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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묵상글 ( 사순 제4주간 목요일. - 사랑의 우선 순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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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사랑의 우선 순위
오늘 주님께서는 당신에 관해 증언하는 것이 많다고, 곧
성경도 증언하고,
모세도 증언하고,
요한도 증언하고,
아버지께서도 증언하시고,
당신이 하신 일들도 증언한다고 하시며, 그런데
그 많은 증언을 듣고서도 사람들이 당신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를 바꾸지 않는다고 한탄하십니다.
그러시면서 그들의 잘못과 죄상을 나열하십니다.
-다른 사람은 받아들이면서 당신은 받아들이지 않는다.
-아버지의 말씀이 자기들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
-성경이 증언하는 당신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자기들끼리 영광을 주고받으면서 하느님께 영광을 받으려고는 하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 저는 그중에서도 다음 말씀이 특히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왜냐면 200주년 성서와 영어 성서를 보면
이 말씀이 조금 다르게 번역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너희에게 하느님의 사랑이 없다는 것을 나는 안다.”
“I know that you do not have the love of God in you.”
그러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은 “하느님의 사랑”을 풀어서 번역한 것 같은데,
제 생각에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직역하는 것이 실은 더 낫다고 생각합니다.
왜냐면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없을 때 하느님께 대한 사랑도 없고,
반대로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 있을 때
하느님을 우리가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관련하여 저의 죄를 성찰할 때
제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못하는 죄보다
제가 하느님 사랑을 잘 받지 못하는 죄가 더 크다고 생각합니다.
사실 내가 나의 사랑을 하느님께 드리는 것보다
하느님께서 주실 때 그 사랑을 내가 잘 받는 것이 우선입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내가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이 있는데
이런 강박관념은 제가 보기에 우리의 주제를 넘어도 한참 넘는 것입니다.
어린아이는 엄마의 사랑을 받는 것이 엄마를 기쁘게 하고 엄마를 사랑하는 겁니다.
그런데 만일 어린아이가 나도 이제 사랑에 있어서 어른이니
엄마의 사랑을 받지 않고 내가 할 거라고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그것이 진정 엄마를 기쁘게 하고 사랑하는 것이 되겠습니까?
사실 사랑은 잘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하는 것보다 더 큰 사랑입니다.
특히 하느님과의 관계에서는 더욱더 그렇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을 싫어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이 사랑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다른 사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사랑이고,
하느님의 사랑을 받아 그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가 해야 할 사랑입니다.
사랑의 우리가 되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우리가 되어야겠지만
하느님의 사랑을 잘 받는 것이 우선이 되고,
그래서 사랑의 우선순위가 바뀌지 않는 우리가 되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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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미사 후 신자들에게 인사하고 있는데 어떤 분이 제게 다가와서 말씀하십니다.
“신부님, 제가 2004년에 신부님을 갑곶성지에서 처음 뵀었는데요. 그때나 지금이나 한결 같으세요.”
이 말씀은 좋은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의도가 담긴 것일까요? 당연히 좋은 의도가 담긴 말씀으로 감사할 내용입니다. 그러나 20년이나 지났는데, 제가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다고 한다면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싶었습니다.
20년이 지나면 외모가 바뀌는 것은 당연합니다. 바뀌지 않았다면 어디 아프거나 문제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요? 또 생각이 바뀌지 않고 행동도 똑같다면 이 역시 커다란 문제입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변해야지만 문제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가 똑같아서는 안 됩니다.
물론 그분의 말씀은 저 듣기 좋으라고 하신 것이겠지만, 스스로 생각해 봅니다. 혹시 아무런 변화 없이 또 변화하려는 노력도 없이 예전과 똑같은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더 나은 ‘나’가 되도록 변화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한결같은 모습보다는 좋은 모습으로 계속해서 변하는 우리가 될 때, 이것이 주님의 뜻에 더 다가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에 대해 예수님께서는 모진 말씀을 많이 하셨습니다. 그들은 늘 한결같았습니다. 그런데 좋은 쪽으로 한결같은 것이 아니라, 나쁜 쪽으로 한결같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율법을 자기 식대로 해석하면서 죄인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의 기준에 따라 큰 죄인이 되고 말았지요. 안식일에 병자를 고쳐 주셨다는 이유 때문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사랑’인데, 이 사랑은 없어지고 오히려 활자만이 남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한결같이 하느님의 뜻을 잘못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단 한 명도 제외 없는 구원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사람만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착각 속에 빠집니다.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하는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없는 길을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다시금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구원을 위해 십자가의 죽음까지도 피하지 않으셨던 주님의 사랑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은 지금의 삶에 만족하지 않습니다. 더욱 주님의 뜻을 따르려고 노력하게 되고, 비로소 주님의 뜻에 함께할 수 있게 됩니다. 주님 뜻에 더 다가설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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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인생의 부피를 늘려주는 것은 우리가 그토록 피하려 애쓰는 불행이다(양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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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들에게 하느님의 아들로서의 당신의 정체성을 4중적 증거를 통해 입증하십니다. 곧 세례자 요한(33-35절)과 성부 하느님(30-32절)과 당신 자신의 활동(36절)과 성경(38-47절)이 당신을 증거하고 있음을 밝히십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증거는 명확하고 확실하였습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그분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마음이 닫혀 있는 까닭이었을 것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함은 결코 증거가 부족해서거나 계시가 없어서가 아니라, 믿고 받아들이지 못한 그들의 완고함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이들을 가리켜 오늘 <제1독서>에서는 “목이 뻣뻣한 백성”(탈출 32,9)이라고 표현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이러한 완고함의 특성을 두 가지로 밝혀주십니다. 한편으로는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분을 믿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품지 않았다.’ ‘그분의 말씀을 품지 않았다.’ 라는 말로 표현 되고 있습니다. 이는 ‘완고함’은 주님이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피조물인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믿어버리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우상숭배에 빠지고, 주님이신 하느님을 거역한 결과를 초래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러한 우상숭배를 두고서 <예레미아서>(5,7)에서도, <에제키엘서>(23,27)에서도 영적 간음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참된 정배이신 주님이 아닌 우상을 섬기고 따르고 하느님을 거역하고 하느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 ‘완고함’이란 말씀을 거역함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이 자신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고 믿지 않는 이들의 이유를 이렇게 밝히십니다.
“너희는 ~말씀이 너희 안에 머무르게 하지 않는다.”(요한 5,38)
“너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요한 5,42)
결국, 완고함은 말씀을 품지 않고 있고,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을 품고 있지 않음을 말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말씀을 품지 않으면 곧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우상을 품게 되기 때문입니다. 곧 4중의 증언의 말씀을 듣고도 품지 않은 까닭입니다. 결국, 완고함은 하느님 사랑이냐, 자기 사랑이냐?, 하느님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의 말씀을 품고 있느냐, 자기 자신을 품고 있느냐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을 위한 마중의 시간인 이 사순절이 말씀을 품고서 하느님의 뜻에 충실한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아버지께서 나에게 완수하도록 맡기신 일이 있다.”(요한 5,36)
주님!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해야 할 일, 맡기신 일을 하게 하소서.
계산하면서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하게 하시고,
의무에서가 아니라 사랑으로 하게 하소서.
바라는 일이 아니라 주어진 일을 하게 하시고,
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신과 함께 하소서.
시작만 하는 것이 아니라 완수하게 하시고,
일을 통해 내 자신이 아니라 당신이 드러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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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옛말에 “일을 만들면 일이 생기고, 일을 줄이면 일은 줄어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항상 바쁘다고 입버릇처럼 뇌까리는 사람들에게 하는 말입니다. 본연의 일에 바쁜 것이 아니라, 지엽적인 것들에 쫓기면서 일을 줄이려 하지 않고 오히려 만든다면 좋은 결과를 내지 못합니다. 꼭 해야 할 일과 하지 않아도 좋을 일을 분별하는 지혜가 필요한 때입니다. 하고 싶은 일도 좋지만, 해야 하는 일을 우선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무슨 일이나 열심히 하는 것은 좋습니다. 노력하는 만큼 풍성한 수확도 기대할 수 있으니 신나는 일입니다. 그런데 정작 하지 않아도 될 일에 분주하게 나서서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그런 사람은 열심히는 하지만 눈먼 열심에 쉽게 지치고 다른 사람에게는 물론 자기 자신 안에 화를 쌓게 됩니다. 따라서 참된 열심을 지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성경에서 영원한 생명을 찾아 얻겠다는 생각으로 성경을 연구한다. 바로 그 성경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요한5,39-40). 유다인들은 열심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경을 연구하고 하느님에 관해서, 메시아에 대하여, 율법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두루두루 많은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작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앞에 두고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고 심지어 하느님의 의를 세우고, 하느님의 법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예수님을 처형하였습니다. 아무리 많이 알고, 연구한다 해도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들은 헛된 일을 한 셈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과 주님께 대한 믿음이 없다면 성경은 죽은 글자에 불과합니다.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도 참 바쁘게 움직이며 많은 일을 합니다. 또 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 일들이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인지,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인지 구별할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내가 좋아서 하는 일이 하느님 마음에 꼭 드는 일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 우리는 실상 많은 일을 하면서도 주님의 일에는 소홀합니다. 일반 서적을 보는 시간의 극히 일부만이라도 신심 서적을 읽으면 좋으련만 그렇지 못합니다. 텔레비전 앞에서는 몇 시간을 보내지만, 성경을 펴들고 있는 시간은 너무도 미약합니다. 물론 어떤 사람은 성경 공부를 하고 교리 공부를 해서 지식을 쌓으면서도 주님을 진정으로 마음에 모시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오히려 그릇된 신심에 빠져 허우적거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교도권의 지도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주님을 드러내는 일이 되길 희망합니다.
무엇이든 열심히 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무엇보다도 모든 것의 원천이신 하느님에 관해서 열심히 챙겼으면 좋겠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권고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언제나 주님의 일을 많이 하십시오. 여러분의 노고가 헛되지 않음을 여러분은 알고 있습니다”(1코린 15,58). “열성이 줄지 않게 하고 마음이 성령으로 타오르게 하며 주님을 섬기십시오”(로마12,11). 주님을 섬기는 일에 열심한 오늘이기를 기대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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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때리는 시어머니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양새는 말리는 것 같지만 사실은 시어머니가 더 때리도록 응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남의 슬픔과 아픔을 조롱하고 무시하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세월호의 진실을 밝히고자 단식하는 자리에 찾아와서 피자와 콜라를 먹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죽은 아이들을 가지고 돈을 벌겠다고 한다고 조롱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들고 ‘호산나,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 찬미 받으소서.’라고 외쳤던 군중들이 ‘십자가에 못 박으시오.’라고 외쳤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의 결백함을 알면서도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군중의 소요가 귀찮아서 무죄하신 예수님께 ‘십자가 형’을 선고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한다고, 사람의 아들은 반드시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데 제자들은 서로 높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다투었습니다. 염불보다 제사 밥에 더 관심이 많았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는 예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을 배반했던 유다와 베드로가 있었습니다. 두려움 때문에 도망가고 말았던 제자들이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죽이려했던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이 있습니다.
‘동병상련(同病相憐)’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웃의 슬픔을 함께 슬퍼하고, 이웃의 고통을 마치 자신의 고통처럼 함께 아파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세월호의 유족들을 위해서 함께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과 교우들이 있었습니다. 피지도 못하고 지고만, 꽃잎처럼 안타깝게 세상을 떠난 학생들을 위해서 노란 리본을 만들어 나누어 주던 사람들이 있습니다. 교황님도 세월호의 유족을 만나서 위로해 주었고,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고통 앞에 중립은 없습니다.” 관중과 포숙의 이야기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은 아름답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이런 글을 남겼습니다. “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 '저 하나 있으니’ 하며 빙긋이 웃고 눈을 감을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만 리 길, 나서는 길 처자를 내맡기며 맘 놓고 갈 만한 사람,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 참 가슴이 따뜻해지는 글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에도 동병상련의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키레네 사람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갔습니다. 베로니카는 예수님의 얼굴에서 흐르는 피와 땀을 닦아 드렸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매달렸던 죄인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영광의 자리에 오르시면 저를 기억해 주십시오.” 동병상련의 아픔을 나누는 이들이 있었기에 예수님 십자가의 길은 외롭지 않으셨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잘못하고, 하느님과 멀어진 이스라엘 백성들을 용서하십니다. 비록 그들의 죄가 크기 때문에 벌을 하고, 심판을 하셔도 되지만 모세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을 믿으며, 하느님께 다시 한번 기회를 주시도록 청하고 있습니다. 모세는 때리는 시어머니 옆에서 더 때리라고 응원하는 시누이가 아니었습니다. 함께 이집트에서 탈출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서 동병상련의 아픔을 느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의 청을 받아들여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를 용서합니다. 우리가 고백성사를 통해서 우리의 잘못을 고백하면, 하느님께서는 사제를 통하여 우리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기회를 주실 것입니다. 신앙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나를 이해하고, 용서하시며, 사랑하시는 하느님 앞에 나의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드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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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오늘 복음의 주제는 ”너희를 고소하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다“입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아버지의 말씀이 너희 마음에 머무르지 못한다. 왜냐하면 아버지께서 보낸 사람들을 너희가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아버지의 말씀은 글자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그러나 글자 이전에 이미 말로써 전해져 내려왔습니다. 또한 아버지께서 보내신 사람을 통해 전해져왔습니다. 그들의 입을 통해, 그들의 행적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왔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온 아버지의 말씀을 사람들은 믿지 않았습니다.
이런 한 모습은 주님께서는 안타깝게 여기십니다. 성경을 연구하지만, 성경에서 말하는 아버지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하는 사람들을 안타까워하십니다.
이 안타까움은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할지 모릅니다. 성경을 통해 들려오는 주님의 모습, 여러 가지 말씀으로 다가오는 주님의 모습을 우리의 믿음은 받아들이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믿음의 주체가 아버지가 아닌 우리 자신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받아들이셨습니다. 이제 우리가 주님을 받아들일 차례입니다.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여 삶으로 살아낼 차례입니다.
그렇게 서로의 받아들임은 사랑으로 이어지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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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십니까?
어느날
누군가가 물었습니다.
요즘 기억에 남는 행복한 일이 있었을까요?
질문을 듣는 순간
머리 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습니다.
기억속에 행복했던 순간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그런데 기억에 남을 만한
기쁨을 찾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낙심했습니다. 행복없는 생활을 해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저녁 주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순간, 모든 시간, 모든 공간에서 나는 너와 행복하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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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영적 승리의 삶-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사세요!”
“주님을 찾는 마음은 기뻐하여라.
주님과 그 권능을 구하여라.
언제나 그 얼굴을 찾아라.”(시편105,3-4)
올해 3월의 성 요셉성월이, 사순시기가 참 고맙습니다. 4월10일, 나라의 명운이 달린 총선을 앞두고 신자들뿐 아니라 온 국민이 정말 깨어 기도해야할 때입니다. 기도가 답입니다. 회개가 답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살아있을 때 기도와 회개, 사랑이지 죽으면 모두가 끝입니다. 어느때 보다 항구히, 간절히 깨어 기도해야, 회개해야, 사랑해야 할 때입니다. 이래야 나도 살고 너도 살고 나라도 삽니다.
그래서 언제나 기상하면 저는 ‘십자가의 예수님’과 ‘태극기’ 앞에서 <가톨릭 기도서> 1.성호경, 2.주님의 기도, 3.성모송, 4.영광송 순서대로 기도를 바친후 하느님의 자녀로서 참나로 살기위해 독립운동하는 마음으로 간절한 사랑을 담아 양팔을 활짝 펴들고 만세육창의 간절한 기도를 바칩니다.
“하느님 만세!”
“예수님 만세!”
“대한민국-한반도 만세!”
“가톨릭 교회 만세!
“성모님 만세!
“성 요셉 수도원 만세!”
어제 “하”씨 성(性)의 이름을 지닌 분과 나눈 기발한 덕담에 행복했고 기분이 좋았습니다.
“저도 하닮(하느님 닮기)의 여정을 살 수 있길 기도하는 아침입니다.”
“하느님과 같은 ‘하’씨 성이라 하닮의 여정을 충실히 살아내고 계시지요! 축하드립니다.”
“ㅎㅎ 감사합니다!”
예나 이제나 한결같은 물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입니다. 오늘의 강론 제목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인공인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영적 승리의 삶을 사세요!”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나는 불림 받았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라는 유대인 랍비 여호수아 헷쉘의 말처럼 하느님을 믿는 우리들은 결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모세처럼, 예수님처럼 불림 받은 유일무이한 성소자들입니다. 불림 받은 자로서 과연 몇% 참나를 실현하며 살고 있는지요? 모세나 예수님은 제가 볼 때 100% 참나를 실현한 성소자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제1독서 모세의 사면초가, 진퇴양난의 모습이 복음의 예수님을 통해 양상은 다소 달라도 고스란히 반복되고 있음을 봅니다. 하느님과 인간의 중재자 모세는 역시 하느님과 당신 백성의 새로운 중재자이자 우리의 영원한 중재자이신 예수님의 예표가 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이때 두분께 적대적인 사람들은 그대로 오늘날도 반복되는 모습들입니다.
정말 계속되는 전쟁에, 악순환의 반복에, 문명의 야만시대(?)에 과연 무지한 인간의 진보는 가능한지 묻게 됩니다. 인간성의 진보가, 영성이 바탕되지 않은 인공지능의 결과는 어떠할지 낙관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다산 어른과 논어의 공자의 말씀이 감로수처럼 삶의 지표가 됩니다.
“사람을 만나는 가장 어른스러운 태도는, 사람에 대해 미리 실망하지 않는 것이다.”-다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희망이기에 사람에 절망하거나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믿는 이들이라면 결코 절망, 원망, 실망의 삼망의 사람이 되어선 안될 것입니다.
“남이 나를 속일까, 남이 나를 믿지 않을까 미리 염려하지 마라. 다만 먼저 깨달아 아는 사람이 현명하다.”-논어
무지에 대한 답은 깨달음의 은총뿐입니다. 깨달음은 빛입니다. ‘깨달음의 여정’에 항구하고 충실할 때 서서히 무지의 어둠으로부터 해방입니다.
만일 제1독서 탈출기에서 중재자 주인공 모세가 빠져 버린다면, 역시 요한복음에서 중재자 예수님이 빠져 버린다면 상황은 캄캄한 어둠일 것입니다. 두분의 찬연한 빛이 무지와 허무의 심연의 어둠을 환히 밝히고 있는 현실입니다. 정말 탈출기의 모세는 참사람의 원형이요 섬김의 모범입니다. 참으로 섬김의 권위, 섬김의 직무, 섬김의 리더십을 100% 발휘하는 모세의 삶이 감동 그 자체입니다. 하느님의 심판과 무지한 백성들 사이에서 샌드위치 같은 처지로 참으로 진퇴양난의 위기입니다.
답은 위의 하늘 향한 기도뿐입니다. 사생결단의 각오로 배은망덕의 무지한 못난 백성들을 살려내기 위한 모세의 단호하고 결연한 자세와 기도가 결국 하느님을 설득하여 심판을 멈추도록 합니다. 참으로 목숨을 걸고 하느님과 담판하는, 애원의 기도를 바치는 모세입니다. 백성들의 배은망덕에 진노한 하느님을 만류하는 모세의 애원이 구구절절 감동입니다.
이처럼 하느님 마음에 정통했고 하느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신뢰했기에, ‘하느님 답지 못하다’며 하느님의 약점을 들먹이는 이런 목숨을 건 애원의 기도가 가능했음을 봅니다. 하느님의 둘도 없는 파트너 모세처럼 기도하는 부모가, 지도자가, 어른이 교회뿐 아니라 각계 각층에 참으로 절박하게 필요로 하는 시대입니다. 하느님을 감동시킨 마지막 애원이 절정입니다.
“당신 자신을 걸고, ‘너희 후손들을 하늘의 별처럼 많게 하고, 내가 약속한 이 땅을 모두 너희 후손들에게 주어, 상속 재산으로 길이 차지하겠다.’하며 맹세하신 당신의 종 아브라함과 이사악과 이스라엘을 기억해 주십시오.”
정확한 사실(facts)에 근거한 모세의 설득에 감동한 주님께서는 당신 백성에게 내리겠다던 재앙을 거두니 하느님과 영적전쟁에 승리한 ‘기도의 사람’ 모세입니다. 새삼 기도를 잘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잘 알기 위해서는, 영적 승리를 위해서는 모세처럼 성서의 말씀에 정통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다음은 요한복음에서는 유다인들에게 사면초가의 위급한 상황에서 예수님은 자기를 위한 증언을 명명백백하게 밝힘으로 이들과의 영적전쟁에 승리합니다. 1.세례자 요한이, 2.아버지께서 완수하라 맡기신 일들이, 3.아버지께서. 4.성경이 예수님 당신을 증언함을 밝히시며 이들의 부족이 무엇인지 알려주시며 개과천선(改過遷善)의 분발을 촉구합니다.
과연 무엇이, 누구가 오늘의 우리를 위해 증언해 줄 것인가 묵상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삶이 우리를 증언해 줄 것이며 이웃도 우리를 증언해 줄것입니다. 만세육창을 바치는 저로 말하면 하느님이, 예수님이, 나라가, 교회가, 성모님이, 수도원 공동체 형제들이, 또 매일 삶을 담아낸 강론들이 저를 증언해주지 않겠나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다음 유다인들을 향한 예수님 말씀이 흡사 우리를 향한 충고 같습니다.
“너희는 나에게 와서 생명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나는 사람들에게 영광을 받지 않는다. 나는 너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내가 너희를 아버지께 고소하는 것이 아니라, 너희를 고소하는 이는 너희가 희망을 걸어온 모세이다. 너희가 모세를 믿었더라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이들의 성서말씀 공부 부족과 믿음 부족을 맹렬이 꾸짖는 예수님입니다. 기도의 싸움에서 하느님을 이겨낸 영적 승리의 모세처럼, 유다인들을 궁지에 몰아넣음으로 예수님의 영적 승리로 대미를 장식하는 오늘 복음입니다. 유비무환입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한결같고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로, 하느님으로 무장했을 때 영적 승리의 삶입니다. 날마다 이 거룩한 사순시기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영적 승리의 삶으로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 당신 백성 돌보시는 호의로 저를 기억하소서.
구원을 가지시고, 저를 찾아 주소서.”(시편106.4).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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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나를 위하여 증언한다.”(요한 5,36)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따를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걸을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믿을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바랄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사랑할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참될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착할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고울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바를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나눌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섬길 따름입니다
내가
나임을
밝혀 주리니
오롯이
살릴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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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314. 사순 제4주간 목요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 교부들의 말씀 묵상✝️
내가 나 자신을 위하여 증언하면 내 증언은 유효하지 못하다. 그러나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 나는 나를 위하여 증언하시는 그분의 증언이 유효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요한 5,31-32)
자기 자신을 위한 증언은 할 수 없다
다른 이의 권위로 온 자는 아무도 그 권위를 자신의 것으로 내세우지 않으며 그런 생각을 경계합니다. 그에게 그 권위를 준 이의 지원이 먼저 있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는 아버지께서 아들로 부르시지 않는다면 결코 아들로 인정받지 못할 것입니다. 임무를 맡겨 그를 보내신 분이 계시지 않다면, 사람들도 그리스도를 아버지께서 보내신 분으로 믿지 않을 것입니다.
-테르툴리아누스-
✝️ 생태 영성 영적 독서✝️
마이스터 엑카르트는 이렇게 말했다(대지를 품어 안은 엑카르트 영성) / 매튜 폭스 해제 · 주석
【첫째 오솔길】
창조계
설교 4 존재는 거룩하다
엑카르트는 이 성서 본문들을 설명하면서 옛 성인들과 영웅들을 이상화하지도 않고, 죽음 이후의 장엄한 삶의 비전을 그려 내지도 않는다. 오히려 그는 이 구절들이 드러내는 부활 및 종말론을 주제로 삼아 다음과 같은 물음을 던진다: 영생이란 무엇인가? 영생은 언제 이루어지는가?
엑카르트는 영생이 지금 이루어진다고 말한다. 그가 죄스러운 시간 의식을 참지 못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그는 시간이 우리를 지금 이루어지고 있는 영생으로부터 분리시킬 수 있다고 말한다. 이는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는 것을 일상적인 시간 의식이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영원한 생명의 형식을 지난 존재에 이르지 못하도록 우리를 방해하는 것, 그것이 바로 시간이다. 시간에 매인 것은 무엇이든지 죽게 마련이다. 시간 의식은 결국 죄의식이 된다. 시간에 집착하는 것은 존재의 환회 속에서 영원, 깊이, 경외, 정지된 시간에 열려 있기를 거부하는 것과 같다. 존재의 환희야말로 우리가 영생이 시작되었음을 깨닫는 곳이다. 존재를 경험하는 것은 시간보다 더 깊이 들어가고, 시간을 초월하는 것이다.(136)
✝️ 목요일 성모님의 날✝️
<파티마의 성모 마리아와 목동 / 세 바르따스>
제 4장 오직 고통뿐
과격당원의 폭력사건
이 사건의 소문은 다음날 아침 알쥬스트렐에 전해졌다. 루치아는 현장에 달려가서 사실을 확인했다. 소녀는 그때 얼마나 기뻐했는지!
저 무뢰한들은 중요한 발현의 호랑가시나무를 잘못 알고 그 옆에 있는 나무를 쳐서 가져 간 것이었다. 발현이 있던 그 나무는 이미 꺾여서 거의 땅에 닿을 정도의 줄기 밖에 없었던 것이다.
루치아가 고바 다 이리아에서 이 무뢰한들을 위해 하느님께 용서를 빌며 그 회개를 기도하고 있을 때 그들은 싼타렘의 큰 길에서 더할 나위 없이 불경스런 행렬을 하고 있었다. 그들은 카니발 때처럼 들뜬 가운데 시위 운동을 하면서 고바 다 이라야에서 약탈해 온 물품을 들고 거리에서 거리로 돌아다녔다.
이런 모독적언 사건을 목격한 신자들은 몹시 마음이 상했고 크게 분개하였으나 그 비열한 짓거리에 감히 반항할 수가 없었다. 그 배후에는 흑막이 있었고 구당국(區當局)이 발기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구당국은 신앙 각성을 위해 잘 조직된 이 계획을 자유주의자들이 처음부터 반대하여 덤비는 것을 보고 잘 되었다고 좋아서 싱글벙글하는 판이었다.
그 즈음 자유주의 신문은 파티마에 대한 논설을 더 확대 강화했다. 그들의 주장인즉 발현이라든가 기적은 “종교 복구의 수단”에 불과하고 루치아, 프란치스코, 히야친타는 “단말마의 고통에 신음하는 성직자 지상주의자들에게 길들여진 앞잡이에 지나지 않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없애버려야 한다”고 했다.(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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