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우리 나라에서는 노·사간의 불협화음으로 회사는 물론 국가운영에까지 위험을 직면하고 있다. 옛 조상 님들은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은 국난의 위기 속에서도 대리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국제정세를 이용하여 국익을 최대한 확보하는 전화위복의 기회를 마련한 국난극복의 사례를 살펴 오늘에 되살릴 필요가 있다.
대표적인 사례로 압록강을 단숨에 건너서 280리(안융성)까지 국토 깊숙이 진격한 거란의 소손녕의 80만 대군에게도 전쟁은 고사하고 오히려 거란이 차지하고 있던 강동6주를 되돌려 받고, 나중에 금, 은, 말 및 낙타 등의 후한 사례까지 받은 서희의 담판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에 조종은 태조 왕건의 고구려를 대신한 나라라고 국호를 고려로 했으며, 고구려의 유족이 세운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을 적대시하였고, 북진정책을 써서 서경을 중시하며, 동시에 거란의 화해외교의 요구를 단칼에 거절하였다. 사신 30명을 귀양보내고, 선물로 보낸 낙타를 만부교에 말라 죽였다. 당시 고려의 군사라고 모두 다해야 30만 명도 안 되었는데 80만 대군이고 대부분이 기마병으로 신출귀몰한 강병을 대적하기에는 중과부적(衆寡不敵)이라고 하였다.
조정에서는 2 가지 대안이 나왔다. 첫째는 "서경이북을 때어주고 돌려보내자(割西京以北)"은 주장과 둘째로 "왕이 군사를 이끌고 나가서 항복하고 빌자(率軍乞降)"를 하자는 것으로 고려사에서는 적고 있다. 그러나 서희는 대노하여 소손녕(蕭遜寧)에게 담판을 내겠다고 하였다. 오히려 이때가 바로 거란이 차지하고 있는 강동6주를 되돌려 받는 좋은 기회라고 주장하면, 죽어도 좋으니 자신은 보내달라고 하였다. 조정의 대신도 국왕도 모든 백성들이 요사이 말로 "돼질 라고 선금 찌른다"고 하였다.
그러나 서희의 복안은 달랐다. 그의 생각은
① 일찍이 송나라 사신으로 7번이 다녀왔기에 송나라와 거란이 30년간 불구대천지수(不俱戴天之讐)로 싸우고 있다는 사실에 착안하여 거란은 송나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려와 친교로 원린근공책(遠隣近功策)을 구사하는 거란의 왕의 속셈을 환히 들어다 보았다.
② 고려 국토인 압록강에서 280리(청천강 남쪽 安戎鎭)까지 깊숙이 들어왔기에 퇴로를 확보하지 못한 거란 80만 대군도 송과 협공할 경우에 퇴로가 막혀 살아갈 수 없다는 사실에 불안하여 무조건 항복을 몇 번이고 강요하고 협박하고 있는 속마음에는 불안을 감추고 있는 소손녕의 마음을 꿰뚫어 봤던 것이다. 당시 기마병으로 산야전에는 불리한데가다 11월동절기로 고려군은 청야전술(적으로부터 물려나먼서 적이 사용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깨끗하게 불태워버림으로 적을 동사시키는 전술)로 맞서게 되었다. 또한 검차(劍車)라는 신무기로 기마병들이 기겁을 할 지경이였다.
③ 이렇게 긴박한 사정을 역이용할 경우에는 거란이 차지하고 있는 강동6주를 되돌려 받는 것은 누워서 떡먹기 보다 쉽다는 틈새를 봤다.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생각을 갖고 아깝지만 신하 1명을 잃는 셈치고 보냈다. 손소녕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는 왕이 나와서 항복하지 않는다고 호령하는 손소녕 적장의 눈빛에는 "조선에 이런 인물이 있구나"는 반가움이 서렸다. 행동은 거칠었으나 내심으로 살았다고 하는 얼굴빛이 역력하였다고 고려사에서는 적고 있다.
막상 만나자 적장의 요구는 "조빙(朝聘)"라는 두 글자를 적어 보내는 것이다. 즉 국교를 맺자는 것이다. 서희는 "환아구지(還我舊地)"라고 회답을 보내자. 왕에게 물려보겠다고 7일을 기다리라고 하여, 7일 후에 형제지국(兄弟之國)의 관계를 맺으면 강동6주(300리 지역)를 돌려주겠다고 했다.
소손녕은 무사히 돌아간 뒤에 고려왕과 서희에게 후하게 보석과 낙타 등으로 사례를 표했다고 한다. 그렇게 급한 사정을 훤히 들여 봐서 서로의 입장을 살려주고, 서로의 이득을 얻을 수 있는 인물이 고려에도 있다는 사실을 성종에게 친서로 극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