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Ⅱ-102]시인 허소라許素羅와 정치인 이철승李哲承
시인 허소라라고 하지만, 나는 그를 전혀 알지 못한다. 다만, 고3, 아니 대학 신입생 시절이었나? 전북지역 문인 중 한 분인 그분의 에세이집 『흐느끼는 목마』를 우연히 읽고, 그분의 실패한 애절한 사랑에 대해 엄청 울었던 것이 지금도 생생하다는 것뿐이다. 처음엔 ‘소라’ 이름 때문에 여성문인인 줄 알았는데, 읽다보니 엄연히 남성이었던 것에 놀랐던 기억도 있다.
아무튼, 오늘 낮 오수면소재지 어느 허름한 식당에서 지인선배와 얘기를 나누던 중, 어찌된 연유인지 지금도 기억이 안나지만, 우연케 ‘허소라’이야기가 나왔다. 생각지 못한 화제였는데, 선배가 화들짝 놀랐다. “아니, 우천이 허소라를 알아? 글먼 ‘흐느끼는 목마’도 알겠네?” “그럼요. 읽으면서 눈이 퉁퉁 부었는 걸요” 이 양반, 나보다 더 놀란다. “이날 평생 살면서 허소라를 알고, 더구나 ‘흐느끼는 목마’을 읽었다는 사람 첨 본다”며 연신 탄복하며 손바닥을 마주치잔다. 당신의 고교 때 담임이었는데, 학창시절 유일하게 기억하는 선생님이라며. 몸매가 진짜 목마木馬처럼 유난히 삐쩍 말랐는데, 책 제목도 ‘흐느끼는 목마’였다는 것이다. 내용은 정확히 않으나, 아마도 경상도 여학생과 펜팔로 사귀었고, 그녀가 전주에도 와 오목대에 올라 한옥마을을 바라보며 사랑을 속삭인 것정도만 기억한다. 그리고 지은이는 그때그때의 가슴 벅찬 느낌과 느낌을 짧막한 운문韻文으로 글 중간에 몇 개 삽입했을 것이다. 어느 지방대 대학교 교수로서 이름을 몇 번 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그후로 그분의 시를 읽거나 시집조차 본 적이 없다. 집에 돌아와 검색을 해봐도 그분의 시 한 편을 찾지 못했다. 다만 1936년생으로 2020년 타계했다는 것을 알아, 그 선배에게 알려줬을 뿐이다.
아무튼, 당시에 허소라 선생의 분수噴水같았던 문학적 감성에 많이 놀랐던 것같다. 지금 읽는다해도 그 감성이 고스란히 살아날 듯한 미문美文투성이였던 듯하다. 그 선배는 ‘무슨 이런 괴물같은 후배가 있나?’하는 심정이었던 같다. 나같아도 그럴 것같다. 당신만 아는 시인선생님 이름을 알 뿐아니라, 그분의 책을 읽으며 허벌나게 울었다는 고향 후배를 만나니 기분이 남달랐을 법하지 않은가. 그렇다고 내가 소위 말하는 문학청년(문청文靑)은 아니었다. 다만, 글이라면 어떤 글조각도 허투루 보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었을 뿐이다. 소설가나 시인이 되려는 꿈은 애시당초 꾸지도 않았다. 글과 관계된 일로 먹고 살고 싶어서 ‘기자記者’를 꿈꾸다 마침내 중앙일간지 내근기자(편집-교열)가 되었을 뿐이다.
그 얘기를 하다보니, 또하나의 일화가 생각났다. 성균관대 홍보전문위원으로 있을 때였다(2002-2014년). 소속 대학의 교수들을 만나 휴먼스토리를 들으며 보도자료 작성하는 게 주요한 일이었다. 소비자아동학과에 국제적으로도 유명한 여교수를 만날 기회가 있었다. 식사를 하며 얘기를 나누다보니, 전북 출신의 정치인 이철승(호 소석) 선생의 따님이었다. 1956년생, 박정희 군사쿠데타로 부친이 정치정화 규제법에 걸려 활동을 못할 때 미국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키도 크고 미모도 준수한 인텔리켄차, 영어를 원어민 수준으로 잘 한다고 소문이 났다. 훗날 ‘정략결혼’이라는 말이 맞는지는 모르지만 ‘동부그룹’의 황태자와 결혼했다고 한다. 유엔 아동권리위원회 위원장으로 활약한 글로벌한 학자, 그에게 “아버지를 잘 안다”고 말하자 깜짝 놀랐다.
‘중도통합론’을 주창하여 ‘사꾸라 정치인’이라는 오명을 뒤집어쓴 흘러간 정치인. 우연한 자리에서 생각지 못하게 당신의 아버지를 안다는 한 대학 홍보팀원을 만나니 반갑고 놀랐을 것이다. 정치인 이철승이라면 나로선 첫 번째 떠오르는 게 고교시절이었을 터, 그가 지은 『절망에의 도전』을 어디선가 구해 읽었고, 오래도록 나의 책꽂이에 있었다. 책 이름과 그 얘기를 하자 “정말이냐? 그 책이 지금도 있느냐?”며 정감어린 눈빛으로 나를 쳐다본 후, 그 후에도 몇 차례 차담과 식사를 한 인연이 있었다. 나중에는 국민의힘 윤리위원장을 맡아 '밥맛'이 떨어지긴 했어도. 유엔의 VIP가 되어 구순이 넘은 당신의 부모를 유엔본부로 모시고 가 당시 사무총장 반기문과 넷이 인증샷도 찍은 ‘효녀교수’로 기억할 뿐이다.
그렇다. 누군가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보면, 생각지도 않은 인물이나 책 얘기로 공통점을 찾아 환호작약할 때가 있지 않던가. 딱 오늘이 그랬다. 평생 살면서 고등학교 은사선생님 이야기를 전혀 상관없게 보이는 후배가 정확히 알고 있고, 게다가 선생님의 책을 읽고 그 내용에 감동을 받았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 후배가 더욱 살갑게 느껴지지 않겠는가? 또한 한때 유명짜한 정치인이었던 자기 아버지의 저서를 소지하여 읽고, 수십 년이 지났어도 책 제목을 정확히 아는 사람을 만나면 어찌 반갑지 않을손가. 이래저래 세월은 가지만, 사는 맛은 이런 것이지 않을까 싶다. 별 거 아니지만 사는 게 참 재밌다. 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