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심이 깊었던 청원군의 독립운동가 7인을 만나다.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도 아깝지 않았던 분들
마음까지 꽁꽁 얼어붙었던 차가운 겨울이 지나가고 추위를 견딘 꽃과 새싹, 잎사귀가 고개를 내미는 봄날씨가 찾아왔습니다.
충북 청원군 문의면 문산리의 양성산 아래에 위치하고 있는 문의문화재 단지에도 어김없이 푸른 나무와 잔디가 반겨주었는데요. 곧고 예쁘게 자란 나무들 사이에서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맑은 봄공기를 마시며 산책로를 따라 걷다보면 다양한 기와집, 초가집, 옹기만드는 곳이 있어서 옛 선조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었고 산을 등지고 물을 바라보고 있어서 풍수지리설에서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배산임수 지역이 어떤 곳이다를 알게 해주는 정말 좋은 곳이었습니다.
기와집, 초가집 외에도 다양한 볼거리가 많이 있었는데 큰 건물로는 박물관과 미술관이 있었습니다. 박물관에는 기와에 관한 전시와 인류의 진화에 관한 전시를 하고 있었는데, 특히 미술관 앞에는 애국지사 조형물과 조각물을 전시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청원군의 독립운동가 7인의 동상이 있었는데 금방이라도 움직일 것 같이 실제 사람정도의 크기로 만들어진 동상에서는 나라를 어떻게 되찾을 것인가 고뇌하는 모습과 함께 불타는 의지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동오 신흥식 선생
본관은 고령으로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다. 35세 때에 청주 북감리교회에서 미국인에게 세례를 받고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1913년 서울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었다. 평양남산현교회 목사로 재임하던 1919년 2월 이승훈으로 부터 3.1운동의 계획을 전해듣고 기독교 측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날인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의 최종 모임에 참석하였고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일제에 피체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종교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은재 신석구 선생
본관은 평산으로 미원면 금관리 출신이다 호는 은재를 사용하였다. 1907년 협성신학교를 졸업하고 감리교 목사가 되어 서울 등지에서 포교활동을 하였다. 1919년 2월 중순경, 서울 수표교회 목사로 재임 중 3.1운동의 계획을 전해 듣고 기독교측 민족대표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였다. 2월 28일 손병희의 집에서 열린 민족대표 최종 모임에 참석하였고, 3월 1일 독립선언식에 참가한 뒤 일제에 피체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종교 활동과 독립운동을 계속하였으며 광복 후 북한에서 공산당에 항거하다가 희생당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청암 권병덕 선생
본관은 안동으로 미원면 용곡리 출신이다. 18세에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 때 적극 참여하였다. 1906년 일본에서 귀국한 손병희가 천도교를 일으키자 천도교에 입교하여 주요보직을 역임하였다. 1919년 2월 하순, 손병희 등과 천도교 측 대표로서 운동을 추진하였고, 독립선언서에 민족대표로 서명 날인한 뒤 3월 1일 독립선언을 하고 일제에 피체되어 2년간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에도 계속 천도교 교단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였고 역사저술을 남겼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청암 한봉수 선생
본관은 청주로 내수읍 세교리 출신이다. 1907년 의병으로 봉기한 이후 1910년 5월까지 충북, 경상, 강원 등지에서 평민으로 구성된 의병부대를 이끌고 여러 차례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친 중부지방의 대표적인 후기 의병장이다. 일제에 피체되어 내란죄로 교수형을 선고 받았으나 이른바 합방대사령으로 출옥하였다. 이후 일제의 온갖 탄압과 감시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1919년 4월 1일 고향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가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뤘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 수여)
의암 손병희 선생
청원 북이면 금암리 출신이고 도호는 의암이다. 1882년 동학에 입교하였고, 1897년 최시형의 뒤를 이어 제 3대 교주가 되었다. 1905년 12월 동학을 천도교로 개칭하고 이듬해 1월 일본에서 귀국, 이용구 등 교단 내 친일파를 제거하고 교세의 확장에 노력하였다. 1919년 3,1운동을 계획하고 추진하였으며, 민족대표 33인으로서 독립선언서에 서명 날인하고 독립선언식을 주도하였다. 옥중에서도 일제에 맞서 당당하게 투쟁하였으며, 병 보석으로 출옥하였으나 곧 순국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추서)
단재 신채호 선생
본관은 고령으로 충남 대덕 출신이나 낭성면 귀래리에서 성장하였다. 1905년 성균관 박사가 되었으나, 황성신문과 대한매일신보의 주필로서 항일언론투쟁을 펼쳤고 신민회에 참여하였다. 1910년 망명하여 연해주와 상해, 만주에서 독립운동과 역사연구를 병행하였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였으며 1923년 창조파의 대표로서 활동하였다. 조선혁명선언을 기초하였고, 무정부 주의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그의 민족주의 역사학은 후대역사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예관 신규식 선생
가덕면 인차리 출신이다. 1897년 관립학교를 다닌 뒤 육군 무관학교를 거쳐 1902년 육군참위로 임관하였다. 1905년 을사조약에 분개하여 음독 자결을 기도하다가 오른쪽 눈을 잃었다. 1911년 중국 상해로 망명하여 신해혁명에 참여하였고, 1917년 대동단결선언을 발표하였으며 1921년에는 중국과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초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풍수지리설에서도 가장 으뜸으로 쳐주는 산을 등지고 강을 바라보고 있는 곳에 나라를 되찾기 위해 온갖 핍박과 고난에도 굴하지 않고 독립운동을 한 애국지사 7인의 동상이 세워져 그 분들의 빛나는 업적이 잊혀지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선조들이 피와 눈물로 되찾은 대한민국! 이제는 우리가 지켜야 할 차례라고 생각합니다.
<취재 : 청춘예찬 윤송희 대학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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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춘예찬 원문보기 글쓴이: 굳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