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6월 14일(금)
* 시작 기도
주님...
마지막 일곱 천사가 하나님의 진노의 일곱 대접을 땅에 쏟을 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합니다.
심판을 단행하는 천사가 말하기를 거룩하신 이 곧 하나님의 심판은 의로우심을 천명합니다.
또한 순교자들의 영혼이 번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공의의 심판에 대하여 참되고 의로우심을 찬양합니다(계 16:5-7).
불의한 인간의 눈으로 볼 때 하나님의 행동하심이 때로는 불의해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일하심은 어떠한 경우라도 불의하실 수가 없음은 하나님은 불의하신 분이 아니라 항상 의로우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의의 기준은 항상 가변적이지만 하나님은 결코 변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심을 믿습니다.
그러하기에 나의 의조차 하나님 앞에서는 더러운 것이 될 수 있습니다.
(사 64:6)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라가나이다.
내가 아무리 의로운 일을 많이 한다 해도 나는 이처럼 부정한 자요 더러운 옷 같은 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이런 나는 주님 앞에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입니다.
주의 공의로 나를 심판하소서.
그 심판 앞에서 설 자 없사오니 주의 긍휼만 바라나이다.
새 영과 새 마음으로 빚어주시고 주의 영 곧 진리의 영으로 조명하사 말씀의 빛을 비추소서.
주의 보혈로 나를 씻어 정결한 주의 신부로 세워주소서.
더러운 옷으로 걸치고 있는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못 박습니다.
이렇게 나는 죽고 오직 예수로만 살게 하옵소서.
심령이 피곤하여 힘들어 하는 주의 자녀들을 주의 강한 오른손으로 안아 주시고 하늘의 평강이 넘치게 도우소서.
주의 크신 은혜가 넘치게 하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성경본문 / 벧후 2:12-22
제목 :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나귀보다 못한 자가 된 발람, 그리고 나.
12 그러나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하는 것을 비방하고 그들의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하며
13 불의의 값으로 불의를 당하며 낮에 즐기고 노는 것을 기쁘게 여기는 자들이니 점과 흠이라. 너희와 함께 연회할 때에 그들의 속임수로 즐기고 놀며
14 음심이 가득한 눈을 가지고 범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굳세지 못한 영혼들을 유혹하며 탐욕에 연단된 마음을 가진 자들이니 저주의 자식이라.
15 그들이 바른 길을 떠나 미혹되어 브올의 아들 발람의 길을 따르는도다. 그는 불의의 삯을 사랑하다가
16 자기의 불법으로 말미암아 책망을 받되 말하지 못하는 나귀가 사람의 소리로 말하여 이 선지자의 미친 행동을 저지하였느니라.
17 이 사람들은 물 없는 샘이요 광풍에 밀려가는 안개니 그들을 위하여 캄캄한 어둠이 예비되어 있나니
18 그들의 허탄한 자랑의 말을 토하며 그릇되게 행하는 사람들에게서 겨우 피한 자들을 음란으로써 육체의 정욕 중에서 유혹하는도다.
19 그들에게 자유를 준다 하여도 자신들은 멸망의 종들이니 누구든지 진 자는 이긴 자의 종이 됨이라.
20 만일 그들이 우리 주 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21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그들에게 나으니라.
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 나의 묵상
사도 베드로는 거짓 교사들에 대하여 주의 할 것을 강조하면서 계속해서 권면을 이어간다.
거짓 교사들은 죽기 위하여 태어난 이성 없는 짐승 같은 존재들로써 그들은 알지도 못하면서 비방하다가 결국 죽게 되고 말 것이다.
남들을 비방하고 괴롭히기 때문에 그들이 고통당하는 것은 당연하며 드러내놓고 쾌락을 즐기는 것이나 성도들 사이에 몰래 끼어서 성도들을 속여 넘어지게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또한 음욕을 품고 범죄 하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그뿐 아니라 아직 믿음이 연약한 자들의 영혼을 유혹하여 실족하게 하는 자들로써 탐욕스런 범죄에 마음이 담대하여 자기들만 아니라 성도들까지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 저주 받은 자들이다.
발람은 선지자로서 마땅히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여야 할 것이나 그의 마음속에 음흉한 탐욕을 품고 행한 자이다.
모압 왕 발락이 자기에게 다가오는 이스라엘 백성을 두려워하여 신하들을 발람에게 보내서 오게 하여 저들을 저주하게하려고 하였다.
그 소식을 들은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는 미명하에 그 신하들을 기다리게 하고 하나님께 묻는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발람에게 "너와 함께 있는 자들이 누구냐?"고 물으신다.
발람은 모압 왕 발락의 신하들이라고 말한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가지도 말고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말라고 하신다.
발람은 발락의 신하들에게 갈 수 없다고 하자 발락은 더 높은 신하들을 보내어 발람을 오도록 유혹한다.
발람은 동일하게 그들을 기다리라 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발람에게 일어나 가라고 하신다.
그것은 가도 좋다는 말씀이 아니라 '네 맘대로 해!'라고 하시면서 역정을 내시는 것이다.
그런데 발람은 그런 하나님의 중심도 모르고 가라고 했다고 해서 발락의 신하들과 함께 발락에게 가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지자이면서도 하나님의 뜻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제 뜻대로 하는 발람에게 하나님께서는 칼을 든 여호와의 사자와 발람이 탄 나귀의 입을 열어서 막으시고자 역사하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람은 깨닫지 못한다.
그리고 발람은 결국 발락의 신하들과 함께 발락에게로 간다.
물론 발락에게 가서도 하나님께서 막으시므로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하고 오히려 축복하는 등 발락의 뜻과는 전혀 반대로 행하면서 그런 과정을 세 번씩이나 반복한다.
발람은 결국 이스라엘을 저주하지 못한다.
그런데 그는 마지막으로 한 가지 묘수를 가르쳐 주고 그 불의의 삯을 받는다.
그것은 다름 아니라 미인계를 쓰면 이스라엘이 넘어질 것이라고 가르쳐 주고 떠난다.
결국 이스라엘 남자들이 모압 여인들과 행음을 하므로써 하나님의 진노가 그 백성들에게 임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거짓 선지자들이나 거짓 교사들의 끈질긴 완악함이다.
이는 결국 사탄의 사주를 받은 거짓 선지자나 거짓 교사들의 궤계요 탐욕에 눈이 먼 자들의 사악함이다.
나는 이 발람과 같이 겉으로는 하나남의 뜻을 구하는 것처럼 행동하였지만 그 속은 탐욕으로 가득차서 내 뜻을 관철시키고 마는 그런 완악하고 사악한 마귀의 앞잡이 노릇을 한 자이다.
그런 나는 하나님 앞에서 죽기에만 합당한 자이다.
나는 목사로써 선지자와 교사의 사명을 가진 자이다.
마땅히 하나님의 뜻을 구하여 그 뜻대로 행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
발람의 경우 하나님의 선민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것은 하나님이 싫어하시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저주가 아니라 그들을 축복해야 함에도 발락의 신하들이 와서 이스라엘을 저주하고자 당신을 초청한다는 말에 하나님의 뜻을 구한다고 하면서 그들에게 기다리라고 한다.
문제는 바로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스라엘을 저주하는 일이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는 하나님께 물어볼 것도 없이 일언지하에 거절해야 함이 마땅하다.
발람은 하나님의 뜻을 몰라서 묻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만 발락이 보낸 금은보화 즉 불의의 삯에 마음을 빼앗긴 것이다.
그는 하나님의 뜻보다 자신의 탐욕을 위에 두고 그것을 관철시키려 하고 있다.
명색이 선지자이기에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것은 안 되는 것을 알지만 그 앞에 어른거리는 금은보화를 놓치고 싶지도 않았던 것이다.
결국 그는 하나님의 허락을 이끌어 내는 것처럼 모양새는 갖추었지만 이는 전혀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었다.
그 발람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임을 이 시간 고백한다.
나는 하나님의 뜻대로 목회를 하겠다고 하면서도 이 목회를 통하여 내 안에 감춰진 탐욕을 이루는 수단으로 사용하곤 하였다.
하나님의 뜻은 주의 일 곧 복음을 전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아들의 생명을 얻어 영생을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한 영혼 한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여 생명을 얻게 하는 일보다 사람 숫자에 관심이 더 많았고 더 많은 숫자를 통해서 나의 명예와 이름을 내는 일에 더 관심이 있었다.
무엇보다 나는 복음을 안다고 자부하면서도 실상은 복음을 모르는 자였다.
정작 복음은 전하지 않고 다 썩어지고 사라지고 없어질 이 세상의 물질의 풍요함을 추구하며 그것이 하나님의 복인 양 호도하는 자였다.
나아가 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그대로 하면 나에게 오는 물질적 손해나 권위의 손상에 대한 염려로 인하여 나의 뜻을 관철시키곤 했던 자이다.
발람이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가나안 땅을 점령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수 13:22)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살륙하는 중에 브올의 아들 점술가 발람도 칼날로 죽였더라.
나에게도 이런 공의의 심판이 찾아왔다.
그러나 발람과 다른 것은 진멸이 아니라 나를 세우시기 위한 징계였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징계는 나에게 말할 수 없는 고난이었지만 그 고난을 통하여 나는 죽고 오직 주님으로만 살게 된다.
요셉이 형들에 의해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가는 말로 다할 수 없는 모진 고난과 고초를 겪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가히 상상할 수도 없는 불의가 아닐 수 없다.
그런데 성경은 그 일조차 여호와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이라고 증거한다.
(시 105:16-19) 그(주)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그가 한 사람을 앞서 보내셨음이여 요셉이 종으로 팔렸도다. 그의 발은 차꼬를 차고 그의 몸은 쇠사슬에 매였으니 곧 여호와의 말씀이 응할 때까지라. 그의 말씀이 그를 단련하였도다.
이처럼 온갖 고난을 당한 요셉은 나중에 하나님의 언약 안에서 이루어진 일임을 알고 그의 입으로 고백한다.
(창 45:5, 8) 당신들(형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이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를 바로에게 아버지로 삼으시고 그 온 집의 주로 삼으시며 애굽의 통치자로 삼으셨나이다.
이렇게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한 사람 요셉이 주님의 언약을 이루는 도구로 온전히 쓰임 받을 때 주님께서는 요셉 주변에 있는 불의한 자들일지라도 그들을 만지신다.
이는 결국 언약의 한 사람이 주님의 뜻을 알고 그 일에 순종할 때 그의 주변 곧 가족 각자도 주님의 뜻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오늘 바람과 같은 목사요 교사이며 선지자인 우리들은 아무리 주님의 뜻을 거스를지라도 마지막에 금은보화를 거머쥐면 그것이 성공한 것으로 치부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식이다.
이런 차원에서 오늘 나는 정말 주님 안에서 죽기를 갈구한다.
이런 나의 옛 사람은 십자가에 온전히 못 박고 내 안에 계시는 예수로 부요한 자 되어 살기를 원한다.
* 묵상 후 기도
주님...
나의 추하고 거짓된 명분 쌓기는 이제 그만 두기를 원합니다.
목사요 교사라는 지위를 이용하여 나의 이름을 얼마나 많이 높이고 드러냈는지 모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자기의 탐욕에 눈이 멀어 악의 축인 발락을 도우려 한 발람에게 자기가 타고 가던 이성 없는 짐승인 나귀의 입까지 열게 하셔서 그의 죽은 영혼을 깨우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의 군대장관이 좁은 골목에서 칼을 들고 그를 치려할 때 나귀가 이를 알고 그를 피하여 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전혀 깨닫지도 못하면서 오히려 자기를 살려준 나귀를 때리고 나무랄 뿐이었습니다.
이렇게 영이 죽으면 짐승만도 못한 짐승 같은 인간이 되고 마는 것임을 분명히 봅니다.
내가 바로 그런 자임을 고백하오니 나를 불쌍히 여기사 나의 영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소서.
주님의 뜻을 분명히 알고 그 뜻에 순종하는 종이 되기 원합니다.
주의 긍휼을 베풀어 주소서.
예수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