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물전 망신은 꼴뚜기가 시키고, 과일전 망신은 모과가 시킨다는 말이 있지요. 모과를 먹을 수 없는 걸 안타까워하는 마음은 알겠지만 사실 모과 자체가 그리 울퉁불퉁하다거나 못생겼다는 생각은 동의하기 어렵답니다. 다른 과일들도 모질게 큰 녀석들은 그런 모습을 종종 보여주기 때문이지요. 아마도 누구라도 혹할 만큼 매혹적인 향기를 지녔음에도 막상 먹을 수는 없으니 그 실망감이 모과에게 그런 불명예를 쓰게 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모과 꽃을 보게 되면 한번 더 놀라게 되는 건 비단 저뿐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모과 꽃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면 '와, 이렇게 이쁜 게 모과 꽃이라고요?' 하면서 반문하면서 저마다 놀라움을 드러내곤 하거든요.
게다가 이렇게 어여쁜 분홍빛 꽃이라도, 끝끝내 자기만의 아름다움을 뽐내려고 애면글면 매달려 있지 않고 시간이 지나면 미련 없이 떨어져버리고 한가운데 탐스런 열매를 키우는 모습까지 보게 되면 더 감탄을 하게 됩니다.
선진국으로 갈수록 출산율이 떨어지는 게 일반적인 현상이라지요. 삶이 어려울 때 다산을 통해 생존율을 높이려는 전략은 하등생물부터 고등생물까지 공통된 전략일 겁니다. 그 말을 뒤집으면 '삶에 여유가 생기게 되면 미래에 대한 대비보다 현재를 더 오래 누리려는 마음이 앞서게 된다.'는 말이 되겠지요. 예전 어머니들의 모습과 요즘의 여성들 외모를 생각해 봅니다. 손톱이 길게 기른 여자는 게으른 여자, 화장을 하면 술집 여자라는 말을 공공연히 할 정도로 여자가 치장하는 것을 터부시하던 예전을 생각하면 요즘의 상황은 그야말로 상전벽해라는 생각이 듭니다.
어느 것이 맞느냐 하는 질문은 의미가 없겠지요. 역사의 흐름은 '옳고 그름'이 아니라 '다름'의 문제일 뿐이며, 변화를 아쉬워한들 변화를 막을 수도 없으니까요. 다만 이렇게 아름다운 분홍빛 꽃을 갖고 있지만 때가 되면 '가야할 때가 언제인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이형기 <낙화>의 한 구절)'처럼 미련 없이 떨어져 버리고 다음 세대를 위해 자리를 내어주는 모과를 보면서 고금의 다름을 생각해 볼 따름입니다.
모과의 국어사전 풀이는 목과( 木▽瓜)에서 파생된 말로 보고 있습니다. 한자대로 풀이하면 '나무에서 열리는 외'라는 뜻이겠지요. 오늘날의 길죽한 오이말고 참외 같은 종류를 생각하면 모양도 얼추 비슷하게 느껴집니다.
2023.3.31. 부산 해운대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