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치 ; 제주시 영평동 2596. 기와1길과 기와7길이 만나는 세거리. 태고원 동쪽 밭. 비석에는 황사평이라고 새겨져 있다. 다음 지도에는 송대장묘라는 지명 표시가 있으나 실제 묘에서 남동쪽으로 600m 가량 떨어진 곳에 표시되어 있다.
유형 ; 묘
시대 ; 일제강점기
송두옥은 조선 말기 제주판관을 역임한 무신이다. 철종1년(1850)~1922년.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귤헌(橘軒). 제주목 성안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송신(宋藎), 형은 위죽당(爲竹堂) 송지옥(宋之玉)이다. 무과에 급제하였으며 구한말 18척의 대선단(大船團)으로 교역을 한 당대의 부호이다.(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대정현감을 지냈으므로 ‘송대정’이라고 불렸으며 이게 와전되어 ‘송대장’이라고 하기도 했다.
고종27년(1890) 3월8일 명월만호(明月萬戶)를 거쳐, 마종문(馬鐘文)의 후임으로 정의군수로 부임하였다.(디지털제주시문화대전) 승정원일기를 보면 송두옥은 고종27년(1890) 12월28일부터 고종28년(1891) 8월23일까지 정의현감으로 재직했다. 정의현감 재임시에도 녹봉을 덜어내어 폐단을 바로잡아서 치적이 매우 우수하다는 평가를 받았다.(승정원일기 고종28년8월19일)
고종29년(1892) 7월 안승관(安承觀)의 후임으로 제주판관에 부임했다가 같은 해 9월에 이임했다. 짧은 기간 재임하면서 자신이 받은 급료를 내어놓고 낡은 폐단을 개혁하여 주민들이 그의 송덕비(소재불명)를 세웠다.
고종30년(1893) 5월부터 1894년 2월까지 하흥도(河興道)의 후임으로 대정군수로 재임하였다. 승정원일기에는 고종30년(1893) 4월6일 대정현감으로 결정되었고, 신병을 이유로 사임을 청하니 고종30년(1893) 9월29일 체직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재임 중인 1893년 가을 기근이 심해 주민들이 기아 상태에 빠지자 1894년 봄에 자기 재산으로 쌀 100석을 내놓아 굶주린 주민들을 진휼하였다. 또한 대정향교를 보수하였다.
송두옥은 그의 업적으로는 ‘각리적비전 연름식리 갑오춘 이소미일백석진민 향장이세찬 존본식리 성전수보개와’(各里籍費錢 捐廩殖利 甲午春 以小米一百石賑民 鄕將吏歲饌 存本殖利 聖殿修補改瓦)라 하여 각 마을의 호적 작성을 위한 비용으로 관아에서 주는 녹을 덜어서 이자를 놓았고 고종31년(1894) 봄에는 좁쌀 1백 섬으로 백성을 구휼했는가 하면 향 장리의 설날에 차려서 대접하는 음식으로 이자를 놓아 그 돈으로 성전(향교)의 기와를 보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고종31년(1894) 9월19일 승정원일기에는 "전 현감 송두옥(宋斗玉)은 미(米) 100석을 스스로 준비하였고, 본주의 판관 채귀석(蔡龜錫)은 봉미(俸米) 60석은 출연하고 전미 70석은 스스로 준비하였습니다. 실질적인 시혜와 큰 업적이 되기에 일체 거론하였습니다. (중략) 이러한 때에 자원하여 바쳐 진휼에 보태고 의로운 마음으로 곡식을 출연한 것은 더욱 가상한 일이니, 전 현감 송두옥은 가자(加資=正三品 通政大夫 이상의 품계를 올림)하고, 본주의 판관 채귀석은 승서(陞敍=벼슬을 올림)의 은전(恩典)을 시행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라는 기사가 있다. 정의현감, 제주판관, 대정현감 직에서 모두 신병을 이유로 사임했다.
광무2년(1898) 1월 방성칠이 민란을 일으키자 전 현감 홍재진과 함께 창의소(倡義所)를 설치하고 의병을 모아 주모자 방성칠 및 모사 강벽곡(姜辟穀)을 체포·주살하고 민란을 평정하였다. 이 공로로 홍재진(洪在晋)·김남윤(金南胤) 두 명과 함께 가자(加資)되어 품계가 올라갔다. 이에 대해 조선왕조실록 고종35년(1898=대한광무2년) 6월 23일 기사에는
의정부 참정(議政府參政) 윤용선(尹容善)이 아뢰기를,
“방금 내부대신(內部大臣) 박정양(朴定陽)의 조회(照會)를 보니, ‘찰리사 겸 제주목사(察理使兼濟州牧使) 박용원(朴用元)의 보고(報告) 내에, 「본목(本牧)에서 변란을 일으킨 우두머리 방성칠(房星七)이 소란을 일으켰을 때 창의(倡義)한 여러 사람에게 포상(褒賞)을 베풀어 주소서.」하였습니다.
전 현감(前縣監) 홍재진(洪在晉), 전 현감 홍재심(洪在深) 형제는 창의하여 집안을 돌보지 않고 백성들을 불러 모아 역적을 토벌하였으며, 전 현감 송두옥(宋斗玉)과 그의 아들 송석진(宋錫珍), 출신(出身) 송윤옥(宋允玉)의 부자 형제는 집안을 돌보지 않고 창의하였으며, 출신 김남윤(金南胤)은 백성들을 이끌고 싸워 인신(印信)을 찾아왔으니, 매우 가상합니다. 모두 마땅히 포상해야 하는데 은전(恩典)에 관계되어 감히 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삼가 성상의 재결을 기다립니다.’ 하였습니다.
전 주사(前主事) 김희두(金熙斗)는 목사를 맞이하여 돌아왔으며, 전 첨사(前僉使) 양제하(梁濟夏), 전 주사 김재용(金在鏞)은 성(城)을 지켰고, 전 낭청(前郎廳) 오순영(吳順泳), 전 오위장(前五衛將) 고재용(高在瑢), 전 사과(前司果) 강시형(姜時馨)은 혹은 성을 지키기도 하고 혹은 역적을 토벌하기도 하였으니, 모두 해목(該牧)으로 하여금 넉넉하게 시상(施賞)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제칙(制勅)을 내리기를,
“아뢴 대로 하고, 홍재진, 송두옥, 김남윤은 모두 가자(加資)하라.”
하였다. 이 때 제주목사 이병휘(李秉輝)는 책임을 물어 파면되었다.
1901년 다시 신축민란이 일어나 제주성이 함락되자 홍재진과 함께 목포로 피난하기도 했다.(속음청사)
호방한 성품과 뛰어난 문장, 그리고 남다른 기지로 당대의 지방 유림을 주름잡았던 사람이다. 또한 힘이 장사여서 ‘송대장(宋大將)’이라고도 불렀다. ‘송대정(宋大靜)’이라면 제주도내에서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또한 ‘전라도갑부’로 이름을 전할 정도로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제주시 한일은행 자리에 높은 누각을 지어 도내의 많은 유림들과 선비들을 초대하여 시회를 즐기며 호화롭게 놀기도 좋아했었다.(제주도의 문화유산 67쪽) 1907년 사립의신학교 설립 당시에도 총모금액 12,303,000원 중에서 송두옥 혼자서 200원을 쾌척하였다.(제주교육사 196쪽)
김윤식은 『속음청사』에서 송두옥에 대하여 ‘송대정(宋大靜)은 제주읍 사람으로 나이는 40여세, 너그럽고 후하여 민심을 얻고 있다. 제주 대정 정의 3읍 관(官)을 두루 역임했고 집안이 부유하나 남의 원망을 사지 않는다.’라고 하였다.
무덤은 일반적인 크기의 2배 정도로 크고 산담도 폭이 2.5m 정도로 넓다. 작은 동자석이 좌우에 하나씩 있고 다른 石物은 없다. 비석에는 嘉善大夫行秘書院監丞礪山宋公斗玉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監丞이란 장관 집사를 보좌하며 업무를 감독하여 때에 늦지 않게 재촉하는 일을 맡은 관원을 말한다. 비석은 화강암 종류로 보이며, 비석에 쓰인 글씨가 매우 단아하여 유명한 서예가가 쓴 것으로 추정되지만 글 지은이나 글쓴이를 밝히지 않았다. 묘비를 세운 이는 次子 錫敦이다.
《작성 1204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