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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수요일. - 여태 사랑.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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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여태 사랑
오늘 이사야서는 버림받았다고 생각하는 시온에게
하느님께서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시는 장면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주었다.”라고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니 시온은
“주님께서 나를 버리셨다. 나의 주님께서 나를 잊으셨다.”라고 대답하고,
그러자 하느님께서는 다시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런 엇박자가 어디 있습니까?
하느님은 사랑하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고 하고,
하느님은 은혜의 때에 은혜를 베푸시고 구원의 날에 도와주셨다고 하는데
인간은 그 은혜를 받은 적이 없고 그 도움을 받은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시온만 이런 것이 아니고 사실 많은 경우 우리 인간은 이렇습니다.
고통이 극심할 때 하느님께서 주신 사랑이, 사랑이 아니라 고통일 뿐이고,
고통을 통하여 구원하시는 그 은혜를 그때는 느끼지 못하여 버림받았다고
하다가 나중에 가서야 은혜로 느끼곤 합니다.
사랑과 고통의 불일치요 때의 불일치인 겁니다.
그런데 오늘 주님은 이런 우리 인간의 불일치와 달리
아버지 하느님과 당신 사이의 일치를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어떻게 이렇게 하실 수 있습니까?
이에 대해 주님 친히 이렇게 정답을 말씀해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그러니까 주님의 관상적 믿음이고, 믿음의 관상 때문입니다.
먼저 아버지 하느님께 대한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은 사랑이시라는 근본적인 믿음이 있습니다.
다음으로 이런 믿음 때문에
눈에 보이는 것들에 현혹되지 않는 관상이 있습니다.
아버지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은 다 사랑이라는 믿음이 있고,
그래서 아무리 고통스러운 일이 벌어져도 그것이 바로 은총임을 봅니다.
그리고 벌어진 일들과 그 일을 벌인 인간들을 볼 때
그것들에 의해 현혹되지 않는 하느님 관상을 하기에
그것들로 인해 실망이나 절망이나 포기를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그 생명의 일을 계속하십니다.
여태 사랑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사랑은 여태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중단되지 않는 사랑입니다.
여태 사랑은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내 뜻대로 되지 않았을 때 좌절감이나 절망감 때문에 중단치 않는 사랑입니다.
내 사랑을 배신하는 그 인간에 대한 실망감 때문에 포기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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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정신과 의사이자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빅터 프랭클 박사는 늦은 밤에 마음의 병으로 고통받는 여성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이 여자는 이제 곧 자살할 것이라면서 자기의 지금 어려움을 이야기했습니다. 프랭클 박사는 새벽까지 이 여성과 대화를 나눴고, 그녀가 삶을 새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 근거들을 하나하나 제시했습니다. 긴 설득 끝에 이 여성은 목숨을 끊지 않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중에 이 여인을 만난 빅터 프랭클 박사는 그가 제시한 여러 가지 근거 중에 어떤 것이 그녀의 결심을 번복하게 했는지 물었습니다. 그녀는 “그것 중에는 그 어떤 것도 제게 도움이 되지 않았어요.”라고 말했습니다. 대신 결심을 번복하고 다시 힘을 내게 한 것은 따로 있었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녀를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오랫동안 그녀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 주는 프랭클 박사의 자세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자세가 마음을 바꾸게 했고 자기 삶을 살 가치가 있음을 이해하게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변화시키는 것은 단순히 말로써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보다 있는 그대로를 받아주면서 나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주는 자세에서 힘을 얻게 되어 마음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결코 혼자가 아님을, 나의 말도 귀 기울여 주는 함께하는 누군가가 있음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와 늘 함께하는 주님의 존재를 느끼는 삶이 필요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말을 들어주시고, 당신의 따뜻함 품으로 안아 주십니다.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안식일을 어기실 뿐만 아니라, 하느님을 당신 아버지라고 했다는 이유였습니다. 주님께서 안식일을 어기셨던 것은 사랑 때문이었습니다. 안식일이라고 해서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을 멈춰야 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시지 않았던 것이지요. 그리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을 말씀하시면서 우리가 지금 사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하지만 유다인들은 죽이려는 이유만을 찾습니다. 율법의 핵심이 사랑임에도 사랑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보지 못하니, 하느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심지어 죽이려고 합니다.
주님을 알아보기 위해서는 우리 역시 주님의 사랑에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 사랑 자체를, 즉 있는 그대로 모습을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리 삶 안에서 늘 사랑으로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볼 수 있게 됩니다. 그 사랑을 알아보는 사람만이 큰 힘을 얻을 수 있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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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용기만 있다면 지금 이 순간부터 바로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알프레트 아들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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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오늘 <복음>은 어제 <복음>에 이어지는 장면입니다.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벳자타에 38년 동안 누워 있는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그런데 그 날은 안식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안식일에 그와 같은 일을 했다고 문제를 삼자,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일하는 것이 정당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이러한 이유로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당신 하신 일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더 중요한 사실을 말씀해 주십니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는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요한 5,19)
이는 당신께서 하느님의 아들로서, 아버지의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곧 그 하시는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 지상에서 하시는 당신의 일에, 아버지께서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하십니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요한 5,24)
아버지께서는 사랑으로 아들이 기뻐하는 자에게 생명을 주시고, 아들에게 재판권을 위임하시고,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사랑으로 일하십니다. 곧 사랑에 있어서, 아버지와 아들은 하나라는 사실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요한 5,26)이며, 아버지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이는 신적 생명이 사람의 행동에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행동에서 온다는 말씀입니다. 곧 신적 생명이 먼저 오고, 그 다음에 사람의 믿음이 온다는 사실을 밝히십니다. 하느님께서 먼저 사람 속에 생명을 넣으시기에, 사람이 믿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결국, 신적 생명은 믿음의 결과나 믿음의 보상으로가 아니라, 믿는 자가 이미 자기 속에 생명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믿게 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와 하나 되어 일하십니다. 곧 벳자타의 병자를 고치신 일도 아버지와 하나 되어 함께 하신 정당한 일임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아들의 일에 있어서 아버지와의 연합이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일하실 때 아버지와의 사랑의 연합에서 하셨듯이, 우리도 일할 때 그리스도와의 사랑의 연합으로 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나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요한 5,30)
주님!
제가 하는 일이 아버지의 뜻에 맞게 하소서.
무슨 일을 하든지 당신과 함께 일하게 하소서.
사랑의 연합으로 당신께서 행하신 바를 행하고 당신의 생명이 드러나게 하소서.
당신과 함께 하는 일이 아니라면 아무 것도 하지 않게 하시고
모든 일이 당신 뜻 안에 가두어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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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을 첫 자리에 모셔라
예수님의 관심사는 사람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사람을 살리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안에 충실히 머물렀고 그래서 사람에게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선언하시고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요한 6,38-40).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고, 그대로 따르는 사람은 결국 하느님을 만나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우리는 세례를 통하여 하느님의 자녀가 되었고, 따라서 일상을 살아가면서 해야 할 일은 하느님의 뜻을 찾는 것입니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나의 계획과 집착, 이기심과 낡은 생활 방식을 고쳐 하느님께서 기뻐하실 일을 계획하고 실천하여야 하겠습니다. 발에 꼭 맞는 신발이 편안하듯 우리가 주님의 뜻에 맞는 삶을 살아감으로써 매일이 편안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아버지와 하나 되었듯이 우리도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가운데 주님과 하나 되기를 희망합니다.
공자께서도 “일흔이 되었을 때 하고 싶은 마음을 쫓아 그대로 하되 법도를 어기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결국 당신의 뜻이 하늘의 뜻과 온전히 일치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까? 물론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마음껏 해도 부끄러움이 없는 일입니까? 인간적인 욕심이 들어가지 않았다면 주님께서 기뻐하실 것입니다.
아우구스띠노 성인은 “우선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하고 말하였습니다.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먼저 사랑하고 그분의 사랑으로 원하는 바를 마음껏 한다면 부끄러움이 있을 리 없습니다. 혹, 해서는 안 될 일을 한 것이 있고, 가지 말아야 할 길을 걸었다 해도 우리 마음을 둘 곳은 주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역경에 처해 있을 때 ‘하느님, 찬미 받으소서.’하고 한 번 기도드리는 것이 좋은 일을 당했을 때 수없이 감사의 기도를 드리는 것보다 더 값집니다.”
성 마더데레사 수녀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분의 생각에 우리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기도에 우리의 기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행위에 우리의 행위를 일치시키고, 그분의 생명에 우리의 생명을 일치시킵시다.” 주님과 하나 되는 기쁨과 행복이 넘쳐나길 기도드립니다. “당신이 저에게 바라시는 일이 무엇인지 알려 주십시오. 저는 저의 뜻을 버리고 당신의 뜻에 저의 뜻을 맞추겠습니다”(성 알퐁소).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가시나무 새 - 시인과 촌장- 하덕규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
당신이 쉴 곳 없네
내 속엔 헛된 바람들로
당신이 편할 곳 없네
내 속엔 내가 어쩔수 없는 어둠
당신에 쉴 자리를 뺏고
내 속엔 내가 이길 수 없는 슬픔
무성한 가시나무 숲 같네
바람만 불면 그 매마른 가지 서로
부대끼며 울어대고
쉴 곳을 찾아 지쳐 날아온
어린 새들도 가시에 찔려 날아가고
바람만 불면 외롭고 또 괴로워
슬픈 노래를 부르던 날이 많았는데
내 속엔 내가 너무도 많아서 당신은 쉴 곳 없네.
@ 내 안에 내가 너무 많으면,
이미 내 안에 계신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내 안에 계신 주님께 손을 내밀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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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1987년 겨울입니다. 저는 제대를 5달 앞둔 병장이었습니다. 일석점호를 앞둔 시간 내무반이 조금 소란스러웠습니다. 일직사관이 조용히 점호 준비하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낮에 일직사관과 장기를 두기도 했고, 평소에 친하게 지냈기에 웃으면서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습니다. 일직사관도 그렇게 하라고 하면서 우연히 손을 휘둘렀는데 그만 저의 뺨에 맞았고, 그때 저는 이가 깨지는 사고를 당했습니다. 의도 된 바도 아니고, 저도 조용히 마무리 하였습니다. 그리고 깨진 이에 크라운을 씌었습니다. 어느덧 37년이 지난 먼 옛날의 기억입니다. 댈러스에 오기 전부터 이에 불편이 있었는데 별 일 아닌 줄 알고 스케일링만 받고 댈러스로 왔습니다. 진통제를 먹어야 할 정도로 불편해서 치과엘 갔습니다. 검사결과 크라운을 씌운 이는 이제 수명을 다했다고 합니다. 신경치료로 해결 될 문제가 아니니 발치를 하면 좋겠다고 하였습니다. 맨 안쪽에 있는 어금니이기에 굳이 임플란트를 하지 않아도 된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동의하였고, 20분 정도 걸려서 발치를 끝냈습니다. ‘앓던 이 빠지는 기분’이라는 말을 실감했습니다. 발치하고 나니 통증도 없었습니다.
친절하신 의사 선생님은 제게 발치 후에 지켜야 할 사항을 설명해 주었습니다. 먼저 거즈를 발치된 부분을 넣어주고 이를 꼭 닫아 압력을 주라고 하였습니다. 압력이 있으면 쉽게 지혈이 된다고 합니다. 사람의 몸은 자연 치유력이 있어서 곧 새살이 돋고, 아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탄산음료를 마시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탄산가스가 발치 부분과 만나면 아무는데 지장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발치 후에는 빨대를 사용하지 말고, 침도 자주 뱉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지혈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음식도 죽이나 부드러운 것을 먹으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선생님의 말을 듣고 죽을 먹었습니다. 음주와 흡연을 일주일 정도 금하는 것이 좋다고 하였습니다. 다른 것들은 다 지킬 수 있었는데 음주는 조금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댈러스에 부임해서 1주일도 안 되었기에 단체들과의 첫 인사도 있었고, 자연스럽게 식사 자리가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가볍게 한두 잔 마시면서 첫 인사의 자리도 마칠 수 있었고, 댈러스에서의 발치는 그렇게 마무리 되었습니다.
인간의 몸과 마음은 모두 소중하고 가치가 있습니다. ‘心身不二’입니다. 현대인들은 마음이 없는 몸처럼 사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많은 갈등과 분쟁은 그릇된 욕망에서 시작합니다. 우리들의 몸은 하나의 개체를 이루지만 우리의 영혼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모두 하나로 연결될 수 있음을 모르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내 몸을 위해서 다른 이들의 몸을 아프게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합니다. 타인의 아픔과 고통은 어쩌면 인류라는 같은 영혼의 아픔과 고통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같은 마음’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모든 것을 덮어주고, 모든 것을 품어주는 사랑입니다. 나에게 잘 해주는 사람에게만 베푸는 사랑은 세상 사람들도 할 수 있습니다. 갚을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빌려주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마음은, 하느님의 마음은 세상 사람들의 마음과는 달랐습니다. 하느님의 마음, 예수님의 마음은 ‘사랑’의 마음입니다. 이 사랑이 생명을 살리고, 이 사랑이 희망을 주고, 이 사랑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합니다.
신앙인들은 하느님을 닮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삶을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주셨습니다. 어미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느님께서는 우리들을 잊지 않고 사랑하신다고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은 자비와 용서, 친절과 온화함입니다. 우리들 모두는 하느님의 모습을 우리의 삶 속에서 드러내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 사람이 되신 예수님께서는 따뜻한 바람이십니다. 막힌 것은 뚫어 주시고, 얼어붙은 것은 녹여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분은 온 몸을 바쳐서 우리들 구원을 위한 ‘숨구멍’이 되어 주셨기 때문입니다. 오늘 하루를 시작하면서 생각해 봅니다. “나는 내가 만나는 사람들, 내가 속한 공동체를 얼리는 존재인가! 아니면 질식해서 숨이 멎을 것 같은 공동체에 사랑과 기쁨을 주는 ‘숨구멍’과 같은 존재인가!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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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주님께서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아버지께서 하신 일은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아버지를 닮아 일하고 계신 주님의 일은 무엇일까요?
아버지와 주님의 일에 대해 수많은 수사를 넣을 수 있겠지만 하나로 표현하자면 ‘사람을 사랑하는 일’일 것이다.
아버지께서 처음 세상을 창조하심과 동시에 사람을 창조하셨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 또한 그 쓰임에 맞추어 창조하셨지만 유독 사람은 쓰임과 동시에 아버지 닮은 모습으로 창조하셨습니다. 그리고 사람에게 창조된 세상을 맡겨주셨습니다. 또한 들에 핀 꽃과 하늘을 나는 작은 새를 보살피는 것보다 더 사람을 사랑으로 보살피셨습니다.
주님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음서 곳곳은 주님의 사랑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치유하고 살리고 고치고 기쁨을 나누고 슬픔으로 나누는 모든 사랑의 순간들이 복음서의 주를 이룹니다.
아버지의 일도 사랑이고 주님의 일도 사랑입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바로 사랑입니다.
물론 그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은 각양각색입니다.
나눔으로 사랑할 수 있고, 봉사로 사랑할 수 있습니다. 또한 침묵과 기도로서 사랑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아버지로부터 주님 그리고 이제 우리 손에 담긴 이 일을 오늘도 충실히 실천하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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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
올해 들어 개인적으로 몇 가지 기쁜 소식이 있었습니다.
그중 하나는 동생이 승진했다는 소식이었습니다.
동생과 축하의 통화를 하던 중 물었습니다.
승진했는데 승진 선물로 필요한 것이 있을까?
동생은 필요한 것이 없다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며칠이 지난 후 동생에게 사진과 함께 문자가 왔습니다.
만약 승진 선물이 유효하다면 이거 선물해 주라
동생이 원한 선물은 적당한 가격의(오빠 지갑을 생각한) 만년필이었습니다. 만년필을 선물하며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왜 이름이 만년필일까? 일만 년을 쓸 수 있어서 만년필일까? 아니면 일만 년 남을 글을 쓰라고 해서 만년필일까?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 수 없지만 제 바람은 후자였습니다.
일만 년 남을 무언가를 기록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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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하닮의 여정”
-하느님 중심의 삶-
3월은 성 요셉 성월이자 은총과 회개의 사순시기입니다. 3월31일 부활 대축일까지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 중심의 삶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참 좋은 시간들입니다. 문득 어제 어느 노정치가에게 방송시 언뜻 들은 삼실(三實)이 잊혀지지 않습니다. 진실(眞實), 절실(切實), 성실(誠實)해야 한다는 것이며 이 세말마디는 그분의 지론이기도 합니다. 참으로 하느님 중심의 삶에 하느님을 닮아가는 삶을 살려는 사람이라면 삼실의 삶에 이어 삼감(三感)의 사람이 되어야 하나 삼망(三望)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감사(感謝), 감동(感動), 감탄(感歎)의 삼감(三感)이라면, 절망(絶望), 원망(怨望), 실망(失望)이 삼망(三望)입니다. 참 감사하고 신기한 것은 제가 여기 요셉 수도원에 만36년 동안 정주하면서 막막하고 답답했을 때는 있었어도 결코 삼망(三望)한 적은 한번도 없다는 것입니다. 아마 하느님 믿음 덕분이었을 것입니다.
하느님을 믿는 다면 삼망(三望)은 도저히 있을 수 없습니다. 막막하고 답답할 때 참 많이 바라봤던 수도원 배경의 하늘과 불암산이었습니다. 자주 되뇌었던 “불암산이 떠나면 떠났지 난 안 떠난다” 말마디였고, 이어 참 많이도 인용했던 “하늘과 산”이라는 제 자작 애송시입니다.
-“하늘 있어 산이 좋고
산 있어 하늘이 좋다
하늘은 산에 신비를 더하고
산은 하늘에 깊이를 더한다
이런 사이가 되고 싶다
이런 사랑을 하고 싶다”-1997.2
무려 27년전 시이지만 읽을 때마다 늘 새롭게 마음에 와닿습니다. 하늘이 평생 도반인 하느님을 상징한다면 산은 저를 상징합니다. 하늘과 산의 관계는 바로 하느님과 나와의 관계를 상징합니다. 과연 날로 신뢰와 사랑 깊어지는 하느님과의 관계인지 생각하게 됩니다.
“아, 여기가 천국입니다.”
아름다운 수도원 경관에 부러워하는 분들에게 드리는 말씀입니다.
“아닙니다. 환경이 좋아서 천국이 아니라, 관계가 좋아야 천국입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공동체 형제들과의 관계입니다.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불편하고 힘든 남남만도 못한 관계라면 거기가 연옥이요 지옥입니다. 그래서 하루하루 날마다 평생 바치는 공동전례기도입니다. 공동체내에서 관계의 훈련, 신망애(信望愛)의 훈련에 공동기도보다 더 좋은 수행은 없습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인간이란 물음만 있고 하느님이란 답이 없으면 평생 헤매게 됩니다. 무지와 허무의 어둠속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런 하느님과의 관계의 모범이 제1독서의 주인공 이사야 예언자이고 복음의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경우는 하느님은 아버지로 더 구체성을 띄게 됩니다. 3월 사순시기는 회개를 통해 하느님과의 관계를 깊이해야할 절호의 기회입니다. 회개와 함께 가는 참된 영성의 표지가 겸손입니다. 이사야 예언자를 통해 계시되는 하느님은 얼마나 좋은신 분인지요! 은총의 사순시기에 참 적절한 말씀입니다. 하느님 마음에, 사랑에 정통한 이사야 예언자의 참 아름다운 고백시입니다.
“은혜의 때에 내가 너에게 응답하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와 주었다.
그들은 가는 길마다 풀을 뜯고,
민둥산마다 그들을 위한 초원이 있으리라.
그들은 배고프지도 않고 목마르지도 않으며,
열풍도 태양도 그들을 해치지 못하리니
그들을 가엾이 여기시는 분께서 그들을 이끄시며,
샘터로 그들을 인도해 주시기 때문이다.
하늘아, 환성을 올려라.
땅아, 기뻐 뛰어라.
산들아, 기뻐소리쳐라.
주님께서 당신 백성을 위로하시고,
당신의 가련한 이들을 가엾이 여기셨다.”
이런 아름다운 자연과 살아 계신 하느님과의 관계가 멀어지니 인공지능이 판치는 세상입니다. 영적 진보라기 보다는 인간 공동체 정신의 퇴행, 영성의 쇠퇴를 보여줍니다. <녹색평론 185호 2024년 봄호>의 특집은 “인류는 인공지능 시대를 건너갈 수 있을까”였습니다. 인공지능이 추세라 하지만 저에게는 “판도라의 열린 상자”처럼 웬지 인류의 미래가 불길하게 느껴집니다.
정말 시를 쓰려면 하느님의 예언자이자 시인인 이사야처럼 이런 희망과 생명, 빛이 넘치는 구원의 시를 써야 할 것입니다. 평생 도반이자 평생 착한목자이신 하느님입니다. 참으로 하느님과 깊은 신뢰와 사랑의 관계에 있는 참사람의 원형 이사야 예언자요, 예언자의 다음 하느님 사랑의 고백은 절정(絶頂)이자 절창(絶唱)입니다.
“여인이 제 젖먹이를 잊을 수 있느냐? 제 몸에서 난 아기를 가엾이 여기지 않을 수 있느냐? 설령 여인들은 잊는다 하더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않는다.”
“나는 너를 결코 잊지 않는다”, 못박듯한 하느님의 고백은 얼마나 절절한지요! 바로 우리 하나하나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의 깊이는 이렇도록 깊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을 어머니로 지칭되는데 어머니를 능가하는 “사랑의 어머니 하느님”을 보여줍니다.
어머니로 비견되는 하느님에 이어 오늘 복음의 예수님은 주저함없이 아버지로 고백합니다. 예수님 덕분에 아버지 하느님과의 친밀한 신뢰와 사랑의 관계를 깊이할 수 있게 된 우리들입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길이 열렸습니다. 참으로 우리의 원대한 평생목표가 하나 있다면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하느님을 날로 닮아감으로 하느님과 날로 깊어지는 일치의 관계일 것입니다. 바로 예수님의 고백을 과감히 나의 고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보여주신다.”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고 또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내 심판은 올바르다. 내가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모든 말씀에 앞서 반드시 예수님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라는 말마디가 강조되고 있음을 주목해야 합니다. 하느님 아버지와 독보적인 관계의 깊이를 지닌 아들 예수님의 확신에 넘친 고백입니다. 참으로 예수님과 날로 가까워지는 관계가 높은 자존감(自尊感)에 자긍심(自矜心)을 지니고 하느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깨닫습니다.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예수님을 통해 하느님을 닮아가는 하느님 중심의 “하닮의 여정”에 결정적 도움을 줍니다. <3월 성 요셉 성월 기도>로 강론을 마칩니다. 예수님의 양부로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부성(父性)과 하느님 어머니의 모성(母性)을, 양성(兩性)을 겸비한 참으로 온전한 요셉 성인처럼 생각됩니다.
-“우리 주 예수님을 기르시는 아버지시오,
정결하신 동정 마리아의 배필이시며,
임종하는 이의 수호자이신
성 요셉께 간절히 청하오니,
하느님께 빌어 주시어,
저희가 예수님을 사랑하며 충실히 따르게 하소서.
또한 죽을 때에 저희를 지켜 주소서.” -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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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늘 그렇게>
“내 아버지께서 여태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요한 5,17)
지치고 힘들어서
멈춰선 자리에서
여태껏 쉬지 않고
앞서가고 계시는
나의 님 발자국 따라
또 한걸음 딛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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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3. 사순 제4주간 수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아버지께서 당신 안에 생명을 가지고 계신 것처럼, 아들도 그 안에 생명을 가지게 해 주셨기 때문이다.(요한 5,26)
생명이 생명을 낳다
이 말씀은 생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살아 계신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선물이라는 증언입니다. 살아 계신 아드님이 살아 계신 아버지에게서 나셨다면, 그 탄생은 새로운 본성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 탄생입니다. 살아 있는 존재가 살아 있는 존재를 낳을 때는 그 어떤 새로운 것도 생겨나지 않습니다. 탄생하기 위해 무존재가 생명을 추구하여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생명에게서 탄생하는 생명은 무엇이든 (본성의 일치로 인하여, 그리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완전한 탄생이라는 신비스러운 사건으로 인하여) 살아 계시며 살아 있는 이들의 생명을 당신 안에 가지고 계신 그리스도 안에서 삽니다.
-푸아티에의 힐라리우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기드온, 바락, 삼손, 입다, 다윗, 사무엘 그리고 예언자들에 대해 말하자면 시간이 모자라겠습니다. 믿음으로, 그들은 나라를 정복했고 정의를 실천했으며 약속된 것을 얻었고 ... 약한 데서 힘을 얻었고 전쟁 중에 강해졌고 외국인들의 진지를 무너뜨렸습니다. 여인들은 부활에 의해 죽은 식구들을 다시 얻었습니다. 그러나 더러는 더 나은 부활을 얻기 위해 석방을 거부하고 고문을 받았습니다. 또 더러는 조롱과 매의 시련을 겪고, 심지어 결박과 투옥의 시련도 겪었습니다. 돌에 맞고 톱질을 당하고 칼에 찔려 죽었으며, 양가죽과 염소가죽을 두르고 돌아다녔고 궁핍과 고난과 학대를 겪었습니다.
세상이 마뜩찮아 광야와 산과 동굴과 땅굴로 헤매 다녔습니다 ... 이렇게 구름처럼 많은 증인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으니, 우리도 모든 짐과 옭아매는 죄를 떨쳐 버리고 우리 앞에 놓인 경주를 참을성있게 해 냅시다. … 여러분은 아직 피를 흘리면서까지 죄와 맞싸우지는 않았습니다(히브 11,32-38; 12,1.4)(135)
✝️ 수요일 그리스도인 일치의 날✝️
세계 교회사, 아우구스트 프란츤
제 2부 중세 그리스도교
제 3기 : 1050 ∼ 1300년
중세 중기 교회의 전성
제 3절: 1054년의 동방 대이교
그리스적 • 동방적 사고와 라틴적 • 서방적인 사고는 벌써 오래전부터 각기 다른 방향으로 발전하였다. 그 대립은 전례적이고 규율적인 것이었으며, 교회정치적이고 교의적인 것이었다. 카를 대제와 오토 대제하에서 서구 황제권의 성취, 성화상 논쟁, 이탈리아에서 - 라벤나와 남부 이탈리아 - 비잔탄인들의 영토 요구, 이탈리아로 프랑크족의 팽창 등은 긴장을 더하였다. 개혁으로 인해 새로운 자아의식으로 각성된 서구의 교회의식 또한 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독일인 교황인 레오 9세가 정치적으로 노르만인들이 비잔탄인에게서 빼앗기 시작한 남부 이탈리아로 뻗으려 하였을 때, 접촉점과 차이점이 새롭게 판명되었다. 비잔틴 황제 콘스탄티누스 9세와 그의 남부 이탈리아 총독 아르기로스는 교황과 동맹을 맺고 공동으로 노르만인들과 싸는 데 마음이 쏠려 있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미카엘 체룰라리오스(1043∼1058)는 교황이 자신의 재치권 영역에 간섭하게 될 것을 두려워하여 교회적인 대립들을 크게 공공연히 문제시함으로써 그 접근을 방해하였다.
콘스탄티노플의 라틴계 교회와 수도원을 폐쇄하고, 미사에서 누룩 없는 빵의 사용, 사제의 독신제, 필리오퀘(Filioque: …와 성자에게서)를 사도신경에 채택한 것 등 라틴 교회의 관습들에 대한 신랄한 비난은 그의 투쟁방법이었다.
레오 교황은 한편으로는 동맹협상을 추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총대주교의 공격을 물리치기 위하여 실바 간디다의 홈베르트 추기경과 자기의 상서 원장인 로트링겐의 프리드리히, 그리고 아말피의 베드로 대주교를 사절단으로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하였다. 특히 전자 두 명은 로트링겐의 귀족 출신으로 개혁의 열렬한 웅호자였다.(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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