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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79번지 그 아래 엄청난 것이 숨어있었다
총통, 환, 종의 파편, 용뉴가 나왔다. “그동안 접하지 않은 유물이 나오니까 심상치 않다 싶었죠.” 깨진 항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 올리자 작은 물체가 두세 점 떨어졌다. 금속활자였다.
조선 전기 금속활자 등이 발굴된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 수도문물연구원과 한울문화재연구원이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시사IN 이명익
서울시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종로2가 사거리의 북서쪽 블록. 양현모 조사팀장을 비롯해 수도문물연구원 발굴팀은 6월1일에도 여느 때처럼 작업에 열중했다. 절단된 채로 묻혀 있던 총통 8점이 나온 건 하루치 작업이 막바지에 이른 오후 무렵이었다. 총통은 조선시대에 사용하던 소형 화기다. 총구에 화약과 철환을 장전하고 손으로 불씨를 점화해 발사한다. 발굴 현장에 가벼운 긴장감이 감돌았다.
“앞서 사대문 안에서 총통이 발굴된 사례가 있었어요. 우리 현장에서도 총통이 나왔으니까 여기를 더 신경 써서 조사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양현모 팀장).” 유물이 출토되면 곧바로 수습하지 않는다. 왜 이곳에 유물이 놓여 있는지 알기 위해 ‘절개조사’를 한다. 인위적으로 땅을 파서 묻었다면 원래 있던 땅과 그 위를 덮은 땅의 색깔이 조금 다르다. 반면 불어난 물에 쓸려와 묻혔다면 이런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유물을 감싸고 있던 단면을 살펴본 결과, 이 총통들은 수백 년 전 누군가가 손수 묻어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총통 옆에서도 금속 소재 유물이 출토됐다. 둥그런 모양의 환(環)들이 나왔고, 그 아래에서 종의 파편들이 발견됐다. 범종을 쇠줄과 연결하는 고리를 용의 형태로 만든 용뉴도 있었다. “종은 (현장에서) 잘 안 나오거든요. 용뉴까지 확인되고 그동안 접하지 않은 유물이 나오니까 심상치 않다 싶었죠.” 둥그런 환은 세종 시대에 네 대만 제작했던 천문시계 ‘일성정시의(日星定時儀:낮에는 해를, 밤에는 별을 관측해서 시간을 정하는 시계)’로 확인되었다.
일부 면이 깨져 있는 항아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항아리를 들어 올리자 공깃돌 같은 작은 물체가 두세 점 떨어졌다. 금속활자였다. 항아리 아래쪽에 금속활자가 한가득 들어 있었다. 금속활자는 왕실에서 주로 제작하고 관리하기에 드물게 발견되는 유물이다. 양 팀장은 “시급성을 느꼈다”고 말했다. 서둘러 항아리를 수습해 수도문물연구원으로 옮기고 세척 작업을 했다. 1600여 개에 이르는 금속활자는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이었다. 조선시대 주조된 것 중 가장 이른 시기로 추정되는 한문 금속활자와 15세기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한글 금속활자가 포함돼 있었다.
고고학자들에게 서울은 ‘기회의 땅’이다. 콘크리트로 뒤덮인 서울 땅 아래에는 수백 년에 걸친 ‘시간의 층’이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다. 인사동 유적 발굴에 참여한 수도문물연구원 박미화 유물관리팀장은 이렇게 설명했다. “조선이 건국된 14세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서울에서는 끊임없이 (건물을) 부수고 짓고, 부수고 짓고 해왔어요. 그 흔적들이 땅 아래에 누적돼 있는 거죠.” 일반인들의 머릿속에 서울은 초현대화된 도시이지만 고고학자들에게는 부여나 경주에 비견할 만한 고도(古都)이며 유물의 보고(寶庫)다.
〈그림 1〉 조선 전기에 제작된 것으로 보이는 한글 금속활자.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되어 있다.ⓒ문화재청 제공
〈그림 2〉 세종 시대 네 대가 제작된 천문시계 ‘일성정시의’ⓒ문화재청 제공
〈그림 3〉 세종 혹은 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부품)
ⓒ문화재청 제공
〈그림 4〉 조선시대에 사용된 소형 화기 총통
ⓒ문화재청 제공
〈그림 5〉 범종을 쇠줄과 연결하는 용뉴(왼쪽)와 동종ⓒ문화재청 제공
6가지 이상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금속활자
조선시대 중심지였던 사대문 안은 ‘문화층(유물이 있어 시대를 알 수 있는 지층)’이 두껍다. 2000년대 종로 일대에 고층 빌딩이 들어서면서 문화재 보존 문제가 이슈로 떠올랐다. 공사를 위해 땅을 파면 문화재가 우수수 쓸려 나왔다. 서울시는 ‘사대문 안 문화유적 종합보존 추진방안(사대문 보존방안)’을 마련하고 2011년 지표조사에 착수했다. 지표조사란 〈조선왕조실록〉 〈동국여지비고〉(조선시대 인문지리서) 등 사료를 토대로 문화재가 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은 지역(유존 구역)을 파악하는 조사다.
사대문 보존방안에 따라 문화재 유존 구역을 개발하기 전에는 의무적으로 테스트 조사를 거치게 되어 있다. 전체 개발 구역의 2~10%가량 되는 면적의 땅을 파서 출토되는 유물과 가치를 평가해 전면적인 발굴에 들어갈지를 결정한다. 수도문물연구원 같은 민간 고고학 발굴기관들이 발주처와 계약을 맺고, 문화재청의 관리·감독을 받으며 이러한 조사와 발굴 작업을 시행한다.
종로구 인사동 79번지 발굴은 지난해 3월 시작됐다. 종로2가를 대표하는 귀금속 상점들 뒤로 허름한 맛집과 좁은 골목길로 유명한 피맛골이 조성돼 있던 이 지역은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로 지정돼 2019년 개발계획 승인을 받았다. 이곳에는 지하 8층, 지상 17층 규모의 건물이 세워질 예정이다. 재개발에 앞서 시굴조사(테스트 조사)가 진행됐고, 조선 전기부터 근대까지 문화층 6개가 확인됐다. 전체 부지에 대한 정밀 발굴조사가 결정됐다.
수도문물연구원 발굴팀은 20세기 전반 문화층부터 발굴을 시작해 19세기, 18세기 층으로 시간을 거슬러 내려갔다. 금속활자를 비롯해 6월1일 발굴된 유물은 지표면 3m 아래 16세기 층에서 발견됐다. 16~17세기 문화층에서는 고고학적 가치가 높고 진귀한 물품이 많이 출토된다. 당시 건물의 터도 비교적 보존이 잘되어 있다. 고고학자들은 16세기 말에서 17세기 초에 있었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전쟁 때 피난을 떠나며 백자, 항아리, 대형 화로, 제기, 총통 등 집안의 귀한 물건들을 묻어놓은 뒤 되찾지 못한 것이다. 또 당시 전쟁으로 도성이 황폐해지면서 개별 가옥을 재건축하는 수준을 넘어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졌는데, 그러면서 묻힌 집터들이 땅 밑에 고스란히 보존된 것으로 고고학자들은 추정한다.
6월28일 문화재청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인사동 79번지 유물’을 공개했다. 조선 전기에 제작된 금속활자 1600여 점, 천문시계 ‘일성정시의’, 세종 혹은 중종 때 제작된 자동 물시계의 주전(부품), 16세기 말에 만들어진 총통 8점, 동종 1점 등이다(〈그림 1~5〉 참조).
‘일성정시의’는 세종 시대에 개발된 독창적인 천문시계다. 낮에는 해시계 구실을 하고, 밤에는 해를 이용하지 못하는 단점을 보완하고자 별자리를 통해 시간을 관측하는 형태로 만들어졌다. 세종대왕은 “옛 문헌에는 별로써 시각을 정한다는 말이 있는데 어떻게 측정하는지에 대한 방법은 나와 있지 않다”라며 밤과 낮으로 시각을 알 수 있는 기구를 만들라 명했고, 〈세종실록〉에는 1437년 일성정시의 4개를 제작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동안 기록으로만 전해질 뿐 실물은 확인되지 않았다.
둥그런 환들이 잘려진 상태로 발견됐을 때 처음부터 일성정시의라는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다. 시계와 관련된 유물이 아닐까 추측한 수도문물연구원 발굴팀은 국내 혼천의 권위자에게 조언을 구했고, 일성정시의로 보인다는 잠정 결론이 내려졌다. 이를 토대로 문헌을 찾아보니 그 형태가 일치했다. 박미화 팀장은 “일성정시의는 환이 세 개로 되어 있고 바깥 환과 안쪽 환에만 손잡이 형태의 고리가 있다고 나와요. 실제로 바깥쪽과 안쪽에 손잡이가 있다는 걸 확인했을 때 너무 놀랍더라고요. 이게 발굴의 기쁨입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수백 년 만에 모습을 드러낸 유물의 정체를 밝히고 가치를 증명하는 데에는 또 다른 수고가 뒤따른다.
인사동 79번지에서 발굴된 항아리 속에는 6가지 이상으로 추정되는 다양한 종류의 금속활자가 담겨 있었는데 가장 주목받는 것은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표기가 반영된 한글 금속활자다. 1446년 새로운 문자를 반포한 세종은 신숙주·박팽년 등에게 한자음을 통일해 표준음을 정하는 책을 편찬하라고 명한다. 1448년 ‘우리나라의 바른 음’이라는 뜻의 〈동국정운(東國正韻)〉이 간행된다. 〈동국정운〉에는 한국어로 표현하기 어려운 중국어 음가를 표기하기 위해 ㅭ, ㆆ, ㅸ 등의 문자가 사용됐다. 이런 동국정운식 표기법은 15세기 이후 사라졌고 인쇄본만이 계승되었는데, 이번에 출토된 금속활자에서 이 문자들이 쓰인 금속활자가 처음으로 나온 것이다.
‘갑인자’로 보이는 한문 금속활자가 확인된 것도 큰 성과로 꼽힌다. 갑인자는 1434년 제작된 금속활자로, ‘갑인자에 이르러 기존 계미자(1403년 주조된 금속활자)의 단점을 보완해 활자가 수평을 이루고 네 모서리를 평평하게 만들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세종대왕 시대에 장영실을 비롯해 물시계·해시계를 발명했던 과학자들이 갑인자 제작에 참여하면서 더 정교하고 반듯하게 활자를 주조하는 기술혁신이 이루어졌다. 서체가 유려하고 깔끔해 문외한이 봐도 갑인자로 찍힌 인쇄물의 차이를 알 수 있다. 이 때문에 일부 전문가들은 갑인자를 ‘금속활자의 꽃’이라고 일컫는다.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오는 조선시대 금속활자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세조 시대에 제작된 ‘을해자(1455년)’였다.
박미화 팀장은 이 금속활자들의 고고학적 가치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구텐베르크(1440년경)에 앞서 고려시대에 금속활자를 개발한 건 유명하잖아요. 그 이후 조선은 활자의 나라라고 할 정도로 굉장히 많은 활자를 제작하고 인쇄했어요. 그런데 실물이 남아 있는 활자가 별로 없습니다. 지금 남아 있는 건 조선 후기에 치중돼 있고, 고려시대는 물론 조선 전기의 것도 거의 없어요. 그래서 정확한 실체를 알고 연구하기가 어려웠는데 이번에 1600여 점이 한꺼번에 발굴됐으니 아주 의미 있는 발견이죠.”
‘인사동 79번지 유물’은 주로 왕실에서 관리하던 것으로 일반인이 취급하기는 어려운 물품들이다. 또 하나, 모두 구리 소재라는 공통점이 있다. 조선시대에 구리는 가치가 높고 애용된 재료였다. 왕실에서는 구리 매매 가격을 통제하고 종종 매매를 금지하기도 했다. 완성된 기물이라도 다시 녹여서 재사용할 수 있었다. 금속활자 역시 활자가 문드러지면 다시 녹여 새로운 활자를 제조했다. 오래된 활자들이 희소한 이유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누가, 어떤 경로로 이 물건들을 입수해, 무슨 이유로 한곳에 묻었는지에 관심이 쏠린다.
수도문물연구원 박미화 유물관리팀장 (왼쪽)과 양현모 조사팀장.ⓒ시사IN 이명익
이곳에 묻어둔 이는 누구였을까
묻힌 곳은 불을 땐 흔적이나 온돌 같은 난방장치가 확인되지 않아 창고로 추정된다. 민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관청 터라거나 그 부속기관이 있었다는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 조선시대 당시에도 이곳은 서울의 중심부였다. 남쪽에는 왕실의 허가를 받아 장사를 하는 시전 행랑이 있어 사람들로 북적였고, 왕실의 친족이 사는 순화궁, 의금부 같은 관청과도 가까웠다. 실록을 찾아보면 과거를 준비하러 온 선비들이 머물렀다는 기록도 있다. 평민·상인·양반이 섞여 살며 활기를 띠던 종로의 모습이 떠오른다. 수백 년 전 어느 날, 이곳에 “작은 물건은 잃어버릴까 봐 도기에 담고 크고 무거운 물건은 담기 어려우니 옆에 쌓아서(박미영 팀장)” 묻어둔 이는 누구였을까.
수도문물연구원 내에서도 다양한 추론이 오간다. 활자와 시계, 총통 등 소재는 구리로 동일하지만 같은 기관에서 사용되는 기물은 아니다. 오래 썼거나 닳았거나 어떤 이유로든 사용 연한이 지난 이 물품들을 재사용하기 위해 한데 모았다가 이렇게 발굴된 게 아닐까 하는 ‘재활용’설이 있다. 그러나 일성정시의가 단 네 대 만들어졌는데 그걸 과연 재활용하려 했을까 하는 의문도 나온다. 명나라에서 조선이 중국을 따르지 않고 독자적으로 하늘을 해석해 달력과 시계를 개발하는 것을 싫어했으니 여기에 숨겨놓은 것 아니냐는 데에까지 상상이 미치기도 한다. 문헌조사가 진행되고 있지만 유물들의 정체를 밝히는 조사보다 좀 더 어려워 보인다.
서울 공평구역 제15·16지구 도시환경정비사업 부지에서 드러난 16세기 문화층은 고고학적 가치를 인정받아 ‘이전 보존’이 결정됐다. 이번에 인사동 79번지에서 발굴된 유물들은 국립고궁박물관이 소장하지만 이 문화층에서 발견되는 건물 터를 비롯해 여러 문화재는 잠시 옮겨두었다가 빌딩이 완공되면 지하에 유적관을 조성해 원래 형태로 보존한다. 인근에 있는 공평도시유적전시관(센트로폴리스 빌딩에 위치)이 택한 방식이다.
국보급·보물급으로 평가받는 유물을 무더기로 발굴한 소회는 어떨까? 양현모 조사팀장은 다소 의외의 답변을 했다. “계속 이슈가 되는 건 유물과 그게 나온 현장이죠. 저 같은 사람(고고학자)들도 잠깐씩 조명을 받고요. 그런데 실질적으로 일하시는 분들은 어르신들이세요(발굴 현장에서 땅을 파는 작업자 중에는 60~70대가 적지 않다). 10~20년씩 되는 경력자들이고 사명감도 크세요. 이분들이 조사를 잘 해주셔야 이번 같은 유물을 찾게 될 가능성이 높아져요. 그분들의 노고를 기억해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