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버 라이닝(silver
lining)은 구름의 흰 가장자리를 일컫는데 역경 가운데에서도 볼 수 있는 희망적인 면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최근 아카데미 여우 주연상을 받은 영화의 제목에서도 '실버 라이닝'은 인생에서 깊은
상처를 입은 두 주인공에게 한 줄기 희망을 부르는 긍정의 단어다.
제목이 이런
영화는 보지 않아도 해피 엔드로 끝날 것임을 알 수 있다.
“Every
cloud has a silver lining.”은 어려운 때가 지나면 좋은 날이 오고,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낙관적인 면을 볼 수 있으므로 절망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로
쓰인다. 역경은 머리 위를 지나는 먹장 구름 같으나 구름을
자세히 살펴보면 흰 가장자리에서 빛나는 태양을 볼 수 있는 것처럼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Is there a silver lining?"은 “어려움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겠느냐?”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그런데 “Every silver lining has a cloud.”라는 표현도 있다. 아무리 좋은 상황일지라도 악화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의미인 듯하다. 같은 하늘을 쳐다보고도 낙관적으로도 비관적으로도 볼 수 있는 게 재미있다.
사람들은 오래전부터 세상일이란 게 다 즐거움과 어려움이 돌고 도는 이치를 가졌음을
알았기에 “지금 잘 나간다고 잘난 척할 것도 없고, 지금 당장 안 좋은 일이 많다고
크게 실망할 필요도 없다.”는 뜻으로 흥진비래(興盡悲來)나 고진감래(苦盡甘來)라는 말로써 잘 나갈 때는 자신을
경계하고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용기를 얻고자 했을 것이다.
유대인들의 경전인 <미드라쉬>에 담긴 ‘다윗왕의 반지’에도 비슷한
글귀가 있다. 다윗 왕은 어느 날 궁중의 세공인에게 “나를 위한
아름다운 반지를 만들어라. 거기에 내가 전장에서 크게 승리해도
교만하지 않게 하고, 큰 절망에 빠져도 낙심하지 않게 큰 용기와 희망을
줄 단어를 새겨라.”라고 명령했다.
그러자 세공인은
고민을 거듭하다가 현명하기로 이름난 솔로몬 왕자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때 왕자가
이와 같은 글귀를 알려줬다고 한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
아시시의 프란치스코 성인의 평화를 구하는 기도를 보면 그분은 미움이라는 구름 뒤에
있는 사랑이라는 햇빛을, 다툼이 있는 곳에 용서가,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가, 의혹이 있는 곳에 신앙이,
그릇됨이
있는 곳에 진리가,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이, 어둠에 빛이,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이 있음을 보여주는 실버 라이닝 같은 존재가 되고자 했던 것 같다.
작년 이맘 때였다. 정기점검을 받으러 주치의를 만났더니 엑스 레이를 찍어보라고 했다. 내 나이에는 별 이상이 없어도 이것저것 점검해 볼 필요가 있다는 그의 권유에 따라
동네 대학병원을 찾았다. 방사선 기사는 인도계 아가씨였는데
어찌나 아름다운지 바라보면 눈이 부실 정도였다.
엑스레이 촬영하고 며칠 후 주치의에게서 연락이 왔다. 폐에 3.8mm
되는 작은
혹이 있다는 얘기였다. 정밀검사를 하더라도 너무 작아서
양성인지 악성인지 판단하기 어려우니 일 년쯤 후에 다시 찍어보고 크기에 변화가 없으면 별문제가 없는 거고 커지면 다시 정밀 검사를 받아봐야 한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니 당연히 기분이 나빴다. 몸에 혹이 있다는데, 그것도 암 종양일지도 모른다는데 기분이 좋을 리가 있겠는가?
그 후 며칠 동안 성당에서 신자 중에 의사를 만날 때마다 물어보았더니 다들 의견이
달랐다.
어떤 산부인과 의사는 “작아도 무시하면 안 됩니다. 그 나이에 그런 종양은 대개 암이니 당장 정밀 검사를 받아 보세요.”라고 겁주는 말을 했고,
어떤 내과 의사는 “신경 쓸 거 없어요. 그 나이에 엑스레이 찍어보면 그 정도 종양은 누구에게나 대개 발견됩니다. 일 년 후에 다시 찍어 보세요.”란 소견을 밝혔고,
학교 후배는 “미인을 보더니 폐 세포가 한때 과민 반응을 보여서 뭉친 겁니다. 다음에는 다른 방사선 기사더러 찍어달라고 하시지요.”라며 히히거렸다.
나는 세 사람 의견 중에서 후배의 말이 가장 그럴싸했다.
이런저런 얘기를 들어도 당장 정밀검사를 해봐야 할지, 아니면 일 년 후에 다시 촬영해보고 결정해야 할 지 혼란스럽기만 했다. 후배 말이 가장 맘에 들기는 했지만, 산부인과 의사 말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이럴 때는 실버 라이닝을 보자. (그새 이 표현의 의미를 잊은 분은 이 글 첫머리를 다시 보시길.) 일 년 사이에 암세포가 급속히 증식하여 죽게 되는 일은 없겠지.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주님이 부르시면 가면 되지 뭐. 그렇게 마음먹으니 별것도 아닌 일에
마음을 썼구나 싶었다.
그러고 일 년이 지났다. 주치의를 만나 엑스레이를 찍어 보게 처방전을 써달라고 했더니 그도 까맣게 잊고 있었던지 내 파일을 뒤적거리더니
그제야 기억이 났다는 듯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웅얼웅얼 어쩌고저쩌고 몇 마디 하더니 조그만 처방전 용지에 알아보기도 어려운 꼬부랑 글씨를 끄적거려서
내밀었다. 아이고, 내 목숨은 내가 챙겨야지 동네 의사 손에 맡기는 게 잘못이지.
처방전을 손에 쥐고 동네 대학병원을 찾았다. 작년에 만난 예쁜 방사선 기사는 아직 있을까? 엑스레이를 찍으러 나타난 기사는 바로 그 아가씨였다. 작년에 처음 보았을 때보다는 눈이 덜 부셔서 몸이 과민반응을 보이지 않아 엑스레이
촬영 결과가 잘 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미인을 다시 만나니 반갑기는 했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도록 주치의에게서 연락이 없어서 내가 전화했다. 내 목숨이 달린 일인데 의사는 참 무심한 것 같았다. 전화를 받고서야 서류를 뒤적거리는지 참 오래도 기다리게 하더니 한 마디 툭 던졌다.
“별 이상이 없다는데요.”
“혹이 커지지는 않았어요?”
“그대로라는데요.”
원 참,
의사가 싱거운
건지, 무관심한 건지 자세한 설명도 없다. 그동안 별것도 아닌 일에 마음 졸였나 보다. 예쁜 방사선 기사를 또 만날 일이 없으니 아쉽기는 하지만 기분은 옛날에 중국인 평론가
김성탄이 쓴 다음 구절처럼 개운했다.
“한 달 동안이나 꼬박 장마가 들어서 주정뱅이나 환자 모양으로 아침이 되어도 일어나지를
않고 자리에 누워 있곤 했다. 그러자 갑자기 날이 활짝 개었음을
알리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부리나케 일어나서 침실의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여니, 아름다운 햇볕이 쨍쨍 내리쬐고 있고, 나무들은 마치 목욕을 하고 난 것처럼 싱싱하기 이를 데 없다. 아아,
이 또한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2013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