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필, 그 사각거리는
홍재숙
아직도 마음의 굳은살이 배기지 않았는지 마음이 흔들릴 때면 연필을 깎는다. 왼손 엄지손가락을 칼등에 대고 나무결 따라 길게 깎노라면 깊은 산속의 나무향이 그윽하게 퍼져서 내안에 평화를 만든다.
지금은 연필로 포장되었으나 본디는 울창한 나무였던 존재를 느끼며 하얀 속살이 드러나도록 한 점 한 점 베어 내린다. 나무향을 오래 붙잡아 놓고 싶어서 느리게 깎다가 이윽고 연필심 차례가 되었을 때는 어느덧 내마음이 잔잔해져 있다. 이 찰나에는 칼날을 비스듬하게 세워 흑연이라 불리는 심을 다듬을 때 연필심이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와 고운모래처럼 떨어지는 심 부스러기조차도 경이롭게 보인다.
연필을 깎으면 아득하게 포개진 시간의 저 편 너머 국민학교 (초등학교) 1학년 입학식이 눈앞에 펼쳐진다. 그때 나는 그 시대 유행의 하나였던 콧물닦이용 흰 손수건을 왼편 가슴에 옷핀으로 매달고 새 책가방에서 새 필통이 내는 덜렁거리는 소리를 기쁘게 들으며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학교에 갔다. 필통 속에는 간밤에 어머니가 공을 들여 깎아주신 새 연필 세 자루가 하얀 몸을 자랑하는 지우개와 같이 나처럼 설레고 있었다.
첫날 운동장 수업이었다. 음악소리가 들리더니 율동을 할 아이들은 나오라는 마이크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은 쭈볏쭈볏 앞으로 나가서 선생님의 몸짓에 맞추어 춤을 추었다. 너도 나가보라고 내 손을 떼어놓으려는 어머니의 손을 놓칠세라 꼭 잡은 나는 꿈쩍도 안했다. 생애 첫 부끄러움의 시작이었다. 실망하신 어머니는 나를 바라보셨고 집으로 돌아갈 때 으쓱대고 깡총거렸던 새 책가방이 갑자기 무거워 졌다.
“ 다 괜찮다.”
연필향이 책상에 퍼질수록 왜 이 말도 같이 퍼지는 걸까. 어린 내가 연필을 깎다가 칼날에 베일까봐 내 연필을 깎으며 혼잣말로 하셨던 어머니의 괜찮다 라는 그 말이 아직도 나무향과 버무려져 내게로 파고든다.
어머니는 나 혼자 연필을 깎아도 될 나이가 훨씬 지났는데도 내 곁에서 연필을 깎으셨다. 늦은 밤 방문을 열고 들어와 필통에서 하루 온종일을 글쓰는 노동을 견디느라 뭉툭하게 닳아진 연필을 꺼내어 가지런히 펼쳐 놓으셨다. 그리고 느릿느릿 연필과 이야기를 나누듯 그렇게 깎으셨다.
어느날은 연필 네 자루를 깎기까지 한 시간이 훌쩍 지나갈 때도 있었다. 그리고 다 깎으면 당신 자신에게 다짐하듯이 꼭 괞찮다 라고 마무리 하셨다. 공부를 하다가 어머니의 그 말이 들리면 나는 꼭 쳐다보았는데 그럴 때의 어머니 얼굴은 왠지 아주 슬퍼 보였다. 어머니가 깎아놓으신 똑같은 크기의 연필 속살과 까만심에서 풍기는 숲속향기가 괜찮다 라는 한숨과 버무러져 오랫동안 방안에서 맴을 돌았다.
지금에 와서 생각하니 어머니의 역설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그만하면 쓸 만하다. 혹은 별로 나쁘거나 벗어나지 않다. 라는 뜻의 사전적 의미를 가진 ‘괜찮다’ 라는 어머니의 속내는 오히려 가슴 속에 슬픔이 너무 가득차서 당신이 좋아하는 연필 깎는 작업으로 승화시키셨을 것 같다.
그 이면에는 너무나 고지식하고 강직한 아버지가 있다. 어머니의 표현을 빌리자면 돈이 쏟아져 들어오는 부업의 길도 외면하고 큰아버지와의 우애를 지키려고 박봉의 봉급으로 미련스럽게 한 길만 파셨던, 당시에 경기도 농촌마을에서 소문이 자자했던 탈곡기 기술자인 아버지와 3남3녀인 자식들의 뒷바라지가 어머니 삶에 발목을 걸었을 것이다.
고만고만한 아들 셋, 딸 셋과 전쟁 같은 하루하루를 치룬 어머니. 그리하여 고단한 일상에게 화해를 하듯 사각사각 경건하게 연필을 깎았던 나의 어머니. 마치 다 잘 될 거야. 나는 해낼 수 있어 라는 결의를 다지듯이 그 어떤 숭고한 의식 같은 것을 연필 깎기로 치르던 어머니의 모습이 출렁거린다.
어머니가 그리울 때면 연필을 깎는다. 사각사각 소리에 귀 기울이며 숨소리도 모우고 나무향이 온 방안에 퍼질 때까지 연필을 깎는다.
좀 더 잘해드릴걸. 건강하셨을 때 좀 더 많은 시간을 같이 보낼 걸. 어느 날 전화목소리로 보고 싶다. 놀러 와라. 하셨을 때 한걸음에 달려가지 못하고 서울에서 인천까지의 먼 거리를 떠올리면서 시간 내서 갈게요 라고 미적거렸던 일을 후회한다.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지 않으셨다. 훌훌 아버지 곁으로 떠나셨다.
오늘도 나는 연필을 깎는다. 아직도 심이 길게 남아있는데도 연필을 깎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