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 기도)
주님,
새날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말씀 앞에 나아갑니다.
부정성과 판단하는 마음을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십자가 보혈로 덮어주옵소서.
정결한 마음과 정직한 영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성령의 인도하심을 기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본문)
12. 그러므로 너희가 이것을 알고 이미 있는 진리에 서 있으나 내가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3. 내가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너희를 일깨워 생각나게 함이 옳은 줄로 여기노니
14. 이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지시하신 것 같이 나도 나의 장막을 벗어날 것이 임박한 줄을 앎이라
15. 내가 힘써 너희로 하여금 내가 떠난 후에라도 어느 때나 이런 것을 생각나게 하려 하노라
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교묘히 만든 이야기를 따른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
17.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그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18. 이 소리는 우리가 그와 함께 거룩한 산에 있을 때에 하늘로부터 난 것을 들은 것이라
19. 또 우리에게는 더 확실한 예언이 있어 어두운 데를 비추는 등불과 같으니 날이 새어 샛별이 너희 마음에 떠오르기까지 너희가 이것을 주의하는 것이 옳으니라
20. 먼저 알 것은 성경의 모든 예언은 사사로이 풀 것이 아니니
21.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받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
(본문 주해)
12~14절 : ‘그러므로’는 1절~11절까지의 내용이다.
<하나님은 모든 믿는 자에게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주셨다. 이로써 그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게 된다. 이 은혜가 헛되지 않도록 그리스도인은 힘써 8가지 덕목을 이루어야 한다. 그리하여 부르심과 택하심을 견고히 하며 그리스도의 나라에 넉넉히 들어갈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자신의 죽음이 임박한 것을 느끼고(환상이나 계시를 통해), 성도들에게 그들이 이미 알고 있는 진리를 기억시키고자 한다.
성도란 죽는 것이 아니기에 장막을 벗는다고 표현한다.
그가 죽기 직전에, 즉 이 장막에 있을 동안에 성도들에게 항상 기억해야 할 내용이 무엇인지를 일깨워 주기를 원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이 떠난 후에도 이런 것이 계속 생각나게 하겠다는 것이다.
15~18절 : 베드로 사도는 성도들로 하여금 무엇을 생각나게 하려고 하는 것일까?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을 생각나게 하려는 것이다.
왜 항상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과 그의 능력을 생각하여야 할까?
당시 거짓 선지자들과 거짓 선생들이 주님의 강림과 심판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썩어질 정욕을 따라 살게 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 세상 전부가 주님의 강림과 그의 능력을 믿지 못하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베드로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이 교묘하게 꾸며낸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을 증언한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자신들이 직접 목격하였다는 것이다. 즉 변화산에서 영광스러운 모습으로 변모하신 주님을 뵈었던 것이다. 모세와 엘리야가 함께 나타났기에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짓고 거기서 살고 싶다고 하였던 것이다.
그때 하늘로서 음성이 들리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시면서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고 하신 것이다. (마17:1~5, 막9:2~7, 눅9:28~35)
그리하여 베드로 사도가 알리고자 한 예수 그리스도의 권능과 재림이 하늘로부터 유래한 것으로써 권위가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재림에 권위를 부여하는 것은, 당시 거짓 교사들의 미혹으로 그리스도의 강림을 부인한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여러분이 무엇보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이것입니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나타나서, 자기들의 욕망대로 살면서, 여러분을 조롱하여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다시 오신다는 약속은 어디 갔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래로, 만물은 창조 때부터 그러하였듯이 그냥 그대로다."”(벧후3:3~4, 새번역)
성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그의 말씀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다. 그 말씀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영광이며 그의 재림에 관한 내용이다.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메시아의 초림과 십자가와 부활이 다 성취가 되었다.
이제 사도들을 통하여 증거 된 그 십자가의 완성을 믿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자들이 성도들인 것이다.
19절 : 그런데 ‘더 확실한 예언’에 대한 오해가 많다.
혹자는 베드로의 그런 체험보다 더 분명하고 확실한 예언이 ‘기록된 말씀’이라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무엇을 보았다. 들었다는 말에 현혹되지 말고 기록된 말씀에 주의하라고 하는데 일면 타당하기도 하다. 워낙 많은 사람들이 종교적인 신비체험을 가지고 마치 직접 받은 계시인 양 간증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본문의 ‘더 확실한 예언’이라는 것은 ‘구약의 모든 메시아에 대한 예언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려주는 말씀’을 가리킨다.
베드로 사도가 변화산에서 보았던 그리스도의 위엄과 하늘의 소리는 완전하고 충분한 증거이다. 이보다 더 큰 증거는 없다. 이것은 구약의 선지자들이 예언한 말씀을 확실하게 한 것이다. 즉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위엄을 목격함으로써 구약시대 선지자들의 예언이 확실하게 성취된 것이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19절, 공동번역)
‘등불’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한 구약의 선지자들(혹은 그들이 전한 말씀)을 가리키며, ‘샛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등불이 비치지 않고 샛별이 떠오르지 아니한 상태에서 구약을 해석하고 율법을 지킨 사람들 중에 대표적인 사람이 바울이다. 그는 율법을 따라 흠이 없는 자며 율법에 대한 열심이 남보다 특심하였지만 예수 믿는 자를 잡아 죽인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이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구약 성경을 보는 눈이 완전히 달라진 것이다.
성령의 역사로 등불을 통해 샛별을 보게 된 것이다.
구약의 백성들이 예언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 샛별처럼 강림하신 그리스도를 맞이하였듯이, 신약의 성도들 역시 그리스도의 말씀과 성령의 증거에 귀를 기울여 그의 두 번째 강림(재림)을 확신하며 기다릴 것이다.
20~21절 : 카톨릭에서는 성경 해석의 권한이 개인에게 있는 것이 아니므로 사사로이 풀면 안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 후 종교개혁이 일어나 성경을 개인도 볼 수 있게 되자 신부들의 가르침이란 것이 얼마나 말씀과 동떨어진 것인지를 백성들이 알게 되었고, 한편 또 제각각의 해석이 나오는 부작용이 생긴 것이다.
사사로이 풀지 말라는 것은, 교회냐 개인이냐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구약의 예언들을 아무렇게나 풀지 말라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은 성령의 감동으로 하나님께 받아서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도들이 성령의 감동으로 해석하고 또 그 해석한 것을 기록한 것이 신약이 되는 것이다.
(나의 묵상)
자신의 죽음이 다가온 것을 알게 된 베드로 사도가 성도들에게 자나 깨나 잊지 말라고 하는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재림의 말씀이다.
왜 이것을 기억하라고 했냐면 당시 거짓 선지자들과 교사들이 들어와 주님의 재림과 심판을 생각하지 못하게 하고, 세상의 썩어질 정욕을 따라 살도록 미혹했기 때문이다.
오늘날도 주님의 재림과 심판에 대해서는 말하기를 싫어한다.
입으로는 ‘마라나타’ 하지만, 속으로는 ‘주님, 지금은 아니올시다’ 한다.
어떤 믿는 자가 어려움을 겪고 난 뒤 ‘자칫하면 천국 갈 뻔했다’고 말하며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것을 보고, 종교인들의 위선과 가증스러움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하여튼 이 세상에 보암직, 먹음직, 탐스러운 것들이 너무도 많아, ‘천국은 최대한 천천히’ 라고 한다. 찬송가는 잘도 부르면서, 마음은 땅에 촤악 붙었다. 그러니 나누는 모든 대화도 땅의 것으로 넘친다.
복음을 알고 매일 말씀으로 살게 된 이후 점점 천국 소망이 커진다.
그것은 주님의 재림을 진심으로 기다리는 마음이다.
내가 완벽해서 주님의 재림 앞에 자신만만한 것이 아니라, 사나 죽으나 주님께 연합되어 있어 그 보혈을 힘입어 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마음은 나의 결심이나 의지 때문이 아니라, 매일 주시는 말씀 때문이다.
“이것으로 예언의 말씀이 더욱 확실해졌습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동이 트고 샛별이 떠오를 때까지는 어둠 속을 밝혀주는 등불을 바라보듯이 그 말씀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좋겠습니다.”(19절, 공동번역)
아, 이 말씀이 이해가 되니 너무도 기쁘다.
매일의 말씀-구약이든 신약이든-에서 나는 예수님을 볼 수 있도록 성령님께서 인도해 주실 것을 늘 기도한다.
2015년 처음 말씀 묵상을 시작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 중심, 십자가 중심’으로 말씀을 묵상하라는 주의 사항을 듣고는 참 막막했다.
신약은 그나마 직간접으로 예수님이 등장하시니 좀 덜한데, 구약에서 태어나지도 않은 예수님, 아직 지지도 않은 십자가를 어떻게 찾는다는 것일까 하고 고민했다.
구약이 오실 예수님을 증거하는 약속의 말씀이라는 것은 지식적으로 알고 있는 표현이고, 도대체 어떤 말씀이 예수님을 증거 하는 것인지 통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드문드문 가뭄에 콩 나듯이 예수님을 예표하는 말씀이라는 가르침에 고개를 끄덕이다가 이내 잊고 만다.
예수님과 동거했지만 메시아를 오해하며 3년 동안이나 허둥대며 살아온 제자들이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을 경험한 이후 구약의 선지자들이 증거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신 것을 더욱 확증하게 되니, 그 말씀을 가지고 복음을 전하는 사도들이 된 것이다.
그렇게 내게도 성령께서 등불을 주셨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살고자 버둥거리는 나를 불쌍히 여기셔서 등불을 주신 것이다. 그것은 매일의 말씀이요, 또한 이 말씀의 주해들이다.
나는 이 등불을 통해 샛별이 떠오르는 것을 보는 경험을 매일 하고 있다.
어둠 속에서 등불을 한참 바라보면 마음의 동이 트고 샛별이 보인다.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또 좋은 주해서를 밑줄 그어가며 열심히 본다. 그러나 때때로 내가 집중을 못하거나 어리석어서 이해를 못하고 놓치는 부분도 많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구약과 신약을 조금씩 넘나들며 주님을 보게 되니 이 기쁨은 뭐라고 표현할 수 없다.
샛별을 보는 기쁨이다.
주님을 매일 보며, 주님과 교제하는 자가 되니 어찌 그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만나자고 한다면 그것이 어찌 사랑이고, 연인 관계일 수 있을까 말이다.
(묵상 기도)
주님,
깜깜한 이 세상을 사는 자의 마음에 등불을 주시고
빛나는 새벽별을 보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모든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늘 보게 하시어
제 마음에 항상 샛별이 떠 있게 하옵소서.
성령님, 의지합니다.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