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녘글밭] 12.17(월) '호찌민의 베트남에 박항서는'
지난 15일, 박항서 감독이 이끄는 베트남 축구 대표팀은 하노이에 있는
미딘 국립경기장에서 열린 스즈키컵대회 결승 2차전에서
말레이시아를 1-0으로 누르고 10년 만에 승리를 차지했읍니다.
원정 1차전에서 2-2 무승부를 거뒀던 베트남은 1, 2차전 합계 3-2로 우승을 차지합니다.
'박항서 마술'로 불리는 박항서의 작전은 승리로 결실을 맺었읍니다.
박항서는 지난해 10월, 베트남 대표팀을 맡아 1년 2개월 만에
동남아시아 최고 축구대회인 스즈키컵에서 우승으로 이끌었읍니다.
붉은 옷의 4만여 관중들은 우승의 순간, 일제히 환호성을 질러 그 기쁨을 감추지 않았읍니다.
국내에서도 21.9%라는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할 정도로 관심을 모았으니까요.
경상남도 산청 시골 소년이었던 박항서는 환갑이 가까운 나이에 거머쥔, 멋진 삶의 승리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히딩크 감독 곁에서 4강 신화를 만들었던 박항서의 재평가이기도 합니다.
2008년 대회 이후 10년 만에 동남아시아 정상을 탈환한 베트남 대표팀의 박항서 감독은
'베트남 축구의 영웅'으로 베트남 축구 역사에 또렷하게 남게 되었읍니다.
이제, 이런 베트남의 역사를 잠시 둘러 보기로 하겠읍니다.
베트남은 기원전 200년쯤에 세워진 남베트 독립 왕국은 중국의 2차례의 정복을 물리치고
양분되었다가 1802년에 통일됩니다.
하지만 프랑스의 식민지로, 속령으로 지배를 받게 됩니다.
그 후, 1945년 독립을 선언하고, 프랑스와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을 치러렀읍니다.
이 전쟁은 1954년 5월 7일 베트남의 승리로 끝납니다.
제네바 협정에 따라 베트남은 소련이 지원하는 북부와 미국이 지원하는 남부로 분할됩니다.
그 후, 북베트남의 게릴라 활동과 남베트남의 친 공산주의자들의 활동은 더욱 격렬해 집니다.
이에 미국은 통킹만사건을 조작하여 개입하게 되어 베트남 전쟁을 일으킵니다.
하지만 1973년 휴전이 되고, 미군은 철수합니다.
1975년, 북베트남은 남베트남을 공격합니다.
1976년 7월 2일, 남베트남은 드디어 붕괴되어 베트남사회주의공화국으로 나라는 통일됩니다.
여기에 호찌민이 있읍니다.
박헌영이 선물한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늘 머리맡에 두고 살았던 호찌민은
1930년,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당합니다.
1941년, 베트남에 돌아와 베트남독립동맹(베트민)을 결성합니다.
이때부터 숨을 거두는 날까지 제국주의를 상대로 끝없이 전쟁을 치릅니다.
결국, 일본에 이어 옛 지배자인 프랑스, 세계 패권국인 미국을 물리칩니다.
나라 밖에서는 강철같은 의지의 지도자, 탁월한 전략가, 냉철한 혁명가였지만
베트남 사람들에게는 ‘호 아저씨’라는 친근한 별명으로 불릴 정도로 사랑을 받은 인물입니다.
늘 검소한 옷차림에 소박한 웃음을 머금었고, 사람을 깊이 사랑했던 모습을 잊을 수 없읍니다.
미국과의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69년, 79세의 나이로 숨을 거둡니다.
유언장에는 ‘장례식 때문에 인민의 돈과 시간을 낭비하지 말라’고 할 정도였지요.
님은 그야말로 훌륭한 사회주의를 실천한 민족주의자입니다.
한 주를 시작하는 월요일 새벽에 박항서와 호 아저씨를 그립니다.
오늘도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