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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왕곡성당 카페, 마리아사랑넷, 빠다킹신부와 새벽을 열며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눈길 교통사고로 생사를 오가는 과정에서 임사 체험을 했던 헨리 나웬 신부님은 이런 말씀을 남겼습니다.
“요르단 강을 살짝 건너갔었을 때 받았던 가장 강렬한 느낌은 극진한 환대였습니다. 환한 웃음, 활짝 두팔 벌린 세상 자상하신 분으로부터 세상 따뜻한 환영을 받았을 때, 평생토록 나를 억압해왔던 두려움, 상처, 분노, 굴욕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지는 편안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특별한 임사 체험이후 헨리 나웬 신부님은 우리에게 이런 권고 말씀을 건네셨습니다.
“여러분 각자 죽음의 순간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증거하는 위대한 순간이 될 수 있도록 잘 준비하십시오.”
오늘 위령의 날은 먼저 떠난 이들을 기억하고 추모하며 하느님의 자비를 청하는 날이기도 하지만, 사실 아직 이 땅 위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날이기도 합니다. 먼저 떠난 이들은 남아있는 우리를 향해 무언의 외침을 건넵니다.
“오늘은 내 차례요, 내일은 네 차례!”
우리 역시 떠날 날들이 그리 많이 남지 않았으니, 이왕이면 좀 더 충만하게, 좀 더 열정적으로, 좀 더 기쁘게 이 세상을 살다 오라는 먼저 떠난 분들의 강력한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하루를 돌아보니, 마치 불꽃놀이 불꽃처럼 순식간에 하루가 소진되었습니다. 우리의 마지막 날도 그렇게 순식간에, 섬광처럼 다가오고 사라질 것입니다.
관건은 순간순간을 하릴없이, 영양가 없이 보낼 것이 아니라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게 계획하고 구성해야겠습니다. 며칠 전부터 저는 자기 전에 작은 노트에 내일 꼭 처리해야 할 사소한 일들을 순서대로 메모합니다. 어떤 날은 한 페이지가 꽉 차 기분이 좋습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시간들이 엄청난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그리 많지 않습니다. 보다 알차게, 보다 계획적으로, 보다 충만하게 엮어가기 위해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이 숱한 날들을 선물로 주시면서 바라시는 바가 반드시 있을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살다가 당신 품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행복은 이 세상에서의 행복, 인간적인 행복도 포함되겠지만, 궁극적으로 영적인 행복이요, 주님 안에서 행복입니다. 산상 수훈을 통해서 강조하시는 바로 그 행복입니다.
죽음은 사실 우리의 삶 속에 이미 스며들어있습니다. 또한 삶이란 것도 죽음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삶과 죽음은 항상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죽음은 우리가 이 세상 살아가는 동안에도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미 ‘작은 죽음’을 체험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사별, 일선에서의 물러남, 질병, 노화, 소외, 실패, 고독...우리는 매일의 삶을 살아가면서 그 안에 실재하는 다양한 죽음의 요소들을 대면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살아있으면서도 매일 작은 죽음을 체험합니다. 결국 삶 속에 죽음이 있고 죽음 속에 또한 삶이 자리 잡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모순되는 말처럼 보이지만 삶은 시시각각 죽음으로부터 위협받고 있기에 더욱 소중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반대로 죽음이 없다면 끝도 없이 반복될 죄와 악습, 병고와 고독...도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겠습니까?
죽음이 있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죽음이 있어 기나긴 한 인간의 생이 정리되고 완성되니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요. 아리송하지만 결국 죽음 안에 삶이 있고 삶 안에 죽음이 있습니다.
언젠가 우리가 인생의 마지막 종착역에 도달했을 때, 우리들의 지난 삶은 어떻게 평가를 내릴 수 있을까요? 절대로 우리가 보낸 세월의 양으로 평가받지 않을 것입니다.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관건이 아닐 것입니다. 그보다는 우리가 하루하루를 얼마나 충만하고 의미 있게 살았는가가 중요할 것입니다.
고대 그리스 사람들은 의미 없이 흘러가는 시간을 ‘크로노스(Chronos)’라고 표현합니다. 반대로 특별한 의미가 담겨있는 시간을 ‘카이로스(Kairos)’라고 말합니다.
참 삶은 의미있는 삶, 가치있는 삶, 깨어있는 삶, 현재에 충실한 삶, 주님의 생명력으로 가득한 삶, 결국 사랑의 삶입니다. 우리에게 남아있는 하루하루가 그저 하루 삼시 세끼 섭취하고 연명하는 데 만족한 삶이 아니라, 하루하루 의미있고 충만한 삶으로 엮어가는 것, 축복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가장 좋은 비결이 될 것입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연옥을 믿지 않으면 벌어지는 일>
복음: 마티오 5,1-12ㄴ
오늘은 위령의 날입니다. 연옥은 무척 고통스러운 곳입니다. 성인들은 지옥의 고통과 맞먹는다고 합니다. 그러니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해주는 것만큼 큰 자비의 행위도 없을 것입니다.
다만 오늘은 연옥이 하느님의 자비임을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만약 연옥이 없다면 어떻게 될까요? 예수님은 세례자 요한도 하느님 나라의 가장 작은 사람보다 크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우리는 세례자 요한보다 완전해져야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뜻입니다.
저는 이것을 친구의 생일잔치에 가서 느꼈습니다. 다만 양말이 뚫려 엄지발가락이 나왔을 뿐인데 잔칫상이 마치 지옥과 같았습니다. 창피해서 맛있는 거 먹는 거보다는 집에 빨리 돌아오고 싶었습니다.
지옥에 가지는 않더라도 양말을 기울 시간을 주어야 하느님께서 자비로운 분이실 것입니다. 만약 그럴 시간을 주지 않는다면 무슨 핑계를 대든지 잔칫상에 가지 않으려 할 것입니다. 그렇게 연옥이 없으면 감히 성인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고 시도하는 사람이 많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을 가졌더라도 연옥에 대한 교리가 약하면 어떻게 될까요? 마르틴 루터처럼 될 수밖에 없습니다. 마르틴 루터는 친구가 벼락에 맞아 죽는 것을 보고 ‘지옥이 두려워’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해성사를 하고 보속을 해도, 죄는 여전히 짓고 보속은 고통스럽기만 하였습니다. 이때 바오로 사도의, 행위보다는 믿음이라는 말씀을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행위를 버리기로 하였습니다. 일단 지옥에 가지 않으려면 죄가 용서받았다고 믿어야 해서 ‘죄를 용서받았다고 믿기만 하면’ 천국에 이른다고 주장하였습니다. 실천을 강조하는 야고보서는 처음에는 성경에서 제외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과연 믿음의 정도가 죄를 용서받았다고 하는 정도면 충분할까요? 우리 믿음은 하느님 자녀, 곧 그리스도처럼 되었다는 믿음까지 가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짓는 법이 있으셨을까요? 없으셨습니다. 따라서 행위 또한 완전하셨습니다.
이렇게 연옥을 생각하지 않으면 완전해야만 해서 그 완전의 정도를 낮추기 일쑤입니다.
전에 전교 1등을 하는 고3 학생이 어머니를 살해한 적이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전국 1등을 하라고 아들에게 폭력을 행사하였습니다. 어느 날 아들이 성적표를 받았는데 학교에서도 1등이 아닙니다. 아들은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성적표를 위조하였습니다. 결국 어머니가 알까 봐 자기가 죽느니 어머니를 죽이는 편을 선택한 것입니다.
성적표는 실천입니다. 실천이 믿음의 정도를 나타내줍니다. 아무리 믿는다고 하더라도 그만한 실천이 나오지 않으면 착각입니다. 그러나 ‘여지’를 주지 않는다면 우리는 모의고사와 같은 성적표가 필요 없다고 말할 것이고 또한 그 목표를 낮출 수밖에 없게 됩니다. 부모는 자녀가 전국 1등을 못 하더라도 사회에서 살 수 있을 정도의 공부만 하면 나머지는 다른 것으로 보충하면 될 것임을 압니다. 그렇게 자비로운 여지를 주는 부모 앞에서 아이는 목표를 낮추지도 않고 거짓말을 하지도 않습니다. 실천과 믿음의 균형을 맞추며 나아갈 것입니다.
한때 조류 인플루엔자나 신종플루, 코로나 등의 전염성이 강한 병이 발생했을 때는 비행기를 타기 전에, 혹은 외국에서 들어올 때 체온계 등으로 일일이 검사하여 그런 병에 걸린 사람이 들어와 다른 사람들에게 전염되지 않게 철저히 관리하였습니다.
죄는 확실히 전염성이 있습니다. 만약 어린아이가 불량한 부모 밑에서 자랐다면 보고 듣는 것들이 좋지 않기 때문에 그 아이가 매우 건전하게 크는 것은 굉장히 힘듭니다. 다른 아이를 괴롭히는 그런 아이를 다른 아이들과 함께 놀게 하는 것도 위험합니다.
그러나 병이 들었으면 치료될 수 있습니다. 성장하면서 착해질 수 있습니다. 그런 시간을 주어야지, 무작정 완전하지 않으면 끝이라는 식이라면 정말 사랑도 없는 사회일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연옥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연옥을 목적으로 하라는 말이 아니라 노력을 포기할 필요는 없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오늘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면서 연옥이라는 곳을 만들어 우리가 이 세상에서 정진을 멈추지 않게 해 주신 하느님을 찬미합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오늘은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하여 새로운 삶을 살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그 은혜에 대하여 감사드리고, 아직 연옥에 남아있는 분들을 위해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날이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을 생각하고 현재의 나의 삶을 되돌아보는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연옥이 어떤 곳인가를 한번 보겠다. 연옥은 끝이 있는 일시적인 정화의 장소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한 존재로서 누구나 결점은 있으며, 완전한 인간은 없다. 그래서 스스로 죄스런 인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죽은 후에는 더는 어떻게 해볼 수가 없다. 하느님을 뵙는 순간 자기 자신 스스로 판단하게 되기 때문이다. 더 이상의 발전 가능성은 죽은 다음에는 없다. 그러므로 결점이 있는 부당한 인간으로서 완전하신 하느님께 나아갈 수가 없다는 것은 당연하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조그마한 결점도 용납이 안 된다. 이같이 인간이 하느님을 향해서 살아갔지만, 인간적 약점 때문에 가지게 된 부족한 것과 결점을 기워 갚는 그것을 연옥이라고 한다. 이 연옥은 마지막 정화단계라고 보는 것이 좋겠다. 하느님께 나아가는데 죄스러운 결점이 하느님의 완전하심을 통해서 정화되고 구원이 성취되는 마지막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교회가 가르치고 있는 연옥론(煉獄論)은 하느님의 성성(聖性), 정의, 자비를 명백히 보여주며, 인간을 절망과 윤리적인 경솔함으로부터 지켜주고, 더구나 죽은 사람도 도와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증하여 줌으로써 많은 위로와 도움을 주고 있다1) . 연옥에서의 영혼은 자신의 죄에 대해 정화 받는다. 이 세상에서는 죄에 대한 보속을 선행이나 기도로써 대신에 할 수 있으나 연옥의 영혼은 더는 무엇을 할 수 없고, 수동적인 형태로 하느님의 정의로 내려진 벌의 고통을 견디는 것으로 정화와 속죄되는 상태이다. 이 영혼은 하느님이 내리시는 고통을 즐겁게 수용함으로써 죄에 대한 유한적(有限的)인 벌의 보상을 하면 확실하게 정화되는 것이다.
연옥의 고통이란 모든 사람에게 같지는 않다. 각자가 지은 죄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된다. 그다음 연옥 영혼은 하느님을 마음으로부터 사랑하고, 천국에 도달할 수 있다는 것이 확실하므로 고통으로 마음의 평화와 기쁨이 흔들리지는 않는다. 그 고통의 기간이나 엄중함도 지상교회의 기도와 선업(善業), 신자들의 기도로 단축 또는 경감시켜줄 수 있다. 연옥의 영혼들을 도와줄 수 있고 그들의 고통을 경감 내지 단축해줄 수 있다는 것은 우리의 현실 속에서도 그 예를 들어 충분히 이해가 가고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예를 들면, 아버지가 빚을 다 갚지 못하고 돌아가셨다고 한다면, 자녀는 아버지의 명예를 위해서 그 빚을 대신 갚으려 할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 더는 어떻게 해볼 수 없는 상태에 있는 그분을 위해서 아직은 무엇을 할 수 있는 우리가 대도(代禱)를 한다고 할 때, 즉 대신 고행(苦行)한다든지 대신 속죄(贖罪)의 선행을 하느님께 보여 드린다고 할 때 그 노력은 헛된 것이 아니다.
그분을 위해서, 그분의 명예 회복, 하느님의 모습을 닮음을 완전히 회복시켜 주기 위한 이 행위는 돌아가신 부모의 빚을 갚아서 그분들의 명예를 회복시켜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는 기쁘게 받아주실 것이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미사를 봉헌하며, 이 미사를 통해서 지상교회는 연옥의 영혼들과 통공을 나누고, 만일에 그 영혼이 정화되어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기도의 은혜는 다른 영혼에게 베풀어지며, 천상에 있는 그 영혼은 아직도 이 지상에서 순례하고 있고, 많은 어려움과 박해 속에 있는 지상교회를 위해 기도해줄 것이다. 이렇게 우리는 또한 “모든 성인의 통공을 믿나이다."하고 고백한다. 연옥의 영혼은 그곳에서 자신의 죄를 다 보속한 후에는 하느님의 생명에 나아갈 것이며, 천국에서 하느님을 직접 뵙게 되고, 그분의 신비에 잠기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일시적 정화의 장소인 연옥은 모든 영혼이 하늘나라에 들어감으로써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다.
교회는 이 영혼들을 위한 특별 기간(위령성월)도 마련하고 있지만, 그들이 하루빨리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하느님께 일치하도록 선행으로써, 기도로써, 미사를 통하여 우리가 도움을 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항상 모든 성인의 통공을 기억하면서이다. 그들을 위한 기도나 선행은 그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모든 성인의 통공 안에서 본다면 바로 우리 자신들을 위한 기도이다. 이 미사 동안 우리가 사랑했고, 우리를 사랑했던 돌아가신 부모와 형제 그리고 친지들이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있도록 주님의 자비를 간구하자.
1) 교회가 연옥에 대한 가르침을 정식으로 정의한 것은 리용 및 피렌제 공의회(1274년 및 1439년), 그레고리오 13세 및 우르바노 8세의 신경(信經), 그리고 프로테스탄트에 반대하여 열린 트리엔트 공의회(1545-1563)에서 이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지난달은 너무나 바쁜 일상의 연속이었습니다. 계속해서 무엇인가에 집중할 일이 생겨서 통 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두통도 있고, 피곤함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다 문득 제 집무실에 있는 너저분한 많은 것들이 눈에 보였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사실 제 집무실에 많은 사람이 오거든요. 그 사람들이 이 지저분한 모습을 모두 보았을 테니까요. 곧바로 정리에 들어갔습니다. 지저분한 것을 과감하게 버리고, 자주 사용하는 것은 눈에 잘 띄는 곳에 두었습니다. 1~2시간의 정리 끝에 제 마음에 드는 상태가 되었습니다. 바로 그 순간 계속 가지고 있었던 두통과 피곤함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모든 병의 원인이 ‘스트레스’에 있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이 스트레스 대처법의 첫 번째가 ‘방을 치워라!’라고 하더군요. 집이든 직장이든 어수선한 상태가 불안 증대 원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히 해야 할 정리 정돈을 하지 않으니, 불안이 생기고 이것이 스트레스가 된다는 말에 공감됩니다.
해야 할 것을 하지 않기에 힘듦의 시간을 갖게 됩니다. 주님의 말씀도 당연히 우리가 따라야 할 것들입니다. 이를 하지 못하니 평화가 없고, 고통과 시련만 가득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닐까요?
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그래서 지금 당장 해야 합니다. 일의 우선순위는 즉시 처리해야 할 중요하고 급한 일이라고 하지요. 그런데 그냥 삭제하고 무시해야 할 중요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은 일에 온 힘을 기울여 스트레스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닐까요?
오늘은 죽은 모든 이, 특히 연옥 영혼들이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도록 기도하는 날입니다. 동시에 우리의 삶에 대해서도 묵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죽음이 분명히 우리에게 다가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마치 이 세상 안에서 영원히 살 것처럼 행동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기 위해서는 반드시 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바로 주님께서 그토록 강조하셨던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사랑을 무시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죽음 이후 힘듦의 시간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 없이 살면, 주님과 함께할 수 없기에 평화 대신 불안과 좌절만 가득한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연옥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날, 우리도 후회하지 않을 삶을 살겠다는 다짐을 해야 하겠습니다. 주님의 사랑 안에서만 이 세상 안에서 스트레스 없이 기쁨과 행복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명언: 실수하는 것은 인간적이지만, 실수를 고치지 않는 것은 악마적이다(성 아우구스티누스).
※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출처 : 묵상글 단톡방)
저 나뭇잎들은 하느님께서 주신 시간에
얼마나 자신의 삶에 최선을 다했으면
저렇게 곱게 물든 단풍이 되었을까?
나는 저 낙엽들처럼
매년 형형색색 얼마나 아름다운 색일까?
나는 내 삶을
얼마나 아름답게 꾸몄는지 성찰해 봅니다.
나무는 떨어지는 잎에 대해
염려하거나 안달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죽기 전에 가장 후회하는 일
하고 싶은 것을 하지 못한 것이라고 합니다.
죽어서는 사랑도 못합니다.
‘지금 여기서’ 후회 없이 사랑해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현재에 최선을 다할 뿐
나머지 몫은 주님께 맡기면 되는 겁니다.
이는 체념이 아니라 믿음입니다.
후회 없는 삶을 살려면
오늘 나는 무엇을 해야 할지
먼저 생각하는 하루가 되어야겠습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 구속주회
※이병우 루카 신부님 - 마산교구 합천성당 주임신부님
복음말씀
제1독서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 욥기의 말씀입니다.19,1.23-27ㄴ
1 욥이 말을 받았다.
23 “아, 제발 누가 나의 이야기를 적어 두었으면!
제발 누가 비석에다 기록해 주었으면!
24 철필과 납으로 바위에다 영원히 새겨 주었으면!
25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네, 나의 구원자께서 살아 계심을.
그분께서는 마침내 먼지 위에서 일어서시리라.
26 내 살갗이 이토록 벗겨진 뒤에라도 이 내 몸으로 나는 하느님을 보리라.
27 내가 기어이 뵙고자 하는 분,
내 눈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그분을 보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될 것입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5,5-11
형제 여러분, 5 희망은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받은 성령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어졌기 때문입니다.
6 우리가 아직 나약하던 시절,
그리스도께서는 정해진 때에 불경한 자들을 위하여 돌아가셨습니다.
7 의로운 이를 위해서라도 죽을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혹시 착한 사람을 위해서라면 누가 죽겠다고 나설지도 모릅니다.
8 그런데 우리가 아직 죄인이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돌아가심으로써,
하느님께서는 우리에 대한 당신의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9 그러므로 이제 그분의 피로 의롭게 된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하느님의 진노에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0 우리가 하느님의 원수였을 때에
그분 아드님의 죽음으로 그분과 화해하게 되었다면,
화해가 이루어진 지금 그 아드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은
더욱 분명합니다.
11 그뿐 아니라 우리는 또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자랑합니다.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이제 화해가 이루어진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음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5,1-12ㄴ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군중을 보시고 산으로 오르셨다.
그분께서 자리에 앉으시자 제자들이 그분께 다가왔다.
2 예수님께서 입을 여시어 그들을 이렇게 가르치셨다.
3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4 행복하여라, 슬퍼하는 사람들! 그들은 위로를 받을 것이다.
5 행복하여라, 온유한 사람들!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다.
6 행복하여라, 의로움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 그들은 흡족해질 것이다.
7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
8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볼 것이다.
9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의 자녀라 불릴 것이다.
10 행복하여라,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
11 사람들이 나 때문에 너희를 모욕하고 박해하며,
너희를 거슬러 거짓으로 온갖 사악한 말을 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2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