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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6년 다해 5월22일 주일 [(백) 삼위일체 대축일]
[수도회] 형제애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제1독서 잠언 8,22-31
○ 제2독서 로마 5,1-5
† 복음 요한 16,12-15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삼위일체는 인간의 지혜로 다 알아듣기
힘든 신비입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아드님과 성령과 함께 한
하느님이시며 한 주님이시나, 한 위격이 아니라 한 본체로 삼위일체
하느님이심을 우리는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완전한
일치와 지극한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하나 되어 사랑하며 살아가기로
다짐합시다.
◈ 오늘의 묵상
“그날, 너희는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또 너희가 내 안에 있으며 내가 너희
안에 있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요한 14,20).
삼위일체 하느님의 신비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그것을 벗어나는 자는
아무도 하느님을 모시고 있지 않습니다. 이 가르침 안에 머물러 있는 이라야
아버지도 아드님도 모십니다”(2요한 1,9).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 삶으로 드러납니다. 우리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하루에 몇 번이나 십자 성호를 긋습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는 우리는 이미 삼위일체 안에 머물며 기도합니다.
성령께서는 우리 안에 머무시며 하느님 아버지와 아드님의 현존을 깨닫게
하십니다. 삼위일체 하느님께서 천지창조 이전에 누리고 계신 사랑의 일치를
알려 주십니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1요한 4,16)은 삼위일체의 내적 친교
안에서 아낌없이 서로를 내어 주고 계십니다. 세 위격은 ‘가장 완전한 친교와
상호 증여’를 이룹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한다면
(요한 15,12 참조), 우리는 삼위일체 하느님을 우리 ‘삶의 자리’에 현존하시게
합니다. 삼위일체 신비는 우리가 이해하고 설명하는 진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그 신비 안에 살고 숨 쉬는 진리입니다. 십자 성호를 그으며
하루에도 수없이 삼위일체를 고백하면, 삼위이신 하느님과 하나가 되는
수련을 하면, 우리 영혼 안에 체득되는 ‘사랑의 신비’입니다.
- 매일 미사 -
◈ [인천] 분리가 아닌 하나를 이루면서
2016년 다해 5월22일 삼위일체 대축일
제1독서
<세상이 시작되기 전에 지혜는 태어났다.>
○ 잠언의 말씀입니다. 8,22-31
제2독서
"우리는 성령께서 부어 주시는 사랑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갑니다."
○ 사도 바오로의 로마서 말씀입니다. 5,1-5
복음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6,12-15
갑곶성지에서는 매주 토요일마다 특강을 합니다. 특강을 통해 영적 성장을
얻으시길, 또한 주님 안에서의 위로와 힘을 얻으시길 바라는 마음에서
지난달부터 시작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이 강화까지 특강을 들으러
사람들이 오실까 라는 걱정이 컸습니다. 그래서 직원들에게 특강 듣는 분이
없으면 우리라도 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말도 했었지요. 하지만 그런 걱정을
왜 했는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특강을 들으러 오시는 분들이 이제는
많으십니다.
아무튼 토요특강이 점차 안정화되는 것 같아서 무척 기쁩니다. 그런데 이
특강에 큰 도움을 주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특강 전후에 하는
찬양팀입니다. 어제는 특별히 인천의 주안1동 성당의 밴드팀이 와서 찬양을
도와주었지요. 어제 이 밴드팀을 보면서 옛날의 추억들이 떠올려졌습니다.
제가 2000년에 보좌신부로 있었던 곳이 바로 인천 주안1동 성당이었습니다.
당시의 학생들이었던 이 친구들이 성인이 되어서도 지금까지 계속해서
밴드팀을 꾸려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저의 부탁에 흔쾌히 허락해주고
토요특강을 위한 찬양을 도와주었습니다.
과거의 만남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다시금 깨닫게 해줍니다. 당시에는 그냥
철없는 아이로만 보였던 학생들이 지금은 먹고 살기에 바쁜 삶 가운데에서도
저를 위해 먼 강화까지 찾아서 봉사해준 것입니다. 그런데 이 청년들뿐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가졌던 인연으로 인해서 갑곶성지를 찾아주시고 또
도움을 주시는 은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저의 힘이 아니라 많은
은인들이 함께 해주셔서 갑곶성지가 성장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사람은 혼자서 살 수 없습니다. 내가 아닌 그 누군가와 계속해서 인연을
맺으면서 살아가는 존재인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의 만남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로 내 자신이 먼저가 아니라 상대방이 먼저가
되어야 합니다. 만약 자기만 잘났다면서 남을 판단하고 단죄한다면
어떨까요? 나의 변화보다는 남의 변화만을 주중한다면 어떨까요? 결코
일치할 수 없으며, 따라서 좋은 관계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맞이하는 삼위일체 대축일은 성부, 성자, 성령께서 완전한 일치를
이루고, 그 사랑의 친교 안에 우리를 초대하고 계심을 경축하는 날입니다.
이 친교 안에 들어가려면 우리 역시 성부, 성자, 성령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닮아야 가능합니다. 즉, 하나를 이루어 활동하시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모습을 따라, 우리 역시 분리가 아닌 하나를 이루면서 서로에게 힘을
북돋워주면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대축일을 맞이하면서 우리들은 어떤 일치 속에서 살아야 할지를
묵상했으면 합니다. 하느님과의 일치, 가족과의 일치, 이웃과의 일치. 그
밖의 많은 일치들을 과연 이루고 있을까요? 그리고 그 일치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요?
단 한 명의 칭찬이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S.존슨).
어제 특강 때에 사용되었던 이콘.
어머니, 오래 사세요? 사네요?
며느리가 시어머니에게 휴대전화를 사드렸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문자를
보냈는데, 글쎄 글자 하나를 잘못 입력해서 보낸 것입니다. 즉, ‘어머니,
오래오래 사세요!’라고 쓰려고 했는데, ‘어머니, 오래오래 사네요!’라고
입력되어 보내진 것이지요.
어머니 기쁘게 해드리고 싶어서 보낸 문자가 한 글자 때문에 최악의 문자가
되었습니다. 그 한 글자가 의미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았기 때문이지요.
많은 만남 안에서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비결은 작은 하나도 소홀히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는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이런 말씀을 하시곤 합니다. “이제까지 내가 얼마나 잘했는데, 겨우 그거
하나 잘못했다고 내게 이럴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작은 실수가 결정적일 수 있습니다.
어제 특강 때에 사용되었던 이콘.
- 인천교구 갑곶 성지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수도회] 형제애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 기 프란치스코 신부
2016년 다해 5월22일 삼위일체 대축일 요한 16,12-15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요한16,15)
형제애의 원천이신 삼위일체
성부, 성자, 성령께서 삼위이시면서 일체라는 신비는 우리의 삶과 동떨어져
신비로만 머무는 것이 아닙니다. 태초부터 하느님께서는 창조된 세계
속으로 당신 말씀을 불어넣으셨고, 그 말씀 속에는 당신 영의 능력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시대의 마지막까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능력 속에서
복음이 선포되고 세례가 주어질 것입니다.
초월적인 본성을 지니신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향하여 “내려오시어”
함께하시고, 당신 자신을 열어 보이시며 나누어주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불가사의한 신비는 이론으로서의 삼위일체 신비가 아니라 지칠 줄
모르고, 비할 데 없는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관심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각자를 사랑하시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포기하시기는커녕 우리를 위하여 당신 아들을 제물로서, 선물로서 우리에게
내어주셨지요. 삼위일체의 신비는 하느님 사랑의 신비의 절정을 보여줍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당신의 사랑을 믿게 하시고자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맡기셨습니다.
하느님의 내적인 관심이 바로 성령이십니다. 성령을 통하여 아들은 아버지
안에, 아버지는 아들 안에 계십니다. 또 하느님께서는 세상 끝날까지 우리와
함께 계시고, 보호자 성령을 통하여 세상을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십니다.
성령 안에서 일치를 이루어 사랑하며 기쁘게 사는 것이 우리의 소명입니다.
참된 기쁨은 하느님의 자비로 모두가 서로 존경하고 위해주는 형제애를
실천하는 가운데서 우러나올 것입니다. 형제애의 기쁨은 성삼위가 누리는
기쁨이고 인류가 되찾아야 할 기쁨입니다.따라서 우리는 어떤 처지에서든
사랑의 친교의 결정체인 삼위일체의 친교와 사랑 안에서 한 형제임을
드러내야 할 것입니다. 또한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우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요한 16,13).
삼위일체의 신비를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먼저 우리는 성부의 모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답게 자신과 주위에 무엇인가를 창조하는 생기를 일으키고
심어주어야 합니다. 이를 위하여 어느 누구의 눈치나 분위기나 체면에
좌우되지 않는 과감한 결단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과
형제자매들을 위하여 ‘창조하는 일’을 해나감으로써 이웃에게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를 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자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답게, 성부의 뜻을 이 땅에 심은
아들을 따라 목숨을 내놓는 십자가의 길, 사랑의 길을 걸어가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사랑의 능력을 이 세상에 드러내야 할 예언자적
소명이 있습니다. 따라서 겉 다르고 속 다른 삶을 청산하고 진리, 정의,
사랑을 가슴으로 살아야 합니다. 이해타산적인 삶과 위선적인 영웅주의를
버려야 합니다.
끝으로 올바로 그리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고 사랑 안에서 일치할 수
있도록 주님의 영을 호흡하고 그 영이 이끄시는 거룩한 관계를 맺도록
힘써야 할 것입니다. 분쟁, 분열, 다툼의 벽을 근원적으로 헐 수 있는 영을
지니고 걸어감으로써 하느님의 능력이 넘치는 세상이 되도록 해야겠지요.
하느님의 영(靈)이 곧 세상과 인간을 살리는 원동력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도 내 가슴에 사랑을 새길 새 돌판을 마련하고, 삼위일체의 사랑의
신비를 몸으로 살아내는 사랑의 달인이 되도록 마음을 모았으면 합니다.
-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작은형제회(프란치스코회) -
◈ [수도회] 알타반의 말씀사랑
2016년 다해 5월22일 삼위일체 대축일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요한 16,12)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우리 인간을 당신의 모상에 따라 만드시고
우리를 위해 세상을 창조하신 성부 하느님과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가난한 모습으로 이 세상에 오시고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의 수난을 감수인내 하신 성자 예수님과
우매한 우리를 진리 안에서 살아갈 수 있게 우리를 늘 이끌어주시고
은사들을 베풀어 주시는 성령 하느님을 통해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를 묵상하는 오늘입니다.
사랑은 절제이고 배려입니다.
성부 하느님은 당신이 직접 모든 것을
하지 않으시고 창조주로서의 당신의 역할을
다 하신 후 나머지를 성자 예수님께 맡깁니다.
성자 예수님도 당신이 모든 것을 다 제자들에게 가르쳐주시지 않으시고
진리의 성령께서 더 밝히 이끌어 주시도록 절제하며 내 맡기십니다.
마치 400미터 계주에서 바통터치를 하듯이 자신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고
다음 주자에게 잘 넘겨주며 뒤에서 묵묵히 바라보고 있는
그런 그림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사랑은 다른 사람의 영광을 드러냅니다.
성자 예수님은 당신의 소명을 다 함으로써
당신을 파견하신 성부의 영광을 드러내시고
성령께서는 당신을 파견하신 성자 예수님의 영광을 드러내십니다.
그리고 성부 하느님도 성령 안에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광스럽게 하십니다.
예. 삼위일체의 신비는 서로를 위한 절제와 배려,
나보다는 다른 이가 더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농익은 맛갈진 술같은 사랑입니다.
우리도 이 사랑의 신비에 참여하도록 불림받았습니다.
오늘 남을 더 배려하고 그를 위해 절제하고
그를 더 칭찬하고 돋보이게 함으로써
우리도 이 하느님의 사랑의 신비에 한번 푹 빠져보면 어떨까요?
사랑이신 하느님께서 여러분을 축복하시어
참 사랑이 무엇인지를 더 잘 깨우쳐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 작은 형제회 오상선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요한 16, 15) 한상우 바오로 신부 |오늘의 강론 묵상
2016년 다해 5월22일 주일 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요한 16, 15)
누구나 예외 없이 소통을 원합니다.
관계의 본질이 소통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은 서로를 진심으로 돌보는 사랑에서 비롯됩니다.
하느님의 고유한 존재방식은 언제나 소통과 친교
자유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소통은 생명의 연대를 드러냅니다.
친교는 생명의 새로움으로 초대합니다.
자유는 생명의 참된 맛을 맛보게합니다.
소통은 생명의 존재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소통의 신비입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의 내면을 만나게 하는 신비입니다.
그 어떤 것도 규정하지 않고 다양한 모든 것을
사랑으로 만나게하기때문입니다.
우리 존재의 근원이 삼위일체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모두는 삼위일체 하느님의 자녀들입니다.
사람들은 갈라놓으려 애쓰지만 하느님께서는 자연스레 일치로 이끄십니다.
존재의 본질은 소통을 통한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삼위일체 신비를 통해 삶의 가치를 하느님안에서 새롭게 재확인하는
은총의 주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삶의 가치는 소통과 조화를 통해 함께 공유하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줄기와 땅 뿌리로 소통되는 나무또한 삼위일체의
신비를 우리에게 드러내고 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분명 하느님 생명의 신비임을 믿습니다.
-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 -
◈ [수도회] 한 마리 나비 같으신 하느님
2016년 다해 5월22일 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요한 16,12-15
한 마리 나비 같으신 하느님
요즘 들어 자주 드는 생각입니다. ‘하느님은 참 묘하셔라!’ 때로 하느님은
한 마리 어여쁜 나비 같으십니다. 어린 시절 나비를 잡으려고 살금살금
다가가 거의 손에 넣었다 하는 순간 홀연히 날아가 버리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오랜 기도와 노력 끝에 겨우 하느님 존재에 대해 포착했다고
느껴지는 순간 하느님은 한 발자국 더 멀리 물러나십니다. 참으로 복잡한
하느님, 알쏭달쏭한 하느님, 안개 속 신기루 같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하느님께서 그렇게 어느 정도 불가해한 존재로,
안개 자욱한 강 건너 피안의 언덕에 자리하고 계시는 것이 오히려 괜찮은
것 같습니다. 만일 하느님이란 존재에 대한 인간 측의 ‘신상털기’가 완료되어
그분의 속성과 본질이 만천하에 낱낱이 드러난다면, 결국 하느님께서
인간으로부터 완전 정복된다면 인간 측의 오만과 안하무인은 점점 더
하늘을 찌를 것입니다.
그래서 차라리 하느님께서 어느 정도 알쏭달쏭 신비스런 존재로서 베일에
감춰져 계시는 것도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만일 하느님 존재가 인간의
이성으로 완벽하고 명료하게 포착된다면, 더 이상 신앙의 대상으로 남아계실
수도 없을 것입니다.
저희 사제들에게 언제나 부담스럽고 껄끄러운 삼위일체대축일이
돌아왔습니다. 매년 어떻게 하면 신자들에게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설득력
있게 설명할까 고민하다가 어떤 때는 얼토당토않은 ‘이단’으로 빠진 적도
종종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전통적인 교회의 가르침에 따르면 이렇습니다.
“모든 구원 역사는 성부로부터 유래하고, 성자에 의해서 실현되며, 성령에
의해서 충만히 성취됩니다. 성자와 성령은 성부이신 ‘하느님의 두
손’입니다.”(이레네우스 교부)
“성부께서는 ‘낳으시는 분’이시고, 성자께서는 ‘나시는 분’이시며, 성령께서는
‘발(發)하시는 분’이십니다.”(아우구스티누스 교부)
하느님 아버지(聖父)께서는 당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聖子)를 이 세상에
보내주셨는데, 그 아들은 성부께 도달하는 길이자 성부께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그 아들에 이어 더욱 완벽하게 우리를 사랑하시기 위한 협조자
(聖靈)를 우리 가운데 머무르게 하셨습니다. 성령은 하느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보내시는 최고 선물입니다. 그런데 이 성삼위는 완벽하게 하나로
일치되고 통합되어 상호 긴밀하게 협조하는 한 하느님이십니다.
이렇게 성삼위께서는 만물을 창조하신 전능하신 성부와 보이지 않는
하느님께서 구체화된 자비와 연민의 성자와 감미로움과 은은함과 섬세함의
근원이신 성령께서 온전히 한 몸이 돼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삼위로 존재하시는 이유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성삼위께서는
상호 온전히 하나로 결속되어 완벽한 일치가 무엇인지 우리에게 보여주고
계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언제 어디서나 항상 소통하시고 상호 증여하시며
한 마음 한 몸이 어떤 것인지를 모델로 제시하고 계십니다. 언제나 자기
본위의 자세를 탈피해서 서로 낮추시고 서로 순명하시며 사랑하십니다.
성삼위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통합된 사랑이 무엇인지를
드러내고 계십니다.
오늘 우리의 발밑을 한번 내려다봅니다. 이리 갈라지고 저리 찢겨지고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더 자주 바라볼 순간입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오늘 우리 사이, 우리 공동체 사이, 국가와 민족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 높은 장벽을 당장 허물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께서는 ‘나와 너무 다른’ 너를 너그럽고 관대한
마음으로 받아들일 것을 기대하고 계십니다.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삼위일체 대축일
2016년 다해 5월22일 삼위일체 대축일
"아버지께서 가지고 계신 것은 모두 나의 것이다. 성령께서 나에게서 받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요한 16,12-15
때 이른 더위에 에어컨을 키려했습니다. 그런데 리모컨이 고장 났는지
작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에어컨은 시원한 공기를 내보내는 기계가 있어야
합니다. 시원한 공기를 내 보낼 수 있는 전원이 연결되어야 합니다. 에어컨의
전원을 작동시키는 리모컨이 있어야 합니다. 이 셋 중에 하나만 작동이 되지
않아도 시원한 바람을 느낄 수 없습니다. 리모컨을 새로 교체하면 올해도
시원한 바람으로 더위를 이겨낼 것입니다.
수학시간에 방정식을 배웠습니다. 방정식은 정답이 하나일 수도 있고, 둘일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고, 무수히 많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수학을 잘
못하기 때문에 방정식 문제를 만나면 머리가 아팠습니다. 3차 방정식을
풀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문제를 풀 수 있는 능력을 키우면 반드시
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대축일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삼위일체만이 아니라,
사위일체, 오위일체 이실 수도 있습니다. 방정식도 차수가 계속되듯이,
하느님의 모습도 무척이나 다양할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는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체험하였고,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을 신앙으로 고백하였습니다.
우리가 말을 배울 때 문법과 이론을 먼저 배우지 않고 체험과 반복을 통해서
배우듯이 삼위일체이신 하느님도 이론과 신학이 먼저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과 초대교회 공동체는 삼위이신 하느님에 대한 체험이 먼저
있었습니다. 그 체험이 교회 역사를 통해서 신학화 되고 교리가 된 것입니다.
자동차를 운전할 때 엔진의 구조를 몰라도, 모든 기능을 몰라도 운전에는
큰 지장이 없습니다. 운전은 이론과 법칙이기 전에 반복과 실습이기
때문입니다. 운전자는 자동차의 구조를 아는 것도 필요하지만 자동차를
아끼고 교통법규를 준수하는 안전운행이 더 중요합니다.
구약의 백성들은 한 분이신 '야훼' 하느님이 계시다는 것을 알고 믿었지만,
그 "한 분이신 하느님 안에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다."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셔서 “나를 보았으면 곧 아버지를 본
것이다.”(요한14,9)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신다.”
(요한14,10)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요한10,30)고 하셨습니다. 또한
성령의 역할에 대해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너희를 이끌어 진리를 온전히
깨닫게 하여 주실 것이다.”(요한16,13) 하셨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어라.”(마태 28,19)고 하십니다.
이렇게 예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에 대해서 거듭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삼위일체교리는 예수님의 공생활을 통해 계시된 하느님의 신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삼위일체 교리는 우리가 주님께로부터 받은 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교리는“하느님은 어떤 분이신가?”하는 질문에 대한
해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의 역사 안에서 드러난 삼위의 역할을 통해 본다면, 세상을 창조하신
일은 성부께서 이루셨고, 죄로 인해 하느님과 멀어진 인간을, 자신을 완전히
내 놓는 십자가의 사랑으로 인간을 구원하신 일은 성자께서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인간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따라 살아가도록 우리에게 깨달음과
능력을 주시며 성화의 길을 가도록 해 주시는 분은 성령이십니다. 이는 마치
촛불이 정전(停電)이 되었을 때는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역할을 하고, 어떤
것을 태우거나 녹일 때는 '열(熱)'로서 역할을 하고, 어떤 장식을 할 때는
갖가지 '색(色)초'로 예쁜 모습을 드러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촛불은
항상 빛과 열과 색을 같이 지니고 있듯이 세상 창조와 구속사업과 성화에
항상 성부 성자 성령은 함께 계십니다.
초대교회의 신자들이 체험한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은 ‘친교, 나눔, 사랑’의
하느님이셨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권한을 예수님께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그 모든 권한을 하느님의 뜻을 따라 사용하셨습니다. 성령은 이제 예수님이
세우신 교회를 따뜻하게 감싸 주시고, 용기와 힘을 주셨습니다. 그러기에
초대교회는 ‘성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었고, 삼위이신
하느님은 교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가정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는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입니다. 아빠의 권위는 가족들의 건강과 행복을 위하여 행사되어야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가족들을 위한 배려와 희생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아빠의 보살핌과 엄마의 사랑을 받은 자녀들은 가정의 미래가 될 것입니다.
본당 공동체에도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친교, 나눔, 사랑이 드러나야
합니다. 불화와 대립을 극복하고 화해와 일치의 삶을 사는 것, 사랑으로
하나가 되는 삼위일체의 신비를 누리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 이것이
신자생활의 이상입니다. 성호경을 할 때마다, 영광송을 바칠 때마다
삼위일체의 신비를 살도록 다짐하고 그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육(肉)은 감당 못하니 영(靈)만
2016년 다해 5월22일 삼위 일체 대축일
육(肉)은 감당 못하니 영(靈)만
영(靈)의 보기와 듣기문제를 공상하며 묵상을 대신 하다가 놀랍니다.
눈도 귀도 밝기나 진동없이 순간 파악되는 참사랑 억만 배 데이터들.
육은 참사랑의 막강한 열기에 순간에 타버리고 영만 남겠다는 생각.
어휴! 하느님은 우리에게 넘 넘 넘 넘 막강한 능력의 영혼을 주셨군.
활쏘기처럼 인생조준 잘 해야지요. 영혼센서 업그레이드 하면서요.
그래야 하느님 앞에 날러가 직접 뵐 때 와~! 하며 포옹인사 해야죠.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요한 16,12~13)”
고등동물인 인간을 하등동물인 돈벌레로 취급하여 퇴화되는 세상 아닌가.
예수님의 복음 듣기 거북해 하고 부정 거부 무심으로 인간이길 거부해요.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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