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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닿을 수 없는 그리움
여기에서 언급하고픈 시는 정희성의 「詩를 찾아
서」라는 작품입니다. 과작(寡作)이기는 하지만
70년대부터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 온 시인이 내
놓은 빼어난 작품이죠. 오랜 시간동안 작품 활동
을 해 오면서 시인은 문득 시가 무엇인지 자문해
봅니다. 젊은 시절에는 시를 쓰느라 급급했기에
이런 물음으로 번민하지는 않았지만, 지긋한 나이
가 되어 시인은 삶을 반추하며 그동안 써 온 시들
과 시 창작 활동을 회고합니다. 그리고 시의 정체
성에 대한 물음과 시작 활동의 회고마저 다시 시
가 됩니다.
詩를 찾아서
정 희 성
말이 곧 절이라는 뜻일까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까
지금까지 시를 써 오면서
시가 무엇인지
시로써 무엇을 이룰지
깊이 생각해볼 틈도 가지지 못한 채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경기도 양주군 회암사엔
절 없이 절터만 남아 있고
강원도 어성전 명주사에는
절은 있어도 시는 보이지 않았다
한여름 뜨락에 발돋움한 상사화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았다
한 줄기에 나서도
잎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다는 상사화
아마도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인 게라고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인 게라고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그 고운 사람을 생각했다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발표 안 된 시 두 편만
가슴에 품고 있어도 나는 부자다
부자로 살고 싶어서
발표도 안 한다
시를 두 편 가지고 있는 동안은
어느 부자 부럽지 않지만
시를 털어버리고 나면
거지가 될 게 뻔하니
잡지사에서 청탁이 와도 안 주고
차라리 시를 가슴에 묻는다
거지는 나의 생리에 맞지 않으므로
나도 좀 잘 살고 싶으므로
- 계간 문학동네 1997 봄호
(어느 한 여름 상사화(相思花)를 보게 된다. 잘 알다시피 어느 한 여름 상사화(相思花)를 보게 된다. 잘 알다시피 상사화는 꽃줄기가 올라오기 전인 6~7월이면 잎이 말라 죽어버린다. 그러니 꽃이 필
무렵이면 살아있는 잎을 볼 수 없다. 시인이 본 것
이 바로 그 모습이다.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는 상사화를 보며 시인은 '한 줄기에 나서도 / 잎
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
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 의미를 시(詩)와 연결시
킨다.
바로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나아가 '보고 싶어
도 볼 수 없는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생각
끝에 시인은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
그 고운 사람'을 떠올리며 그것이 시가 아닐까 생각
한다. '우바이(優婆夷)'란 ‘여성 재가 불자' 즉 출가
하지 않고 속세에 머무르며 불도를 닦는 여성을 일
컫는다. 결국 우바이가 비록 지저분한 저자 거리를
걷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듯이, 시란 끝없는 그러면서도 간
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이란 결론이다.
.......
이들처럼 우리는 한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서 불도를 닦는 불자…
평생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사는지도 모
른다. 그런 삶이 바로 시가 아니겠는가. 겉으로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처럼 보이지
만, 이 시 속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통해 꿈을 꾸며
살자는 말도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상사화는 꽃줄기가 올라오기 전인 6~7월이면 잎이 말라 죽어버린다. 그러니 꽃이 필
무렵이면 살아있는 잎을 볼 수 없다. 시인이 본 것
이 바로 그 모습이다. '꽃대궁만 있고 잎은 보이지
않’는 상사화를 보며 시인은 '한 줄기에 나서도 / 잎
이 꽃을 만나지 못하고/ 꽃이 잎을 만나지 못한
다'는 생각에 이르렀고 그 의미를 시(詩)와 연결시
킨다.
바로 시는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나아가 '보고 싶어
도 볼 수 없는 마음’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 생각
끝에 시인은 '끝없이 저자 거리 걷고 있을 우바이 /
그 고운 사람'을 떠올리며 그것이 시가 아닐까 생각
한다. '우바이(優婆夷)'란 ‘여성 재가 불자' 즉 출가
하지 않고 속세에 머무르며 불도를 닦는 여성을 일
컫는다. 결국 우바이가 비록 지저분한 저자 거리를
걷고 있지만 그녀의 마음속에는 불도를 이루고자
하는 간절함이 있듯이, 시란 끝없는 그러면서도 간
절한 그리움과 기다림이란 결론이다.
.......
이들처럼 우리는 한 꽃과 잎이 만나지 못하는 상사화, 출가하지 않고 속세에서 불도를 닦는 불자…
평생 무엇인가를 그리워하고 기다리며 사는지도 모
른다. 그런 삶이 바로 시가 아니겠는가. 겉으로는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찾는 과정처럼 보이지
만, 이 시 속에는 기다림과 그리움을 통해 꿈을 꾸며
살자는 말도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시가 무엇이냐는 자문(自問)에 대해서, 시인은 결
정적으로 “닿을 수 없는 그리움”,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 마음”이라고 답합니다. 시인이 보기에 시
는 그리운 마음입니다. 그리움의 대상은 "우바
이”로 암시됩니다. 우바이는 이상화되거나 신격화
된 사람이 아닙니다. 높고 빛나는 곳에 있어 우러
러 봐야 하는 대상이 아니라, 그저 저잣거리에서
헤매고 있는 타인들 가운데 한 명일 뿐이죠. 시인
은 그런 우바이를 사랑합니다.
그런데 타인으로 향하는 그리운 마음은 닿을 수 없
습니다. 그것이 시인을 괴롭게 하지만, 닿을 수 없
기에 오히려 그리운 마음은 지속될 수 있습니다.
그리운 대상이 닿을 수 있다면, 닿는 즉시 그리움
은 사라지고 말 겁니다. 그렇다면 시 역시 사라지
고 중단될 겁니다.
존재의 철학자 하이데거는 시를 존재의 측면에서
이해합니다. 시란 존재의 소리에 응답하는 인간
의 마음입니다. 시란 존재를 향한 그리움이죠.
정희성의 시에서 사랑의 '대상'으로 등장하는 우바이
가 하이데거의 존재일지는 의심스럽습니다. 그러
나 최소한 미지(知)의 무엇이 근원적인 그리움
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것을 향한
마음이 결코 닿을 수 없다는 점에서도 유비적인 조
응이 성립합니다. 시는 불가능한 것을 그리워하
는 마음입니다. 그렇기에 모든 시는 실패할 수밖
에 없는 운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지어진
모든 시들은 습작(習作)에 불과하고 아무리 훌륭
하더라도 종국에는 불충분한 시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모든 위대한 시인은 오직 하나의 유일한 시(ein einzige Gedicht)로부터 시를 짓는다. 그가 어느 정도로 이 유일한 것에 내맡겨져, 그 속에서 어느 정도로 시짓는 말함을 담을 수 있느냐에 따라, 그
위대함이 가늠된다. 한 시인의 시는 말
해지지 않은 채 남아 있다.
(GA12,33)
시인은 저마다 '쓰이지 않은 하나의 시'를 가지고
있습니다. 쓰고 싶지만 이내 쓸 수 없는 단 하나의
시를 가지고 있죠. 시인은 그 시를 써 보려고 하지
만 매번 실패합니다. 다만 그것의 흔적만을 자신
의 시 속에 담을 수 있을 뿐입니다. 그 시에 가까
이 접근하면 그나마 훌륭한 시로 평가되고, 멀리
떨어져 있으면 모자란 시로 평가됩니다. 하지만
불가능한 그 하나의 시에 완벽하게 닿을 수는 없습
니다. 한편으로 이런 '선험적 무능’이 시인의 절망
과 우울의 원천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바로 그 무
능 때문에 끝없는 창작이 가능하죠. 시의 불가능
성은 모든 창작의 가능성을 선사합니다. 언표 불
가능한 시적 침묵이 시인의 서툰 옹알이를 허락해
줍니다. 수런대는 시와 비평은 침묵하는 유일한
시를 향해 나아가야 합니다. 끊임없이 웅성이면
서 침묵의 종에 부딪혀 산산이 흩어져야 합니다.
2. 헤맴
시인은 시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라고 말합니
다. 시인은 이것을 어떻게 알았을까요? 닿을 수 있
는지 없는지 어떻게 단정할 수 있었을까요? 헤매
어 보았기 때문입니다. “깊이 생각해볼 틈도 없이
/헤매어 여기까지 왔다.” 헤맨 다음에야 시가 무
엇인지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헤맴은 건너뛸 수 없는 필수조건이죠.
또한 시가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이라면, 헤맴은 그
리움의 필수조건입니다. 시를 알기 위해서는 우
선 생각할 겨를도 없이 정처 없이 헤매야 합니다.
수영을 배우기 위해서는 직접 물속에서 허우적대
는 경험을 해야만 하는 것처럼, 시는 헤매이는 과
정을 거쳐야 합니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헤맴
자체가 바로 시입니다.
인용된 시의 전문에는 헤매는 과정은 짧게 생략되
었습니다. 다만 헤매던 과거를 회상할 뿐이죠. 과
거에도 헤맸고 현재도 헤매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
속 헤매리라는 생각이 들면서, 시인은 “닿을 수 없
는 그리움”으로 시를 규정합니다. 회상하는 가운
데 「詩를 찾아서」라는 시가 쓰입니다.
하이데거에 따르면, 본래 시 자체가 회상입니다. 시는 존재에대한 회상이며, 존재를 향한 헤맨 길들에 대한 회상이죠. “깊이 생각해 볼 틈도 없이” 헤맨 것은 당연합니다. 헤매는 과정이 있어야, 즉 회상할만한 것이 있어야지 비로소 깊이 생각할 여지가 생기기
때문입니다. 생각한다(Denken)는 것은 곧 회상
한다(Andenken)는 것이며, 시는 곧 이런 회상
을 뜻하지요.
시를 찾으려는 각성 이후에도 시인은 여전히 헤맵
니다. 그는 시(詩)라는 한자어의 두 요소, 즉 말
(言)과 절(寺)에 착안해서 회암사와 명주사에 직
접가 봅니다. 당연히 절에서 시를 보지는 못합니
다. 하지만 그런 헤맴이 무익한 것은 아니었습니
다. 우연히 절의 뜰 앞에 핀 상사화를 보면서 닿을
수 없는 그리움을 떠올립니다. 이처럼 헤매는 와
중에서만 불확실한 답이라도 얻을 수 있습니다.
미흡한 시 한편이라도 얻을 수 있죠.
3. 존재의 사원
일반인들에게 알려져 있는 하이데거의 가장 유명
한 말은 "언어는 존재의 집”라는 문장일 겁니다.
정확한 의미가 선명하게 다가오지 않더라도, 이
말은 사람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겼음에 분명합
니다. 하이데거에게 시는 언어의 본질이고 근원적
인 언어입니다. 언어가 존재의 집이라면, 시 역시
존재의 집일 겁니다. 집은 집인데, 좀 더 정확
하자면, 시는 존재의 사원입니다.존재의 집일 겁니다. 집은 집인데, 좀 더 정확히 말
하자면, 시는 존재의 사원입니다.
시인은 한자 시(詩: 言+寺)를 보면서, “말이 곧 절
이라는 뜻일까 / 말씀으로 절을 짓는다는 뜻일
까”라고 자문합니다. 아마도 하이데거는 한자를
몰랐겠지만, 비슷한 생각을 했던 것 같습니다. 명
시적으로 말한 적은 없지만, 횔덜린의 시인론을
바탕으로 그는 시적 언어의 집이 사원임을 암시하
고 있습니다. 사원은 본래 신의 집이죠. 또는 신과
인간이 만나는 성스러운 장소입니다. 다시 말하
면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직시하고 그 이상으로 비
상하는 시공간입니다. 그곳은 생사(生死)의 경계
에 서서 지나간 삶을 회상하는 곳이죠. 하이데거
가 보기에, 시란 말로써 이런 사원을 짓는 것을 뜻
합니다. 하이데거는 사원(Temple <Templum <
Téuevos)이란 말의 어원을 분석하면서, 근본적으
로 “나누다, 분할하다”라는 의미를 함축한다고 말
합니다.
사원은 하늘과 땅을 나누고 분할하여 미래를 점치
는 곳입니다. 그곳에서 미래를 내다 볼 수 있는 것
은 과거를 회상하고 인간 미래의 끝인 죽음을 예견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는 사원, 즉 인간의 한계
를 직시하는 죽음의 공간에서 발원합니다. 죽음
을 통해 신과 인간은 구분(immortal/mortal)되
지만, 사원에서 그 둘은 조우합니다. 신과 인간을
만나게 한다는 의미에서, 횔덜린에 기대어 하이데
거는 시인을 (신과 인간 사이의 전령으로서) “반신
(半神)"이라고 규정합니다. 신과 인간의 경계에 시
인이 거주합니다. 불가능의 영점인 죽음을 미리
생각하고 지나온 삶을 회상함으로써 인간은 비로
소 본래의 (자기)존재에 도달할 수 있죠. 그리고
그런 자의 입에서 터져 나온 진정성이 담긴 언어
가 바로 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