 중요하지만 집안이나, 나라에나 대를 이를 아들은 따로 있는 법이다. 너를 보종공께서 대를 이을 사자(嗣子)로 삼았으니 아버지의 뜻을 거슬러 불경을 행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그리고 염장은 아들 장명에게 말했다.
“비록 태어나긴 네가 먼저 태어났으나 보종공께서 이제 양도를 사자로 삼았으니 너에게는 양도가 형이나 마찬가지니라. 앞으로는 양도를 형에 대한 예로써 섬기거라”
장명은 생부의 명에 따라 동생 양도를 오히려 형으로 섬겼다. 그러니 양도 또한 장명을 더욱 아꼈다.
양명공주는 보종이라는 남편이 있었지만, 염장과 모종을 사신私臣으로 거느리고 그들과의 사이에 자식까지 낳았다. 혼외정사로 다른 남자들과 관계하여 자식을 낳았을 뿐 아니라 그렇게 낳은 자식을 친자식처럼 여겨준 것이다.
오늘날 우리 현대인의 시각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 모습이다. 양명궁주가 두 사람의 사신을 거느린 것은 미실의 남자 설원랑이 풍월주 자리를 스스로 포기하고 미실과 함께 영흥사로 들어가 최후까지 함께한 사신이었던 것과 같다. 사신은 사사로이 거느린 신하라는 뜻이지만, 대개 외모 수려한 화랑들이 신분이 높은 여자들의 사신이 된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양명궁주와 염장, 모종의 사이가 부적절한 관계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자신을 사신으로 삼아준 사람에게 목숨을 바쳐 충성하는 것은 물론 사적으로 색공까지 함께한 공개된 애인과도 같았던 것이다.
아무리 부귀영화가 좋다 해도 세월을 이기지는 못한다. 미실은 모두를 정리하고 설원랑과 둘이 월성에서 멀리 떨어진 영흥사로 들어가 조용한 여생을 보냈다. 두 사람은 오직 서로가 가족이고, 친구이며, 동반자였다. 606년 미실은 이상한 병에 걸려 여러 달 동안 일어나지 못했다. 그러면서 진평왕과의 처음 합궁을 회상했다. 아직 어린 진평왕이 미실의 유혹에도 합궁이 잘 이루지지 않자 밖으로 나와 설원랑에게 자신을 대신해 들어가 미실과 함께하라고 명했고, 왕명에 따라 설원과 미실이 합한 후 태어난 아들이 바로 ‘보종’이다. 설원랑은 미실을 간호하다가 미실보다 먼저 죽었다. 설원랑은 한때 젊은 날 재혼한 아내 준화의 딸 준모를 강간하는 등 방탕하고 문란한 남자였으나, 마지막은 자신의 주인이자 사랑한 여자에게 정성을 바쳐 충성을 다했는데 이는 본능에 충실하면서도 자신들의 도를 추구한 것으로 신라인의 진면목 일수도 있겠다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도 설원랑에 대해 ‘미실의 신하로서(ⵈ) 처음부터 끝까지 충성은 하늘의 복을 열었다’고 칭송했다.
8) 여덟 번째 이야기
진평왕과 보명궁주 사이에 난 양명궁주는, 미실궁주와 설원랑 사이에 난 아들 보종과 결혼하여 딸 보량을 낳았는데, 보량이 식음을 전폐하고 앓아누운 지 며칠째, 보종과 양명 즉 아버지와 어머니는 보량으로 인해 속이 탔다. 그것은 진평왕의 첫부인 마야왕후가 죽고, 두 번째 왕후가 된 승만왕후가 진평왕에게 바쳐진 보량을 지극히 사랑해 총애를 입은 것이 화근이었는데 승만왕후가 투기해 보량을 궁에서 쫓아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보종이 말했다.
“마야왕후가 죽고, 승만왕후께서 네가 왕의 총애를 받는 것을 투기하니 우리로서는 방법이 없구나. 보량아, 이제 그만 마음을 풀거라”
어머니 양명도 이제 그만 다른 곳으로 시집을 가라며 위로했다.
그러자 누워있던 보량이 발딱 일어나 말했다.
“왕이 아니라면 나는 어머니의 아들에게 시집가고 싶습니다”
“아들, 아들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 장명이냐, 양도냐?”보종이 물었다.
양도와 혼인하겠다는 보량의 말에 보종과 양명이 찬성하고, 진평왕도 허락했지만 정작 당사자인 양도는 내켜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한집에서 자란 누이와 어찌 결혼하겠습니까? 저는 동기간에 결혼하는 풍습을 좋게 여기지 않습니다”양도의 말에 어머니 양명이 화를 냈다.
신라의 근친혼은 신라만의 풍습으로 고구려 백제와 다르고 중국에서도 유례가 없어 타국에서는 오랑캐의 풍습으로 여겼다. 양명이 둘의 결혼을 기정사실로 하려 하자 양도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제가 오랑캐의 풍습을 따르면 아버지, 어머니, 누이가 모두 좋아할 것이지만, 중국의 예를 따르면 모두 나를 원망하고 슬퍼할 것입니다. 가족을 슬프게 하느니 차라리 오랑캐가 되겠습니다.”
어머니 양명은 아들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장하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다. 어찌 중국의 도를 따르겠느냐”며 달랬다.
이에 양도는 친누나 보량을 아내로 맞아 아들 양효를 낳으니, 양효는 외할아버지가 친할아버지고, 외할머니가 친할머니와 똑 같으며, 이모가 고모가 되고, 외삼촌이 친삼촌이었다. 이것은 당시에는 지극히 자연스런 현상이었고, 여자가 혼인할 때 무조건 처녀여야 한다는 의식도 없었다. 오히려 신분이 높은 이에게 색공하고 왔으니, 영예로 생각하였던 것인지 모른다.
자신이 우겨 동생 양도와 결혼한 보량이었지만 보량의 행복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들 양효를 낳은 뒤부터는 양도의 발길이 끊겼기 때문이었다. 뭔가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보량이 먼저 적극적으로 나서기로 했다. 하루는 양도가 밤늦도록 책을 보고 있는데, 보량이 술상을 차려 양도의 방으로 들어갔다. 술이 몇 차례 오가며 취기가 오르자 보량이 취기를 핑계삼이 양도에게 몸을 기대자 놀란 양도는 보량을 바로 세웠다. 보량은 끝까지 자신을 멀리하는 양도에게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았다.
“너는 내가 나이가 많다고 사랑하지 않느냐? 너와 내가 같이 산지 벌써 3년이고 아들을 낳아 우리 부모가 기뻐하셨다. 또한 너를 사랑하지 않은 적이 잠시라도 없는데 너는 나를 한결같이 누나로만 여기고 공경만 하니 내가 쇠로 만든 사람이냐, 아니면 돌로 만든 신상이냐, 쇠붙이도 아니고 돌상도 아닌데 무슨 공경이냐?”
“ⵈⵈ”
차마 같이 화를 내지 못하고 듣고만 있는 양도에게 화가 난 보량은
“말을 좀 해보아라. 내가 금불상이라서 절만 하느냐, 신궁에 있는 신상이라서 공경만 하느냐? 너는 듣지도 못했느냐? 백 말의 공경은 한 되의 사랑만 못 하다는 것을! 부부사이에 공경은 어디다 쓰겠느냐, 부부에게는 공경이 아니라 사랑이 필요하다.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 거냐?”
양도가 보량의 눈물을 닦아주면서 말했다.
“같은 굴에서 생사를 같이하는데 어찌 사랑하지 않겠습니까? 다만 제가 듣기로는 큰 사랑은 공경하기를 신과 같이 하고, 작은 사랑은 희롱하기를 옥과 같이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큰 사랑으로 그대와 함께하기를 원할 뿐, 그대를 누나로 생각하여 그런 것이 아닙니다”
양도의 큰 정신적 사랑을 이해한 보량은 극진히 그를 내조해 마침내 637년 양도가 풍월주가 되었다. 당연히 보량은 풍월주의 아내로서 ‘화주(花主)’되어야 했는데 보량은 자신은 나이가 많다며 하녀인‘능보’를 화주로 추천했다. 하지만 양도는 “아버지의 친아들도 아닌 내가 아버지의 대를 이어 통을 얻었을 뿐이고, 진골정통은 오히려 그대에게 있는데 그대가 화주가 아니면 어찌 내가 풍월주가 될 수 있겠는가?”하면서 이를 사양했다.
이 무렵부터 진골정통과 대원신통에 이어서, 가야파의 세력이 커지기는 했지만 여전히 모계에 따른 세력이 강했던 당시에 보량의 어머니 양명, 양명의 어머니 보명궁주, 보명궁주의 어머니는 진골정통의 우두머리였던 지소태후였으니 보량은 진골정통이었던 것이다. 양도가 자신을 높여주자 보량은 기뻐하며 화주를 기꺼이 받았다.
양도보다 먼저 풍월주가 되었던 예원공은 점차 중국을 의식하여 혼인 풍습을 고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아들이 사촌 누나와 결혼하려하자 크게 화를 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결국 허락했고 그래서 얼마 뒤에 아들이 사촌누이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자 크게 기뻐하면서 다시는 신라 혼도를 논하지 않았다고 하는데 이때 태어난 아이가 《화랑세기》를 쓴 김대문이다. ‘신국에는 신국의 도가 있으니 어찌 중국의 예를 논하겠느냐’고 한 양명공주의 말처럼 신라 사람들에게는 신라 사람만의 질서가 있었던 것이다.
9) 아홉 번째 이야기
‘선덕여왕’하면 무엇이 생각날까? 최초의 여왕, 첨성대, 분향사 아니면 황룡사, 그도 아니면 총명함, 첨성대에 대하여는 천문관측 시설로 보기도 하지만 기도를 위한 종교시설로 보기도 하는데 후사를 얻지 못하던 선덕여왕이 자손을 기원하기 위해 지었다는 것이다. 선덕여왕을 《삼국사기》에서는 앞에서 본대로 ‘할멈이니, 암탉이 운다느니’하면서 폄하했지만 《화랑세기》에서는 ‘선덕공주가 점점 자라면서 용봉의 자태와 태양의 위용이 왕위를 이을만 했다.’하고 있다.
선덕에게 후사가 없다는 것은 불행이었을 수도 있고 그래서 여러 사람들을 울린 것만은 사실인듯하다. 진평왕과 마야부인 사이에는 딸만 둘이 있었는데 첫째가 천명, 둘째가 덕만, 즉 선덕이다. 이 둘은 남편을 두고 불행을 낳기도 하였고 또 한 비련의 여인이 있었으니 그는 천화공주다. 천화공주는 진지왕의 큰아들로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수의 첫 아내였다. 우리는 그냥 용수가 천명과 결혼해 김춘추를 낳은 것만 알고 있다. 진평왕은 천명과 용수를 결혼시켜 다음 왕위를 용수에게 물려주고자 하였는데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던 덕만에게 양위를 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을 하고, 그래서 큰딸인 천명에게 양보할 것을 권유하자 천명은 왕위보다 여자의 행복, 사랑을 원했기에 그러겠다고 했다.
632년 왕위에 오른 선덕은 용수의 동생 용춘과 혼인했으나 후사가 없자 다시 형부인 용수를 통해 후사를 얻고자 했으나 역시 불발되자, 심지어 화백회의에서 ‘삼서의 제’에 따라, 세 명의 남편을 두는 것이 마땅하다고 하여 용춘 외에도 을제와 흠반에게 왕실에서 정한 길일에 맞춰 여왕을 모시도록 하기도 했다. 그러나 선덕은 아이를 생산하지 못했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이가 많아서 그랬던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선덕여왕에 대한 출생 기록은 없지만 추론할 수는 있다. 천명과 용수 사이에 난 김춘추가 602년에 태어났고 이때 천명의 나이가 22세. 선덕은 천명의 동생이니 왕위에 오른 632년에는 이미 쉰 살쯤 되었을 것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니까 그 나이에 임신이 가능할까? 세 남편을 두었던 일은 단순히 자손을 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목적에 의한 하나의 연합작전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고,
여왕의 남편이 되었던 용춘과 용수 또한 남녀간 결합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용수와 용춘은 폐위된 진지왕의 아들로서 진평왕이 아니라면 원래 왕위를 이을 서열이었다. 진평왕은 이들이 경계 대상이었을 것이고, 그렇게 보면 둘은 소외된 계층이었다가 다시 서로의 목적을 위해 화합하면서 천명과 용수의 결혼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또 진평왕은 용수를 사위로서 왕위를 물려줄 생각도 했지만 선덕이 왕위를 계승받게 되자 선덕과 용수의 관계는 정치적으로 흘렀을 가능성까지, 이에 선덕이 을제, 흠반을 자기편에 끌어들임으로써 지지기반을 확대하려하고 결국은 용춘까지 끌어들인 것은 아니었을까?
10) 열번 째 이야기
양도는 풍월주 자리에 있으면서 화랑의 여러 가지 폐단을 개혁하려고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하루아침에 고쳐지지 않았다. 또 양도는 정이 많은 사람이라 부하들의 잘못을 단호하게 처벌하지 못했다. 게다가 양도는 친누나 보량과의 관계만 멀리했을 뿐, 스스로 색을 좋아해 다른 낭두들의 처들과의 사이에서 아들도 많이 낳았다. 그런 양도가 화랑에게 색공을 바치려고 안달하는 폐단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무리를 다스리는 것은 때로 파리를 쫓고 잡초를 뽑는 것과 같다. 다스려도 다시 나타나고 처단해도 다시 자라니 과연 어찌할 것인가?”하면서 아내 보량에게 한탄하는 말을 하자 보량이 웃으며 말했다.
“낭군께서는 무리를 다스리는 데는 능하나, 스스로를 다스리지 못하니 그 까닭이 아니겠습니까?”
결국 양도는 640년 부제였던 ‘군관’에게 풍월주를 물려주고 조용히 물러났다.
요즘도 그치지 않는 상납은 부하가 상사에게 뭔가를 바친다는 것이지만, 역사 속에서 성상납은 비단 국내, 신라에서 국한되는 일이 아니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에는 당시 당나라와의 외교 관계에 있어 진평왕이 미녀 두 명을 바치려 하였는데, 당이 이를 받지 않고 돌려보냈다고 했다.
《화랑세기》예원공 조에도 김춘추와 양도, 예원 등이 사신으로 당으로 갈 때 당나라 사람들이 색을 좋아한다 하여 유화(낭도들의 여자)세 명을 종실 여자라고 속여서 당나라에 바치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때 예원은 유화들의 신분을 속여 가면서까지 당나라에 여자를 바치는 것에 반대했다. 하지만 고구려·백제가 동맹을 맺어가면서 신라를 넘보자 당과의 외교가 절박해지자 당나라로 가는 사신들이 유화들과 함께 배를 탓는데, 마침 풍랑이 일자 뱃사람들이 유화를 바다용왕에게 재물로 바쳐용왕을 잠재우자고 했다. 이에 예원이 나서 말렸다.
“인명은 지극히 소중한 것인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
이에 양도가 말했다.
“예원 형님은 어찌하여 유화의 생명만 중하게 여기시고 춘추공의 생명은 중히 여기지 않으십니까? 만약 춘추공의 생명이 위험에 빠지면 그땐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아마도 배에는 양도와 춘추가 같이 탔던 모양이다.
“위험할 때 함께 위험하고, 안전할 때 함께 안전해야 한다. 어찌 다른 생명을 죽여 우리가 살길을 꾀하겠는가?”
예원의 강경한 태도에 유화들을 바다에 던지지 않았고 다행히 풍랑이 멈췄다. 일행이 당에 도착해 천병(天兵)의 지원을 요청하고 돌아올 때에 선물로 유화를 바쳤으나 당은 ‘말이 통하지 않고 풍토에 익숙하지 않기 때문에 아름다워도 머물게 할 수 없다’며 유화들을 돌려보냈다고 한다. 대국의 모습이다. 그리고 유화라고 해서 천한 신분으로 봐서도 안 된다. 신라는 남녀 구별보다 골품에 따른 신분지배가 강하게 작용했던 것이다. 신분이 높은 사람은 신분이 낮은 사람의 모든 것들을 지배할 수 있었던 사회였다는 말이다.
선덕여왕으로 돌아가 선덕여왕은 어떻게 최초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 선덕여왕은 632년에서 647년까지 치세하였고, 그 뒤를 이어 진덕여왕이 647년에서 654년까지 치세하였는데, 이 무렵 일본의 경우 추고여왕(593∼628)을 시작으로 여섯 명의 여왕이 있었고, 당나라는 유일하게 측천무후가 고종의 왕후였다가 아들인 중종과 예종의 태후로서 아들들을 폐하고 690년 직접 왕위에 올랐다. 이 시기에 세계사 어디에도 이런 경우가 없지만 동아시아에서는 줄줄이 여왕이 배출된 셈이다.
11) 열한번 째 이야기
친누나로 양도의 아내인 보량은 화랑 낭두 찰인과 정을 통해 찰의라는 아들을 낳았다. 찰의는 낭정 내에서도 아주 방자하기로 소문이 났었는데 그럴 수 있었던 것은 어머니 보량의 총애도 있었지만, 아버지 찰인의 힘도 적지 않았다. 아버지 찰인은 백여 명의 자손을 두고 영화를 누릴 수 있었는데, 사람들은 철인이 처를 잘 둔 덕이라고 입을 모았다. 찰인의 처는 절세미인인 ‘옥두리’였다.
낭두의 아내들은 임신을 하면 예물을 준비해 상선(전임 풍월주)과 상랑(전 화랑)들이 거하는 선문에 들어가 그들과 한동안 같이 지내며 그들 중 누군가의 총애를 입기를 기다리는 풍습이 있었는데, 옥두리는 임신되기를 기다리다 찰인과의 사이에서 임신이 되자 바로 예물을 준비해 선문으로 들어갔다. 그녀의 미색은 이미 명성이 자자했던 터라 선문에 들자말자 곧바로 상선의 총애를 입었다.
그리고 돌아와서 남편 철인에게 말했다.
“내가 상선의 총애를 입었으니 낭군과 내 아이의 앞날이 몹시 밝을 것이옵니다.”
남편의 아이를 임신한 때부터 옥두리는 선문에 들어가 수태한 몸으로 상선과 상랑들 중에서 누군가와 사랑을 했기 때문에 찰인의 집안은 날로 번성해 갔던 것이다. 찰인은 점차 신분이 높아져 갔으나 옥두리는 자신을 기다리는 상선과 상랑이 많아지자 남편을 속이고 수태가 되지 않았음에도 수태가 되었다고 남편을 속이기도 하고, 젊은 예졸을 유혹해 수태를 하고 집으로 돌아와서는 아이를 낳았는데 옥두리조차 누구의 아이인지 모른채 상선의 마복자가 되어 남편 찰인의 출세를 도왔다. 아내가 방탕할수록 좋아했던 남편의 심사를 지금 우리는 어떻게 봐야 할까.
풍월주를 지낸 염장의 마복자들이 화랑에 들어와 낭정을 어지럽힐 때 염장의 외조카이던 천광이 풍월주가 되었다. 천광은 나이 많은 외숙부를 파면시키고 폐단이 많던 마복자가 아니면 선문에 들 수 없던‘입망의 법’을 폐하고 새로운 신진들에게 문을 크게 열어주었다. 이에 젊은 화랑들이 크게 좋아했다. 입망의 법을 폐하자 찰인과 옥두리는 반발했으나, 마음을 고쳐먹고, 찰의의 누이이자 미색이 뛰어났던 딸 찰언을 천광에게 바쳤다. 찰인 부부는 찰언을 천광이 받아주자 풍월주의 소생을 얻게 되었다며 외손자가 크면 이 또한 우리 집안이 더욱 번성하지 않겠냐냐며 서로 위로했다.
647년 선덕여왕이 병이 악화되자 비담 등이 반란을 일으켰다. 천광은 김유신 장군을 도와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우고, 이어 진덕여왕이 등극하자 공을 인정받아 ‘호성장군’이 되었다. 천광의 가계는 좀 복잡한데 아버지는 수품이고, 어머니는 천장이었다. 수품은 반야공주와 구륜공의 아들로, 반야공주는 미실궁주와 진흥대왕의 딸이고, 구륜공은 사도태후와 진흥대왕의 아들이다.
또 천광의 어머니 천장은 지도태후와 천주공의 딸이고, 천주공은 진흥왕의 아들이었다. 따라서 천광의 친증조할아버지, 외증조할아버지가 모두 진흥왕이고, 사도태후와 미실은 이모와 조카 사이면서 사돈지간이 되기도 한 것이다. 이처럼 신라의 지배계층은 따지고 올라가면 모두가 한 핏줄로 얽혀있다. 근친혼뿐만 아니라 다양한 혼외정사로 인하여 자손들이 서로 얽히고설킨 탓이리다.
12) 열두번 째 이야기
지금까지는 《화랑세기》에서 가져온 신국의 도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이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실려 있는 이야기다. 일련 스님이 쓴 책에 성상납 같은 이야기가 있겠냐 싶지만, 신라가 백제를 멸하고 이듬해인 661년 무열왕의 아들로 여러 차례 당나라에도 다녀온 문무왕, 즉 법민이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667년에는 고구려를 멸하고, 당나라 군을 몰아내기 위해 진력할 때 문무왕은 병석에 누운 김유신을 찾아와서 수어지교(水魚之交)를 말했다. 이에 김유신은 “삼한이 한 집안이 되었고 백성이 두 마음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완전히 태평성대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나 적이 잔잔해졌으니 전하께서는 성을 빼앗기보다 지키는 것이 더 어렵다는 것을 아시고 통일된 삼국을 잘 이끌어 나가신다면 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673년 7월 1일 진평, 선덕, 진덕, 무열, 문무왕까지 다섯 왕을 충심으로 모신 김유신이 79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당나라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지는 못했으나, 대동강과 원산 이남을 차지해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이다. 3년 뒤인 문무왕 16년에는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내 신라가 선덕여왕 때부터 닦아온 기초위에 삼국통일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당나라 세력까지 몰아낸 뒤에 포부를 새로이 한 문무왕은 나라 기틀을 다지고자 ‘총재’자리를 새로 만들어 이복동생 차득공을 그 자리에 앉히고자 했다. 하지만 차득공은 “전하, 총재가 되기 전에 먼저 나라 안을 두루 돌아보고 민간의 삶을 보고 난 연후에 명을 받겠습니다.”고 말해 윤허를 받고는 검은 승복의 거사 차림으로 아슬라주(명주), 우수주(춘천), 북원경(원주)를 거쳐, 무진주(광주) 등을 두루 돌아보는데, 그가 무진주에 이르렀을 때 이야기다.
무진주의 벼슬아치인 안길은 무진주 사람이라면 왠만한 사람을 다 알지만 낯선 사람이 지나가기에 그에게 누구인지 물었다. 차득공이 그냥 지나가는 사람으로 사람 구경과 경치를 즐긴다고 말하자, 안길은 삿갓 아래 차득공의 눈빛을 보고 예사 사람이 아님을 알아채고 “나는 무진주 관리인데 괜찮으시다면 오늘 밤은 저희집에서 하루 묵으시지요”하고 권했다. 승려가 아닌 거사 차림을 한 차득공은 딱히 갈 데도 마땅치 않았던 차라 “이런 감사할 때가 있나...”면서 하룻밤 신세를 지겠다고 했다.
융숭하게 대접받고 방에서 쉬고 있는데, 갈화라는 안길의 젊은 첩이 술상을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그리고 술을 따라 올리면서 말했다.
“귀한 손님이 오셨으니 주인이신 안길공께서 가장 귀한 것으로 손님을 대접하라 하셨습니다.”
“가장 귀한 것이라ⵈ”
거사는 술잔을 받아 마시며 물었다.
“안길공에게 가장 귀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소첩입니다.”
거사는 술상을 옆으로 밀치고 불을 껐다. 문밖에서 숨을 죽이고 몰래 동태를 살피던 안길은 두 사람의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것을 듣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돌아갔다.
이튿날 차득공은 무진주를 떠나면서 서울에 오거든 꼭 한번 찾아오라고 안길에게 말했다. 신라에는 지방 향리가 매년 한 사람씩 서울에 올라와서 상수하는 기인제도*라는 것이 있었는데, 얼마 후 안길이 그 차례가 되어 서라벌로 올라와 차득공을 찾았다. 차득공은 그때의 고마움을 잊지 않고, 안길을 문무왕에게 알현시켰다. 그 자리에서 왕은 궁궐과 관청에 땔감과 재목을 공급하는 소목전(燒木田)을 내리고, 산 아래 서른 이랑의 전답까지 내렸다. 여기 전답에 풍년이 들면 무진주에도 풍년이 들고, 흉년이 들면 무진주에도 흉년이 들었다고 하는데 차득공은 안길의 첩 선물에 고마움을 확실하게 보답한 것이다.
*上守 其人制 : 통일신라 이후에 해마다 외주(外州)의 향리 한 사람을 서울에 있는 여러 관청에 올려보내 지키게 한 제도
문무왕은 외삼촌 김유신이 죽은 날로부터 8년 후 공교롭게도 김유신이 죽은 날과 같은 날인 7월 1일에 돌아가시니 유언대로 장사하고, 시호를 문무라 하고, 여러 신하가 왕의 유언대로 동해구 대석상에 장사하였다. 속전(삼국유사)에는 왕이 용으로 화하였다고 하여 그 돌을 대왕석이라 한다고 《삼국사기》는 전한다.
신라는 통일 후 고구려 백제와 한 문화권이 되면서 중국 문물이 쏟아져 들어옴으로 인해 신국의 도는 조금씩 사라져 갔다. 우리는 《화랑세기》를 통해 신라인의 생생한 신국의 도를 엿볼 수 있었으나 《삼국사기》나《삼국유사》를 통해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삼국유사》안길의 첩 상납기록을 통해 ‘총재’라는 재상직을 두었다는 것과 ‘상수 기인제’가 있었음을 알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