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멸망
순종 즉위 직후인 1907년 7월, 일제는 이른바 한일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제로 성립시켜 국정 전반을 일본인 통감 이 간섭할 수 있도록 하였고 정부 각부의 장관을 일본이 임명하는 이른바 차관 정치를 시작하였다. 이렇게 내정 간섭권을 획득한 일본은 곧 재정 부족을 이유로 한국 군대를 강제 해산시켰으며 1909년 7월에는 기유 각서에 의해 사법권마저 강탈해갔다. 이처럼 순종을 허수아비 황제로 만든 뒤 이토 총독이 자국으로 돌아가고 소네 총독을 거쳐 군부 출신의 데라우치 총독이 부임하면서 일본의 대한제국 식민화 계획은 더욱 강화된다. 일제는 1909년 7월 기유각서의 각의에서 '한일합병 실행에 관한 방침'을 통과시킨 뒤 러시아와 사전에 만주 문제를 협상하기 위해 이토를 만주에 파견하였다. 이때 하얼빈에서 안중근 의사가 이토를 포살하자 이를 기화로 한반도 무 력 강점 계획을 실행에 옮기게 된다. 일제는 이를 위해 친일 세력인 이완용, 송병준, 이용구 등을 중심으로 형성된 매국 단체인 일진회를 앞세워 조선인 이 원함에 따라 조선과 일본이 합병한다는 논리로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을 성립시켜 대한제국을 멸망시켰다
조선 멸망후의 순종
일본에 의해 대한제국이 무너진 뒤 순종은 황제의 위치에서 왕으로 강등되어 창덕궁에 머물렀다. 일본은 창덕궁에 머무르는 그를 이왕이라 불렀고 왕에 해당하는 대우를 해주면서 왕위의 허호는 세습되도록 조처했다. 순종은 폐위된 후 16년 동안 창덕궁에 머물다가 1926년 4월 25일에 53세를 일기로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이 해 6 월 10일 그의 국장이 치러지게 되는데 과거 고종 인산날에 일어났던 3.1 만세운동에 이어 6.10 만세운동이 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