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이성(成以性 1595~1664)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유학자, 청백리이다. 자(字)는 여습(汝習)이고 호는 계서(溪西)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춘향전의 주인공인 몽룡은 원래 성몽룡이었다. 남원부사와 승정원승지를 지낸 성안의의 아들이다.
강직한 간관이자 청백리였으며, 춘향전에 나온 '금준미주 천인혈(金樽美酒 千人血)'은 그가 실제로 지은 한시였다. 호서 암행어사와 호남 암행어사로 활동, 감찰하며 부패 수령들을 봉고파직(封庫罷職.고을원을 파면하고 관가 창고를 봉함)시켰다. 이것 역시 춘향전의 소재가 된다.
성이성은 경상북도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 태생으로 아버지는 창녕 성씨로 승정원승지와 군수를 지낸 성안의(成安義)이고, 어머니는 예안 김씨로 증(贈) 호조참판에 추증(追贈)된 김계선의 딸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그는 학업에 열중하여 13세때 그가 쓴 글을 우연히 정경세(鄭經世)가 보게 되었다. 정경세는 그의 글을 읽고 장차 크게 될 인물이라 하였다.
어려서부터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고 학문에 더욱 증진하여 조경남의 문하에서 수학하다가 뒤에 강복성(康復誠)의 문인이 되었다. 강복성은 사림의 학통인 길재-김숙자-김종직-김굉필-조광조-이연경의 학통을 계승한 학자였다.
1607년(선조 40) 남원부사로 부임한 아버지 성안의(5년간 재임)를 따라 갔다가 그곳에서 만난 기생과의 일화가 후일 춘향전의 주 뼈대가 되었다. 그러나 아버지 성안의가 참의로 발령되면서 기생 춘향(春香)과는 이별하게 된다. 이때 시중에는 성이성과 춘향을 소재로 한 춘향전이 희극과 인형극, 만담 등으로 확산되었는데, 양반가 자제의 스캔들이라 하여 조선조정에서 관을 시켜서 금지하게 되자 성몽룡을 이몽룡으로 바꾸고, 성씨(姓氏)가 없던 기생인 춘향에게 성(成)씨 성을 붙여서 시연하게 된다.
1616년(광해 8) 그는 사마시 양시에 합격했는데 생원시에 합격하여 생원(生員)이 되고, 그 해에 다시 진사시에 합격하여 진사(進士)가 되었다. 그러나 광해군 때의 난세에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았다.
1639년(인조 17) 호남(湖南) 지방 암행어사에 임명되어 5년간 호남 지역을 순찰하고 1644년(인조 22) 되돌아왔다가. 그 뒤 1647년(인조 25) 다시 호남 암행어사로 파견되었다.
그러나 호남 암행어사로 부임했을 때 신분을 노출시키고 마는데 성이성은 암행을 하고 다니다가 1647년 11월 25일 순천에서 실수로 부득이 자신의 신분을 드러내고 이후에는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그는 돌아오는 길이던 12월 1일 남원에 들렀다고 일기에 적고 있다.
외직으로는 진주부사,강계부사 등 네 고을을 다스렸는데, 진주부사로 재직할 때는 서인 출신으로 경상도 암행어사로 파견된 민정중(閔鼎重)이 조사하여 그의 선치(善治)를 보고하여 특별히 왕으로부터 표리(表裏.옷감)를 받았고, 강계부사 때에는 여진족 등의 약탈과 흉년 등으로 어려움에 처한 부민들에게 삼세(蔘稅)를 모두 면제해주어 백성들이 기뻐하였으며 부처가 환생하여 돌아왔다며 '생불' 또는 '관서활불'(關西活佛)이라며 칭송하였다. 1664년(현종 15)에 향년 70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고향인 봉화군 물야면 가평리에는 성이성을 추모하는 사당인 계서당이 건립되었다. 사후인 1695년(숙종 21) 청렴함을 인정받아 조정으로부터 청백리로 선출되었고 통정대부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계서유고>가 있다.
그는 아버지인 남원부사 성안의가 부임할 때,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 남원에서 생활하다 우연히 남원 기생 춘향을 만나게 되었다. 그러나 춘향과는 (당시 신분제도상) 이루어지지 못했고 이는 바로 춘향전의 모티브가 되었다. 뒤에 호남 암행어사로 부임했다가 신분을 노출하고 돌아갈 때 남원에 들렀다. 늙은기생 여진이 찾아왔지만 그는 춘향을 찾았다 한다. 그러나 그는 춘향을 만날 수 없었다.
‘서리 내린 난간에 앉으니 눈빛이 뜰에 하얗게 깔려있고 대나무숲이 희었다. 나는 소년시절을 생각하여 밤늦도록 잠들지 못했다.’
춘향전은 판소리, 연극, 소설의 소재가 되었으나 양반가 자제의 스캔들이라 하여, 조정에서는 양반가의 위신을 떨어뜨린다며 춘향전을 금지하였다. 할 수없이 민중들은 성몽룡 대신 이몽룡으로 성을 바꾸어서 연극과 판소리, 소설, 구전 등으로 전하였다.
「金樽美酒 千人血, 玉盤佳肴 萬姓膏. 燭淚落時 民淚落, 歌聲高處 怨聲高.」아름다운 동이에 담긴 향기로운 술은 뭇사람의 피요, 옥쟁반의 맛있는 안주는 만 백성의 기름이라, 촛불의 눈물 떨어질때 백성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드높도다.
춘향전에 나오는 ‘금준미주 천인혈’은 성이성이 지은 시 중의 하나였다. 성이성이 춘향전에 나오는 성몽룡처럼 변사또를 응징한 남원 출두 기록은 실록이나 문집에는 없다. 그러나 춘향전에 나오는 잔치연에서 이몽룡이 변학도를 질타하며 읊은 시조는 성이성이 짓고 읊었다. 이는 성이성의 4대손 성섭의 저서 <교와문고>와 스승 조경남이 쓴 <난중잡록>에 그의 작품으로 기록되어 있다.
호남 암행어사가 되었을때에 호남 12고을 군수, 현감들이 잔치를 베풀었다. 이때 성이성은 암행어사가 걸인의 행색을 하고서 연회장에 나타났다. 호남의 12고을의 군수, 현감들은 그를 조롱하며 '그대가 시를 지으면 종일토록 놀고 짓지 못하면 가라.'고 했고, 그는 즉석에서 '금준미주 천인혈'을 짓는다. 이어 전라도내 6명의 부패한 수령들을 봉고파직 시킨다. 석성현감이 생일날 과다한 잔치를 벌인 것은 춘향전에 등장하는 변사또의 모티브가 되었다. <위키백과>
註: 《인조실록》 인조15년(1637) 7월 16일에 의하면 “암행어사 성이성(成以性)ㆍ김홍욱(金弘郁)ㆍ심동귀(沈東龜)ㆍ조수익(趙壽益)을 각도에 보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