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km 턱밑에 러 핵무기… 우리도 핵으로 맞서야 하나”
新 핵냉전의 최전선 발트해를 가다… ‘핵전쟁 공포’ 리투아니아 르포
인구 2000명 발트해 휴양도시, 북적이던 관광객 발길 끊겨
“핵무기가 이곳에서 폭발하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도 핵으로 맞서야 하는 거 아닙니까.”
21일(현지 시간) 러시아 역외영토인 칼리닌그라드로 이어지는 리투아니아 국경 도시 니다에서 만난 로마 씨(40)는 “발트해가 신(新)냉전의 최전선이 되면서 국경이 막혔다”고 토로했다. 서방은 러시아가 이곳에서 불과 90km 떨어진 칼리닌그라드에 핵무기를 배치한 것으로 보고 있다. 러시아는 29, 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주요 의제인 스웨덴,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 현실화되면 핵미사일을 배치하겠다고 28일 공개적으로 위협했다.
발트해로 이어지는 해안이 아름다운 인구 2000여 명의 소도시 니다는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그러나 최근 러시아가 핵위협 수위를 한층 높이면서 관광객이 끊겼다. 러시아는 지난달 4일 칼리닌그라드에서 핵탄두를 탑재한 이스칸데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는 시뮬레이션을 벌였다. 전동킥보드 대여업을 하는 지역 주민 노스 씨(21)는 22일 “예년에는 여름철 손님이 하루 100명이 넘었지만 오늘은 5명도 안 된다. 당장 핵전쟁이 일어날 수 있는 곳에 누가 오려 하겠나”라고 했다. 러시아의 핵위협이 현실화되자 칼리닌그라드로 연결되는 국경검문소 도로 진입이 차단됐다.
러 핵전폭기로 우크라 쇼핑몰 폭격… 최소 18명 숨져 27일(현지 시간) 우크라이나 중부 폴타바주 크레멘추크의 한 쇼핑몰이 핵미사일 탑재가 가능한 러시아군의 전략폭격기에서 발사한 순항미사일 공격을 받아 화염과 시커먼 연기로 뒤덮였다. 당시 쇼핑몰에 있던 1000여 명 중 최소 18명이 숨지고 60여 명이 다쳤다. 사상자는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이날 미사일 공격은 주요 7개국(G7) 정상회의 직후, 29일 예정된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 정상회의 직전에 벌어졌다. 크레멘추크=AP 뉴시스
나토 정상회의를 이틀 앞둔 27일 러시아는 핵공격 능력을 과시했다. 이날 핵미사일 탑재가 가능한 전략폭격기 Tu-22M3에서 발사한 순항미사일로 1000명의 시민이 몰려 있던 우크라이나 중부 크레멘추크시 쇼핑센터를 공격해 최소 18명이 사망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27일 발트해와 동유럽 일대에서 러시아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을 현재 4만 명 규모에서 7.5배 이상 늘어난 “30만 명 이상으로 증강하겠다”고 밝혔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노골적 핵위협이 핵전쟁 문턱을 낮춰 핵공포를 확산시키고 나토가 병력·군비 증강으로 맞서는 ‘신(新)핵냉전’ 시대가 온 것이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는 “핵무기와 군비 지출을 억제하던 탈냉전 시대에 역사적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나토군 훈련 잦아진 리투아니아… 시민들 “현대판 서베를린” 불안감
[오늘 나토 정상회의]‘핵전쟁 공포’ 리투아니아 르포
푸틴측 “스웨덴-핀란드 나토 가입땐 두 나라 턱밑에 핵탑재 미사일 배치”
주민들 “러의 다음 타깃은 발트해” 리투아니아, 미군 영구 주둔 요구
나토, 동유럽 병력 8배로 증강 발표… 러 “크림반도 침범땐 3차 대전”
“괜히 힘 빼지 말고 돌아가십시오. 지금 탱크 오가는 거 안 보입니까?”
20일(현지 시간)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 인근 파브라데에 있는 군사시설 ‘헤르쿠스 실전훈련 캠프’ 입구에서 군용 트럭이 진입을 기다리고 있다. 파브라데=김윤종 특파원
20일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약 48km 떨어진 소도시 파브라데. 탱크와 장갑차 4대가 지난해 8월 운영을 시작한 군사시설 헤르쿠스 실전훈련 캠프에 연이어 진입했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나토)군이 훈련을 벌이는 곳이다. 캠프 입구에서 보초를 서던 리투아니아군 디아노스 씨는 기자에게 “요즘처럼 긴장이 고조된 시기에 (나토군과 함께) 훈련하는 장소를 공개할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러시아는 최근 리투아니아가 자국을 거쳐 발트해 연안 러시아 역외영토 칼리닌그라드로 가는 철도 화물열차의 운송 제한 조치를 내리자 군사 보복을 경고했다. 리투아니아 정부는 발트해 연안에 나토군 소속 미군의 영구 주둔을 요구하고 나섰다.
○ 리투아니아, 연일 나토군과 연합훈련
러시아 발트해 역외 영토 칼라닌그라드에 있는 핵무기 벙커로 추정되는 위성사진 자료: 미국과학자연맹(FAS)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최측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국가안보회의 부의장은 29, 30일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열리는 나토 정상회의 주요 의제인 스웨덴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 현실화되면 “두 국가의 턱밑(발트해)에 (핵 탑재) 이스칸데르 극초음속 미사일을 배치할 것”이라고 28일 위협했다. 서방은 러시아가 칼리닌그라드에 핵미사일을 배치했다고 보지만 러시아는 공개적으로 밝힌 적이 없다. 이번엔 대놓고 핵미사일 배치를 경고했다.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발트해 연안은 ‘신(新)핵냉전’의 최전선이 됐다. 군사 긴장이 더욱 고조되면서 리투아니아에서 나토군과 연합훈련이 연일 이어지고 있다. 기자가 만난 빌뉴스 시민들은 최근 수도권 일대에서 군 훈련이 잦아졌다고 전했다. 이들은 리투아니아 정부가 10∼12일 “갑작스러운 미사일, 전투기 소리에 놀라지 말 것. 나토군 훈련 중”이란 ‘훈련 고지 문자’를 재난경보처럼 수도권 시민들에게 전송했다고 전했다.
현지 주민들은 “칼리닌그라드와 친(親)러시아 국가 벨라루스 사이에 끼어 있는 리투아니아는 현대판 서베를린”이라고 했다. 냉전 기간 소련이 통제하는 동독에 둘러싸여 서방의 최전선 역할을 한 서베를린과 지정학적 의미가 같다는 뜻이다. 5세 딸을 둔 다이와 씨는 “러시아의 다음 타깃이 발트국이라는 얘기가 나온다”며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토로했다.
○ “러의 다음 타깃은 발트해”
나토 정상회의에서 스웨덴과 핀란드의 나토 가입이 확정될 경우 러시아를 제외한 발트해 연안 8개 국가가 모두 나토 소속 국가가 된다. 발트해가 ‘나토의 내해(內海)’가 되는 셈이다. 뉴욕타임스는 “(이에) 푸틴 대통령이 나토의 결의를 시험하려 하면 발트 연안 국가들 침공이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국 등 서방은 나토가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군사 개입을 확대하는 것을 막기 위해 러시아가 발트해 국가들에 군사 도발을 벌일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 메드베데프 부의장은 28일 “나토가 (러시아가 2014년 강제병합한) 크림반도를 침범하면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27일 기자회견을 열고 “러시아는 즉각적 위협”이라며 “발트해를 비롯해 동유럽 일대에 러시아에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병력을 30만 명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미 NBC 방송은 28일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나토 정상회의에서 리투아니아 등 발트해 연안 3국과 폴란드의 미군 주둔 규모를 확장하는 계획을 밝힐 것이라고 보도했다.
나토는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동유럽 일대에 병력 4만2000명을 배치했다. 그럼에도 병력을 7.5배 이상으로 늘리겠다고 선언한 것. 2024년까지 나토 회원국 30개국 가운데 19개국이 국방예산을 국내총생산(GDP)의 2%로 올리는 나토의 목표를 달성할 것이라고 했다. 현재 9개국에 불과하다. 러시아의 핵위협이 나토의 군비 증강 본격화로 이어진 것이다.
니다·빌뉴스·파브라데=김윤종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