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3. 15. 목요일
리베르
1. 취지
매해 총선때마다 기성 정치인은 구시대 인물로 낙인찍히고, 쇄신의 차원에서 신진 인물을 정치개혁 차원에서 내세우는 것이 반복되었다. 김문수, 이재오 등도 정치 쇄신의 차원에서 영입되었던 것이고, ‘386부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세월은 모든 사람들을 낡은 사람으로 변모시키게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그 중에 옥석이 있는 것이고, 새로 영입되는 ‘참신한 인물’ 중에서도 역시 옥석이 있는 것이다.
이번 총선 역시 공천으로 기성 정치인들이 뭇매를 맞고, 새 인물을 맞이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다. 그러나 전혀 검증이 안 된 그 ‘새 인물’이라는 것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는 지난 수십 년 간의 경험으로 우리는 깨달았다.
본지는 19대 총선을 맞이하여, 기성정치인과 새 인물을 따지지 않고 딴지 독자와 유권자들이 안심하고 믿고 찍을 수 있는 인물을 발굴하여 본지 공식 추천 후보를 내세우고자 한다. 종종 시민운동 단체들이 낙선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는데, 굳이 비교하자면 본지는 포지티브적으로 찬성 운동을 전개하게 되는 셈이다.
2. 선정 기준
본지가 강추하게 될 후보는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는 정치인들보다는 ① 상대적으로 덜 알려지거나, 저평가된 인물을 중심으로 ②현 시대적 과제인 ‘양극화 문제, 시장만능주의 문제’를 극복하고 ‘복지국가’에 대한 신념과 능력을 갖춘 사람을 최우선 기준으로 삼았다. 그러므로 이런 기준에 부합하여 정치적으로 주목해야 될 인물이라면 당적은 물론 기성과 신인을 막론하고 선정하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한 인물에 대하여 평가를 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다. 트위터 알바들의 행각을 똥꼬털까지 털어내는 본지 기자 카인의 철저한 뽕빨 정신으로 인물을 검증해야 했으나, ‘내가 나를 모르는 데 넌들 나를 알겠느냐’라는 철학적인 가사에서 보듯이, 한 인물에 대한 총체적 인식은 어쩌면 미궁의 과제일 지 모른다.
다만, 그가 살아온 궤적으로 그의 진정성과 우리가 선정한 가치에 부합했는가를 판단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3. 선정 과정
본지가 선거 시기 노골적이며, 강력하게 정치인을 추천하는 이런 기획은 전무후무한 일이다. 그러므로 그 선정과정은 매우 대단히 객관적이면서도 주관적이고, 총수의 수염과 엄창을 걸고 한 점 부끄러움이 없도록 공명정대하게 밀실에서 이루어져야만 했다. 특히 편집국장으로부터 노벨상의 권위에 맞먹을 수 있도록 후보자 선정에 만전을 기하라는 지엄한 주문이 있었다.
이에 따라 우리는 강력 추천할 후보 선정을 노벨상 선정과정과 동일하게 세계 각계 전문가 2천 명으로부터 후보자를 추천받고 딴지공천심사위원회에서 각 분과별로 철저하게 검증하여 최종적으로 딴지 수뇌부로부터 낙점을 받는 과정을 거쳤다. 물론 이 전 과정은 노벨상과 마찬가지로 50년 간 비밀에 부쳐진다.
* 이번 총선에 출마할 후보 중 위와 같은 딴지 추천 [숨은 블루칩 후보]
선정 기준에 자신이 걸맞다고 보는 분은 총선기획단에 신청서를 보내주시라.
새누리당부터 진보신당까지 당적은 관계없다. 별도의 신청 양식은 없고,
자신의 이력과 신념을 너무 짧지도 너무 길지도 않게 보내주시면
딴지 공심위에서 검토하여 연락을 드리겠다.
(딴지 공심위 메일: ddanzirecom@gmail.com)
19대 총선 딴지 추천 숨은 블루칩 후보 1호, 최정식
본지는 [19대 총선 숨은 블루칩 후보] 제1호로써 최정식 비례대표 후보를 선정했다. 딴지 공천심사위의 허술한 듯 하지만 바늘구멍과도 같은 간불용발(間不容髮)의 까다로운 심사 조건을 그는 가볍게 통과했다.
그를 선정한 이유는 그의 이력이 보여주듯이, 한국 사회에 복지국가의 모델을 심고자하는 일관된 삶. 현 안락할 수도 있는 삶을 버리고 노동운동에 투신한 그의 열정과 순수성. 그리고 오랜 국제적인 활동 속에 넓은 식견과 사회 진보에 대한 신념을 높이 샀다.
다음은 간략한 그의 신상이다.
1986 ~ 1993 | 아메리칸 익스프레스(AMEX) 카드사 마케팅 부장 |
1999 | 국제사무전문기술노조(FIET) 한국협의회 사무국장 |
1999 ~ 2003 | 참여연대 운영위원 |
2002 ~ 2009 | 신자유주의 극복을 위한 대안연대회의 발족/ 운영위원 |
2004 ~ 2006 | 투기자본감시센터 발족/운영위원 |
2005 ~ 2008 | 골든브릿지 투자증권 사외이사(노조 추천) |
2000.1 ~ 현재 | 국제사무금융노련(UNI) 한국협의회 사무총장 |
2007.7 ~ 현재 | 복지국가society 발족/ 노동복지위원장 |
2003 ~ 현재 | 스웨덴-모델 사회적 합의건설 포럼 발족/ 대표 |
2010 ~ 현재 | 사회책임투자포럼(KOSIF) 이사 |
리베르(이하 리): 안녕하십니까. 이번에 민주통합당 비례로 출마하신다는 말씀을 듣고 찾아뵈었습니다.
최정식(이하 최): 네… 미남하고 이렇게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어서 영광입니다.
리: 미남이라는 말, 태어나서 저희 어머니 외의 분에게 처음으로 듣는 소리이군요. 하하하…후보님이야말로 국회에 입성하시면, 나경원 못지 않는 미모의 국회의원이 떴다고…
최: 어이쿠, 놀리지마세요. 제 나이가 몇인데 그런 소리하면 호호호…
리: 네, 이렇게 서로 립서비스를 주고 받았네요. 하하 암튼… 저희가 지난 번에 전화로 인터뷰 취지를 설명드렸다시피, 이번 인터뷰는 총선 특집으로 기획되었습니다. 지금, 우리 현 시대에서 양극화 해소와 복지국가 건설이라는 한국 사회의 최우선적 과제를 해결할 적임자를 선정한다는 것이 취지입니다. 최정식 UNI 사무총장님을 추천한 분이 많습니다.
최: 어이구, 어떤 분들께서 추천했는지 모르지만 정말 감사드립니다.
리: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노동계쪽에서는 모르겠지만, 대중적으로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어요.
최: 네, 노동계라든지, 시민단체에서 대중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라, 대체로 노동계의 국제 연대 활동을 지원하는 국제전문가로 해외에서 오히려 유명하다고 할 수 있죠.
리: 그렇군요. 현재 직함도 UNI(국제사무금융노련) 한국협의회 사무총장을 맡고 계시는데요, 국제 활동만 전념하셨습니까?
최: 국제 활동은 저의 메인 포지션이지만, 그 일을 한 것 자체가 우리 사회의 개혁을 위한 것이니까 제가 국제 활동만 한 건 아니에요. 10여 년 전 부터 참여연대 운영위원, ‘신자유주의극복을 위한 대안연대’ 운영위원, 복지국가소사이어티 노동복지 위원장일을 맡고 있어요. 국내 시민운동 단체 일도 꾸준히 하고 있습니다.
리: 이력을 보니까 화려하시네요. 아무튼 독자들로서는 생소한 사무총장님에 대한 소개를 구술로 하기보다는 저희가 일목요원하게 정리할 거니까, 개인적인 이력은 이 정도로 하고요, 좀 개인적인 질문 좀 하겠습니다. 일단 독자들에게 최정식 사무총장님, 이름만 보면 남자인 줄 알 텐데요.
최: 네. (웃음)
리: 정보를 보니까 생년월일을 보고 깜짝 놀랐는데, 72학번 정도에요. 그렇게 안 보입니다.
최: 호호…너무 젊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유신시절, 반정부 혐의로 학교제적.
리: 사실 외모와 분위기를 보면 노동운동보다는 갤러리를 운영하시는 분처럼 뭐랄까 인상이 상당히 세련되어 보이시는데요, 70년대 유신 정권으로부터 긴급조치 위반으로 제적까지 당했군요.
최: 네, 그때 제가 다닌 학교가 수도여자사범대학인데요. 비교적 곱게 자라고 모범적인 여대생들이라, 반유신에 대한 정서라든지, 학생운동에 대한 심적 지지는 많았지만 학생운동을 활발히 전개했던 곳은 아니었어요. 제가 4학년때 우연한 소요사태에 휘말렸어요. 하하.
리: 우연히?
최: 우리 때는 학생회장을 3학년 때 했고요, 4학년 때는 교직 준비로 한참 공부하고…이것이 기본 패턴인데요. 제가 3학년 때 학생회장을 할 때 학생회장 임기 규정을 3학년 1학기 때부터 2학기로 바꾸도록 개정했죠. 4학년 1학기 때 저는 해외 유학 준비하느라 도서관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였죠. 우리 학교 옆이 건국대였거든요. 거기서 시위하던 학생들이 경찰들에게 쫓기면서 말하자면 우리 학교에 긴급 피신하러 들어왔어요.
리: 마치 독립운동 상황이 연상되는군요.
최: 말하자면 그런거죠. 근데 그때 피신한 남학생을 잡으러 우리학교에 경찰이 들어왔는데, 우리 학생들이 경찰이 못 들어오게 막고 있었죠. 당시 학생회장이 체육학과 출신이었는데, 체육학과장으로 계신 교수님의 승용차를 타고 학교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학생회장을 어디론가 데리고 간 상황이고요. 아마 학생회간부가 연루된다면 문제가 커질까봐 그랬겠죠. 그래서 전체 상황이 컨트롤이 안되고 막 우왕좌왕할 때, 제가 전임 학생회장이라 도서관에서 있다가 내려가서 그런 상황을 즉각적으로 통솔하고 이끌었죠.
우리 영문학과 과장님께서 도서관으로 달려와 저를 뜯어 말렸지만, 상황의 심각성을 볼 때 내가 희생당하는 한이 있더라도 가만히 지켜볼 수만 있을 수 없었죠. 쫓겨온 건대 학생 보호를 위해 최선을 다했어요. 그 사건 이후로 저는 3개월 동안 도피 생활을 했습니다…
리: 사실, 그냥 데모한 학생 도망가게 도와준 아주 단순 가담 정도인데, 당시로선 그것도 크게 엄하게 취급했군요.
최: 그렇죠. 유신체제가 얼마나 반정부 운동에 민감했는데요. 아무튼 내가 한 3개월 정도를 피신해 있었는데 너무 운이 좋게 동부경찰서에서 나를 담당하던 남기덕 형사라는 사람이 저를 참 잘봤어요. 그래서 내가 어디 숨어있는 거 다 알면서도 시경에 못 잡았다고 리포트를 한 거야. 시말서 써가면서까지, 나를 보호해주려고. 삼개월쯤 지나고 나서 아버님한테 찾아오셨어요. 최 회장이 어디 있는 거 알았지만 평상시 아주 성실한 사람으로 봤기 때문에 훈방만 하니까 부모님과 나오면 된다고 얘기하셨다고.
그래서 서장실에 가서 아버지하고 나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서장 얘기가 남형사가 최회장을 어떻게 감쌌는지 상소문 같이 올리는 명문장으로 자기가 봐도 감동의 글을 썼다고. 누구도 어떻게 할 수 없게끔 해서 이렇게 되었다고, 인연이라고, 해서 잘 마무리됐어요.
리: 그 형사가 혹시 최 총장님에게 흑심이 있는건 아니었을까요? 하하.
최: 아니에요. 그렇게 얘기한다면 정말 선의를 갖고 있던 그 분에게 엄청난 실례인거죠. 사실 아무리 유신시절이라 하더라도, 학생운동에 대해 이해하거나 동정해주던 그런 경찰들도 많았어요. 우리가 비록 독재정권의 주구라고 표현 하더라도, 직업적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거지. 형사라고 해서 성고문했던 김귀동이나 이근안 같은 사람만 있던 건 아니에요.
리: 그런데 그런 훈방 정도의 조치를 받고서도 제적을 당했군요.
최: 네, 아무래도 그런 소요사태가 발생한 것에 대해 누군가는 책임을 져야 하니까요. 얘기를 들어보니까 당시 최옥자 학장님이 문교부에서 네 시간 동안이나 머물면서 최회장을 제적 안 시키게 해달라고 했는데도 안되니까. 일곱 시간 가까이 교수회의를 했대요. 문교부에서 최회장을 제적하든 아니면 휴교를 당하든 선택을 하라고 했다는 거야. 회장 구하려고 휴교할 수는 없잖아요. 그 사건이 있고 나서 이틀만에 제적을 당한 거죠. 1975년 4월17일자로.
리: 우연한 사태로 제적까지 당하셨는데, 심정이 어땠나요?
최: 당시에 구속까지 안 되고 그 정도 선에서라도 끝난 게 다행이었죠. 그리고 중고교 시절부터 사회문제에 관심이 많았었고, 대학 입학해서도 학보사에서 활동을 했기 때문에, 제적을 당했다고 해서 그런 일로 마음의 상처나 그런 건 없었습니다.
리: 그럼 제적당하신 후, 생활은 어땠나요?
최: 사실 학장님이 다른 학교 편입을 추천하셨는데요, 그 후에 유학까지 책임져주겠다고…사실, 제가 당시 수도사대 부속 여중고를 나오고 그 학교에서 수석으로 졸업했는데요 수도여자사범 대학 입학조건으로 4년 장학금에다가 유학까지 해주기로 했었거든요. 근데 제가 학교 제적당하니까, 유학 보내기가 난감해졌잖아요. 그렇지만 난 다른 학교까지 굳이 가진 않겠다고 하니까, 당시 유신시절에 얼마나 오래갈지 모르는 상황이니 우선 세종호텔에서 일하고 있으면 어떠냐는 권고를 하셨죠. 세종호텔이 우리 대학의 호텔 경영학과와 관광개발학과의 실습장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서 홍보, 세일즈 마케팅 일을 하다가 2년 후에 결혼해서 그만뒀죠.
리: 아, 그럼 평범한 직장 생활 한 후 결혼하시고 한동안 육아와 가사일에 전념하셨군요.
최: 네, 결혼하고 한 5년 동안 그렇게 집에서만 지냈어요. 아기도 낳고 이쁘고 좋은데 너무 심심하고. 내가 어떤 걸 느꼈냐면 사람이 바보가 되는 느낌이에요. 멍해지는 느낌, 긴장감이 없으니까.
중고등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하고 유학까지 보장받으며 주변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정을 받고 장래가 촉망유망했던 데다가, 성격까지 엑티브했던 여성으로서, 가사일로 세월을 보내야만 하는 상황 상상이 된다.
전업주부에서 노조위원장이 되다.
리: 그럼 결혼하고서, 사회활동에 다시 나서게 된 것은 언제였습니까?
최: 사실, 제가 바깥 활동 하는 걸 남편이 반대를 많이 했지만 우울한 나날이 계속되어, 밥맛도 없고 제 몸상태가 말이 아니었어요. 몸무게가 38kg까지 떨어졌을 정도니까요. 어떤 보약을 먹어도 안 돼요. 그러던 차에 신문에 구인 광고가 있는데 캐나다 대사관하고, 하얏트 호텔 마케팅, 홍보 파트에서 모집하더라구요. 두 군데 면접 가서 다 붙었는데, 대사관은 상무관 비서라서 저의 활동적인 성격이랑 잘 안 맞는거 같아서 하얏트 호텔에서 PR 부문에서 다시 근무하게 되었죠. 그렇게 2년 잘 일하다가 우리 아들이 아파서, 그래서 관두고. 그러다가 86년도에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사에 마켓팅 스페셜리스트로 AMEX에 입사하게 되었죠.
리: 그럼 노동운동을 어떻게 시작하게 되었는지요?
최: 바로 그 아멕스에 입사한 것이 계기가 되었죠.
리: 당시엔 신용카드가 일반적이지 않았을 때고, 또 왠만한 사람 아니면 그런 크레딧카드가 없었죠?
최: 그렇죠. 지금처럼 신용카드가 일반화되기 전이어서, 고객 대부분은 중상류층 이상이었죠.
리: 그리고 머, 지금도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당시로선 외국계 회사라면 최고로 선망하는 기업 아닙니까? 그런 회사에서 노동운동을 시작한게 아이러니하네요.
최: 네. 그렇죠. 근데 입사한 지 1년만에 전 사회적으로 87년 노동자 대투쟁이 일어나고 있을 때였고, 또 그걸 계기로 회사 매각설이 떠돌 때였죠. 제가 회사에 입사한 지 1년만에 회사에서 파업이 일어난 거에요.
리: 아, 입사한 지 1년만에? 그런데 노조위원장이 되셨네요.
최: 네. 내가 마케팅차장으로 승진이 됐는데, 아멕스가 여기 있으면서 최초로 공식승진이 된 게 과장이 차장 된 거예요. 마케팅에서 하나, 세일즈에서 하나, 파이낸스에서 하나, 그래서 어시스턴트 매니저가 됐고. 그때까지 우리는 가입이 가능했어요. 다른 사람은 가입을 안 하고 나는 가입을 했어요. 그랬더니 인사부에서 거기를 그만둬라, 지위도 있고 하니까, 특히 한 달 파업을 할 때 그만두라고… 나는 안 그만뒀죠.
리: 당시 아메리칸익스프레스 카드사에서 파업의 원인은 임금체계를 한국식으로 호봉제로 바꾸고 임금인상을 요구한 것이라고 들었습니다. 회사 매각과 파업이 어떤 관계가 있었나요?
최: 네. 매각을 했어요. 왜 매각을 했냐면 87년에 전국적으로 노조 가입이 전염병처럼 퍼지니까, 아멕스 본사에서 걱정이 된 거야. 한국만이 아니라 아시아에 노조가 퍼진다 이거죠. 그래서 한 달 동안 파업한 이후에 한국 지사의 연간 예산을 팍 줄여버렸어요. 그리고 80년대가 미국에서도 경기침체로 많은 기업들이 다운사이징이 막 일어날 때에요. 본사도 인원감축하고 그럴 때라 한국 예산을 확 줄여버린 거죠.
리: 노조위원장은 어떻게 하게 되셨죠?
최: 아마 영어를 잘하는 중간간부라는 점, 그리고 지점장 앞에서 소신 발언할 수 있는 당당한 여성… …호호.
리: 네. 영어 때문에?
최: 내가 중간 매니저라 경영정보나 이런 것도 프레젠테이션을 잘 하는 걸 아니까, 매각 걸려있을 때는 노조위원장이 영어를 잘 하고 똑똑해야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나한테 온 거야. 나는 이런 거 못한다고, 남편한테 쫓겨난다면서 도와는 주겠다면서 한사코 거절했지만, 난리를 쳐가지고 할 수 없이 하게 됐죠.
리: 남편한테 쫓겨난다?
최: 그럼요. 내가 바깥 생활 하는 것도 못마땅한데 노조위원장까지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정말 가정에서의 갈등으로 힘들었지만, 또 나에게 주어진 책임도 있고 같이 했던 동지들을 외면하기도 그렇고…
리: 그래서 노조위원장직을 수락하게 된거군요.
최: 네, 그렇게 되었습니다.
리: 그런데 국제 노동운동과는 어떻게 관계를 갖게 되었습니까?
최: 마침 그때 상급단체인 사무노련에서 나를 ILO(국제노동기구) 교육을 보낸 거예요. 호주에. 나는 지금 매각설이 돌아서 안 된다고 그랬더니, 한 달 동안 교육을 받으려면 영어를 잘 해야 하는데 갈만한 사람이 없다는 거야.
리: 아, 그 일도 결국 영어 때문에 시작하게 된거로군요. 그런데 이력을 보면 외국 유학 경험도 없는데 어떻게 그렇게 영어를 잘하게 되었습니까? 사무총장님 당시엔 우리나라 회화교육도 그렇게 강조되지 않았을 때였는데 말이죠.
최: 글쎄요. 사람마다 각자 재능은 있는데, 저에겐 그런 언어 감각이 있었나봐요. 고등학교 다닐때도 정통영어인가요, 그 참고서를 아침 자습시간에 제가 친구들에게 강의를 할 정도였으니까… 그리고 영어 공부 자체를 너무 좋아해서 그런지 자연스럽게 그렇게 되더라구요.
리: 아, 그것도 천부적인 그런 재능을 타고 난 거군요.
최: 그 정도는 아니고, 영문과 다녔어도 영문학 공부 하나도 못했고.
리: 그렇게 해서 호주의 ILO(국제노동기구) 연수를 계기로 국제 활동의 이력이 시작된거로군요.
최: 그렇죠. 뭐 할 수 없이 호주에 끌려간 거야. 낮에는 공부하고 밤에는 한국에 있는 노조와 연락하고, 낮과 밤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죠. 한 달 동안을. 나는 밤에도 교육원내에 있는 도서관 가니까 너무 좋은 자료가 많은 거야. 잠도 안 오고 그래서 노조 관련 자료를 복사를 해서 이만큼 박스에 담아 왔어. 교육받은 것 리포트하고 자료도 연맹에 보내고 우리 노조 지역사무실에도 두고. 그런데 나를 보내준 아태 사무총장이 한국에 온다는 거야. 그래서 이 복사본을 드렸더니, 깜짝 놀라면서, 20년넘게 노동운동하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교육에 보냈는데, 나처럼, 자발적으로 교육자료를 모아 가져오는 사람은 처음이었대요.
리: 알겠습니다. 어쨌든 그런 영어실력을 바탕으로 해서 국제노동기구 ILO 지도자 과정을 수료를 하셨고. 그 다음에 회사가 매각이 된 거죠?
최: 그래서 제가 명퇴를 했어요.
국제 노동운동가로의 데뷔, 노동운동의 정치세력화
최: 내가 나오고 나서 일 년 반인가 이 년 쯤 있다가 아마 매각이 됐을 거예요. 명퇴가 있길래 내가 명퇴를 신청을 했어요. 왜냐면 내가 학교도 다시 가고 싶기도 하고, 그동안 오전 아홉 시부터 오후 여섯 시까지 회사에 꼼짝 매달려 있는 게 너무 싫어서. 학교도 가고 싶고 공부도 하고 싶고 다른 것도 하고 싶고 여러가지 하고 싶어서 얼른 나왔죠.
리: 유학도 안 가셨으면서 국제통이 서서히 되어 가신 건데. 국제사무전문기술노조 한국협의회라고 하는데, 어떤 조직이죠?
최: 그때까지는 한국협의회가 없었어요. 그때 피에트(FIET, 국제사무전문기술노련)였다가 지금은 이름이 UNI(국제사무직노련)로 바뀌었는데, 금융노조, 전문기술노련, 그런 화이트칼라 노동자들이었어요. 한국에 그 때 다섯 개 노조인가 있었는데, 우리 아태지역에서 영어도 안 되고, 연락도 안 되고,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모르니까, 일주일에 두 번 정도만 나와서 연락병 역할만 해달라고… 그렇게 하다가 한국협의회를 만들게 된 겁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계에서의 유일한 국제조직이죠.
# UNI(유니:국제사무직노조연합, Union Network International) 는 2000년 1월부터 기존 4개의 국제산별인 FIET(국제사무전문기술노련), CI(국제통신노련), MEI(국제미디어엔터테인먼트), IGF(국제출판노련)이 통합되어 전세계 140개국, 1,500개 노조 1,200만 명의 노조원을 대표하는 최대 국제산별노조이다. 본부는 스위스 니온에 두고, 각 대륙별로 지역사무소가 있고, 아태지역은 싱가포르에 지역사무소를 두고 있다. 한국에는 양대 노총 산하 9개 노조(금융노조, 체신노조, 정보통신노련, 언론노조, 대학노조, 사무금융노련, 민간서비스노조, 한국통신노조, 보건의료노조)의 35만 명이 가입되어 있으며 한국협의회를 구성하여 활동하고 있다. 협의회 사무총장은 최정식 UNI – 아태지역 한국담당자가 겸하고 있다. |
리: 그렇게 해서 우리나라 노동운동계랑 국제조직 간의 연계를 맺게 된 거로군요. 근데 사무직이라면 엄청 광범위하잖습니까?
최: 그렇죠. 금융, 보건, 언론, 출판, 텔레콤 등을 다 관할하죠.
리: 그럼 우리나라 한국노총과 민주노총 이렇게 양노총에서도 다 그런 사무직 노조가 있을텐데 주로 어디 노총과 관계를 지니고 있었나요?
최: 아유~ 어느 한 곳하고만 연계하고 그런 건 없죠. 양노총 노조원들 다 똑같이 우리 연맹원들인데요. 그리고 사실, 조합원들로만 보면 양노총 사람들 아무 차이가 없죠. 한국노총이 어용이라는데 그건 좀 과거 얘기고요. 파업하다가 구속되고 하는 건 한국노총, 민노총 별 차이가 없었어요. 더구나 IMF 이후 우리나라 금융계가 엄청난 구조조정 들어갔잖아요. 더구나 이 신자유주의가 금융자본주의를 특징으로 하고 있으니까, 금융노련이 한국노총 계열이거든요. 이 분들이 엄청 투쟁적이에요. 의식도 진보적이고요. 민주노총 산하 조직의 투쟁성은 말할 필요도 없이 대단했고.
리: 그렇군요. 그렇다면 사무직에서 노동운동을 하셨고, 국제 노동운동도 사무직계열에서 계속 계셨는데, 사실 민주노총은 금속노조 등 생산직에서의 파워가 세지 않습니까? 그런 쪽과의 관계는 어땠나요?
최: 사실 제가 이렇게 오랫동안 노동운동계에 몸담을 거라는 생각을 처음엔 하지 못했어요. 그런데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은 예전 전노협, 단병호 위원장님 등 당시 노조지도자들의 헌신성에 영향이 컸습니다. 제가 ILO에서 교육받은 것도 결국은 한국의 노동운동의 발전을 위해서 그런 것 아니겠어요? 그때 당시 단병호 위원장님이 수배되고 구속되면서 탄압을 아주 심하게 받았거든요. 너무 안됐잖아요. 그리고 나는 화이트칼라지만 기회가 되면 금속 쪽 이렇게 외국 사람하고 같이 울산 현내자동차 컨베이어벨트도 들어가 보고, 금속 쪽 화학 쪽 보면, 우리 작업장이며 이런 데가 너무 근로조건이 나쁘고, 폭력이나 이런 게 심하니까, 내가 느낀 것보다 심각하니까 이런 이슈들을 보고 느끼고 이야기가 나오니까 떠날 수가 없는 거야. 그러면서 이렇게 노동운동에 깊숙히 몸담아 오게 된거죠. 사무직에 비해 금속화학등 제조업의 근로조건, 특히 산업재해에 무방비한 상태는 충격적이었어요.
리: 아, 그러니까 그분들의 열악한 상황을 보면서 연대 활동을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된 거군요.
최: 그때는 조직화 교육을 많이 했어요. 그런데 내가 일 년 딱 지나면서 느낀 게 노동자들이 정치적으로 세력화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한 거야. 그래서 조직화 교육하는 명목으로 FIET에서 자금 지원을 했는데, 거기서 정치과목을 넣었어요. 그런데 순수 노동운동에 정치성을 넣지 말라는 아태지역의(FIET) 압력도 받았어요.
리: 사실 노동운동이 아무리 발전을 한다고 해도 조합운동에만 머물러 있으면 한계가 있으니까.
최: 그렇죠. 특히 우리나라 특유의 기업별 노조운동은 앞이 빤히 보이는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교양 과목이라고 변명해가며 노동자 정치 교육을 하려고 엄청 노력했어요.
리: 그때가 언제였죠?
최: 97~8년도 IMF로 한참 힘들 때였죠.
리: 그런데, 당시 노동운동이 비록 전투적이긴 했지만 정치의식이 그렇게 높을 때는 아니었죠?
최: 맞아요. 그때 민노총은 정치교육 이야기가 나오니까 지금 노조도 제대로 못하는데 무슨 정치냐 그런 반발이 많을 때였죠. 제가 그래도 정치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강하게 갖고 있어서 고집을 꺾지 않았죠. 그래서 스웨덴 서비스노조로부터 자금 지원을 받아서 계속 정치교육을 이어갔어요. 당시 민주노총 산하 가맹 노조지도부 들과 많은 사람들이 노력을 해가지고 국민승리 21에 이어 민노당을 꾸렸죠.
리: 그랬군요. 보수양당체제에 대한 문제의식을 90년대부터 갖고 계셨던 겁니까?
최: 그렇죠. 사실 IMF 이후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민주당이 집권당이었으니까, 한나라당도 그렇지만 완전히 적대적인 관계였어요. 그 정권 하에서 노동자들의 해고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이루어졌습니까? 지금의 쌍용자동차 같은 비극이 거의 매일같이 비일비재하고…한 마디로 학살이었어요.
리: 그러면 그때 민주노동당, 국민승리21 같이 하셨나요?
최: 저는 직접 어떤 당도 같이했던 적이 없어요. 최근 들어서야 민주당에.
리: 보수양당체제의 한계를 알고, 스웨덴과 같은 사민주의 정당이 필요하다고도 생각하셨을텐데 진보정당에 들어가지 않을 이유가 있었나요?
최: 제가 그랬던 것이 내가 처한 위치가 양 노총을 다 아우르는 역할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리: 민주노총하고 한국노총?
최: 네. 민주노총하고 한국노총 양 노총이 한꺼번에 했었으면 아마 저도 그 물결을 같이 갔을 거예요. 그런데 반만 가고 반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리고 국민승리21도 그렇고 민노당도 그렇고 굉장히 초기라서 언젠가는 큰 물결로, 노동자성이 강한 진보정당이 크게 나올 걸로 봤고, 나는 좀 더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이라는 것을 바깥으로 표방하는 그런 정당이 나올 때까지 기다렸죠.
두 가지 측면에서 한 쪽만 됐다는 것, 그리고 그때까지 아직 민노당은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이라는 걸 바깥으로 표방할 만큼은 아니었다는 것, 그래서 제가 정당참여를 계속 유보했죠.
리: 그러니까 국제사무금융노련 사무총장으로서 양대 노동조직이 이분화되어 있는 상황에서 관계를 유기적으로 잘 가져가야 하기 때문에 곤란한 것과, 당시 민주노동당이 그렇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면서 갔던 것도 아니었고…
최: 민주노동당은 제가 어떻게 봤냐면, 그 내에서도 NL, PD 같이 한국노총보다 훨씬 많은 정파가 각이 세워져있고, 민주노동당은 사회민주주의라는 말에 대해서 알레르기 하는 정파들이 많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왔기 때문에, 당장 사회민주주의를 표방하기에는 아직 무리가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쪽 세력(민주노총) 노동자들의 일반 그라스루트(Grass root, 풀뿌리, 일반 대중) 멤버들의 생각과 한국노총의 그라스루트 멤버들의 생각은 비슷할지는 모르겠어요. 말은 표현은 안하지만 굉장히 사회민주주의적 복지국가를 원할 것으로 저는 보는데, 중요한 거는 리딩하는 정파나 그룹들의 생각은 그와 다를 수도 있고, 그런 면에서 이쪽은 훨씬 복잡하다고 보고요.
한국노총은 어떻게 보면 전에도 녹색사민당을 한 번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도 있지만, 또 일부는 한나라당이나 민주당 쪽으로 경도된 부분도 없지 않아 있지만, 나머지 이런 부분들인 더 흰 백지에 그림을 그릴 수 있는 가능성이 높아서, 사회민주주의적인 교육프로그램이라든가 그런 프로그램이 현실화되면, 제대로 단계를 밟아갈 수 있다고 보는 거죠.
리: 민주노총을 리드해가는 그룹들은 너무 정파적 컬러가 강해서 오히려 사회민주주의적 노선을 걷는 데 선입견도 강하고…사실 자신들이 더 조합주의적이고 개량적인데, 사회민주주의는 개량주의라고 욕하는 사람들을 보면 좀 재밌기도 합니다.
최: 그렇죠. 현재까지 느낀 건 그렇습니다.
리: 그런데 한국노총 같은 경우엔 오히러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거부감이 적을 뿐 아니라…
최: 한 번 했다가 접은 적이 있었고…
리: 녹색사민당을 했다가 접은 적이 있었고. 그러면 지난 번 한국노총의 한나라당 참여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명박 정권 때.
최: 그때는 한국노총이 정치적 오류를 했다고 보는 거죠.
리: 판단을?
최: 네.
리: 굉장히 잘못 됐다.
최: 네.
리: 그때 당시 그런 판단을 내릴 때 이용득 의원장님이나 그 위치에 있는 분들한테 조언이라든지 이런 말씀을 전혀 안 하셨습니까?
최: 저는 그런 조언을 할 수 있는 입장에 있지도 않고. 저는 항상 객관적으로, 한국노총이나 민주노총이나 민노당이나, 일정한 거리를 유지했었고, 좀 더 객관적으로, 좀 더 아웃사이더로 보는 시각을 항상 가졌었고요. 그때 한국노총은 뭐랄까, 그 시기에 그 조건 속에서 지도부의 생각이라기보다는, 그 경로도 분명 보면 조합원들의 서베이를 가지고 간 걸로 알고 있어요. 지도부 몇 명의 결정이 아니라. 그래서 일부 오류가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 당시 조합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역사적으로 평가를 해야죠.
리: 네.
최: 또 하나 제가 고무적으로 생각하는 건 한국노총이 얼마 전 12월 말에 임시대의원회의를 하면서 미래발전전략보고서가 나왔었는데, 거기에도 스웨덴이나 북유럽의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정책이나 프로그램이 많이 반영되었기 때문에, 본인들도 인정하고 있고, 그런 면이 저로 하여금 좀 더 그쪽에 관심을 갖게 하고, 제가 더 많이 지원을 할 수 있는 방법은 없는지, 새로운 운동에 일조할 수 있는 것이 없는지 생각하게 된 거죠.
리: 사무총장님이 보시기에는, 보통 사람들 생각에는 예전에 한국노총이 87년에 호헌지지 성명도 냈고 해서 어용노조의 대표적인 케이스로 보고, 또 민주노총이 거기에 대한 반발로 나왔는데, 그런 이미지에 대해서 객관적으로 보시기엔 어떠세요?
최: 제가 처음에 한국협의회를 구성하고서 금융노조가 주요 가맹조직이었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개혁을 추구했죠. 금융노조 같은 경우는 한국노총에서 가장 개혁적이고 진보적이고 현장중심적이었다, 그런 면에서 굉장히 다행으로 생각하고요. 금융노조가 한국노총을 개혁하고 진보화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보고, 앞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할 거라고 봅니다. 그런 입장을 한 가지 칼라로 칠할 수는 없고 그렇지 않은 세력도 충분히 있다고 보는 거죠. 그리고 어디나, 많은 외국의 노동의 역사를 보면, 일부, 한 시기에 여러 팩션간의 갈등도 있고 시행착오를 겪는 경로는 다들 겪어요. 또 제가 처음 여기 들어왔을 때는 양대 노총의 그런 문제나 대립점 때문에 굉장히 힘들었어요. 양쪽의 사람들을 달래서 협의회를 만들고 서로 인사 나누게 하고 얘기하게 하고 마음을 열게 하느라고 너무 너무 힘들었죠. 그래서 그나마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있지만 자꾸 만나고 교육도 하고 고민을 하다 보니까 많이 가까워지고 서로 이해하는 폭도 넓어지고요.
리: 화이트칼라 쪽의 노련 단체 차원에서는 어느 정도 서로.
최: 그럼요. 서로 교감들이 많이 높아졌죠.
노동 국제 외교.
리: 사무총장님이 노동계에서 유일한 국제통이라는 평가가 있습니다.
최: 유일하지는 않죠 그러나, 아까 말씀드렸듯이 그 방면에서 18년 넘게 활동하고 있지요.
리: 기억에 남는 보람된 활동이 있습니까?
최: 보람된 활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노동자와 국민을 너무너무 힘들게 만든 IMF같은 신자유주의 첨병들의 실책을 미국 민주당 의원에게 가서 막 따진 적이 있지요.
리: 아, 그러셨군요. 그때 마치 그들은 식민지 점령군처럼 우리 경제 정책을 자기들 입맛에 맞게 제멋대로 요리했고, 우리 정부는 그들의 모범생처럼 따랐죠.
최: 네, 그들이 요구한 정책이 얼마나 황당한거에요. 30%가 넘는 고금리 정책을 강요해서 멀쩡한 기업들 도산시키고요, 그러면서 재정 정책은 오히려 축소시켜서 해고되거나 실직한 노동자들을 아무 대책없이 거리에 내몰았잖아요. 그때 자살한 사람들, 비참하게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 정말 그런 사람들 생각하면 소리없는 학살인 셈이죠.
리: 네, 그들 신자유주의자들의 본질이 금융자본이니까, 통화안정책만이 유일하게 중요한거죠.
최: 네, 그래서 당시 현금을 많이 갖고 있던 사람들은 정말 대박이 난거고요. 인플레이션은 그들 금융자본들에겐 가장 큰 악몽이잖아요. 근데 장하준 교수의 말대로, 완만한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경제에 약이 될 수 있는거거든요. 그래야 기업이 돈놀이 하는것보다 가격 상승을 기대하고 생산에 많이 투자하고 그러니까요.
리: 네, 거기다 작은 정부를 표방하여 공기업 민영화도 요구를 많이 했죠.
최: 그래서 멀쩡한 공기업 헐값에 민영화하고, 외국 투기자본들이 그걸로 떼돈을 벌었죠. 아무튼 IMF가 지나간 자리는 정말 폐허가 되어버려요. 그래서 어떤 나라도 IMF에서 돈을 빌리려고 하질 않잖아요. 그러니까 지금 IMF는 돈 빌려줄 데를 못찾고 존폐위기까지 몰릴 정도잖아요.
리: 돌이켜 보면, 지금의 양극화와 더블딥 경기 침체가 그런 정책의 짙은 그림자가 아닐까 합니다.
최: 물론이죠.
리: 근데, 미국 의원들에게 항의를 하니까 뭐라던가요?
최: 거기서는 자기네 경험 상으로는 이럴 때 돈을 풀면 인플레가 되어서 더 나중에 나쁘다는 변명, 그리고 공기업의 개혁은 꼭 필요하다든가, 이런 식의 의례적인 IMF, World Bank가 내놓는 레시피에 대한 항변만 하더라고요. 그 중에 지금 오바마 행정부에서 재무장관을 하고 있는 티모시 가이드너도 그 세 명의 경제학자 중에 하나였는데, 티모시는 비교적 내 말에 많은 반론을 제기하지는 않고 주로 경청하는 입장을 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 몇 년 후에 IMF가 공식적으로 한국 정책에 대해서 자기네가 잘못했다고 인정하는 보고서가 나왔잖아요. 저는 이번에 유럽의 위기를 보면서도 EU의 가이드라인에 의해서 대량실업이라든가 경기침체라든가 이런 부분을 해결하지 못하고 더 긴축정책을 쓰는 거가 갖는 큰 폐해에 대해서 더 걱정이 많죠. 그게 다시 옛날 우리 IMF 외환위기 시기 같아서.
리: 사무총장님의 그런 비판이 장하준 교수의 논조와 거의 일치를 하죠?
최: 네. 네.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전도사
리: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신자유주의 모델에 대한 전세계적 저항이 일어나고, 또 한편으로 국내에서 보면 양극화의 지속된 심화 문제 등으로, 복지국가에 대한 국민적 요구가 일어나고 있는데요. 대안으로 스웨덴 모델이 부각되고 있습니다.
최: 그렇죠. 영미식 자본주의는 이제 아니라는 것이 명백해졌죠.
리: 주변에서의 평가가, 사무총장님께서 그런 스웨덴 복지국가 모델의 전도사라고 하던데요.
최: 호호, 그런 평가를 받았다면 영광이네요.
리: 언제부터 스웨덴 모델에 관심을 가지셨습니까?
최: 제가 세계 각국을 많이 다니면서 국제 컨퍼런스에도 자주 참석도 하고 여러 채널로 정보도 많이 얻기도 하는데요. 미국 모델은 아니라고 진작에 판단은 했었죠. 그리고 국제노동운동 활동을 하면서 유럽 국가들 쪽과, 특히 스웨덴 사민당에서 협조를 많이 해줬어요. 특히 IMF가 터지면서 올로프 팔메(Olof Palme) 센터로 달려갔어요. 스웨덴 사민당의 국제지원센터인데요.
제가 거기 가서 세 시간 동안을 한국 상황에 대해서 프레젠테이션을 했어. 스톡홀름대학의 정치학 경제학 교수 앞에서. 왜 정치교육과 사회복지 교육이 필요한지. ‘과거 한국의 독재정치 시스템, 그리고 노동자들 상황이 이렇게 와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외환 컨트롤 못해서 IMF가 되고, 대량 실직이 생겨서 너무 심각하다. 한국은 그동안 노동조합이 임금인상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사회안전망에 대한 대책이 없어서, 이제는 노동계가 보편적인 사회복지정책을 요구하고 가르치는 프로그램이 필요하다.’ 이런 한국적 사황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적극적으로 했죠.
그래서 그 기금을 따가지고, 스웨덴의 이런 사회복지시스템을 한국에서 미리 공부를 시켜가지고, 99년 1월 5일부터 그 추운 날 스웨덴에 갔어요. 스웨덴에서 일주일 열흘 간 연수를 다 시키고, 노동계에 스웨덴 모델을 퍼뜨린 겁니다.
리: 기금 규모가 어느 정도 되었습니까?
최: 처음에 정치교육을 했을 때는 5천 불씩 해서 5×4=20 해가지고 한 2만 불 했었고, 스웨덴 연수를 해가지고 아예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했을 때는 4만5천 불, 5만 불 정도 했었죠.
리: 매년 그렇게?
최: 연간.
리: 거기서 펀딩을 해주셔서 우리나라 노조간부들을 북유럽 쪽으로, 스웨덴으로 연수를…
최: 네. 그래서 어떻게 노동조합이 단체협약을 맺으며, 그 내용이 뭐며, 노동조합이 정당들과 어떻게 관계를 갖고 있는가, 그 다음에 노동조합이 사회복지나 사회보장 문제에 어떻게 접근하고 요구하는가, 그런 문제들을 집중적으로 교육했고.
특히 유명한 살츠요바덴 협약을 갖게 된 배경, 그 의미, 그리고 90년대 금융위기 이후에 갖게 된 복지병이라고 하는 부분이 어떻게 수정되고 현재 어디까지 와 있는지, 옛날 1930년대부터 지금 현재까지를 계속 업데이트하면서, 특히 198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 신자유주의로 다 흘렀던 그 폐해가 어디까지 왔고, 지금 얼만큼 잘 견디고 있는가를 실제 눈으로 보고 느끼게 한 거죠. 그때는 그 프로그램을 국세청, 경총, 작은 지방자치단체, 종합병원, 보건소까지 다 포함해서, 어린이들 보육하는 보육원, 노인들 엘더리 케어하는 거, 이런 데를 다 시찰을 시켰고.
# 살츠요바덴 협약(Saltsjobaden Agreement): 1938년 스웨덴의 생산직노조전국중앙조직(LO)과 사용자연합(SAF)이 체결한 협약. 노조 측에 산업평가를 유지할 기본 책무를 부여하고, 사용자 측에 노조활동의 자유와 단체활동권을 침해하지 못하도록 규정함. |
리: 노조간부들한테?
최: 네. 스톡홀름 시 자체에 메디컬 폴리시(Medical policy, 의료정책)하는 단체도… 심지어는 노동재판소도 방문하고. 그런 식으로 골고루 관심사를 다각적인 면에서 보고 느끼고 직접 얘기할 수 있도록 그렇게 했죠.
리: 그때 그 연수에 선생님이 추진해서 갔던 노조 간부들은 어떤 분들이에요?
최: 예를 들면, 당시 공공연맹 사무처장 하던 임성규 사무처장도 그 중에 한 사람이고요. 사회보험노조 부위원장, 금융노조 위원장, 그런 노조 간부 분들이죠. 양노총의 주요 정책활동가들도 많이 깔려있어요.
리: 소속은 민주노총이나 한국노총이나?
최: 양쪽 다 했죠. 보건의료노조의 많은 간부들도, 부위원장들이랑 다.
리: 그분들이 갔다 오신 다음에, 뭐랄까요, 견문이…
최: 네. 많이. 아주 놀랍도록 많이 높아졌죠.
리: 기업별 노조 형태로 우리나라 노조의 한계라고 할까, 사회 전체의 개혁에 대한 인식이…
최: 그런 게 많이 바뀌었죠. 특히 그전에는 사회보장하면 보건 쪽만 많이 신경을 썼는데, 건강보험 이런 것만, 가면 갈수록 실업보험이라든가 연금 문제, 이런 쪽에도 광범위하게 인식이 많이 달라졌죠.
리: 성과가 좋았네요?
최: 1999년부터 2002년까지 4년 하고 나서 2003년에 팔머센터 평가단이 왔는데 굉장히 만족하는 거야. 또 나한테 아이디어가 없냐고, 더 하고 싶은 거 없냐고 그래서, 원하는 것 있다, 해보니 노동계 내에서만 이야기가 돌고 밖으로 이야기가 안 나간다. 그리고 노조간부 교육을 시켜도 다음에 선출이 안 되면 연관성이 없으니까 업그레이드 되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내가 노조 바깥에 있는 오피니언 그룹을 연수를 시켜야겠다. 그래서 바깥의 싱크탱크를 가져야겠다.
리: 바깥의 싱크탱크?
최: 그 당시 내가 스웨덴 모델 연구하는 ‘사회적 합의건설 포럼’이라는 것을 만들어서 방송사 PD, 시사인 이종태 기자, 이찬근 교수, 조홍준 교수, 정승일 박사, 홍기빈 박사, 조원희 교수 이런 사람들 있잖아. 노조간부와 언론인, 학자, 정치인 분들 이런 오피니언 그룹들이 연수 가고 이런 책도 내고 보고서도 쓰고 세미나도 하고 그랬죠.
리: 그런 결과로 점차 스웨덴 모델이 우리 사회에 확산하는데…
최: 물론 그 분들이야 원래부터 반신자유주의에 대한 의식이 강했던 분들이고, 그 대안으로서 복지국가를 생각하셨던 분이었지만, 또 책과 이론하고 현장 체험은 다소 차이가 나니까, 아무래도 현장에서의 견학도 많은 도움이 되었겠죠. 아무튼 그 결과로 김대중 정부때 스웨덴에 갔다온 최민식, 박일환, 곽해곤 정책보좌관 그 분들이 이성재 의원과 국민기초생활법을 만들었어요. 또, 그런 분들과 함께 2007년 결국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라는 단체를 만들게 된거지요.
리: 아, 그렇게 된거로군요. 복지국가 소사이어티는 복지국가에 대한 정책과 신념을 책과 언론 등을 통해 정열적으로 설파하더군요.
최: 네, 그런 활동이 이제 우리 사회에 뿌리내리기 시작한거 같아 그 한편에 다소 일조를 한 저로서는 정말 보람이 안 될 수 없지요.
리: 북유럽 사회복지국가 모델의 전도사였다고 표현을 해도 되겠네요. 정열적으로, 국제적으로, 한마디로 선교사였군요.
최: 멤버들이 그런 이야기를 하죠. 그런데 그때만 해도 내가 94년부터 와서 95년부터 정치교육을 시켰는데, 정치교육이라는 건 사회민주주의잖아. 사실은 사회민주주의 교육을 할 때 다들 그걸 의문시했단 말야. 결국 보면 스웨덴 정치라는 게 사회민주주의인데, 사회라는 말 들어가면 어떡하나 말이 많았죠. 잘 달래고 해서 계속 꾸준히 집합교육도 시키고 각 연맹 별로 자기 눈높이에 맞춰서 교육하라고 했죠.
단순히 사회복지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라 스웨덴 모델이 갖고 있는 그 철학, 인간존중의 평등과 연대, 그 사민주의 철학에 바탕을 둔 정치시스템에다, 그 정치시스템에는 절대다수의 노동자들, 농민들하고 같이 가는 부분이 중요한 요소죠. 그런 부분을 많이 배우도록.
리: 세계적 기준으로 보면, 사실 우리나라도 비록 말석이지만 이제 선진국에 들었다고 할 수도 있는데, 다른 나라 정당의 지원을 받으면서 교육해야 한다는 사실이 좀 서글퍼지네요.
최: 그렇죠. 사실 우리가 이제 다른 나라에 도움을 줘야 될 처지가 된 거죠.
리: 그런데 우리나라와 유럽의 노동현실의 격차가 그렇게 많이 차이가 나나요?
최: 최근 자료에 의하면 2010년도 우리나라의 연 평균 노동시간이 2149시간이에요. OECD 평균이 1739시간이고, 네덜란드는 이보다 적은 1700대고요. 노르웨이 같은 경우도 굉장히 적은 나라 중에 하나입니다.
적은 나라들의 공통점은 사회복지가 잘 되어있는 나라라는 거예요. 그리고 또 하나, 단시간근로자가 많다는 거죠. 비정규직이. 네덜란드는 비정규직의 포션(portion, 몫)이 전체 노동시장의 65%를 차지하거든요. 왜 가능하냐면 정규직하고 비례해서, 자기 일한 만큼 비례해서 봉급을 주기 때문에 사실상 페어(Fair, 공평)하거든요.
리: 그렇죠. 정규, 비정규 임금차이가 하나도 없이 공정하게.
최: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4시간 일한다 하면 8시간 일하는 거의 반을 주지 않기 때문에. 큰 차이죠. 또 하나, 우리가 북유럽 사회주의국가 모델을 보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여성노동자들의 노동시장 참여율이 높다는 것이죠. 최소한 65%에서 75%, 80%까지 가는데, 우리나라는 많은 여성들이 노동시장에 진입하지 못하는 장애요인들이 많거든요. 보육의 문제도 그렇고, 자기가 전일제로 8시간 다 일하기는 힘든 경우도 많고. 가정도 그렇고 일도 조화롭게 병행하기 위해서는.
그래서 비정규직이라고 해도 자기가 일하는 시간에 비례해서 임금이나 사회복지가 차별이 없어진다면, 많은 여성들이 4시간짜리라든가, 주 며칠만 한다든가, 그런 걸 통해서 노동시장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이 늘어나고, 그렇게 되면 여성인력이 노동시장에 들어옴으로써 국가적인 파이를 키우는 데 도움이 되죠. 그게 북유럽국가와 우리나라의 가장 큰 차이입니다.
리: 실제로 보면, 가령 우리나라 은행이 오후 4시에 문닫는다고 하더라도 은행원들 퇴근 시간이 밤 10시…
최: 백 오피스 작업으로.
리: 그것이 통계 속에 잡히는지 안 잡히는지 모르겠는데, 유럽 같은 경우에는 어떻습니까?
최: 거기는 정말 칼퇴근이에요. 제가 자주 유럽을 방문하는데, 은행은 말할 것도 없고, 보통 상점에 들어갈 때도. 제네바 중앙역에 뭘 좀 사려고 샵에 들어갔는데 6시에 문 닫는다고 아예 받지를 않아요.
리: 상점이 공무원 같네요.
최: 네. 받지를 않아요. 자기네 문 닫는다 이거야. 그 정도로 생활화되었다는 거죠. 자기네 샵 오프닝타임(개점시간)과 클로징타임(폐점시간)이 잘 적용이 되고.
리: 우리나라는 자영업자들이 12시간, 14시간 일을 하는데.
최: 그런 건 있을 수가 없죠.
리: 상상을 할 수가 없군요.
최: 밤은 정말 밤답게 조용하고 휴식하고 가족을 위한 시간이에요. 그게 참 너무 부럽더라고요. 밤에는 교통량도 많지 않고. 정말 적막할 정도입니다.
리: 우리나라의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들은 기겁을 하겠네요.
최: 많은 유럽인들이 한국에 왔을 때 우리나라의 불야성 같은 밤을 보고 기절하는 거예요. 어떻게 된 거냐고. 너희는 잠도 안 자고 뭐하고 다니는 거냐고. 우리하고는 너무 생활패턴이 다르죠.
리: 거기 있는 노동운동가들하고 우리나라의 노동현실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뭐라고 합니까?
최: 너무 놀라죠. 다르기 때문에. 장시간 일하는 것에 대해서 거부감이 없느냐고 묻죠.
리: 좀 창피하기도 하겠어요?
최: 당황스럽죠. 그래서 저는 그럴 때마다 우리는 36년의 일제 식민체제에서 경제가 피폐화됐고 얼마 안 있다가 6.25 전쟁을 치렀고, 잿더미에서, 제로(zero, 바닥)에서 다시 시작한 나라다 보니까, 또 더군다나 독재정권을 거치면서, 위에서부터 탑다운(top down, 상명하달)으로 일을 할 수밖에 없었고, 바텀업(bottom up)으로 밑에서 위의 의견을 달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많은 습관이 되어있지 않은 전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독재정권 때는 우리가 싸우면서 일하자 할 정도로 북한의 침략에 대한 두려움, 국민적인 두려움으로 인해서 공산주의와 싸워야 한다 동시에 일해야 한다. 그래서 새마을운동 같은 경우도 농촌을 현대화한다든가하는 정부의 정책에 모든 국민들이 참고 견딘거죠, 경제발전에 일정 부분 역할을 했지만, 그 이후로 일정 수준의 GDP가 높아지면서도, 많은 노동자들이 저임금 장시간에 너무 오랫동안 노출되어 왔다는 거죠. 그건 엄청난 로스(loss, 손실)에요.
리: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 노동문제 중에서 가장 큰 게, 직종 간, 기업 간, 임금 차이가 어마어마해요. 능력에 따라서 다르다고 하는 이데올로기가 확산되었지만, 사실 그 정도로 차이가 나는 건 아니잖습니까?
최: 그렇죠.
리: 예를 들면 식당 일 하는 사람이나, 또 다른 서비스업을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서비스업 쪽이 노동의 질과 임금이 엄청나게 턱없이 낮아요. 유럽은 예를 들어서, 덴마크인가요, 벽돌공과 의사 수입이 별 차이가 없다고. 유럽 쪽의 경우는 어떻습니까?
최: 스웨덴은 동일임금 동일노동 연대임금정책으로 유명한 나라죠. 연대임금정책을 했을 때의 근간은 대기업에서 일하건 중소기업에서 일하건 노동자가 일정 수준의 교육과 직장 경력이 있다면 규모하고 상관없이 거기에 상응하는 임금을 줘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만약에 중소기업이나 회사가 그에 상응하는 임금을 주지 못한다면 차라리 도산하거나 회사 문을 닫으라는 거죠. 그리고 나온 노동자들을 재훈련시키든지 다른 회사로 보내든지 해야한다는 거죠. 우리나라 같은 생각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조치죠. 그걸 걔네들은 이미 60년대, 70년대 했고, 계속해서 끊임없이 구조조정을 했기 때문에 경쟁력을 가질 수 있는 중소기업만이 아직도 살아 있는 거죠.
리: 구조조정이 돼서 회사가 도산하고 거기서 나온 노동자들을 국가가 책임졌다는 거죠?
최: 그렇죠. 국가의 적소노동시장정책 프로그램을 통해서 실업보험도 주고, 실업기간 동안에 트레이닝할 수 있게 해주고, 그게 가능했기 때문에.
리: 우리나라 같은 경우 묻지마 대학진학이… 그 이유 중 하나가 학력 간 임금차별이 상당하단 말예요.
최: 대단하죠. 제가 너무 놀란 것은 LO라는 노총의 정책담당하는 사람인데, 자기 임금이 웬만한 대학의 교수 임금하고 큰 차이가 없다는 거예요. 왜냐면 그 사람도 그만큼 공부를 했기 때문에.
리: 거기는 고졸자와 대졸자의 임금 차이가, 우리는 직장생활을 하면서 좁아지는 게 아니라 생애 전체로 갈수록 격차가 더 벌어져요. 들어갈 때도 차이가 있지만 승진이라든가 모든 것이. 그래서 학력과잉사회라고 하는데…
최: 스웨덴 같은 경우는 놀란 게 고등학교 졸업하자마자 대학 가야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 않아요. 지금은 옛날보다 훨씬 많아졌지만, 옛날에는 왜 그게 가능했었냐면 경제가 성장하는 모드고 완전고용의 모드였기 때문에 고등학교만 나와도 누구나 어떤 형태든 직업을 가지는 게 가능했어요. 그래서 대학들 많이 안 갔어요. 지금은 거기도 이미 선진국이다 보니까 좀 더 하이테크나 자동화되었기 때문에 그만큼 완전고용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히 한국보다는 대학진학률이 낮아요. 거기가 요즘 해봤자 65% 정도?
리: 많이…
최: 많이 늘은 거죠. 그런데 거기는 뭐냐면 고등학교 졸업하고 어떤 사람들은 대학을 가더라도 고등학교 끝나자마자 가지를 않고 자기가 원하는 형태의 경험을 합니다. 예를 들면 내가 아는 사람 중에는 원양어선을 탔대요. 자기가 다른 기술이 없지만 쿠킹을 잘 하니까 거기 주방장을 했다는 거야. 전세계를 돌아보고 나서는 이태리가 궁금하니까 이태리 가서 한 일 년 이상 주방 쿠킹 일 하면서 거기 문화도 배우고 이태리어도 배우고.
그 사람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것을 할 수 있게끔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대학이 우리같이 맹목적으로 가는 게 아니라, 자기 취미나 장기가 어디 있나, 자기 생의 가치가 어디 있나를 항상 자기가 GPS를 돌리듯이 계속 자기 방향을 찾아가는 거죠. 적성에 맞는지. 이걸 하다가 나중에 공부하고 싶으면 그때 대학에 가도 아무 상관이 없어요.
리: 그 나라 대학은 평준화되어 있나요?
최: 굉장히 평준화되어 있죠. 대부분 평준화, 국립대학이니까.
리: 우리나라 같이 점수로 진학하는 게 아닌가요?
최: 거기도 물론 시험은 봅니다만, 스톡홀름대학도 그렇고 주요 지방에 국립대학이 다 있어요. 우리나라처럼 절대적으로 어느 한두 대학이 유명하다는 개념이 아니고, 어디나 있는 국립대학이 골고루 배치되어 있고, 거기서 가기 좋은 사람들이 가는 거기 때문에, 우리 같이 큰 편차가 없죠.
리: 그러니까 점수제로 하는 거 자체가 없단 얘긴가요?
최: 점수제의 개념보다는 자기가 택한 전공, 그 분야에 맞는 시험을 봐서 가는 거죠. 이거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핀란드나 노르웨이 같이 대부분의 국공립대학이 많은 나라들은 대학 사이의 서열 차이나 그런 부분들이, 우리나라 같이 소수의 몇 개의 대학이 일류냐 이류나 놓고 싸우는데, 걔들은 그런 게 이해가 안 가죠.
리: 그런 개념 자체가 없으니까.
최: 그런 게 없어요. 다만 이럴 순 있어요. 어느 대학은 어느 분야가 뛰어나다. 이럴 순 있어요. 거기도 스웨덴의 왕립 과학기술대학이 있거든요. 로열 아카데미 오브 테크놀로지(Royal Academy of Technology) 그쪽은 아주 오래전부터, 거기 출신들이 스웨덴에 여러 발명을 하거나 기업의 혁신을 일으킨 주도세력이에요.
지금은 상당히 많이 지역 별로 평준화되어 있죠. 우리가 말하는 평준화라는 것은 괜히 평균에 놓고 좋은 학교도 밑으로 내려가는 하향평준화로 자꾸 생각하는데, 걔들이 말하는 평준화는 하향평준이나 상향평준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대학교육이라든가, 대학교육의 내용이라든가, 또 학생 수 대비 교수라든가, 리서치 능력이라든가, 골고루 여러 가지 요소 속에 수준이 비슷하다는 거죠. 가장 바람직하죠.
정치 인생의 시작.
리: 이제 민주당 비례 후보를 신청하셨으니까, 처음으로 정당인이 되신 거네요?
최: 네. 그렇게 되었네요.
리: 평생 노동운동 외길로 걸으셨는데 소회가 남다르시겠네요?
최: 뭐, 제가 노동운동에서 추구했던 지향을 정치권에서 실현하는 것이니까, 특별한 감흥까지는 없어요. 또, 제가 노동운동에서 정치 교육을 가장 강조했던거니까 오히려 늦은 셈인지도 몰라요.
리: 그런데 사무총장님은 민주당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최: 노무현 전대통령이 말년에 유러피안을 읽고 진보주의를 연구하신 것 등을 보면 사실상 지난 10년 동안의 정책에 대한 반성이 막 시작되었다고 볼 수도 있겠지요.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정동영 의원 같은 경우엔 아주 진실성있게 반성하고 방향도 전환하지 않았습니까? 물론 전체가 다 그런 건 아니겠지만, 지난 번 무상급식 논쟁도 그렇고, 민주당의 정강 정책이 보편적 복지를 명시하면서 완전히 바뀌었잖아요. 세계적 추세도 신자유주의의 파도가 잦아들기 시작했고요.
주대환 사민련 대표님의 말씀대로 정당의 성격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르게 바뀔 것으로 봅니다. 노동+자유 연합의 성격으로요. 또 그렇게 만들어야 되고요.
리: 그럼 앞으로 지금의 민주통합당이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으로 될 것이라고 봅니까?
최: 지금 잠재력이 있다고 보는 거죠. 노동운동 세력이 결합하지 않았다면 지금의 복지 아젠다도 지속적으로 갈 수 있을지 의문이겠지만, 한국노총은 이미 결합되어 있고, 이석행 민주노총 위원장 민주노총 옛 간부들도 민주당에 들어와 있지 않습니까?
노동조합은 끊임없이 노동자의 입장을 전달할 것이고, 그렇게 하다 보면 북유럽의 노동자 정당이나 사민주의 정당이 걸어왔던 길과 유사한 길로 갈 가능성을 높이 보고, 이렇게 될 때 이 정당이 훨씬 더 친노동적인 친인간적인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 있겠죠.
리: 만일 국회에 입성하시게 된다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이 뭐가 있습니까?
최: 물론 스웨덴같은 사회 안전망이 완벽히 갖추는 정책과 법안을 만들어야 되겠죠. 그러나 그것은 재정을 많이 투입되는 것으로 당장 효과를 볼 수 있지는 못하잖아요. 또 중산층의 삶의 불안이 아주 큰데요, 그래서 어느 정도 단기적으로 효과를 볼 수 있는, 공공 보험 제도랄까요. 그런걸 만들고 싶어요.
리: 공공 보험이라면 공제조합같은?
최: 네. 우리나라 민영 보험은 정말 비효율의 극치죠. 보험료는 정말 높지만 보장금액은 터무니없이 적고. 사실 보험에 내는 돈의 40%가 넘게 마케팅비, 주주 배당금, 기타 영업비 등으로 다 엉뚱하게 새어나가요. 그리고 보험사들이 어마어마한 이익으로 남지요. 공적 보험을 만들어서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기만 해도 보험가입자들이 지금보다 훨씬 적은 돈을 내고 질높은 보장을 받을 수 있는거죠.
리: 네, 삼성생명이라든가 그런 대형 보험사들의 현금 보유와 이익금은 상상초월이더라구요. 그러면서도 막상 재해나 질병 걸리면 보상 안 해줄려고 벼라별 편법과 소송을 남발하면서 괴롭히더라구요. 소비자고발 같은 프로그램을 보니까 말이죠.
최: 그렇죠. 유럽에 비해 정말 너무 민간보험사가 비대화되어 있어요. 이런 보험 제도를 뜯어고치고 공적 보험 제도를 만들어야 되요. 이것이 중산층 붕괴를 막는데도 일조를 할 거에요.
리: 그런 롤 모델이 있습니까?
최: 예를 들면 지금 싱가포르도 스웨덴의 폭삼(Folksam)을 벤치마킹해서 이광요(리콴유) 수상 때 만든 회사가 있어요. 회사 이름이 인캄(NTUC Income)인데.
리: 인캄.
최: 그게 싱가포르 노총 산하에 근로자 복지 차원에서 이루어진 겁니다. 노동자에게 싼 보험료를 받고.
리: 일종의 공제조합이네요.
최: 그렇죠.
리: 정치에 이제 입문하신다니까, 집안에서는 응원을 하시던가요?
최: 집에서는 다 반대하죠. 그 복잡한 힘든 생활을 하려고 하느냐, 나이도 들어가면서 우아하게 살아야지, 그동안 터프한 삶을 살았는데, 개인생활은 엉망인데, 왜 굳이 그렇게 할 필요가 있느냐…이런 소리를 듣죠.
리: 하하 터프한 삶… 사실, 얼핏 보면 사무총장님은 노동운동과 잘 안 어울리기도 해요.
최: 제가 호텔이라든가, 외국계 카드사에서 상류층을 대상으로 영업을 해왔고 또 그렇게 생활해왔었기에, 노동운동을 시작할 때 그런 터프한 노동운동가들과 처음엔 정서적 교류를 하기엔 힘들기도 했어요. 솔직히. 그땐 제가 요즘 말로 샤방샤방한 옷들이 많았고 그런 옷을 즐겨 입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분들이 저와 거리감을 많이 느끼는 거에요. 뭐라고 하시는 분들도 계시고. 그러다 한 3년 있다가 그 옷들 다 버리고 옷도 검거나 회색톤으로 튀지 않게 그런 정장들만 입고 다녔어요. 지금까지도요. 호호.
리: 예전 직장생활과 비교가 많이 되었겠네요?
최: 그럼요. 뭐, 급여는 그때와 비교하면 말도 안 되는 거죠. 그리고 그때도 1년에 한두 번은 그런 쪽에서 job이 들어와요. 고위 간부직으로. 외환위기 이후 외국계 회사들이 엄청 많이 들어왔잖아요.
리: 유혹을 많이 느끼지 않으셨나요?
최: 뭐, 제가 돈 때문에 노동운동 한 건 아니잖아요. 나이 먹을 대로 먹었는데 보람있게 살다가 가는거죠.
리: 자녀 분들은 이제 다 성인이 되어서 어머니를 많이 이해하시겠어요?
최: 그래도 걔들은 좀 섭섭하겠죠. 엄마로서 제가 늘 미안하죠. 우리 딸 고3, 아들은 중3 때고 하니까… 아이들한테 보통 엄마들이 해주는 만큼 챙겨주지도 못하고. 나는 내 가족과 자식들에게는 정말 해준 게 없어요. 노동운동을 한다고 하면서. 불특정다수의 많은 노동자들의 권익을 위해서 불철주야 싸우고 스트레스 받고 조용히 뒤에서 싸웠죠. 그런데 나는 내 가족들이나 자식들은 챙기지 못한 거예요. 늘 미안하죠.
나중이라도 우리 아들딸들이 사회에 나와서 살면서 엄마가 했던 일들이 나 개인의 이해라기보다 이 사회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도록 노력했다라는 거를 걔들이 깨달을 정도만 되면 더 이상 바랄 게 없어요.
리: 아마, 지금까지 하셨던 역할을 이해하고 사무총장님을 존경하는 분들이 많은 것을 알게 된다면, 자녀들이 굉장히 자랑스러워 하실 것 같은데요. 아마 어쩌면 전부터도 사무총장님을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하하. 장시간 인터뷰였는데요, 시간이 가는 지 몰랐네요. 끝으로 한 말씀 해주시죠.
최: 제가 국제회의 차 아시아 여러 나라에도 가보긴 하는데요. 정말 한류 열풍이 대단하더라고요. 그것이 자랑스러우면서도 한편으로 저는 우리 사회가 이렇게 약육강식의 정글인 사회라는 실상이 알려질 것이 은근히 두렵더라고요. 이제 우리나라가 지금보다 훨씬 인간다운 복지국가로 변해서 그들이 모델이 될만한 사회로 변한다면, 다시말해 아시아의 스웨덴이 된다면 진정한 한류를 이룩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꿈을 꿔 봅니다.
또, 우리가 선진 북유럽 국가로부터 지원을 받고 그랬던 것처럼 우리도 그들에게 많은 지원과 도움을 아끼지 않고, 그래서 아시아에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 모델을 확산시키는 전진기지가 된다면 우리는 정말 세계로부터 존경받을만한 나라가 될 거에요.
세계 인구 대부분을 차지하는 아시아에 복지국가를 전도한다면 세계는 지금과는 엄청 달라진 모습이겠죠. 그래서 저는 우리나라를 선진 복지국가로 만드는 것이 국제적으로도 굉장히 의미있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우리나라를 아시아의 스웨덴으로 만드는 것, 제가 남은 여생을 바쳐 그 일에 작은 보탬이라도 되는 것이 꿈이라면 꿈이겠네요.
리: 감동적인 말씀 잘 들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최: 너무 고맙습니다.
이상이다.
본지가 자신있게 선정하여 빤스벗고 노골적으로 추천하는 후보다.
본지가 이번에 ‘숨은 블루칩을 찾아서’라는 총선 기획을 했던 의도가 <양극화 해소, 복지국가 건설, 그리고 그에 맞는 역량있는 정치인 발굴>에 있었다면, 우리는 최정식 사무총장을 통해 그에 대한 완벽한 모델을 찾았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언론의 조명이 비추지 않는 곳에서 불철주야로 수십 년 동안 우리 사회의 진보와 미래를 위해 안락할 수도 있는 삶을 희생해가며 묵묵히 일해 온 역량있는 숨은 주역들이 이제는 ‘2013년 체제’에 전면에 나서야 한다고 본다.
바람처럼 지나가는 이슈나 화제 속에서 대중의 주목을 받는 인물이나, 유력한 당권 주자에게 줄서기 경쟁에 앞서 있는 인물들이 공천을 받는 구태는 또다시 보지 않기를 바란다.
그 흔한 개인 홍보 홈피조차 없는 최정식 UNI 사무총장은 비례로 출마하였기에 우리가 표로써 힘을 실어줄 수 있는 방안조차 없지만, 민주당 홈피에서라도 찾아가 응원이라도 해 보는 것은 어떨까?
리베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