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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편.
잠깐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집으로 들어온 영주는 불도 켜지 않은 채 곧장 욕실로 들어갔다.
화장기를 지우기 위해 간단히 세수를 하고 나온 영주는 곧바로 옷장을 열었다. 내일 아침 출근할 때
입을 옷가지를 쇼핑백에 넣었다. 무언가 더 필요한 것이 없나 싶어 잠시 생각하던 영주는 냉장고를
열었다. 많이 다친 탓에 죽이나 미음 같은 간단한 음식 밖에 소화시킬 수 없겠지만 그래도 제대로 된
반찬이 필요할 것 같아 빈 그릇통에 조금씩 챙겨 넣었다.
더 이상 필요한 것이 생각나지 않아 영주는 서둘러 병원으로 향했다. 조용히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민혁이 가느다란 신음을 뱉어내며 몸을 움직이자 영주는 동작을 멈추었다. 혹여 그녀 때문에
깨는 것이 아닐까 염려되었다. 지금 그에게 제일 필요한 것은 편히 잘 수 있는 것이었다.
민혁이 얼굴을 찌푸리던 것도 잠시 이내 다시 잠잠해지자 영주는 좀 전보더 더 조심스럽게 문을 닫고
들고 온 물건들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겉옷을 벗어놓으며 시간을 확인해 보니 벌써 새벽 2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다행히 새벽같이 나갈 필요가 없는 직장이었기에 충분히 잠을 청할 수 있는 시각이었다.
빈 침상 위에서 잠을 청할까 싶던 영주는 생각을 거두고는 보호자 전용 쪽으로 몸을 틀었다.
이불은 두껍지 않았지만 병실 안의 온기는 꽤 훈훈했기에 감기 들 생각은 없겠다는 생각을 하며
불을 끄고 자리에 누운 영주는 곧바로 다시 일어나야만 했다.
병실로 들어설 때 깬 것인지 무척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둠 속에서 들려왔다.
“거기서 그냥 자도 되겠어?”
스탠드 불빛을 다시 켠 영주는 민혁이 눈을 뜨고 있는 모습에 잠시 당황스러웠다.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어쩔 줄 모르고 있는 그녀를 보고는 민혁이 보일 듯 말 듯 웃음을 지었다.
“방금 전에 간호사 들어왔을 때, 집에 연락해 달라고 했어. 오지 말라고 전화했는데……. 못 받았지?”
말하는 것조차 힘이 드는 지 중간에 함숨과 함께 잠시 쉬어가며 말하는 민혁의 모습에 영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민혁이 부드러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자, 영주는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고요함 때문인지,
아니면 저 따스한 눈빛 때문인지 가슴 속이 간질거렸다.
침묵이 흐르자 이상하게 초조해진 마음에 무슨 말이라도 하고 싶지만 딱히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아
난처했다. 어색해진 상황에 통화만 할 때도 이렇진 않았다. 용기를 내 입을 열려는 순간, 민혁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다른 생각…… 되도록이면 하지 마. 그게 나아. 우선은 그냥 자연스럽게 놔두자.”
민혁은 확실히 배려가 깊은 사람이었다. 그래서인지 주위에 사람이 많았다. 원래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섞여 들어갈 수 있는 능력도 있었다.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면 싶은 생각이 들게끔 만들었다.
이미 그런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부럽다는 생각을 다시금 하게 만드는 민혁이었다.
영주는 작게나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마음을 먹었으니 그의 말대로 자연스럽게
놔두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천히 물들어가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에 결심을 굳혔다.
처음부터 정신없이 빠져 든다고 좋은 것은 아니었다. 쉽게 빠져든 만큼 쉽게 사라질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해.”
=====
일주일 동안 영주는 민혁의 병실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지냈다. 늑골에 금이 간 탓에 한동안 제대로
누워 있어야만 하는 탓에 시중을 들기 위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그의 가족들과 제법 친해질 수
있었다. 그처럼 무척이나 유쾌한 사람들이라 영주는 알 수 있었다. 그가 외무부터 성격까지 부모님을
많이 빼닮은 것은 잠시만 같이 있어도 금방 알 수가 있었다.
저녁 늦게 그녀가 병실에 들렸을 때는 곁에 지키고 있는 사람 없이 홀로 민혁이 늦은 저녁을 먹고
있었다. 오른팔을 쓸 수 없는 탓에 왼손을 사용하자니 무척 불편해 인상을 잔뜩 찡그리고 있는
민혁이었다. 왼 손마저 다친 것은 아니었지만 충격이 컸던 탓에 사용이 자유롭지 못해 밥은 하나도
먹지 못한 상태였다.
“그렇게 먹다간 다 흘리겠네.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이리 줘 봐.”
영주는 민혁의 손에서 수저를 빼어 왔다. 그녀가 대신 먹여주는 것 역시 마음에 들지 않는 지 입을 꾹
다문 채로 표정을 굳히고 있는 민혁을 보며 영주는 피식 웃고 말았다. 별 거 아닌 것에 자존심을 내세우
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꼭 심술궂은 어린 아이를 보고 있는 듯 느껴졌다.
“안 먹어?”
애써 웃음을 참으며 수저를 바짝 갖져다 대니 민혁이 내키지 않은 듯 입을 벌렸다.
쑥 입 안으로 들이밀자 여전히 인상을 펴지 않은 채 오물거리는 모습이 상당히 재미있었다.
몇 숟가락 떠 넣어주고는 다음을 기다리며 있자니 민혁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마음은 정한 거야?”
텔레비전에 관심을 두고 있던 영주는 민혁의 진지한 눈빛을 보고는 잠시 흠칫했다.
“뭐?”
“마음 정했냐고.”
영주가 잠시 대답 없이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민혁이 작게 숨을 내쉬며 물었다.
“생각할 시간 더 필요해?”
이미 결심은 선 상태였다. 그렇지만 망설여지고 있었다. 저번처럼 또 못된 짓을 하게 될 것만 같아서였
다. 우유부단한 자신의 모습이 지독히도 싫었지만 아무리 노력해도 고쳐지지 않았다. 예전 가까이 지내
던 친구들 중 하나가 지나가는 말로 미련퉁이라고 놀릴 만큼 고집이 센 그녀였다.
마음은 정했지만 왜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우습다고 생각하며 영주는 민혁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저번처럼 바보 짓…… 하게 될 지도 모르는데 괜찮아?”
“괜찮아.”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너무도 진중해 보여 순간 영주의 몸이 굳어져 버렸다. 이번에는 절대로
그냥 끝내지 않을 거라는 결심이 눈빛을 통해 보여지는 듯 느껴졌다.
순간 결정을 번복해야 하는 것일까 생각하던 영주는 전화벨 소리에 그녀를 훤히 꿰뚫어 볼 것 같은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영주는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이 전화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방금 전,
아주 잠깐 바보같은 생각을 하기는 했지만 두 번 다시 흔들릴 생각은 없었다.
잠시 고민하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영주는 민혁이 눈길을 피하자 머리가 어지러웠다. 신경성
두통이 다시 시작되려는 듯 지끈거리는 것 같았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할 것 같아 숨을 고르는데
민혁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
“전화 온 사람, 이해준이야?”
“아니.”
“그런데 왜 내 눈치를 봐? 나가서 전화하고 와. 무슨 용건이 있으니까 전화 했겠지.”
이미 단정을 지어버린 민혁에게 변명을 하자니 참 어려웠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오해하는 일은
없어야 된다는 생각이 들어 불쑥 내밀었다.
“부재중 전화, 보여줄까?”
“됐어. 확인 안 해도 돼.”
억지로 웃는 것인지, 조금은 기분이 나아져서인지 민혁이 작게 웃음을 흘렸다.
영주는 다시 수저를 들어 민혁의 입가로 가져갔다. 생각보다 재미가 있었다. 그녀가 내미는 족족 잘도
받아먹는 모습이 꼭 어린아이 같다는 생각에 기분좋게 있는데 다시금 전화가 울렸다.
수저를 내려놓고 확인해 보니 같은 전화였다.
잠시 받을까 말까 망설이던 영주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금방 들어올게.”
“아냐. 신경쓰지 말고 그냥 다 통화하고 들어와.”
고개를 끄덕이며 병실로 나오자 전화가 뚝 끊어졌다. 다행히 복도는 한가했다.
그럴 리 없지만 혹여 그녀의 목소리가 병실 안으로 흘러들어 갈까 걸음을 옮기며 통화 버튼을
꾹 눌렀다.
잠시 후 기다렸단 듯 금세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이제야 통화가 되네. 잘 지냈어?」
변함없이 부드러운 어조였다. 영주는 흔들리려는 마음을 애써 다잡았다. 이제는 괜히 어떤 일에도
참견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뿐이었다. 딱 부러지게 거절을 하는 것이 옳다는 생각에 영주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예. 잘 지내셨어요?”
「그래, 잘 지냈어. 늘 그렇지.」
무언가 중요한 할 말이 있는 듯 서연은 쉽게 용건을 꺼내지 못했다. 어려운 부탁에 말문이 쉽게 열리지
않는 지 숨소리만이 들려왔다. 영주는 아무래도 먼저 그녀가 말하는 것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에 마음을
다잡았다. 하지만 아쉽게도 서연이 선수를 치는 바람에 영주는 입을 닫아야만 했다.
「어려운 부탁 좀 하려고 전화했었어. 미안하지만, 우리 해준이한테 들려줄래? 얘기 들으니까 집에서
쉬고 있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서 말야.」
“무슨 일 있으세요?”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묻긴 했지만 역시 내키지 않았다. 저번에도 마찬가지지만 평소 때와는
어쩐지 분위기가 달랐다. 무언가 머뭇거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아니, 확실히 말하는 것에서부터
차이가 나고 있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단단히 있었다는 확신이 들었다.
「그냥 한 번 영주 니가 한 번 들여다 봐줬으면 하는데, 그럴 수 있니?」
=====
새벽같이 휘트니스 센터로 나온 경희는 정말 오랜만의 휴식에 기분 좋게 수영장을 가로질렀다.
평일인데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직원들을 제외하면 사람들은 한 손에 꼽을 정도 밖에 보이지 않았다.
한참을 물에서 보내다 밖으로 나온 경희는 물기를 닦아내며 편하게 자리에 누웠다. 이렇게 한가하게
있으니 너무도 기분이 편안했다. 운동을 한 탓에 나른하기까지 해 저절로 잠이 들 것만 같았던
경희는 누군가가 아는 척을 해오자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리 실내이지만 겨울이라 수영장 내부는
이용객들이 적었다. 애써 시간을 골라서 온 보람이 없어져 버린 탓에 짜증이 일었다.
“여기서 보네요?”
애써 표정 관리를 하며 눈을 뜬 경희는 눈앞에 반가운 사람이 보이자 활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라마가 끝난 터라 당분간 해준을 만날 기회가 없다는 생각에 낙심하고 있던 차였다. 그런데 여기서
그의 매니저를 보게 될 줄은 전혀 생각치 못했었다. 이 근처에 산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었지만 그래도
뜻밖이었다.
차민은 벌써 운동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인지 편안한 트레이닝 차림새에 머리는 젖어 있었다.
“네. 그런데 벌써 운동 마치신 거예요?”
“그동안 바빠서 건강에 신경 못 썼잖아요. 좀 일찍 나왔죠.”
정말 반가워하는 차민을 보며 경희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잘만 되면 세 사람이 함께 식사라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차민이 그녀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진작부터 눈치를 채고 있었다.
그러니 그녀가 잘만 행동하면 식사 쯤이야 어려울 것도 없었다.
“그럼 같이 식사 하실래요? 금방 나가려던 참이었거든요?”
“아래층에 샌드위치 괜찮던데.”
이미 알고 있는 것처럼 차민은 사람을 웃게 만드는 재주가 있었다. 같이 있으면 전혀 지루하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재미있게 하는 사람이었다. 외모도 단정했기에 조금만 분위기가 있었다면 한 번쯤
만남을 가져도 좋을 거란 생각이 들만큼 괜찮았다.
운동을 해서 그런지 목이 말랐던 경희는 차가운 음료수가 테이블에 놓여지자 무척이나 반가웠다.
목을 축이고 잠시 주문한 것을 기다리는 동안 경희는 유리벽 너머로 운동하기 위해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에어로빅 강의실이 옆에 있어서인지 대부분이 주부들이었다.
그녀를 보고 놀라하며 지나가는 모습을 보자니 어쩐지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녀 역시 유명인을
보고 그들처럼 두 눈을 커다랗게 뜨며 놀라워 했던 과거가 있었기에 이런 상황이 아직까지도
낯설게 느껴지는 경희였다.
“가끔씩 우울해져요. 더 이상 평범하게 살 수 없다는 거 말예요. 지금 이 상황, 내가 원해서 만들어진
건데 말이예요.”
경희의 말에 차민은 나지막히 대답했다.
“그냥 즐거워만 할 줄 알았는데.”
유리창 밖을 내다보던 경희의 고개가 돌려졌다. 차민은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머그컵에 담긴 진한
초콜릿색 커피를 티스푼으로 젓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이 어쩐지 평상시와 다르게 보이고
있었다. 항상 분주하게 움직이던 모습을 봐서 그런지 낯설게 느껴졌다.
“나 그냥 철부지로 봤단 뜻이죠? 너무하네. 나 그렇게 생각없이 사는 사람 아닌데. 하기는, 다른 사람들
도 마찬가지니까. 나하고 가깝게 지내는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해요.”
그의 말에 씁쓸해하지도,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은 듯 무덤덤한 경희의 모습에 차민은 피식
웃었다. 확실히 매력있는 여자였다. 가끔 뒤에 따라올 결과는 생각치도 않고 행동하는 철부지 같지만
의외로 생각이 깊다는 것쯤은 대충 느끼고 있었다.
“내가 징검다리가 되줄 수도 있는데.”
“네?”
“사랑의 징검다리. 이래봬도 매니저로 일하면서 보고 배운 게 많아. 눈치도 늘었고 말이야. 협조해
줄테니까 이해준이한테 다가봐 보라고.”
꽤나 직선적으로 말하는 그의 모습에 놀랐는지 조금은 굳은 표정으로 앉아있는 경희를 보며
차민은 흥미를 느꼈다. 생각보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속내를 들킨 것이
못내 양심에 찔리는 지 굳어있는 경희의 모습에 마음을 굳히기로 했다.
얼마 전, 스캔들로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지만 그것이 꺼림직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가산점으로 매길 수 있었다. 해준에게 필요한 것은 자극이었다. 단단한 껍질을 깨줄 수 있는 사람은
지금으로썬 경희 밖에 없었다. 뜻하지 않는 변수가 생길 수도, 아니면 전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겠지만 모험을 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았다.
이미 오래 전부터 최영주는 가망성이 없었다. 어쩌면 처음부터였을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내내 휘젓고 있던 스푼을 내려놓으며 차민은 결심을 굳혔다. 지금 하려는 일이 주제넘을 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그냥 두고 볼 수는 없었다.
“어때? 한 번 해보는 게? 실패한다 해도 어차피 손해보는 일은 없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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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때요? 좀 더 흥미로워 졌나요? ㅎㅎㅎㅎ
첫댓글 영주는 굳게 민혁이 한데 마음을 돌려네요....하지만 해준이길 바래는데.....그리고 왜 전화 안받는 것인지.....그리고 차민이 정말 마음 안드네요...당사자는 아무말 안하고 있는데 너무 설치네요...다음편도기대...
저도 위에분님말에 동감입니다^^ 오늘 처음 읽었는데 애독자될께용 작가님 화이팅
차민이 너무 위험스런 발언을.... 영주를 너무 무시하는 처사가 아닌가 싶기도 하구.... 영주가 민혁에게 맘을 돌려도 해준에게 못 벗어날듯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