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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ING_내가된다는것 '들어가는 말' 옮김
몇 년 전, 나는 인생에서 세 번째로 소멸했다. 간단한 수술을 받느라 뇌에는 마취제가 가득 찼다. 온통 암흑이었고, 세상에서 떨어져 무너지는 듯했던 느낌을 기억한다.
전신마취는 잠이 드는 상태와 다르다. 사실 그래야 한다. 수술 중 마취되지 않고 잠이 든다면 수술칼이 닿자마자 깨버릴 것이다. 깊은 마취 상태는 의식이 전혀 없는 혼수상태나 식물인간 상태와 비슷하다. 깊은 마취에 빠지면 뇌의 전기적 활동이 대부분 사라지는데, 이런 일은 깨어 있든 잠들어 있든 일상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는다.
마취과 의사가 환자의 뇌에 변화를 주어 어렵지 않게 깊은 무의식 상태에 들어갔다 나오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은 현대 의학의 기적 중 하나다. 마취는 일종의 변신이자 마술이며, 사람을 사물로 바꾸는 기술이다. (...)
전신마취는 뇌나 마음에만 작용하지 않는다. 우리의식에도 작용한다. 마취는 머릿속 신경 회로의 섬세한 전기화학적 균형을 바꿔 '무언가가 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기저 상태를 일시적으로 사라지게 만든다. 이 과정에는 과학과 철학의 가장 큰 미스터리가 있다.
우리 뇌는 아주 작은 생물학적 기계인 수많은 뉴런의 활동을 결합해 의식적 경험을 만든다. 뇌가 만드는 의식적 경혐은 지금 이곳에서 일어나는 당신의 의식적 경험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째서 우리는 삶을 일인칭으로 경험할까? (...)
어린 시절, 욕실 거울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내가 된다'는 그 순간의 경험도 언젠가는 끝나고, 그러면 '나'는 죽는다는 사실을 난생처음 깨달았다. 여덟아홉 살 때쯤이었을 터라, 어린 시절의 다른 기억과 마찬가지로 그다지 정확하지는 않다.
하지만 내 의식에 끝이 있다면 그것은 나를 이루는 내 몸과 뇌라는 물리적 물질성과 어떻게든 연관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그 후 나는 이 미스터리와 씨름해왔다.
(...) 길지만 뜻밖에 귀한 우회로에 접어든 나는, 이후 태평양 연안 샌디에이고의 신경과학 연구소에서 6년간 일한 후, 마침내 직접 의식의 뇌 기반을 조사할 기회를 얻었다. 그곳에서 나는 노벨상 수상자 '제럴드 에델만'과 함께 연구했다. 그는 의식이라는 주제를 연구함에 있어 과학에 초점을 맞추는 정당한 관점에서 보는 가장 중요한 인물 중 한 명이다.
지금 나는 영국의 해안 도시 브라이턴 근처 사우스다운스의 완만한 녹지 언덕에 자리한 서식스대학교 새클러 의식과학 연구 센터의 공동 책임자로 10년 넘게 재직 중이다. (...)
당신이 과학자든 아니든 의식은 중요한 미스터리이다. 의식적 경험은 우리에게 '전부'다. 의식적 경험이 없다면 세상도, 자기도, 내부도, 외부도 없다.
(...) 머지않은 미래에 내가 일생일대의 거래를 제안한다고 상상해 보자. (미리 말해두지만, 이는 철학적 문제다.) 당신의 뇌를 '기계 뇌'로 대체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도 차이를 구별할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문제가 있다. 나 역시 실제 뇌에서 어떻게 의식이 발생하는지 알 수 없으므로, '당신이 제안을 받아들인다면' 의식적 경험을 하게 된다고 장담할 수 없다.
의식이 뇌 회로의 동력이나 복잡성 또는 기능적 능력에만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당신은 이 제안을 받아들이겠지만, 의식이 뉴런 같은 특정 생물학적 물질에 의존한다고 생각한다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물론 기계 뇌는 모든 면에서 원래 뇌와 똑같이 작동할 것이므로, 제안을 받아들여 새로 태어난 당신에게 의식이 있는지 질문하면 당신은 그렇다고 대답할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대답하더라도 당신에게 삶이 더는 일인칭이 아니라면 어떨까?
그렇다면 당신은 거래를 거절할 가능성이 크다. 의식이 없다면 5년을 더 살든 500년을 더 살든 큰 차이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는 동안 당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테니 말이다.
철학 논쟁을 제쳐두더라도 의식의 뇌 기반을 이해하는 일은 실질적으로도 중요하다. (...)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어린 시절부터, 좀 더 명확하지만 환상 같기도 하고 분명 전반적으로 명료하지는 않은 성인기를 거쳐, 신경 퇴행성 쇠퇴가 시작되어 점진적으로 자기가 해체되는 노년기에 이르는 동안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변한다.
인생의 각 단계에 존재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단일하고 독특한 의식적 자기(영혼?)가 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사실 의식이라는 미스터리의 가장 매혹적인 측면 중 하나는 자기self의 본질이다. 자의식 없이도 의식이 가능할까? 그렇다 해도 자의식의 여전히 중요할까?
이런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은 우리가 세상, 그리고 세상 속 생명을 이해하는 방식에 여러 의미를 준다. 의식은 언제부터 발달하기 시작할까? 태어날 때부터일까? 태아도 의식이 있을까? 영장류나 다른 포유류뿐만 아니라 문어 또는 전혀 다른 생물, 이를테면 선충류나 박테리아 같은 단순한 유기체도 의식이 있을까? 대장균이나 농어 같은 것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무언가가 있을까? 미래의 기계는 어떨까?
이제 우리는 인간을 넘어선 새로운 인공지능의 능력뿐만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 대해 윤리적 태도를 보여야 할지 아닐지, 만약 그래야 한다면 언제부터 그래야 할지 근심해야 한다. 이런 질문은 영화<2001 : 스페이스 오디세이>에서 주인공 데이브 보우먼이 그저 기억 저장 장치를 하나씩 빼내 인공지능 할의 성격을 파괴하는 장면을 볼 때 느꼈던 묘한 연민을 떠올리게 한다.
리들리 스콧의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 나오는 복제인간들의 처지를 볼 때 느끼는 더 큰 연민은 의식적 자기를 경험하는 데 있어 '살아 있는 기계 living machines' 라는 본질의 중요성에 대한 실마리가 된다.
이 책은 의식의 신경과학을 다룬다. 주관적 경험이라는 내면의 우주가 뇌와 몸에서 펼쳐지는 생물학적·물리적 과정과 어떤 연관이 있고, 이 과정을 통해 내면의 우주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지 알아본다.
의식의 신경과학이라는 주제는 내 연구 경력 전반에 걸쳐 나를 사로잡아 왔으며, 이제 희미한 해답의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이 희미한 빛은 세상과 그 속에 사는 우리의 의식적 경험에 대해 사고하는 방법을 이미 극적으로 바꿔놓았다. 의식을 사고하는 방식은 삶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의식과학은 다름 아닌 우리가 누구인지, '내가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당신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인지 알려주는 무언가가 대체 왜 존재하는지 설명한다.
의식은 인간 게놈을 해독하거나 기후변화라는 현실을 파악하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해결'되지는 않을 것 같다. 과학 지식이 번뜩 떠오른 깨달음으로 단번에 진보한다는 믿음은 간단하지만 그다지 정확하지 않은 신화에 불과하다. 의식의 미스터리는 그렇게 풀리지 않을 것이다.
의식과학은 의식의 다양한 속성이 머릿속 뇌라는 신경 웨트웨어wetware의 작동과 어떻게 연관되고, 이에 따라 어떻게 달라지는지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적어도 의식과학은 의식이 애초에 우주의 일부가 된 이유를 설명하는 것을 일차적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된다. 의식의 미스터리는 감추면서 뇌가 이처럼 복잡하게 작동하는 이유를 이해하는 것을 목표로 삼아서도 안 된다.
이 책에서는 뇌와 신체 메커니즘 측면에서 의식의 속성을 설명해 의식이 존재하는 심오한 형이상학적인 이유와 존재 방식의 신비를 점차 밝힐 수 있음을 보이려 한다.
앞서 나는 뇌가 고깃덩어리로 만들어진 컴퓨터가 아니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웨트웨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뇌는 전기적 네트워크이자 화학적 기계다.
뇌는 환경과 상호작용하는 살아 있는 신체 일부다. 생물물리학적 메커니즘 측면에서 의식의 속성을 설명하려면 뇌와 의식의 마음을 '체화embodied'되고 '내재된embedded' 시스템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나는 우리에게 가장 의미 있는 의식의 측면일 '자기"에 대해 새로운 개념을 제안하고자 한다. 17세기 데카르트로 거슬러 올라가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는 전통적 관점에서는, 인간이 아닌 동물에게는 행동을 유도하는 이성적 마음이 없으므로 의식적 자아도 없다고 본다. 동물은 자신의 존재를 숙고할 능력이 없는, 살점으로 된 자동장치인 '동물기계beast machines'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런 의견에 동의하지 않는다. 의식은 지능이 있다는 것보다 살아 있다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 우리는 바로 동물기계이기 때문에 '의식적 자기'가 된다. '당신이 된다'거나 '내가 된다'는 경험은 뇌가 신체의 내적 상태를 예측하고 제어하는 방식에서 나온다.
자아의 본질은 이성적 마음도 비물질적 영혼도 아니다. '자아의 본질'은 모든 자기 경험과 의식적 경험의 기초가 되는, '살아 있다'는 '단순한 느낌'을 뒷받침하는 깊이 체화된 '생물학적 프로세스'다. '당신이 된다'는 것은 바로 '신체'와 관련이 있다.
이 책은 네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부에서는 의식을 과학적으로 다루는 접근법을 설명한다. 여기서는 의식의 '수준', 즉 누군가가 혹은 무엇이 얼마나 의식적일 수 있는가 하는 문제, 그리고 의식을 '측정'하려는 시도가 어떤 길을 걸어왔는지 살핀다.
2부에서는 의식의 '내용'을 다루며 우리가 무엇을, 언제 의식하는지 설명한다.
3부에서는 내면에 초점을 맞추어 자기와 의식적 자아가 일으키는 '다양한 경험'을 다룬다.
마지막 4부 '또 다른 것들'에서는 의식을 새롭게 이해해 다른 동물의 의식과 의식 있는 기계의 가능성을 살펴본다.
이 책을 읽고 나면 세상과 자기에 대한 우리의 의식적 경험이 살아 있는 우리 몸에서, 몸을 통해, 몸 때문에 발생하는 뇌 기반 예측, 즉 '제어된 환각controlled halluciations'의 여러 형태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신경과학자들 사이에서는 다소 그 명성이 퇴색했지만,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여러 면에서 옳았다. 프로이트는 과학의 역사를 되돌아보며, 발견 당시 거센 저항에 부딪혔지만 중요한 과학적 진보를 이룬 세 가지 '충격'을 거론했다.
인간 중심의 '자기 중요성self-importance에 이의를 제기한 충격들이다.
첫 번째는 지구가 태양 주위를 돌며 그 반대는 아니라는 지동설을 주장한 니콜라우스 코페르쿠스다. '지동설'은 인간이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우리는 광활한 저 어딘가의 작은 점, 심연의 창백한 푸른 점에 지나지 않는다.
두 번째는 인간과 다른 모든 생물의 조상은 하나라는 사실을 밝힌 찰스 다윈이다. 놀랍게도 어떤 사람들은 아직도 이 사실을 거부한다.
약간 자기 자랑 같지만 프로이트가 인간 예외주의에 대한 세 번째 충격으로 거론한 것은 '인간의 정신적 삶'을 의식적이고 이성적으로 통제할 수 있다는 생각에 도전하는 '무의식적 마음'에 대한 '자신의 이론'이었다.
세부적으로는 다소 빗나갔을지 모르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은 마음과 의식에 대한 자연주의적 설명이 결정적으로 인류의 지위를 끌어내리리라 지적했고, 이런 프로이트의 설명은 전적으로 옳았다.
이처럼 우리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한 것은 환영받을만한 일이다. 자신을 새롭게 이해하면 우리가 자연에서 멀어진 존재가 아니라 '자연의 일부'라고 보는 새로운 능력과 경이로운 감각을 얻게 될 것이다.
우리의 의식적 경험은 신체나 세상과 마찬가지로 자연의 일부다. 그리고 삶이 끝나면 의식도 사라진다. 이렇게 생각하면 나는 전신마취쥐를 받았던(경험하지 못한 경험)을 다시 떠올리게 된다.
망각은 위안이 되지만, 그래도 망각은 망각이다. 소설가 줄리언 반스는 '죽음을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다음과 같이 완벽하게 표현했다. "의식의 끝이 온다고 겁먹을 것은 아무것도 없다. 정말 아무것nothing도 없다."
#책에서_들어가는말_옮김
#내가된다는것_저자_아닐_세스_옮긴이_장혜인_흐름출판
* 축약해서 옮겨 보려 했으나, 거의 다 옮기게 되었다. 책 본문을 이해하는 데 이 '머리말'을 다시 상기할 필요가 있어서였다. 띄엄띄엄 읽다 보니 읽은 부분이 또 기억이 안 난다. ㅎㅎ. 이어서 쭉 읽어야 되는데 생소한 분야라서 더 그렇다. 매일 같이 있는 뇌이고 의식인데도 그렇다. 뇌와 의식을 알아가는 과정이 참으로 지난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