筆者(필자)가 겨우 初等學校(초등학교) 3學年(학년) 때였다.
당시 長木(장목) 國民學校(국민학교)에 登校(등교)하고 보니, 온통 避難民(피난민)들이 敎室(교실)에서 가득 잠을 자고 運動場(운동장)과 便所(변소)에는 以北(이북) 돈 다발이 여기 저기 뿌려져 있었다. 敎室(교실)에서 工夫(공부)를 할수 없다고 先生(선생)님은 우리를 이끌고 冠浦(관포)로 넘어 가는 언덕 솔밭에서 工夫(공부)를 하던 追憶(추억)이 떠 오른다.
https://www.youtube.com/watch?v=jqkh26uaMAU
6·25戰爭 [특집다큐] 避亂(피난)과 捕虜(포로)의 땅, 巨濟島(거제도)
https://www.youtube.com/watch?v=aV_2NaSUIL4
'避亂(피란)과 捕虜(포)로의 땅, 巨濟島(거제도)' 放映(방영)
https://www.youtube.com/watch?v=14h4drx-ORI
1950년 6월25일 새벽 북한군의 남침으로 시작된 전쟁은 중공군의 예상치 않은 개입으로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이 됐다.
이렇게 중공군의 침략으로 또다시 대한민국이 풍전등화의 위기와 같은 장진호 전투에서 적의 공격을 막아내며 마침내 작전을 완수했다.
철수과정은 쉽지 않았다. 작전의 마지막 고비였던 12월 7일 고토리 지역에서 교량 파괴로 더 이상 나아갈 수가 없게 됐다. 미군은 좋은 일기와 날씨를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그러던 그날 밤 기적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하늘이 맑은 날씨로 변하고 밝고 환한 별이 고토리 상공에 반짝였다. 곧바로 교량 공중투하작전으로 가설된 임시교량을 건너 미군은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날 수 있었다.
지형도 모르고 운신하기조차 힘든 고원 산악지대에서, 더구나 밤이면 영하 30도까지 내려가는 악천후와 싸웠던 미군의 피해는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전투 중 전사자보다 동상으로 죽은 병사가 더 많았다. 동태처럼 얼어붙은 시신을 짐짝처럼 트럭에 실어 수송하기도 했다. 이때 미 해병 4500명이 전사하고 7500명이 동상을 입었다.
미국의 전쟁 역사상 최악의 전투로 기록되고, 세계 역사상 3대 동계전투로 알려질 정도의 이 전투에서 미군들의 희생은 엄청났다.
이들의 희생을 기념하기 위해 설립된 공원이 바로 워싱턴 D.C.의 한국전 참전용사 기념공원(위 사진)이다. 공원에는 긴장한 채 얼어붙은 얼굴의 미군 19명이 판초를 입고 총이나 무전기 등을 휴대한 채 행군하고 있는 모습의 동상이 있다.
이렇게 장진호 전투를 치른 미군이 흥남항구로 철수했고, 또 이들의 활약은 그 역사적인 흥남철수작전으로 이어졌다. 더불어 북한주민 9만8000명도 공산군에게 학살되지 않고, 무사히 탈출할 수 있었다.
그 당시 철수한 배는 피난민을 싣고 巨濟島(거제도)로 왔다. 巨濟島 捕虜 收容所(거제도 포로 수용소)는 1951년 2월 지금의 거제시 수양동과 고현동을 중심으로 거제도 일대에 설치되어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과 중공군 포로들을 수용, 1953년 7월까지 운영되었다. 거제군은 현재 거제대교로 육지와 연결되었으며, 거제포로수용소는 1983년 12월 20일 문화재 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다.
거제도에 포로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육지와 가까워 포로를 수송하기에 용이하고 당시에는 육지와의 교통수단이 배 밖에 없었으므로 포로를 격리 수용하기에 적합했기 때문이다.
이 수용소는 1950년 국제협약인 「포로의 대우에 관한 1949년 8월 12일자 제네바 협약」에 따라 세워졌다. 이 협약에 의하면 ‘포로들에게 위협이 없을 정도로 전투 지역에서 충분히 떨어진 지역에 소재’하게 되어 있어 당시의 신현면, 즉 지금의 신현읍 고현리를 중심으로 한 문동리, 장평리, 양정리와 동부면의 디포리, 저구리의 농토 및 임야 1,200정보쯤을 징발하여 수용소를 세운 것이다. 그 때문에 당시 그 곳에 거주하던 주민 2,116세대가 수용소 대지 밖으로 밀려났다.
거주민의 이주 뒤에 그 자리에 수많은 막사가 들어섰고, 뒤이어 포로인 인민군과 중공군이 30만 명쯤 들어왔다. 당시 거제도에 살던 사람이 10여만 명쯤 이었는데, 흥남 부두에서 미 해군 함정 빅토리호가 싣고 온 피난민과 육지에서 건너온 피난민 20만 명쯤이 합쳐지자 거제도는 갑자기 사람들이 넘쳐나는 섬이 되었다.
1951년 5월 포로수용소 내6수용소에서 수용소 사령관 F. T. 돗드 준장이 포로들에게 납치되어 4일 만에 풀려나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인민군 대좌 이학구가 주동한 것으로 그들은 포로의 대우를 개선해줄 것, 자유의사에 따른 포로 송환 방침을 중지할 것과 포로대표위원단을 인정할 것 등을 요구했다.
그들은 유엔군과 대치하고 한편으로 반공 포로를 인민재판으로 처형하였다. 그 당시 사건이 일어난 제76수용소에서는 즉결인민재판의 결과에 따라서 처형된 반공 포로의 시체들이 매일 몇 구씩 쏟아져 나왔으며, 죽은 반공 포로가 무려 105명에 이른다고 한다.
유엔군 쪽의 강력한 저지로 돗드 준장이 구출되면서 사건은 매듭지어졌지만, 반공 포로와 공산 포로 간의 갈등은 더욱더 격해져 따로 분리하게 되었다. 반공포로 분리작전으로 약 12,000명의 북한 송환희망 포로들이 제17수용소(저구리)로, 8,000명의 북한 송환거부 포로들이 제18수용소(용초도)로, 10,000명의 민간인 억류자들이 제19수용소(봉암도)로, 그리고 5,600명의 중공군 포로들은 선박을 이용하여 제20수용소(제주도)로 수송되었다. 1952년 7월 17일작전은 완료되었다. 이렇게 거제도의 기존 수용소, 즉 유엔사 관할 제1포로수용소에는 북한 공산포로 약 48,000명만이 남게 되었다.
북한과 유엔 사이에 휴전협정이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됨에 따라 전쟁은 기약없는 휴전에 들어갔다. 6·25전쟁이 끝난 뒤 남북 양쪽의 전쟁 포로 교환이 있었는데, 남과 북 어느 쪽도 선택하지 않고 거부한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남과 북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한 채 ‘중립국’을 택했다. 북한군 포로 74명, 남한군 포로 2명, 중국군 포로 12명은 인도로 또는 남미로 흩어져 힘들고 고생스러운 세월을 겪었다.
한편, 거제군은 1965년 6월에 착공, 1971년 여름에 준공된 거제대교개통으로 육지와 연결되었다. 그리고 거제포로수용소는 1983년 12월 20일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99호로 지정되었으며, 거제시 신현읍 고현리에 면적 8,887㎡의 거제도 포로수용소 유적공원으로 남아있다.
1951년 12월 10일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이송돼 온 공산당 포로들
1951년 12월 13일 대구에 마련된 서울 피난 학생들을 위한 피난민촌
임시 초등학교에서 DDT를 어린이들에게 살포하는 모습
1952년 7월 7일 피난민 수용소에 마련된 거주 텐트
1953년 11월 25일 북한 강제노동수용소에서 남한으로
탈출한 아들을 얼싸안고 기뻐하는 어머니
6.25전쟁 65주년을 맞아 행정자치부 국가기록원이 6.25전쟁 관련 사진을 24일 공개했다.
국가기록원은 2013년부터 미국 국립기록관리청에서 6.25전쟁 관련 사진 7천 여 점를 수집·정리 중이다.
이 사진은 그 중 일부를 국가기록원이 홈페이지를 통해 공개한 것이다.
6·25전쟁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이 남북군사분계선이던 38선을 넘어 불법 남침함으로 시작해 1953년 7월 27일 휴전 협정을 맺기까지 3년 동안 벌어진 전쟁이다.
사진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시점부터 1951년 11월까지 가장 치열했던 전쟁 초기 기록사진을 날짜별로 정리한 것이다.(사진=국가기록원 제공)
첫댓글 이승철 ~ 금 2021-01-01 오후 5:42 ~ 참 좋은 자료 입니다. 포로수용소가 거제도에 들어 온지는 1950년 9월 15일 맥아더 장군이 인천 상륙작전에 성공 한 후, 월북하지 못한 인민들을 슈용하기위해 인천 광주 대구 등지에 임시 수용하고 있다가 11월 말경에 거제도에 와서, 고현항 주변에 처음 막사가 설치되었습니다. 그때의 자료 사진과 포로수요소 사진 350장을 반공포로로 석방되어 미국에 살고 있는 사람이 350점의 그 당시 사진과 비디오 테프를 가져와서, 그것을 바탕으로 김한배 군수 때 임시유적관 50평을, 신봉권 김해정 김재윤 교수의 건의에 의해 이승철이 만들었으며, 그 후 양정식 군수 때 신봉권씨 가 신씨 재실과 묘지와 토지를 내어 놓아 그 때 부터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만들게 되었습니다. 무너지던 유적을 보존 하느라 너무나 고생도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요즘와서는 모두가 자기들이 다 했다고 우쭐대고 있습니다.
이승철 ~ 금 2021-01-01 오후 5:42
세계문화유산을 만들겠다며 거제시 돈을 받아서 온갖 짓을 다 하던 사람이 자기가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만들었다고 하면서 세미나를 하는 자리에서, 내가 앞에 나가서 저기 저 사람은 포로수용소 유적관을 만들 때 초등학교 다녔습니다 하였더니, 장내가 뒤집히는 사건이 생긴 후 그만 두었습니다. 작년에 경남대 김재윤(사등출신)교수가 그 때 무상으로 만들어 준 설계도를 거제시 해양개 발공사 사장에게 복사 해 줬습니다.
우리 민족은 왜 자기가 최고라 하는지? 일본을 원망 할 것이 아니라 우리민족 정신 부터 고쳐야 합니다. 그 어려운 시기에 외국에서 온 반공포로들과 한국에서 온 반공포로와 학자들이 거제의 문화유적증 자료 조사하러 올 때, 저의 집에서 자고 제가 대접하고 사천 비행장 까지 가서, 비행기 표도 끊어 줬습니다. 1970연대 초에는 고현에 여관이 없었습니다. 기와집 3칸이 여인인숙이였습니다. 밥은 식당에 가서, 먹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저의집에 손님이 오시면 사용 할 수 있는 객실을 별도로 만들어 화장실과 방 하나를 두었습니다. 일본 학자들도 많이 왔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