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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달에도 지난달에 이어 <이동원 목사와 함께 걷는 천로역정> 가운데 <24. 무지와 작은 믿음 : 갈2:11-16, 3:1-3>(p280~291)을 소개하려고 합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많은 유익이 있기를 바랍니다. 진 상열 목사 드림.
- <믿음의 여정에 방해가 되는 두 부류의 사람들> : 교회 생활을 하다보면, 우리는 종종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는 바람직하지 못한 교인들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의 교회 여행, 믿음의 순례가 유쾌하려면 그들을 잘 분별해 그들이 던져 주는 시험을 극복해 낼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의 믿음의 여정에 방해가 되는 구체적인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면, 첫째는 잘못 믿고 있는 사람들과 둘째는 일관성 없게 믿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은 이들을 ‘무지(Ignorance)’와 ‘작은 믿음(Little-faith)’이라고 부릅니다.
- 순례자 크리스천 일행은 ‘기쁨의 산지’를 떠나 ‘자만(Conceit)’라는 동네를 지나면서 먼저 ‘무지’라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그는 착하게 살며 율법을 지키면 누구나 새 예루살렘 성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기세당당한 젊은 친구였습니다. 일종의 도덕주의자 혹은 율법주의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좁은 문을 통과한 적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 그리고 이어서 만난 또 다른 순례자는 길에서 강도를 맞아 상처를 입고 쩔룩거리는 사내였습니다. 그는 본래 착한 사람이었고 ‘진실(Sincere)’이라는 도시에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만 길을 잘못 들어선 데다 잠이 들어버렸고, 세 명의 강도를 만나 협박을 받고 돈 주머니를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보석만은 잃지 않았고, 천국에 들어가는 증명서만은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그의 이름은 ‘작은 믿음’이었습니다. 그는 믿음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작은 믿음 때문에 몰골이 말이 아닌 영적 상태를 갖고 있었습니다.
- 우리는 교회에서 이런 이들을 만날 때마다 영적 시험과 혼란을 경험하게 됩니다. 초대 교회 당시 갈라디아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이런 교인들로 인해 시험과 혼란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갈라디아 교회 내에는 상당한 율법주의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근본적으로 잘못 믿고 있었던, 그릇된 믿음의 소유자들이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바르게 복음을 믿고 있었던 이들을 혼란스럽게 했습니다. 사도 바울은 존 번연과 마찬가지로 이들을 ‘어리석은 자들’, ‘무지한 자들’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들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사도 바울은 (갈2장)에서 작은 믿음, 혹은 일관성을 잃어버린 성도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신이 책망할 수밖에 없었던 사도 베드로를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제 교회 내에 적지 않게 출현하여 신자들을 혼란스럽게 하는 첫째 시험의 대상, ‘작은 믿음’에 대해 먼저 생각해 봅시다.
1. 첫째, 일관성을 상실한 ‘작은 믿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 작은 믿음이 강도들의 위협에 굴복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두려워서 당황해 일관성 있게 행동하지 못한 것입니다. 이런 모습을 베드로에게서 동일하게 관찰할 수 있습니다. (갈2:11) 이하에는 게바, 곧 베드로가 안디옥에서 바울에게 책망 받은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야고보에게서 온 어떤 이들이 이르기 전에 게바가 이방인과 함께 먹다가 그들이 오매 그가 할례자들을 두려워하여 떠나 물러가매”(갈2:12)
- 야고보는 당시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였습니다. 어느 날 예루살렘에서 일단의 유대적 그리스도인들이 이방 도시 안디옥에 도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까지 이방 선교에 헌신하고 있었던 베드로는 이방인들이 더 이상 더럽거나 기피할 존재가 아니라는 나름의 확신에 따라 이방인과 한 상에서 먹고 교제했습니다. 그런데 유대인과 이방인은 섞여서는 안 된다는 유대적 신념을 가진 율법주의자들이 오자 베드로는 그만 태도를 바꾸어 이방인들과 먹지 않는 척했던 것입니다.
- 이 구절은 베드로가 보인 행동의 원인이 두려움 때문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아마 예루살렘의 유대인 지도자들에게 왕따를 당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그를 사로잡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베드로의 일관성 없는 이 행동이 안디옥의 이방인 신자들을 얼마나 실망시켰을까요? 사실 일관성을 상실하고 두려움의 지배를 받는 행동은 베드로의 아킬레스건과도 같은 평생의 약점이었고, 여전히 그는 자신의 약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한 이유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이 밝혀지면 받게 될 고난과 불이익이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 봅시다. 베드로가 파도치는 갈릴리 바다 위를 걸었을 때입니다. 잠시나마 베드로가 배 밖으로 나와 물위를 걸을 수 있었던 것은 “내게로 오라!”는 주님의 말씀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베드로는 바다에 불고 있는 바람을 보고 무서워서 물속에 빠져 가며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고 소리쳤습니다. 이때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기억해 보십시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그를 붙잡으시며 이르시되 믿음이 작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마14:31)
- 여기서 우리는 다시 일관성 없는 베드로의 모습, 두려움의 지배를 받은 그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습니다. 베드로에게 주님이 “믿음이 작은 자”라고 하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베드로는 믿음이 없는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믿음이 전혀 없었다면 배 밖으로 발을 내딛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계속해서 주를 바라보는 믿음, 계속해서 주를 의지하는 일관성 있는 믿음이 결여되어 있었습니다.
- 교회에서 보이는 얼굴과 가정이나 직장에서 보이는 얼굴이 다른 사람들, 잘나갈 때의 얼굴과 역경 속에서의 얼굴이 전혀 다른 이중성을 보이는 믿음, 이것을 가리켜 주님은 ‘작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존 번연도 여기서 힌트를 얻어 ‘작은 믿음’이라는 사람을 출현시킨 것입니다. 실제로 존 번연은 크리스천의 말을 인용하여 우리가 베드로처럼 두려움에 빠져 주님 곁을 떠나지 않으려면 믿음의 방패로 잘 무장해야 한다고 권면합니다. 그리고 끊임없이 주님의 지켜 주심을 기도하며 순례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2. 둘째, 잘못 믿고 있는 ‘무지’를 조심해야 합니다. : <천로역정>을 보면 ‘무지’라는 청년이 처음 크리스천을 만났을 때 “어디로 가고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물론 자신도 새 예루살렘 성으로 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크리스천이 새 예루살렘 성에 도착했을 때 성문을 열기 위해서는 뭐라고 말할 것이냐고 묻자 무지는 서슴지 않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주님의 뜻을 잘 압니다. 여태 선하게 살았고요. 빌린 돈은 어김없이 갚았어요. 기도와 금식도 빼먹지 않았습니다. 십일조를 꼬박꼬박 바치고 이웃돕기 성금도 냈어요.”
- 무지가 언급한 모든 일은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것들이 성경이 가르치는 구원의 조건인가 하는 것입니다. 무지라는 청년이 무지라는 이름을 가질 수밖에 없었던 가장 중요한 이유는 성경적 구원의 길에 무지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이 선언하는 구원의 길을 다시 들어 봅시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2:16)
- <천로역정>의 무지와 동일한 사고를 가진 교인들이 많았던 교회가 바로 갈라디아교회였습니다. 그것은 소위 유대적 전통을 버리지 못했던 유대주의자, 혹은 율법주의자들의 영향으로 말미암은 것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의 영향을 받아 믿음이 흔들이고 있었던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어리석은 자들이라고, 그들이야말로 영적으로 무지한 자들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어리석도다. 갈라디아 사람들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 너희 눈앞에 밝히 보이거늘 누가 너희를 꾀더냐?”(갈3:1)
- 여기서 사도 바울이 왜 십자가를 말하고 있습니까? 율법을 지키는 인간의 도덕적 행위만으로 우리가 죄 사함을 받고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면 예수께서 왜 오시고, 왜 십자가로 가셔야만 했겠습니까?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2:21)
- 크리스천과 소망은 무지를 다시 만났습니다. 그때 무지는 자신도 의롭다 함을 받기 위해서 그리스도를 믿어야 한다고 대답했습니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고 천국도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더 깊은 대화 속에서, 무지는 아무리 예수를 믿어도 그리스도의 공로 위에 신앙적 의무를 다하는 자신의 노력을 통해서만 하나님이 자신을 의롭다고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다고 말했습니다. 결국 무지의 궁극적인 의는 자기 노력, 자기 행위에 기초하고 있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 마침내 무지는 “인간의 공로 없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역사로 충분하다는 것을 나는 믿을 수 없다!”고 소리쳤습니다. 그것이 무지의 실체였습니다. 결국 그는 ‘믿음 + 행위 = 구원’이라고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갈라디아교회 내 율법주의자들의 실체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들에게 무엇이라 말합니까? “너희가 이같이 어리석으냐? 성령으로 시작하였다가 이제는 육체로 마치겠느냐?”(갈3:3)
- 구원의 궁극적인 근거가 나의 행위에 있다면 나의 구원의 근거는 결국 나의 육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믿음 외에 수많은 종교적 계율로 성도들의 신앙을 억압하고 희석하고 있던 중세 교회를 향하여 종교 개혁자들은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라고 선포했습니다. 지금 역시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이 필요한 때입니다.
-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엡2:8-9) 이 구절을 방정식으로 표현하면 “은혜 + 믿음 ‒ 행위 = 구원”입니다. 그러나 이렇게만 보면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럼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말인가?”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방정식을 제대로 풀어야 합니다. 방정식을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풀 수 있는 문제입니다.
- 바로 ‘행위’를 반대쪽으로 옮기는 것입니다. 그러면 “은혜 + 믿음 = 구원 + 행위”가 됩니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반드시 행위가 따라 와야 합니다. 아무렇게나 살아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행위는 구원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행위가 필요 없어서가 아니라 자기의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을 수 있는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독교 구원관의 핵심입니다. 이것을 모르는 것이 바로 무지의 본질이고, 무지의 실체인 것입니다.
- 우리는 <천로역정>이 끝나기 전에 한 번 더 무지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는 다행스럽게도 배로 죽음의 강을 건너 새 예루살렘 성문 앞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를 위해 천국의 성문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있는 힘을 다해 성문을 계속 두드리자 성 위로 사람들이 나타나 말했습니다. 이 성문은 신분증명서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열린다고 말입니다. 신분증명서란 오직 예수, 그분만을 구주와 주님으로 믿는 믿음의 증명서입니다. 무지에게는 그 증명서가 없었던 것입니다. 바로 그때 빛나는 천사들이 그의 앞에 나타나 그를 번쩍 들고는 성문 앞 어두운 심연의 통로로 집어 던집니다. 그 통로는 바로 지옥으로 연결되는 통로였습니다.
- 우리에게는 믿음의 증명서가 준비되어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내 마음대로, 내 육신의 생각대로 순례길을 가는 무지의 행렬에 서 있습니까? 언제까지 그 길을 그런 모습으로 갈 것입니까? 언제까지 자신을 속이고 이웃을 혼란스럽게 하는 그 길을 갈 것입니까? 예수를 구원의 주님으로 믿고 살아가지만 시간과 장소에 따라 변개하는 이중성, 일관성 없이 흔들리는 모습의 순례자, 작은 믿음으로 살아가겠습니까? 당신의 이름은 무지입니까? 작은 믿음입니까? 아니면 진정한 순례자 크리스천입니까? (끝)