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년은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었다... 라는 구절에서
딴지가 발동한 Freey2k!^^
민증상으로는 세상에 태어나기 전이었지만, 험악하고(?)
아저씨틱한 얼굴은 1970년생이라고 해도 이의가 없을정도
인데.. 이상하구려- -+ 본인은 끝까지 동안이라고 우기
지만..- -
농담이었고... 사실 저도 매직을 '역사상 가장 훌륭한
플레이어' 'Favorite Player' 로 뽑는다는것과, 코비보
다는 에디를 더 좋아하는것.. 밴엑셀-존스-세발로스-켐
벨-오닐의 라인업이 갖춰졌던 96-97 시즌의 라인업이
다시한번 실현되길 기대하는 사람으로서.. 스톤형과 많
은 공통점이 있는데, 어쨌든 계속해서 시리즈 연재해주
길. 후추등의 미디어활동(?)으로 바쁠텐데, 한달이상의
공백기 같은건 같지말고- -
아 마지막으로!
If you smell what the Rock is cookin!
그럼 이만.
p.s : 당시 자유투 에어볼은, 평생 기억에 남을것 같습
니다.- -
: 이제는 NBA 최정상급 슈팅 가드로 성장한.. 어설픈 제 2의 조던이니.. 과대평가된 선수니.. 하는 평가를 지긋지긋할 정도로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것을 극복하고 리그 최고의 사나이 중 하나로 우뚝 선 선수, 코비 브라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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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부터 코비에 대한 저의 얘기를 해볼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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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 코비의 팬입니다. 하지만, 예전 다른 칼럼에서 밝혔던 것처럼 전 코비의 팬이기 이전에 레이커스의 팬이었습니다. 즉, 제가 코비를 좋아하게된 건 그가 뛰어난 재능을 갖췄고, 멋진 플레이를 할 수 있었다는 이유에서가 아니라 그가 단지 노란색과 보라톤의 유니폼을 입고 뛰고 있다라는 이유에서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보다는 에디 존스를 훨씬 더 좋아했었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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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비 브라이언트는 뛰어난 기량에 비해 그동안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지만, 당연히 그 정도라면 비난을 받아야한다라는 당위성 그 이면에 숨겨진 사실들도 만만치 않게 많았습니다. 이번 글을 통해 코비의 루키 시절부터 지금까지의 행보를 돌이켜보고 그가 받고 있는 오해를 해명할 기회를 제공하고 코비 브라이언트를 재평가할 수 있는 기회를 찾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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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튼 각설하고 코비에 대한 저의 얘기들을 시작해보겠습니다. 서론이 좀 길 것 같군요. 경어체는 생략할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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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레이커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했던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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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979년.. 197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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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LA 레이커스 역사상 가장 중요했던 연도는 언제였을까라는 질문에 10에서 9은 1979년도라고 얘기할 수 있다. 1979년도는 레이커스가 80년대 5차례 우승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던 미시간 주립 출신의 매직 존슨이 노란색 유니폼을 입기 시작했던 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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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그 이전에도 레이커스에게 있어서 중요한 연도는 많았을 것이다. 역사적인 33연승과 당시 리그 최다승률을 올렸던 71-72시즌이나 레이커스 프렌차이즈 사상 최초의 우승을 달성했던 1949년 등등 그러나 임팩트 면에서, 그리고 역사의 관점에서 보면 1979년만큼 비중있는 해는 찾아보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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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이유는 NBA 역사상 최초의 빅 맨이라는 조지 마이칸과 하이플라잉 게임의 기원이라 불리우는 짐 폴라드(엘진 베일러를 그 시작으로 보는 사람들도 많으나 실질적으로 하이 플라잉 게임의 세계를 팬들에게 보여준 최초의 선수는 짐 폴라드로 보는 것이 옳을지도..) 등이 활약했던 1950년대 Dynasty 시절 이후 탄탄한 멤버를 보유했음에도 불구하고 무수한 강적들에게 치이면서 이렇다할 성적을 보여주지 못하며 단지 꾸준한 winning team 이라는 이미지를 굳혔던 시기가 20년 이상이나 지속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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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의미에서 1979년은 매우 중요하다. 레이커스가 다시 한 번 Dynasty 를 건설할 수 있었던 계기가 마련된 해였고, 팬들의 우승에 대한 갈증을 풀어줄 수 있었던 그 시작이었기 때문이다. 많은 시카고 불스 팬들이 1984년을 추억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많은 레이커스 팬들은 1979년을 추억한다. (물론, 난 그 때 아직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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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에 레이커스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더욱 자세하게 언급하지는 않겠다. 다만, 한 명의 플레이어가 한 팀은 물론이며 리그 전체에 엄청난 파장을 안겨다줄 수 있었다는 사실 정도는 언급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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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년만에 찾아온 위대한 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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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1996년.. 1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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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커스 팬들에게 있어서 지난 1996년은 1979년의 위대함 못지 않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1996년, 레이커스가 겪었던 크고 작은 변화들은 지난 1979년 이후 NBA 를 지배할 수 있었던 것처럼 훗날 NBA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계기가 마련된 해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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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1996년 여름, 두 명의 젊은 스타들이 헐리우드와 레이커스를 찾은 것이다. 올랜도 매직 출신의 샤킬 오닐, 그리고 로워 매리언 고등학교 출신의 코비 브라이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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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시 레이커스는 FA 로 풀리는 샤킬 오닐이 영화나 음악 등 엔터테인먼트에 지대한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또한 오닐을 얻을 가능성이 매직보다 클 수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레이커스는 모험을 강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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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닐에게 던질 카드를 만들기 위해 레이커스로서는 페이롤의 여유가 필요했고, 당장 쓸만한 롤 플레이어였던 앤쏘니 필러와 조지 린치를 과감히 벤쿠버 그리즐리스에 헐값에 넘기는 극단적인 처분을 해버린다. 여기에 오닐이 들어갈 자리에 굳건히 버티고 있는 블라드 디박을 샬럿 호네츠가 1996년 NBA 드래프트에서 전체 13위로 지명했던 고졸 출신의 코비 브라이언트와 트레이드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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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제 레이커스에게 남은 일은 샤킬 오닐의 영입. 당초 7년에 9천5백5십만 달러를 제시했던 레이커스는 올랜도 매직 측에서 오닐에게 7년에 1억1천5백만 달러를 제시하자 몸이 달아오를 수 밖에 없었다. 여기서 나온 레이커스의 반격이 린치와 필러의 처분이었다. 결국 레이커스는 넘치는 페이롤을 바탕으로 오닐에게 7년 1억2천만 달러의 계약 조건을 제시했다. 물론, 여기에는 암묵적인 추가 조항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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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닐아. 이 곳은 헐리우드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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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커스가 오닐을 얻는데 성공했던 이유는 올랜도 매직과 레이커스의 마인드에서의 차이였다. 매직 측에서 제시한 위의 조건에 대해 많은 매직 팬들은 너무 많은 액수가 아니냐며 불만을 표시한 반면, [무언가]를 아는 레이커스 팬들과 구단 프런트는 그보다 더한 조건을 제시하며 어떻게든 오닐을 빼오고자 시도했고, 결국 성공했다. 여기서의 [무언가]가 무엇인지는 매우 간단하다. 레이커스는 지금까지 리그 최고 수준의 센터없이 우승을 해본 적이 없었다. 엘진 베일러와 제리 웨스트라는 리그 최강의 PF-SG 콤비가 60년대 단 한 차례의 우승도 경험해보지 못하다가 71-72 시즌에 우승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윌트 챔벌린의 힘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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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레이커스는 오닐을 영입하는데 성공한다. 오닐 영입에 성공한 레이커스는 대폭적인 티켓값 인상을 시작했고, 9.5 불의 최저가 티켓값이 21불로 인상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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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이 와중에 우리는 한 가지를 더 눈여겨봐야할 필요성이 있음을 훗날 알 수 있었다. 그 것은 바로 블라드 디박의 대가로 영입된 코비 브라이언트였는데, 당시 많은 레이커스팬들과 NBA 팬들은 이 선수에 대한 기대와 궁금증을 갖고 있었다. 첫 번째 이유, 그는 고졸 출신이라는 점. 두 번째 이유.. 제리 웨스트가 왜 브라이언트를 골랐을까라는 점에 대한 의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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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레이커스의 1996년은 마감된다. 물론,추가로 바이런 스캇의 복귀 등 이 성공되긴 했지만, 생략하도록 한다. 하여튼 이 정도 설명을 통해 요즘 NBA 를 즐기고 계신 팬들은 레이커스에게 있어서 1996년이 왜 1979년 못지않게 중요했던 해인지를 느낄 수 있으시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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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론이 무척이나 길었다. 이제부터 제대로 시작해야겠다. 코비 브라이언트의 이야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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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코비 브라이언트의 루키 시즌 - Airball M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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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비 브라이언트는 슈팅 가드다. 그런 면에서 코비 브라이언트의 루키 시즌은 보잘 것 없을 수 밖에 없었다. 샤킬 오닐의 영입을 통해 유망주 팀에서 단번에 우승후보로 변해버린 레이커스에게 있어서 코비 브라이언트라는 경험없는 젊은 유망주를 함부로 코트에 내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레이커스의 2-3번 라인에는 당대 SF 중에서 최고의 공격력을 갖췄던 세드릭 세발로스와 이미 레이커스가 발굴했던 유망주 에디 존스, 그리고 베테랑 바이런 스캇 등이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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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물론, 시즌 중반 자신의 공격 기회 감소로 인해 불만을 토로했던 세드릭 세발로스가 마침 피닉스 선즈에서 헤드코치 대니 에인지와 마찰을 일으켰던 로버트 호리가 트레이드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레이커스의 2-3번 라인은 보다 가벼워졌지만, 사실 레이커스가 과감하게 세발로스를 트레이드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 첫 번째, 레이커스의 80년대를 주도했던 바이런 스캇은 여전히 훌륭한 베테랑 플레이어였다는 점. 그리고 두 번째, 에디 존스가 이제는 올스타급의 기량을 만개하기 시작했다는 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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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되니 코비 브라이언트가 낄 자리는 여전히 없을 수 밖에 없었다. 대신 그는 엄연한 'The King of the gabage time' 이 될 수 있었다. 나를 비롯한 많은 레이커스 팬들은 레이커스가 3쿼터 막판이나 4쿼터 초반 일찍 승부를 결정내버리기를 원했다. 왜냐하면 그 이후에야 안정된 출전 시간을 보장받을 수 있는 코비 브라이언트가 등장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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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비 브라이언트는 1996년 10월 17일 NBA 시범 경기에서 처음으로 모습을 선보였다. 브라이언트는 2쿼터 도중 코트에 모습을 드러냈고, 첫 득점을 3점슛으로 기록했다. 그리고 틈틈히 코트에 모습을 들이댔던 브라이언트는 멋진 투핸드 슬램과 턴어라운드 점퍼, 훼이크&점퍼 등을 성공시키며 10득점, 5리바운드, 4/4 FG 를 기록하는 발군의 활약을 펼쳤다. 해당 경기에서 play of the game 은 코비의 첫 3점포였고, player of the game 역시 코비 브라이언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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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런데 왜 코비 브라이언트의 시범 경기 데뷔 얘기를 소개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날 경기는 프레즈노에 위치한 셀런드 구장에서 펼쳐졌는데, 경기장은 10000명 가량의 만원 관중이 가득 매웠고.. 코비는 캘리포니아 팬들로부터 어마어마한 함성을 받으며 코트에 등장했고 그의 플레이 하나하나에 많은 팬들은 박수갈채를 아끼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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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튼 이 것이 코비 브라이언트의 루키 시즌이었다. 보고는 싶지만, 자주 나올 수는 없고, 일단 나오면 폭팔적인 플레이와 실수를 동반하지만 그 하나하나는 팬들의 관심이 되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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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비 브라이언트의 루키 시즌을 논하면서 반드시 빼먹어서는 안될 이야기가 있다. 바로 플레이오프 2라운드, 유타 재즈와의 컨퍼런스 세미파이널에서의 에어볼 사건이 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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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커스는 1승 3패로 밀리며 시리즈 탈락 위기에 몰려있었다. 그런 중압감은 경험이 적은 레이커스에게 매우 불리한 요소였다. 5차전에서 레이커스 선수들은 단체로 버벅이기 시작했다. 오닐은 파울 트러블에, 호리는 3쿼터 퇴장, 존스의 부진한 수비와 야투, 캠밸의 부진 등등 레이커스는 총체적 난국이었다. 여기서 델 헤리스는 3쿼터에 코비를 기용하는 강수를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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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과정론적 관점에서 보면 이는 대성공이었다. 브라이언트는 겁대가리없는 플레이로 레이커스의 경기를 리드했다. 브라이언트의 활력에 닉 반 엑셀의 클러치 능력이 발동했고, 어려울 것처럼 보였던 레이커스는 4쿼터 막판까지 경기를 접전으로 몰고 가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코비의 비운은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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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이커스는 경기 종료 10초를 남기고 결승 득점을 뽑을 수 있는 찬스를 맞았다. 그리고 델 헤리스는 활력있는 플레이를 펼친 코비 브라이언트에게 마지막 슛을 지시했다. 브라이언트는 볼을 잡았다. 그 앞에서 재즈 최고의 스윙맨이자 수비수인 브라이언 러셀이 있었다. 코비는 크로스오버와 피벗으로 러셀을 날려버리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점퍼를 시도했다. 그러나 이미 눈치채셨겠지만, 그 슛은 에어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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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팀은 연장전에 돌입했고, 브라이언트의 에어볼 쇼는 계속되었다. 코비는 활력넘치는 움직임으로 다양한 찬스를 맞았으나 두 번의 점퍼가 에어볼로 연결되었다. 그리고 경기 막판, 3점차로 뒤졌던 레이커스의 에디 존스는 회심의 동점 3점포를 노렸으나 그 것은 불발되었다. 그러나! 레이커스는 기적적으로 공격 리바운드를 얻어내는데 성공했고 그 볼은 코비의 손으로 연결되었다. 코비는 다시 한 번 동점 3점슛을 시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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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그 것마저 에어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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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비는 이 날 레이커스의 역적이 되었고, 이는 훗날 안티 코비 멤버들의 코비 씹기 주 안주가 되었다. 하지만, 그 것은 과연 정당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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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포츠는 결과론이고 결과만큼 중요한 요소는 없다. 한 팀이 어설픈 과정으로 승리했다고 가정해보자. 선수들과 팬들은 승리했다는 사실 자체에 매우 좋아한다. 하지만, 헤드코치는 뭔가의 찝찝함을 안고 선수들을 다그쳐서 다시는 그런 경기를 펼치지 않게끔 유도한다. 그러나 그런 역할은 코칭 스태프의 전유물일 뿐이다. 누구나 일단 승리하면 기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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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코비의 경우는 달랐다. 레이커스가 막판까지 재즈와 경쟁할 수 있었던 것, 레이커스가 재즈와 연장전까지 갈 수 있었던 동기를 제공해준 것은 바로 코비 브라이언트였다. 그러나 그는 막판 결정적인 삽질로 인해 역적이 되었고, 그 것이 그를 비난의 대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러나 코비가 없었으면 그 날 경기는 재즈의 one side game 이 될 공산이 컸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혼자서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던 게 정당했던 것이었을까? 결과론.. 그 것이 전부라면.. 그렇다면 할 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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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여튼 코비 브라이언트의 루키 시즌은 이렇게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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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만간 스톤콜드의 코비 이야기 두 번째 편을 올려놓도록 하겠습니다. 이후 정말 글이 길어질 것 같아서 나눠올리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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