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101]아름다운 사람(31)-군산 샘물교회 개척 최목사
주인공이 ‘목사牧師’이니 종교이야기로 생각할 수 있겠으나 아니다. 고교 3학년 같은 반에 형뻘 동창이 있었다. 자기를 크게 내세우지 않고, 나이 때문(1954년생)인지 늘 조용했다. 얌전하셨다는 말이 맞을 듯하다. 동기지만 “00야” 할 수가 거시기해 그때에도 “최형”이라고 불렀다. 졸업하자마자 군대를 간다기에 송별회를 해준 기억이 있다(그게 오래도록 고마웠었다고 한다). 그후 오랫동안 소식을 모르고 만나지도 못했다. 5년 전, 군산에서 당시 학창시절 제법 가까웠다고 볼 수 있는 5인이 모임을 가졌다. 목회자 최형의 인생역정 이야기가 30분도 넘게 길어졌다. 얘기를 들으며, 심성이 본래 착하고 온유한 때문에라도 ‘참 아름다운 사람’이라고 대번에 느꼈다.
제대 후 1980년 세관시험에 합격,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 당시 월급이 8만5000원. 그 계통에 비리나 부조리가 아주 심했을 때여서, 월급보다 훨씬 더 많은 뇌물성, 급행통행료성 현금이 마구 오갔다. 어느 때에는 월급의 10배를 넘기도 했다. 그는 그 현실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입사 2개월만에 사표를 썼으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퇴근 후 수 년간 ‘술의 세계’에 빠졌다. 월급 이외로 생기는 돈은 모두 술값으로 탕진하는 세월이 5년여 흘렀다. 직장 스트레스 등 고민을 술로 해결한 셈이다. 그냥 꿀꺽해도 아무 문제가 없을 때였다. 어느 친구는 ‘대박 직장’을 즐기기도 했지만, 그는 끊임없이 괴로워했다. 순찰지역을 오토바이로 돌다가 대형사고를 당해 중환자실에서 두 달간 생사를 오가는 가운데,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었다한다(believe or not).
이후 술을 완전히 끊고 신학대 입학을 계획했다(이 대목에서 나는 ‘아, 이렇게도 술을 끊을 수 있고, 하나님의 목소리를 듣고 신학대도 갈 수 있구나. 아, 나는 믿을 수 없는 일이다’ 형의 성품이 본래 선하기에 그럴 수 있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1990년 신학대 야간과정에 입학, 10년간 신학을 공부하여 2000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아내의 내조가 없었으면 경제적으로 불가능했을 터. 고향(옥구 대야) 근처 군산 사정동沙井洞에 개척교회를 열었다. 2년간 가족구성원 단 4명이 기도를 했을 뿐이다. 그러다 신자들이 100여명으로 늘었다(퐁퐁퐁 신자가 는다하여 ‘샘물교회’라 지었을까). 최근에는 노령화의 영향으로 신자가 자꾸 줄어들고 있고, 본인도 정년(만 70세)이 머지 않았다 한다.
그가 다섯 살 때 아버지가 51세로 돌아가셨다. 위로 형 6명, 동생 2명, 어머니는 머시마만 10명을 낳았다. 농촌지역에서 41세에 아들 10명을 키우고 가르친 어머니의 고생은 안봐도 비디오. 보릿고개도 사치한 말, 가난해 대학 진학은 엄두도 못냈으나, 장남인 큰형을 제대로 가르치면 집안이 펼 거라고 생각했단다. 장남은 의대를 나와 막내동생까지 어머니 대신 뒷바라지한 인생길을 걸었다. 이제 3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그런 과정에서도 남자형제들은 모두 제 밥벌이를 하며 짧은 가방끈을 셀프self 보충했다. 그가 목회자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이런 환경에서 큰사고까지 겹치자 ‘예비豫備된 길’이 아니었을까.
그를 ‘아름답다’고 한 이유는 간단하다. 4반세기(24년) 동안 목회활동을 하면서 신자들에게 참 좋은 얘기(무수한 설교?)들을 함으로써, 신앙생활을 인도하고 어리석은 사람들을 ‘착한 양’으로 만들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다. 기독교든 천주교든 불교든 원불교든, 종교를 불문하고, 나쁜 성직자보다 착한 성직자가 몇 천 배 많을 것은 사실이 아니겠는가. 그들은 그 소임을 다함으로써 ‘빛과 소금의 사회’를 만드는데 일정부분 기여한 바가 클 것이기 때문이다.
보름 전 주말, 다섯 쌍 부부가 분기별 모임을 가졌다. 식후 분위기 좋은 커피샵에서 ‘사는 이야기들’을 처음으로 진지하게 가졌다. 어느 부부가 적나라하게 부부갈등의 사례를 표출했다. 그들은 수시로 서로에 대한 칭찬보다 애증이 교차한 불평불만의 선수들이었다. 그러자 갑자기, 평소 목회자 티를 한번도 내지 않던 그 형이 처음으로 “진심과 진정은 통하게 마련”이라며 자기 부부의 성공사례를 고백했다. 그들 역시 젊은 시절 갈등이 많았으나, 지금도 ‘온전한 평화’를 이루었단다. 그 비결을 얘기하여 좌중을 숙연하게 만들었다.
언제나 아내에게 믿음을 주는 남편, 왼종일 남편에 대한 사랑으로 충만한 아내가 말처럼 그리 쉬울 것인가.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성격(솔직히 같은 게 이상한 것 아닌가?)과 인생관 가치관 차이 등을 극복하고 감싸안는 비법이 있다는 것이다. 굳이 성경聖經을 들먹일 것도 없이(비신자도 많으므로) 우리네 생활 속에서 이해하기 쉽고 실천할 수 있는 사례들을, 목에 힘주지 않고 말함으로써, 전체의 동의를 얻는다는 것은, 어쩌면 그 형이 가진 장점일 듯했다. 종교를 강요해서 될 일인가? 우리 삶 속에 ‘생활종교’가 있는 것을. 꼭 갈등을 표출한 부부 아니래도 모두 귀담아 들을 만한 좋은 설교(?)에 감명받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영원한 운명공동체인 최영배 목사부부의 행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