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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용 감독의 '영화 만추(晩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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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이 오기 전에 벌써부터 배리 매닐로우의 '10월이 가면'(←클릭)이 떠오르는 것을 보니 가을인 모양이다. 그는 내 품안에 아직 따스하게 남아 있는 그녀의 체온을 떠나보내기 싫어, 내 청춘이 떠나는 것이 싫어 10월이 가는 것이 싫다고 노래했다.
낙엽처럼 처연한 영화 ‘만추’가 떠오르는 것도 지금쯤이다. 이만희 감독의 1966년 영화는 전설이 된 작품이다. 한국영화사에서 걸작을 얘기할 때 빠지지 않지만 유감스럽게도 필름이 남아 있지 않다. 1970년대 초 일본에서 ‘약속’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고, 1975년 김기영 감독이 김지미 이정길 주연으로, 1981년 김수용 감독이 김혜자 정동환을 주연으로 다시 만들었다. 지금 다시 볼 수 있는 것은 1981년 작뿐이다.
‘2박 3일간의 휴가를 나온 여죄수와 건달 청년의 짧은 만남과 이별’을 그린 ‘만추’는 현대인의 고독을 그린 작품이다. 살인죄로 복역 중인 여죄수 혜림. 그녀가 사흘간의 특별 휴가를 얻어 세상에 나온다. 그리고 어머니 산소를 찾기 위해 강릉행 열차를 탄다. 이미 그녀의 영혼은 말라 있다. 미련도 염원도 없고, 사랑도 여죄수에게는 지독한 사치일 수밖에 없다.
열차에서 한 청년을 만난다. 그는 범죄 조직에 휘말려 쫓기고 있다. 여자 호송원의 날카로운 감시 속에 둘은 눈빛을 주고받는다. 바늘 끝처럼 의지할 곳 없는 외로운 두 영혼의 정사. 불꽃같다는 표현이 제격이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이 믿기지가 않는다. 살인을 저지르고, 가혹한 운명에 치를 떨고 있는 그녀에게 사랑이라니. 그래서 그 남자의 이름도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교도소 앞에서 끌려가는 그 남자에게 외친다. “이름은? 이름이 뭐예요?”
남은 2년간의 감옥생활에서도 숱하게 불렀을 그 이름. 마침내 그를 만나는 날, 아침부터 기다리기 시작한다. 가을의 호숫가에는 낙엽이 땅을 덮고 있다. 찬 공기가 수면을 스치고, 메마른 가지가 허한 소리를 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지만 그는 오지 않는다. 그 시간 그는 감옥에 갇혀 있다. 그것을 알 길이 없는 그녀는 그 벤치를 떠날 수가 없다. 마침내 체념한 듯 일어선 그녀를 휘감는 것은 낙엽이다. 쏟아져 내리는 낙엽이 그녀의 발길을 잡는다. 뒤늦게 찾아온 사랑을 놓치고 싶지 않은 그녀의 마음처럼 말이다. 김도향의 저음의 노래가 깔리면서 한없이 쓸쓸한 느낌을 주는데, 그것이 가을의 대표 정서 고독이다.
세월의 무게만큼 가을도 쌓여만 간다. 레코드판처럼 필름처럼 또 그렇게 추억도 쌓여간다.
옮긴 글 / 출처 : 매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