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짱한 글이라 공유합니다.
❤️ 어느 양로원
할머니의 시(詩)❤️ -
늙은 부모가 귀찮아 돈 몇푼이면,
해결된다는 안일(安逸)한 생각에 보내지는
부모님의 슬픈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 보는 자식들이 얼마나
될까?
똑바로 쳐다보지 않는 자식들의 면전(面前)에서,
애써 슬픔을 보이지 않으려 굳어만 가는 얼굴에 미소(微笑) 를 띄우며 걱정하지 말고,
잘 살라는 말 한마디가 가슴에 와 닿았을까?
아래 글은 할머니의 글이지만,
우리 모두의 현재 이거나,
미래라고 생각 된다.
어느 작은 요양병원에서 한 할머니가
돌아 가셨다.
간호사들이 조촐한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다가 "이"시(詩)를 발견 하게 되었다.
시(詩)의 내용에 감동받은 간호사 들이
이 시를 복사하여 모든 간호사들에게 전달 하였다.
한 간호사는 이 시를 정신 건강협회 뉴스지의 "크리스 마스" 판에 실리게 하였다.
단순하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이 시는
동영상으로 만들어져 소개 되었고...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로 전해졌다.
그 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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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님들!!
무엇을 보시나요?
댁들이 저를 볼 때
무슨 생각을 하시나요?
현명하지 않고 변덕스런 성질과
초점 없는 눈을 가진 투정이나 부리는
늙은 노인으로 보이겠지요?
음식을 질질 흘리고 대답을 빨리빨리
못하냐고 큰 소리로 말할 때면,
전 정말 당신들이 좀 더 노력 해 주기를 원했습니다.
ㅡ당신들이 귀찮다고 주먹질을 할 때는
맞아가면서도 전 정말 안 움직이는
몸속에서 용기를 내어 헛 손 질로나마
싸우고 싶었던 것이랍니다.
댁들이 하는 일도 못 알아차리는 것 같이 보이고,
양말이나 신발 한짝을 항상 잃어 버리는 늙은 노인으로 밖에는 안 보였나요?
저항(抵抗)하든 말든, 목욕을
시킬때도 설거지통 그릇 만도 못하고
댓돌만도 못한 내 몸뚱이에 눈물도 쏟아 냈지만, 흐르는 물에 감추어져 당신들 눈에는 보이지 않았겠지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이 아닌,
그냥 먹여 주는 댁들의 눈에는
가축보다 못난 노인으로 비추어 졌던가요?
댁들은 저를 그런 식으로 생각 하시나요?
댁들은 저를 그런식으로 보시 나요?
제 팔에 든 수많은 멍자국들이 당신들 눈에는
도화지 위에 아무렇게나 그려 놓은 망가진
보라색 도라지 꽃으로 보이던가요?
간호사님들!
그렇다면 이제 눈을뜨고 그런식으로
절 보지 말아 주세요.
이자리에 꼼짝 하지않고 앉아서
나의 의지는 상실 되어 댁들이 지시한 대로 행동하고, 나의 의지가 아닌 댁들의 의지 대로 먹고,
온 몸에 멍이 들어도 아픔을 삭혀야 되었던
제가 누구인지 말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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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열살 어린아이였을 땐
사랑하는 아버지도 있었고,
사랑하는 어머니도 있었고,
형제들도 자매들도 있었답니다.
열여섯이 되었을 땐
발에 날개를 달고
이제 곧 사랑할 사람을 만나러 다녔답니다.
스무 살땐
평생의 사랑을 평생 지키기로 약속한
결혼 서약을 기억하며 가슴이 고동쳤답니다.
스물 다섯살이 되었을땐
안아 주고 감싸주는 행복한 가정을 필요로 하는 당신들 어린시절과 같이 귀엽던 어린 자녀들이 생겨 났답니다.
서른살이 되었을땐
어리기만 했던 자녀들이 급속히 성장해서 서로 오래도록 지속될 관계가 맺어 졌답니다.
마흔 살이 되었을땐
어리기만 했던 아들 딸들이 성장해서 집을
떠나게 되었지만,
남편은 제 곁에 있어 슬프지 않았답니다
오십 살이 되었을땐
제 자식들은 직장에서 일을 하고
손주를 제 무릎에 안겨 주며
그때 비로소 인생의 맛을 느끼는
저 자신을 알게 되었답니다
마침내 어두운 날들이 찾아와
내 옆에 있던 이가 먼저 하늘로 떠나게 되면서 앞으로의 삶을 생각해 보니
두려운 마음에 몸이 오싹해 졌답니다.
자녀들이 모두 자기의 자식을 키우고 있는
그 모습을 보고 난 내가 알고 있던 지난날들과
사랑을 한번 생각 해 봤답니다.
저는 이제 늙은이가 되었는데
참으로 우습게도 늙은이를
바보처럼 보이게 만드는 것들을 보면서 세월은 참으로 잔인한 것 같다는 생각도 해 봤답니다.
몸은 망가지고 우아함과 활기는 떠나버렸고 한 때는 마음이었던 것들이 이제는
무딘 돌이 되어 버렸답니다.
시체와도 같은 이늙은이 속에는
아직도 어린애같은 마음은 살아 있어
가끔씩 다 망가진 이 가슴이 부풀어
오는 때가 있답니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겨 젊은 시절 처럼
사랑도 하고 싶다는 꿈도 꾸어 본답니다.
즐거웠던 일들을 기억해 보고 고통스러웠던 일들을 기억해 보면서 난 지금 다시한번
삶을 사랑하며 이렇게 살아가고 있답니다
너무 짧고 빨리 지나간 지난날들을 생각하면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엄연한 현실을
받아 들이기로 했답니다
이제, 사람들이여!
눈을 떠 보십시오!
눈을 떠 보십시오!
투정이나 부리는 늙은이로 보지말고
좀 더 자세히 나를 봐 주세요!
당신의 아버지는 아니나,
아버지일 수도 있고
당신의 어머니는 아니나,
어머니일 수도 있습니다.
그냥 가축에게 모이를 주듯 하지 마세요....
그냥 먹고 싶습니다
멍들게 하지 마세요...
가슴속에 멍을 안고
떠나지 말게 해 주세요.
사는 동안 간절한 내 소망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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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태어났다가, 생(生)노(老)병(病)사(死)를
거치며, 결국은 죽는다.
이 대자연의 섭리(攝理)속에서 펼쳐지는
한갓 드라마와도 같은 인생사....
세상의 변천사에 따라 시대적 "고려장"
(高麗葬)이라고 불리우는 요양원의 현실이
이렇다는 것을 적나라하게
표현된 내용에 공감(共感)을 하면서도
어쩐지 애잔한 마음이 남는다.
남의 일이 아닌, 바로 나에게도
다가오고 있는 길이기에.....!!!
사는동안 건강하고 행복 하자...!!
움직이세요!
움직이세요!
움직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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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님, 이 글의 바탕이 된 시는 확인됩니다.
다만 ‘돌아가신 할머니의 유품에서 발견된 실제 시’라는 사연과,
보내주신 한국어 본문은 구분해서 보셔야 합니다.
1. 원작은 「Crabbit Old Woman」입니다.
‘까다로운 할머니’ 정도의 뜻이며,
「Look Closer」(좀 더 자세히 보세요) 또는
「Look Closer Nurse」라는 제목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작가는 스코틀랜드의 간호사 필리스 매코맥(Phyllis McCormack)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1966년 몬트로즈의 서니사이드 병원에서 일하면서,
노년 여성의 입장에서 자신의 일생을 돌아보는 형식으로 쓴 작품입니다.
1972년에는 간호 전문지 《Nursing Mirror》에 익명으로 실렸고,
이후 작가가 자신의 작품임을 밝힌 기록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작품의 저자·발표 경위
2. ‘유품에서 발견됐다’는 이야기는 원작의 집필 경위와 다릅니다.
이 시에는 오래전부터 ‘요양시설에서 숨진 할머니의 짐을 정리하던 간호사가 발견했다’는 사연이 붙어 전해졌습니다. 그러나 이는 작품에 덧붙은 이야기로 정리되어 있으므로, 확인된 실화처럼 소개하기는 어렵습니다. 작품에 붙은 사연과 유통 경위
3. 보내주신 글은 원문 그대로의 번역이 아닙니다.
영문 본문과 대조하면 차이가 뚜렷합니다.
보내주신 글의 내용영문 본문과 비교
| 어린 시절부터 결혼·육아·사별·노년을 돌아보는 부분 | 원작의 중심 내용과 일치합니다. |
| 주먹질, 팔의 멍자국, 보라색 도라지꽃, 가축에게 모이를 주듯 한다는 표현 | 확인한 영문 본문에는 없는 추가 내용입니다. |
| 요양원을 ‘시대적 고려장’이라고 평가하는 맺음말 | 원작에 없는 별도의 논평입니다. |
| “움직이세요!”를 반복하는 마지막 문장 | 원작에 없습니다. |
따라서 누군가 원작을 바탕으로 학대 묘사와 논평을 덧붙인 한국어 각색본으로 판단됩니다. 번역·각색자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대조한 영문 시 전문
카페에 소개하신다면 출처를 “필리스 매코맥의 「Crabbit Old Woman」을 바탕으로 한 한국어 각색본 — 번역·각색자 미상”이라고 표시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원작이 전하려는 핵심은 ‘눈앞의 쇠약한 노인에게도 사랑하고 살아온 한 사람의 온전한 인생이 있으니, 그 사람 자체를 보아 달라’는 호소입니다. 이 글을 요양시설 전체의 실제 모습이나 특정 학대 사건의 증언으로 받아들이지는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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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승과 목사의 수명💕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인터넷에서 흥미로운 글 하나를 보았습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고승들과 개신교 목사님들의 수명을 비교한 내용이었습니다.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신 효봉 스님은 79세, 이청담 스님은 70세, 성철 스님은 82세,
법정 스님은 79세에 입적하셨다.
이분들은 모두 불교계의 고승들이며, 영적 깊이와 도량이 넓은 분들이었다.
그러나 90세를 넘기신 분은 없었다.
반면 개신교의 대표적인 목사님들 중에, 영락교회 한경직 목사는 99세,
영등포교회 방지일 목사는 104세,
충현교회 김창인 목사는 96세, 경동교회 강원용 목사는 90세에 소천하셨다.
모두 90세 이상을 사셨다.
고승들의 평균 수명이 약 77.5세인 데 비해, 이들 목사님들의
평균 수명은 97세로 무려 20년 가까운 차이를 보인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일까?”
이 글은 표본이 충분치 않고 통계적 객관성은 떨어지지만,
나름대로 생각할 거리를 던져줍니다.
일반적으로 스님들은 공기 좋고 물 맑은 산중에서 살며,
육식을 금하고 채식을 실천합니다.
규칙적인 생활과 절제된 식단, 청정한 환경 등 장수의 조건을 두루 갖춘 셈입니다
. 반면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은 도시에서 살며,
고기 반찬과 커피, 과로와 스트레스가 일상처럼 따라붙는 삶을 삽니다.
게다가 직업별 평균 수명을 보면, 가장 단명하는 직업이 언론인, 다음이 체육인이고,
가장 장수하는 직업은 종교인이라고 합니다.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직업일수록 수명이 짧다는 것은
통계적으로 입증된 사실입니다.
개신교 목회자들 역시 교인 관리, 교회 운영, 설교 준비 등 상당한 스트레스를 감내해야 하는 직업군 인데도
불구하고, 장수 직업 1위에 속한다는 사실은 오히려 더 신기하게 느껴집니다.
그렇다면 이 수명의 차이는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요?
하나는 인간관계의 차이일 수 있습니다. 고승들은 수행과 참선 중심의 삶을 살며, 비교적 고립된 환경에서 살아갑니다. 반면 개신교 목사들은 평생 수백 명, 수천 명의 신도들과 밀도 높은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갑니다. 다양한 사람들과 소통하며 웃고 울고 기도하는 일상이 오히려 정서적 안정과 생의 활력을 줄 수도 있습니다.
또 하나는 설교와 예배라는 지속적 활동입니다. 목사님들은 매주 설교를 준비하며 꾸준히 뇌를 사용하고, 회중 앞에서 말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이는 뇌 건강 유지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고, 사회적 역할감이 노후에도 유지되며 삶의 의미를 지속적으로 부여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목사님들은 자신의 사명과 소명을‘하나님의 부르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이런 강한 목적의식과 영적 정체성은 삶에 대한 태도를 긍정적으로 바꾸고, 병마조차 이겨내는 정신력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물론 이는 단순한 수명의 차이를 넘어, 삶의 태도와 철학, 인간관계와 환경, 사명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일 것입니다. 결국 오래 사는 비결은 단순한 식습관이나 환경에만 있지 않은 듯합니다. 나이가 들어도 끊임없이 머리를 쓰고, 사람들과 교류하며, 삶의 의미를 붙들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장수의 중요한 조건이 아닐까요? 고요한 산중에서 묵묵히 자신을 비우며 살아가는 스님의 길도, 분주한 도시 한복판에서 끊임없이 말씀을 준비하고, 교인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목회자의 삶도 모두 존귀합니다. 다만 두 삶의 방식이 건강과 수명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생각해보면, 인간은 결국
혼자보다는 함께, 멈추기보다는 움직이며, 고립되기보다는 소통하며 살아갈 때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사는 존재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장수의 비결은 육체의 절제가 아니라, 정신의 활력과 관계의 온기에 있지 않을까요?(옮)
언제나 건강관리 잘하시고 행복하세요
💕사랑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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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덕님, 이 글의 최초 작가는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또한 ‘목사가 고승보다 약 20년 더 오래 산다’는 주장은 이 자료만으로 입증되지 않습니다. 출처가 불분명한 수명 비교에 장수에 관한 해석을 덧붙인 글로 보입니다.
① 출처·작가 확인
보내주신 글과 제목·도입부·결론이 같은 X 게시물을 찾았습니다. 다만 게시자가 직접 쓴 글인지, 다른 곳에서 옮겼는지는 확인되지 않아 원작자로 지목할 수 없습니다. 동일 문구가 확인되는 게시물
또한 고승 4명과 목사 4명의 이름·나이를 똑같이 비교하는 내용은 글로벌연합선교훈련원 게시물에서도 확인됩니다. 그러나 그 글의 해석과 결론은 보내주신 글과 다릅니다. 따라서 비교 사례가 여러 형태로 유통되고 있다는 점까지만 확인됩니다. 동일한 수명 비교가 실린 게시물
② 수명 비교에는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본문에 적힌 나이를 그대로 계산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개별 나이의 정확성까지 검증한 표는 아닙니다.
구분본문에 제시된 나이산술평균
| 고승 4명 | 79·70·82·79세 | 77.5세 |
| 목사 4명 | 99·104·96·90세 | 97.25세 |
차이는 19.75년입니다. 그러나 이는 선택된 여덟 사람의 평균 차이일 뿐, 승려와 목사 전체의 평균수명이 아닙니다.
사회적 관계가 좋은 사람들에게서 더 높은 생존 가능성이 관찰된 연구는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148개 연구, 약 30만 명을 종합한 분석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연구는 목사와 고승의 수명을 비교하거나, 설교가 참선보다 장수에 유리하다고 입증한 연구가 아닙니다. PLOS Medicine 연구 원문
또한 ‘스님은 고립되고 목사는 소통한다’는 구분은 지나친 단순화입니다. 효봉 스님만 해도 교육·종단 운영·국제 불교대회 등 다양한 활동을 했습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효봉
확인 결과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